제13과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질문, 대답, 설명) 09/24/2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9-16 07:31 조회5,328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
(9월 2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27분)
연구 범위: 눅 2:7, 22~24, 마 2:1~18, 요 8:58, 59, 눅 22:41~44, 마 27:51, 52, 롬 6:23, 딛 1:2
기억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우리가 고난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죄와 고통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다. 죄와 고통은 자유를 부여받은 존재들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함으로 생겨났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하나님은 이 존재들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는가? 그렇다. 하지만 C. S. 루이스(C. S. Lewis)의 말대로, 그분께서는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누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지적 피조물들에게 주신 자유는 너무나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우리가 자유를 남용해 만들어내는 고통까지도 그분 자신이 감수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셔서 감당하고 계신 고통을 본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고난당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영원히 지속될 연합을 이루셨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그분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고난으로 가득했던 이 땅에서의 삶을 십자가의 승리로 마무리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 느끼기
수많은 고난을 견디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다.
- 행하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앞에 닥쳐오는 고난들을 믿음으로 극복한다.
TMI 위로
2. 어린 시절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외부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요 1:46)
※ 나사렛에사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 출신과 성장 환경.
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거절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습니까?(마 23:37)
※ 대단히 슬퍼하셨다.
4. 성경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경험하신 고난에 대해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막 14:33~36, 눅 22:41~44)
※ 이마에 흐르는 땀이 핏빛 같다고 했다.
5.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떤 희망과 위안을 얻게 됩니까?
※ 고난을 인내하는 힘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
6.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요 10:28, 롬 6:23, 요일 2:25)
※ 영원한 생명.
결론
예수님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한 삶이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죄 가운데서 사시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었지만 사람들의 멸시와 거절은 그분의 마음을 더욱 더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충성하면 우리를 위해 준비된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9월 18일(일) 예수님의 초기 생애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초기 생애에 관해 단편적인 정보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환경과 구주께서 오신 세상의 형편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누가복음 2:7, 22~24(참조, 레 12:6~8)과 마태복음 2:1~18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어떤 환경에 태어나시고 사셔야 했는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눅2:7,22~24]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레12;6~8]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마2:1~18]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답: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했으며 헤롯이 죽이려고 하는 정치 상황 아래 출생하셨다.
물론 역사 속 인물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 여럿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시련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46을 읽어보라. 이 구절에는 예수님께서 유년 시절 직면했어야만 했던 시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어떤 요소가 기록되어 있는가?
[요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답: 생활환경이 선하지 않은 동네에서 성장하셨다.
타락 전의 아담과 하와를 제외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았던 사람 중 죄가 없었던 유일한 분이셨다. 순결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가득한 세상에 사셔야 했다. 그분의 순결한 영혼이 끊임없이 죄와 접촉하게 되는 것은 아무리 어린아이였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죄로 인해 강퍅해진 우리조차도 혐오스러운 죄와 악에 노출될 때 움츠러든다. 하물며 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지셨던 그리스도께 그러한 경험은 어떠한 것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이 점에 있어서 그분 자신과 주변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떤 현저한 차이가 있었을지 생각해 보라. 죄악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께 대단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묵상>
인간의 몸을 쓰시고 나사렛의 악한 영향력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답: 환경과 생활 형편이나 사회적 신분이 사람을 반드시 죄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그는 거의 30년을 나사렛의 사악한 사람들 가운데서 사셨다. 이 사실은 흠 없는 생애를 살자면 장소, 재산, 번영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견책이 된다. 시험, 빈곤, 역경이야말로 순결과 확고부동함을 계발시키는 데 필요한 수련이다”(시대의 소망, 72).
