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질문, 대답, 설명) 0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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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2-04 03:41 조회6,803회 댓글0건본문
제6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2월 1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6분)
연구 범위: 창 6:5~14, 히 11:8~13, 고후 4:18, 창 13:10~12, 창 32:22~31, 히 11:24~29
기억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 8:36, 37).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투자 전략을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 20). 예수님의 투자 전략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것이다. ‘너희가 어디에 돈을 쓰는지 나에게 보여 주거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돈을 두는 곳에 너희의 마음 또한 함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돈을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곳에 두도록 하라. 그대의 시간과 돈과 기도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바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이내 그대의 마음 또한 따라가게 될 것이다.
이번 주 우리는 영원한 상급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하면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성경 말씀과 비유들을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믿음의 선조들은 시험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을 깨닫는다.
- 느끼기: 우리가 겪는 고난보다도 더 큰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져 있음을 느낀다.
- 행하기: 세상에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TMI 위로
3. 노아에게 요구된 근본적 변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 생활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바치라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히 11:8)
※ 확실한 장래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한걸음씩 인도받아 살라는 것이다.
5. 아브라함의 가까이에서도 교훈을 배우지 못한 롯의 선택과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막 8:36)
※ 인간의 안목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결과가 어떤지 보여준다.
6. 야곱이 속이는 자에서 성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요?
※ 회개하고 하나님께 굴복한 것이다.
7. 아름다운 칭찬과 영예, 가득한 고난 이 두 상반되는 현실은 모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습니까?(히 11:25)
※ 모세는 애굽의 영화를 떠나서 상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나라를 얻었다.
결론: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재정적인 문제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믿고 따라 갔습니다. 그와 달리 욕심을 따라 간 사람들은 실패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따라갈 때 잠시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이후에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2월 5일(일) 은혜를 입은 노아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늘의 보화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인생길에서 큰 전환을 경험하게 하신다. 당신의 인생에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면, 당신도 그런 전환점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창세기 6:5~14을 읽어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노아의 삶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는가? 임박한 멸망에 대한 경고를 받아야 할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창6:5~14]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답: 노아는 농부였으나 이제는 방주 짓는 일에 몰두하며 홍수 경고하는 의의 전파자가 되었다. 말세의 진리의 백성들도 일상에서 이렇개 본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노아는 자신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 그의 시간과 자원들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적극적이고 과감한 변화를 선택한 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오늘날 많은 회의론자들은 자연 법칙에 관한 과학적 추론을 근거로 하여 홍수 이야기를 신화 정도로 취급하며 무시해 버린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홍수 이전 세상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자연 법칙은 변한 적이 없었다고 판단을 내렸다. 계절의 순환은 그 순서대로 이르러 왔었다. 지금까지 비가 내린 적은 결코 없었으며, 땅은 안개나 이슬로 물 공급을 받았다. 강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경계선을 넘어 범람한 적이 없었고, 강물을 안전하게 바다까지 날랐다. 고정된 하나님의 명령은 물이 제방을 넘어 범람하지 못하게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96). 홍수 전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근거로 홍수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수 후에는 같은 이유로 홍수가 일어난 일이 결코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경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전 1:9)고 말한 것과 같다.
한편, 성경은 사람들이 홍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 사건들에 관해서도 회의적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참조, 벧후 3:3~7). 그렇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멸망을 위해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만족 지연”이라 불리는 의도적인 결정이 있다. 이것은 더 영광스러운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며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지 못한다. 사실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매일 매 순간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묵상> 만약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노아와 비슷한 일을 감당하도록 부르신다면 그대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노아의 반응은 얼마나 신실한 것일까요?
답: 믿음으로 산다면 노아와 같은 반응을 하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호흡이 있는 동안 일상적 생활을 하게 되고 생활필수품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상생활하는 것 자체가 의를 전하는 것이 되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노아는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방주를 지었고 의를 전하였다. 성경은 홍수 경고를 하는 노아를 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벧후2:5). 의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노아가 지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생명을 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롬4:23~25, 5:18). 이런 의를 얻은 진리 백성들은 일상생활이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먼저 자기가 의를 얻은 사람인지 시험하고 확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고후13:5).
