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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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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11-10 16:26 조회5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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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믿는 자들은 복(福)되도다

              (11월 16일 (안) / 일몰: 오후 5시 20분)

  

<기억절(記憶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핵심 주재(核心 主宰)>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直接) 보지 못한 이후세대(以後世代)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몇 사람 :   아브라함, 마리아, 빌라도, 도마 등등) 몇 사람의 증언을 통해 증거(證據)를 제공(提供)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直接) 보지 못했지만, 그분께서 하신 말씀과 예언(豫言)의 성취(成就)를   보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弟子)들보다 더 많은 증거(證據)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고 따를 수 있고 예수님께서 구주(救主)이심을 확신(確信)하고 세상에 증거(證據)해야 한다.


(11월 10일) (일) <아브라함도 미리 보고 기뻐함>


(Q)~“아브라함이 나기 전(前)부터 내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증언(證言)이 요한복음에 포함(包含)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 8:56, 58, 창 12:3, 18:16~18, 26:4, 마 1:1, 행 3:25)


(A)~<우리는 성경에서 상식적(常識的)으로 이해(理解)할 수 없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중의 하나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만난 내용이다. 과학적(科學的) 이론(理論)으로 과거(過去)에 일어난 일은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첨단과학(尖端科學)을 동원해도 미래(未來)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너희 조상(祖上)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⑴.(요 8:56)은 아브라함에게 미래(未來)의 메시아에 대한 계시(啓示)가 보여졌다는 것을 암시(暗示)한다.


⑵.이 영광스러운 소망(所望)에 대한 신성(神性)한 계시(啓示)는 하나님의 보편적(普遍的)인 구원계획(救援計劃)을 확인(確認)하는 역할(役割)을 하도록 의도(意圖)되었다.


⑶.이 웅장(雄壯)한 계시(啓示)를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은 "기뻐"했고 "즐거웠습니다." 이와는 정반대(反對)로 유대 지도자(指導者)들은 그리스도의 날을 보기 위해 계시(啓示)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위대(偉大)한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기뻐하는 대신, 그들은 화(火)를 내고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


⑷.더욱이 아브라함은 그 환영(幻影)을 실제로 적용(適用)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인간 구원(救援)의 파노라마 계획(計劃)을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예표(豫表)로, 이삭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예수의 예표(豫表)로 봉사(奉仕)했다.


⑸.희생제물(犧牲祭物)을 위한 나무는 이삭의 등에 실려 제단(祭壇)으로 옮겨졌고,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十字架)를 갈보리 제단(祭壇)으로 옮기셨던 것과 같았다.


⑹.이삭과 예수는 모두 아무런 반항(反抗) 없이 기꺼이 희생제물(犧牲祭物)이 되셨다. 이삭과 같은 건장(健壯)한 청년이 그의 젊은 시절에 그렇게 순종할 것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⑺.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 그러나 고통(苦痛)스러운 주저함, 그의 외아들 이삭은 약속(約束)의 아들(그리스도)을 희생(犧牲)하는 것은 인류(人類)를 위해 예수를 죽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지(依支)를 상징한다.


⑻.예수와 이삭의 주요 차이점(差異點)은 후자를 위해 제공된 대용품(代用品)이었으나. 그러나 예수를 위해 제공(提供)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⑼.그리스도의 희생(犧牲)은 실제로 우리 모두를 위한 대용품(代用品)이 되기 위한 것이었으나 예수께서는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구원(救援)을 위해 다른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 자신의 생명과 의(義)로움을 주셨다.


⑽.아브라함이 보고 기뻐했던 구원(救援)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며 예수님은 아브라함 전(前)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심으로 예수님의 신적근원(神的根源)에 대해 말씀하셨다. 


(11월 11일) (월) <마리아의 증언(證言)>


(Q)~마리아가 한 행동(行動)의 의미(意味)는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이 실제로 누구인지에 대한 증거(證據)가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2:1~3)


(A)~<마리아가 구세주(救世主)의 죽은 몸에 아낌없이 바치려고 생각했던 향기로운 선물(膳物)을 그녀는 그분의 살아 있는 몸 위에 부었다. 매장(埋葬)할 때 그 달콤함은 무덤에만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확신(確信)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셨다>


⑴.바리새인 시몬의집에서 열린 잔치에 주의를 돌릴 때, 예수께서 방금 죽음에서 부활시킨 나사로 와 함께 영예로운 손님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영예로운 손님이 아닙니다. 


⑵.시몬과 마리아는 대조적인 사례연구(事例硏究)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나병(癩病)에서 깨끗이 하셨지만, 시몬은 아직 예수께서 그의 죄악적(罪惡的)인 선택의 나병에서 그를 치유(治癒)하도록 허락(許諾)하지 않았다. 반면(反面)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온전히 항복(降伏)했고, 그분께서 그녀의 죄(罪) 많은 “과거(過去)의 나병(癩病)”을 깨끗이 씻어 주시도록 허락(許諾)하셨다. 