<부가설명> 예수님이 죄 없으신 것은 그가 아담의 씨로 오시지 않고 여자의 씨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전혀 죄를 짓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부터 죄와 상관없는 생명으로 오셨다. 본질적인 죄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이다(고전15:22).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람은 존재 자체가 죄다. 이런 인간 상태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이라고 하였다(엡4:22). 아담의 씨로 출생한 옛사람에게는 나오는 것이 썩는 것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썩어질 씨로 출생했기 때문이다(벧전1:23).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엡2:3).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씨로 출생하지 않으시고 생명 자체이신 자신의 생명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 동정녀에게 잉태하셨다. 그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아니다. 동정녀는 남성을 경험한 일이 없는 순결한 처녀를 뜻하는 말이다. 세상의 이치로는 임신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은 삼위일명 여호와께서 인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행하신 새 일이다.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렘 31:22). ‘둘러싸리라’라고 번역한 말은 개역에는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더 합당하다. 즉 동정녀가 아들을 낳을 것에 관한 예언이다. 예수님은 썩어질 씨로 탄생하지 않으셨다. 썩지 않을 씨로 탄생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순결하고 아담 이후 세상에 산 사람 중에 유일하게 죄가 없었다. 그런 생명으로 죄의 진흙탕 속에서 생활하면서 죄의 진흙이 튀어 묻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한다.
<교훈>
순결하고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셔서 죄 가득한 나사렛에서 자라나실 때, 그분을 둘러싸고 있던 악한 영향력은 그분께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9월 19일(월) 사람들의 멸시와 거절을 당하심
하늘과 땅의 거룩한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구절들을 읽어보라(마 12:22~24, 눅 4:21~30, 요 8:58, 59).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겪으신 고난을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마12:22~24]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눅4:21~30]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요8:58,59]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답: 귀신 들렸다는 공격을 받았고 고향과 유대인들에게 살해위협을 겪는 환경에서 순결하게 사셨다.
지도자들로부터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행동, 가르침을 끊임없이 오해했고, 마침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예수님을 거절하고 증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마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방황하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무엇이든 기꺼이 베풀려고 하지만 그 자식이 부모를 멸시하고 거절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직면하셨던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그분께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마태복음 23:37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거절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다고 이야기하는가? 위의 성경절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예수님께서 아파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가?” 만약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답: 이스라엘이 구원을 외면한 것 때문에 아파하셨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구원에 관해 소개했지만 거절당하는 아픔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경험한 고통이 이타적이었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아픔과 유사했을 것이다. 단순히 거절당했다는 사실로 인해 아픈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거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더욱 아픈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일에 직면하게 될 것인지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절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느끼셨을지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공격을 그렇게 통렬하게 느끼신 것은 바로 그분의 무구(無垢)하심 때문이었다”(가려뽑은 기별, 3권, 129).
<묵상>
자신을 끝까지 거절하는 백성들 때문에 아파하셨던 예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며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답: 지금도 주님은 기다리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들어오기를 열망하신다(딤전2:4). 그러나 세상은 구원의 복음을 외면하고 우상에 빠져있다.
<부가설명>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데는 사람의 노력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구원은 창조주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다(사45:8).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사람이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창조 역사에 자기도 참가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두려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루시퍼의 시도였다. 구원에 관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과 믿기 때문에 굴복하는 삶을 사는 것일 뿐인데, 그것이 구원받는데 어떤 공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참람한 생각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었으므로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시는 방법으로 삶이 나타나게 될 뿐이다. 그것은 자기의 노력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갈2:20). 이 원리에 오해가 없었으면 참 좋겠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거절을 당하셨는데, 그분께서는 그 거절의 결과가 무엇일지를 아셨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우셨다.
9월 20일(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막 14:34).
예수님께서는 33년간의 지상 생애 동안 수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몇 시간 동안 겪으셨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영세 전부터(엡 1:1~4, 딤후 1:8, 9, 딛 1:1, 2) 세상 죄를 위한 제물로 계획되었던 예수님의 희생이 이제 성취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구절들은 겟세마네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마 26:39, 막 14:33~36, 눅 22:41~44).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14:33~36]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눅22:41~44]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답: 이마의 땀이 핏빛 같이 되도록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예수께서는 조금 나아가사 그들이 당신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멀지 않은 거리의 땅바닥에 엎드리셨다.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느끼셨다. 그 심연(深淵)은 매우 넓고 매우 검고 매우 깊었으므로 그분의 심령은 그 앞에 떨고 있었다. 이 고민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은 당신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인간의 죄악의 결과를 감당해야만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어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분이 전에 항상 서시던 바와는 다른 태도로 서셨다. 그분의 고통은 다음과 같은 선지자의 말 가운데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슥 13:7). 죄 많은 인간들의 대속자, 그리고 보증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공의 아래서 고통을 받고 계셨다. 그분은 공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되셨으나 이제 그분은 자신을 위한 중보자를 갖기를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686).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묵상해 보라. 세상의 죄가 이미 그분 위에 내려 앉고 있었다. 그와 같은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 어떤 인간도 지금까지 그런 일을 당하도록 부름 받은 적이 없었다.