어제를 기억 않는다
김명호
주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어제를 기억하지 않는다
너의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 너의 오늘이 내 앞에
있을뿐이다
너의 오늘, 오늘 중에도
지금을 보고 있다
지금 너의 생각을 읽고
지금 너의 언어를 듣는다
지금 너의 감정을 느끼며
지금 너의 태도를 본다
너는
오늘을 산다
오늘 중에도
지금 살고 있다
영원함이란
항상 오늘일뿐이다
나는 오늘
지금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오늘 내 앞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깨끗하여라
보혈로 씻으며 살아라
나는 영원히 함께 한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 눈물을 씻어주시고
내 손을 꼭 잡아주소서
아멘, 아멘
<교훈>
하늘의 보화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세상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든지 매일 매 순간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며 다가올 재림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2월 6일(월) 믿는 자들의 아버지 아브람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메시아가 탄생할 혈통이 시작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브람은 그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땅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분명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세상의 쾌락과 편안함을 포기해야 했다.
창세기 12:1~3을 읽어보라. 이곳에 기록된 약속과 그것을 받아들인 결과, 어떻게 “땅의 모든 족속이...복을 얻”었는가?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답: 아브람과 그의 자손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세상에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람과 그의 가족의 삶을 바꾸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아브라함의 의심없는 순종은 온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현저한 믿음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부조와 선지자, 126).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과 친구들과 가족들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렇게 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있기를 원하시는 곳에 있기를 즐거워했다. 하지만 아브람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 땅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했다.
히브리서 11:8~13을 읽어보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기별은 무엇인가?
[히11:8~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답: 그리스도인의 삶은 앞이 환히 보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현재를 살면 그분이 한걸음씩 영원한 나라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브람이 관대하고 용감하며 친절하다고, 그리고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의 삶은 모범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 7).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노아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삶의 중대한 변화를 선택했다.
<묵상> 말씀에 순종해 하나님을 따라 나섰던 모세나 아브라함이 무엇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부름을 따랐는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답: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다.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본질은 영생이다(시133:3).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 해도 죽음으로 생명과 존재를 다 잃어버린다면 헛된 것이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 진리를 설파했다. 바울은 이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참된 소망이라고 했다(롬8:24,25, 고후4:18). 모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히11:27) 인내로 일생을 순종하며 살았다. 이렇게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가르친다. 교과 저자는 이런 삶을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6과 제목이 그렇지 않은가? 재물과 명예를 세상에 쌓는다고 해도 호흡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호흡하는 사람들이 고인에 관하여 좋은 말을 하고 추억을 가질 수 있고 귀감(龜鑑)을 삼을 수 있겠으나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말씀에 굴복하여 노아 아브라함과 같이 산다면 하나님을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생명을 모든 죽은 성도들에게도 주실 것이고 우리는 무덤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승리를 외치며 부활할 것이다. 진정한 보물 영생의 생명을 하늘에 쌓을만하지 않은가!
<교훈>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가족과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참된 믿음을 나타내 보였다.
2월 7일(화) 롯의 잘못된 선택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향을 떠났을 때, 그의 조카 롯이 동행하기로 선택했다. 창세기 13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하셔서 그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고(창 13:2) 기록한다. 롯에게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다(창 13:5). 두 사람 모두 매우 부유해졌기 때문에 가축이 많아서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었다. 목자들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아브람은 롯에게 어디에서 살지를 먼저 선택하도록 했다. 롯은 당연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브람에게 먼저 선택하도록 해야 했다. 또한, 그가 부유하게 된 것은 아브람 덕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 하지만 롯은 자신을 부유하게 해준 아브람에게 감사를 나타내기는커녕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좋은 땅은 선택했다.
창세기 13:10~12을 읽어보라.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롯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했는가?
[창13:10~12]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답: 요단 지역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기 때문이다.
롯이 땅을 선택한 이유가 아무리 그럴 듯 했던 간에 그곳에서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아브람이 롯에게 일어난 일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참 안됐구나 롯아. 네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브람은 즉시 롯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참조, 창 14장).
때론 물질적 욕심에 취한 나머지 우리는 마땅히 배워야 할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 때가 있다. 롯은 소돔으로 곧장 돌아갔다. 하지만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알리는 천사들을 롯과 그의 가족에게 보내셔서 그 도시에 다가오는 멸망을 알리셨다.
창세기 18:20~33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악한 도시들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창18:20~33]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답: 소돔의 부르짖음이 커서 그것을 살피러 왔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자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했다.
아브라함은 롯과 그의 가족을 생각하여, 만일 그 도시에서 의인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도시를 멸망하지 않도록 하나님과 협상했다. 50명의 의인에서 시작된 협상은 10명까지 내려갔다. 사랑 가득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요청이 멈추기까지 자비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하나님과 두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직접 그 성에서 인도해 내셨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바라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다. 부유한 사람으로 소돔에 들어갔던 롯은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당장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참조, 막 8:36, 37).
<묵상>
롯의 결정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롯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또 그 결정이 롯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도 롯처럼 행한 적은 없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답: 롯이 아브라함의 제안에 선 듯 받아 자기가 먼저 좋게 보이는 곳을 택한데서부터 잘못되었다. 결과는 롯을 망하게 했다. 우리도 무슨 결정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첫째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부가설명>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난 때 롯과 함께 했다. 롯은 아버지 하란은 아브람의 맏형이다. 데라가 아브람을 낳을 때 하란은 60세였다. 하란의 딸 밀가는 하란의 동생 나홀과 결혼했다. 하란에게는 밀가 외에 이스가라는 딸이 있었다(창11:29). 이 두 딸이 롯의 누나들이라고 하면 하란이 70세쯤 롯을 낳았다고 해도 아브람보다 10살 연하이고 그보다 일찍 났다면 아브람과 롯의 나이 차이는 열 살 미만이다. 만일 하란이 롯을 60세에 낳았다면 아브람과 동갑이고 그 전에 낳았다면 그 삼촌 아브람보다 나이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 기록의 분위기를 보면 아브람이 롯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하란이 60세가 지난 후에 롯을 낳았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나이 차이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숙질 간 아주 친밀했을 것이다. 롯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작은 삼촌 아브람과 아주 친밀했기에 할아버지 데라가 우르를 떠나 하란을 갈 때 동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별세하자 롯은 삼촌과 동행하기를 선택하고 아브람은 아버지 없이 자란 조카를 아주 잘 돌보고 함께 생할했다. 그러다가 독립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삼촌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양보하지 않고 자기의 독립 생활을 생각하면서 거부(巨富) 삼촌에게 지지 않는 재물을 모을 욕심에 비옥한 지역을 먼쟈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안이 없었다. 영적 눈,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믿음은 롯과 같은 결과를 맞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지?
<교훈>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당장의 유익만을 쫓아 소돔으로 이주했던 롯은 그 성의 멸망과 함께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 그 성에서 나오게 되었다.
2월 8일(수) 속이는 자에서 성공한 자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했던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기 위해 그의 어머니 리브가와 음모를 꾸몄다. 그 결과 그는 도망가거나 아니면 죽을 지도 모르는 잘못된 길에서 장년의 삶을 시작해야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라반에게로 피신하여…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고 말했다(창 27:43~45). 야곱은 20년간 떠나 있어야 했고, 다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창세기 32:22~31을 읽어보라.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창32:22~31]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답: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씨름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 죄 많고 잘못이 많은 인간이 겸손과 회개와 자기 포기를 통해서 하늘의 임금과 겨루어 이겼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으며, 사랑이 무한하신 분께서는 이 죄인의 호소를 물리칠 수 없으셨다. 속임수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죄가 이제 그의 앞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정하신 시간에 당신이 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실 그것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 야곱은 그의 영혼이 오랫동안 갈망하던 축복을 받았다. 대신 들어앉는 자요, 속이는 자로서의 그의 죄는 사유하심을 받았다”(부조와 선지자, 197, 198).
창세기 49:29~33을 읽어보라. 비록 가나안에 야곱의 재산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장례와 관련하여 그의 아들들에게 어떤 지시를 했는가? 그 굴에 누가 장사 되어 있었는가? 야곱이 이와 같은 요청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창49:29~33]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답: 아브라함이 준비한 그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부탁했다. 거기는 아브라함 부부, 이삭 부부, 그리고 야곱의 아내 레아가 장사되어 있다. 거곳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기업의 땅이다. 그가 그것에 묻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을 드러내었다.
성경은 세 명의 부조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같은 굴에 장사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굳건히 신뢰했으며 자신을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여겼다(참조, 히 11:13). 여러 실수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집을 떠났던 야곱은 부유한 사람이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왔다.
<묵상> 야곱은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대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십시오.
답: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복이 우리의 복이 된다.
<부가설명> 야곱이라는 이름은 ‘속이는 자’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본 뜻은 ‘발꿈치를 잡는 자’ 또는 ‘뒤에서 붙드소서’ 그런 뜻이다.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출생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뒤에서 붙들어주시도록 간구하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어느 아버지가 쌍둥이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다고 ‘속이는 자’라는 이름을 짓겠는가? 그는 이 아들이 욕심이 보통이 아니겠다고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부디 그를 붙들어주시기를 간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이는 사건이 크게 부각(浮刻) 되면서 이런 일차적인 뜻보다는 ‘속이는 자’라는 이차적인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서 야곱이라는 이름의 부정적인 면이 이 사건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박히는 것 같다. 삶이 그렇게 보이는 과정이었으나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주신 것으로 끝난다. 그는 속이는 자였으나 승리자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의 자손들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고 나라가 건국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주신 것을 우리가 다 확인할 수 있다. 회개하고 주님께 나가면 다 이스라엘에 된다는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잘 가르쳐주셨다.