<묵상>
겟세마네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그 모습을 통해 우리를 위한 어떤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까?
답: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사랑이고 우리의 사망을 대신하시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 소망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겟세마네 고통은 그 상태를 우리가 알 수 없다. 십자가 주위에 흑암이 둘렀듯이 이 사건도 신성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소망에는 아버지 분리의 심연으로 인하여 떨었다고 썼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생활하실 때 자신을 위하여 신성을 사용하신 일이 없었다. 예수님은 친히 고통의 길을 택하셨다. 영원전에 삼위일명 여호와 회의에서 우주의 어느 세계든지 창조주를 배반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면 삼위일명 창조주 여호와 중에 누군가 그 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망을 처리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의논하셨다(렘23:18, 슥6:13 참고). 그때 말씀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그 일을 담당할 것을 자원하셨다(빌2:5~8). 베들레헴에 아기로 출생하실 때부터 33년 반동안 고난의 삶을 이어오셨지만, 이제 다니엘을 통하여 주신 예언대로 그 일을 수행할 때를 맞으신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께 자아를 비운 것을 거두고 사망의 고난을 버리고 승천하라고 계속 속삭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삼위 사이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과 사탄의 유혹 중에서 고통을 겪고 계셨다. 그것이 피땀이 흐르는 고통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기도로 승리하셨다. 끝까지 자아를 비우신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피땀이 흐르도록 고통당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사망의 세상에서 인내로 승리하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수많은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분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겪으신 마지막 몇 시간 동안의 고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9월 21일(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인들이 집행했던 가장 가혹한 형벌 중 하나였다. 그것은 가장 잔혹한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죄 많은 인간이 그런 식으로 죽는다 해도 비참한 일이겠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께는 얼마나 더 참혹한 일이었겠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매 맞으시고 채찍에 찢기시며 손과 발이 못 박히신 상태에서 자신의 체중에 의해 상처가 찢길 때에 느껴야 했던 육체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악랄한 범죄자에게도 가혹한 것이었는데, 그 누구보다 무고하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최후를 맞으신 것은 얼마나 불공정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겪으신 육체적 고통보다 더 극심한 심령의 고통을 겪으셨다. 이것은 무죄한 한 사람의 죽음 그 이상의 사건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더 중대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각 사건들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어떤 중요한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는가?
마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답: 천연계가 창조주의 희생에 반응하는 광경이다.
마 27:51, 52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답: 지상 성소 봉사의 영원한 종결이 선포되고 성소봉사를 통하여 속죄를 경함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부활하여 예수님이 생명이요 성소의 원형임을 드러내었다.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답: 예수 안에서 성도가 지성소 봉사의 결과를 받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단지 무고한 한 사람의 부당한 죽음 이상의 어떤 중대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께 쏟아 부어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겪으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고난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둡고 고통스러운 고난을 겪으셨다.
<묵상>
시대의 소망 78장 “갈바리”를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대를 향한 예수님의 진실된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답: 각각 읽어보고 답을 해보자.
<부가설명>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창조주 말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고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피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20:28).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창조주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혈연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그래서 말씀 하나님 여호와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시고, 옛사람인 아담의 씨로 난 사람은 죽고 예수님의 물과 피로 새로 출생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진리는 단순히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뿐이라면 예수님 죽음의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예수님이 용서하신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을 처리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피는 생명이다(레17:11). 피를 흘리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그분이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을 나타낸다. 신성(神性)이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참으로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버리고 다시 얻었다(요10:17,18). 그래서 우주에 그분이 자존자(自存者) 여호와이심을 증명하셨고 루시퍼도 자기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때 일어난 십자가 주변의 일들은 성소 봉사와 속죄에 관하여 명백한 해답을 내놓으신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분을 정말로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분이 홀로 감당하셔야만 했던 인류의 죄의 무게였다.
9월 22일(목) 고난당하신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 사실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을 것이다. 타락한 피조물로서 고난은 우리의 운명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 사실을 부인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다음 구절들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행 14:22, 빌 1:29, 딤후 3:12).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답: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과 투쟁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더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는데(사 53:4), 우리 각자가 가진 고통을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한꺼번에 감당하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고후 5:21)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 많은 피조물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감당하셨다.
둘째, 우리는 고난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의 결과를 기억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0:28, 로마서 6:23, 디도서 1:2, 요한일서 2:25을 읽어보라.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허락되었는가?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딛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요일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답: 영생.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당하든 간에 우리 죄의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설 수 있는 복음의 위대한 대비책을 주심으로 영생의 약속을 갖게 하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이 약속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와 온전한 희생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고통과 실망과 상실을 경험한다 해도, 그것은 죄와 고통과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과 비교해 보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겪으신 시련으로 인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약속되었다. 언젠가 가까운 장래에 그분께서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다(사 53:11).
<묵상>
모든 믿는 자들이 끝까지 붙잡아야 할 가장 위대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답: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부가설명>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태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이 정상적인데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된다. 그런데 이 세상은 비정상적인 세상이다. 태초에 정상적으로 창조하신 세상이 시조가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한 그 실과를 먹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영생의 언약을 어겼을 때(호6:7) 시조는 영생을 잃었고 따은 저주를 받았다. 사망의 저주로 사람을 비롯해서 이 지구의 모든 피조물이 저주로 떨어지고 이 세상은 비정상적인 세상이 되었다. 광명의 세상이 흑암의 세상이 된 것이다. 생명의 세상이 사망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빛이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싫어해서 어떻게 하든지 빛을 꺼버리려고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정상적인 세상에서 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하고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모르게 된다. 사망과 흑암의 세상에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어이 없애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고 이것을 알면 그리스도인이 고난당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대우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마침내 고난이 영광으로 바뀌는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
9월 2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685~697, ‘겟세마네,’ 741~757, ‘갈바리’를 읽어보라.
“예수께서는 세 번이나 그 기도를 드리셨다. 인성이 마지막 더할 나위 없는 희생으로부터 세 번 움츠러드셨다. 그러나 이제 인류의 역사가 구주의 앞에 펼쳐진다. 그분은 만일 그대로 버려둔다면 율법을 범한 자들이 틀림없이 멸망당할 것을 보신다. 그분은 인류의 무력함을 보신다. 그분은 죄의 세력을 보신다. 운명지어진 세계의 재난과 비탄이 그리스도 앞에 떠오른다. 예수께서는 세계의 절박한 운명을 바라보시며 결심하신다. 그분은 자신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신다. 멸망하는 무수한 인간이 그분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그분은 피의 침례를 받아들이신다. 그분은 순결과 행복과 영광의 하늘 조정을 버리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즉 죄로 인해 타락한 한 세계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분은 자기의 사명에서 돌아서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스스로 범죄한 인류의 화목 제물이 되실 것이다. 그분의 기도는 이제 복종하시겠다는 말씀뿐이다.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시대의 소망, 690, 69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쓰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이 놀라운 진리로부터 어떤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
※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를 위하여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감내하는데 대한 이해를 확실하게 한다.
2. 그리스도께서 마주하셨던 시련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그분의 시련과 우리의 시련 사이에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그분의 시련 대처 방법을 통해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되는가?
※ 예수님은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난을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로서 죽음의 고난은 싫지만 당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할 때 주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은 오히려 감사하며 받아야 하지 않을까?
3. 시련과 고통의 때에 꼭 붙잡을 수 있는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약속은 무엇인가? 직접 기록해 보면서 하나님께 구하고 각 반에서 함께 나눠보라.
※ 영원한 생명의 약속, 곧 생명의 부활 약속이 아닐까?
4.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것의 핵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라.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 목요일 공부 부가설명을 다시 읽어보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