<교훈>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아무것도 없이 집을 떠나야 했지만, 여전히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유한 자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왔다.
2월 9일(목) 애굽에서의 모세
초기의 거룩한 역사에서 모세의 품성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한 어머니와 배려심이 많은 누나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생명을 보존했다. 바로의 딸이 갈대 상자에 들어있는 아기 모세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아기의 히브리인 어머니에게 그 아기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렇게 하도록 돈을 지불했다. 노예로 살고 있던 젊은 어머니에게 허락된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요게벳에게는 그녀의 아이에게 기도하는 법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법과,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추도록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12년 밖에 없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훈련을 받았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행 7:22). 모세가 장성한 남자가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삶과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히브리서 11:24~29을 읽어보라. 모세가 무엇을 포기했으며 그 결과 무엇을 마주해야 했는가?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히11:24~29]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답: 바로의 공주 아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택하고 상 주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믿음으로 살았다.
당시 애굽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 중 하나였다. 나일강으로 인해 땅이 비옥했기 때문에 애굽은 곡물이 풍부했으며 부유하고 힘센 나라였다. 모세는 이런 나라의 일인자가 될 수 있었다. 애굽과 그 나라의 모든 보화가 그의 것이었을 터인데, 그것들의 유혹이 얼마나 강력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곳에서 누리던 영화와 쾌락과 부유함이 그에게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멸시받는 노예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기보다는 너무나 쉽게 그곳에 머무르기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어떠했는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히 11:25). 사실 모세만큼 큰 고통을 당한 사람도 없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련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모든 시련 후에도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참조, 민 2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세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고 있다. 비록 살아 있는 동안에는 종종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묵상> 모세는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넘어서는 더 위대한 실체가 있음을 묵상해 보십시오.
답: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나라를 향해 세상을 포기하는 믿음으로 걸어가야 할 것이다.
<부가설명>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이런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포기하고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더 나은 본향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았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유일의 기회라는 것을 그들이 잘 알았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잠시 지내는 동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 그러려면 눈에 보이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하늘로 가는 길에 방해된다면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브람이나 모세나 신앙의 선조들이 다 그렇게 살았다. 구약에 기록된 신앙의 선조들의 삶은 이런 것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이다. 그래서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의 거울이 된다고 한 것이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말세를 통과하고 있는 재림 성도들도 이런 생활로 하늘을 향해 거룩하고 정직하고 감사하며 걷자.
<교훈>
모세는 애굽에 남기로 선택하고 바로의 궁전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기로 선택함으로 더 영원한 것을 얻게 되었다.
2월 1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유업은 이 세상에 있는 유업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지상에서 ‘발 붙일 만큼’(행 7:5)도 땅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막대한 물질을 가지고 그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썼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을 그의 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주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우상 숭배자들인 그의 동족을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영원한 유업으로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아들의 아들도 그것을 얻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이 그의 죽은 자를 위하여 매장지를 필요로 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가나안 사람에게서 사야 하였다. 약속의 땅에서 그의 유일한 소유는 막벨라 굴 속 바위를 잘라낸 무덤뿐이었다”(부조와 선지자, 169).
“바로의 장엄한 궁전과 왕의 보좌가 모세를 유인(誘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그 궁정 안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죄악적인 쾌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호화찬란한 궁전 저편 곧 군주의 왕관 저편에 있는, 죄로 물들지 않은 나라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가 받게 될 지극히 높은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음으로 하늘의 왕께서 승리자의 머리에 씌워 주실 불멸의 왕관을 바라보았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비천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족과 연합하도록 했다”(부조와 선지자, 24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재산은 어떻게 될 것인가?(참조, 벧후 3:10)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그것들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참조, 마 6:20)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사물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고, 그날이 오기 전에도 녹슬고 도둑맞을 수도 있고 간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23:5).
2. 예수님께서는 “재물의 유혹”(막 4:19)에 대해 경고하셨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재물이 어떻게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가?
※ 재물을 쌓아두고 평안히 세상을 지내려는 유혹을 한다(눅12:19). 고생이 많은 세상에 몸과 마음이 재물을 의지하여 편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성도는 재물이 주님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3. 모세가 일단의 노예들과 도망하여 메마른 광야로 향하는 대신 애굽의 궁전에 머물기로 선택한 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취할 수 있었던 행동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라. 무엇이 그로 하여금 애굽의 궁전을 떠나게 했는가?
※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는 믿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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