⑶.시몬은 유대인의 관습(慣習)에 따라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 주신 데 대해 경의(敬意)를 표(表)해야 할 의무감(義務感)을 느꼈고, 의무감에서 예수님을 초대(招待)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獻身)하고 헌신(獻身)했으며, 그분의 사랑의 향기(香氣)를 온 집안에 퍼뜨렸다. 


⑷.시몬의집에서의 잔치에서 마리아는 곧 죽임을 당할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몸에 기름을 부었고, 죄(罪) 많은 인류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대속제물(代贖祭物)이셨다.


⑸.마리아는 개인적(個人的)으로 크게 희생(犧牲)하여 그는 예수의 몸에 부을 ‘값진 향유’ 한 옥합(玉盒)을 샀다. 이처럼 중심을 아시는 예수님은 마리아가 모든 사람의 주목(注目)을 받게 되었을 때 그녀를 변호(辯護)하셨다. 


⑹.유다는 예수님께 향유(香油) 기름을 부은 것에 대해 그녀에게 언어적(言語的) 공격(攻擊)을 가했고, 제자(弟子)들은 이 공격(攻擊)을 지지(支持)했다.


⑺.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헌신(獻身)한 행위를 놀라운 일이라고 묘사(描寫)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의 역할을 할 때, 예수님은 그러한 노력을 우리의 가장 좋은 제물(祭物)로 받아들이신다. 


⑻.예수님은 진정한 마음의 내면(內面)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예수님은 그것이 매우 좋다고 여기신다. 예수님께 충분히 좋은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좋을 것이다.


⑼.향유(香油)를 깨트려 부었을 때 다른 이는 비난(非難)했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그 행위를 기념(記念)하셨다. 이는 그녀의 순수한 사랑의 증거(證據)로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다. 


⑽.“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그의 죽음이 가까움을 알리시는 말씀을 듣자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 예수님에게 경의(敬意)를 표(表)하기를 원(願)하였다


(11월 12일) (화) <무심코 한 빌라도의 증언(證言)>


(Q)~빌라도의 사례(事例)에서 그의 양심(良心)이나 마음과는 달리 정반대(正反對)로 거스른 판결(判決)의 행동은 그의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심코 한 빌라도의 증언(證言)은?. (요한복음 18:38, 요한복음 19:4~22.)


(A)~<빌라도 예수님이 단순히 무고(誣告)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특별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빌라도는 그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진실을 전하고 그를 정죄하지 말라고 경고함으로써 이러한 확신(確信)을 확증(確證)했다. 사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을 무죄(無罪)하다고 세 번이나 선언(宣言)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빌라도는 폭도(暴徒)의 압력(壓力)에 굴복(屈伏)했다. 그는 약(弱)해진 순간에 주저하며 양심(良心)을 저버렸다. 빌라도는 로마와 폭도(暴徒)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둘 다 기쁘게 하지 못했다. 모든 명예(名譽)를 박탈(剝奪)당하고 프랑스의 갈리아로 추방(追放)된 빌라도는 심한 우울증에 휩싸여 자살(自殺)했다.>


⑴.이교도(異敎徒) 총독(總督)인 빌라도는 어떤 의미(意味)에서 예수님 편(便)을 들고 그분의 무죄(無罪)를 선포(宣布)한 반면, 예수님께서 구원(救援)하기 위해 오신 자신의 백성은 예수님을 거부(拒否)하고 그분의 죽음을 요구(要求)했다는 것은 놀랍고 아이러니합니다. 


⑵.매우 타락(墮落)한 세상에서 살고 통치(統治)하면서 빌라도는 진실을 알고 싶어 했지만,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疑心)했다.

⑶.진실(眞實)의 존재에 대한 그러한 의심(疑心)은 특히 오늘날 만연(蔓延)하다. 진실은 거짓말로 오해(誤解)받고, 권력(權力)의 책략(策略)에 불과하며, 빛은 무지(無知)한 자들을 복종시키는 데 사용되는 어둠으로 낙인(烙印)찍힙니다.


⑷.빌라도는 진리(眞理) 그 자체를 앞에 두고 있었지만, 무리가 그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빌라도는 어쨌든 예수를 사형(死刑)에 처했다! 양심(良心)과 마음이 옳다고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 참으로 비극적(悲劇的)인 예(例)입니다!


⑸.우리는 빌라도의 예(例)에서 대중(大衆)의 감정(感情), 심지어 압력(壓力)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위험(危險)에 대해 명심(銘心)하여 교훈으로 배울 수 있다.


⑹.“비록 빌라도가 예수의 피 값을 고소(告訴)하는 자들 곧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부르짖던 군중(群衆)들에게 돌렸다 할지라도 그가 무죄(無罪)한 것은 아니다. 


⑺.빌라도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죄(罪)가 있다. 그는 이기적(利己的)인 야망(野望)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의 치리자(治理者)로부터 받는 영예(榮譽)를 사랑했기 때문에 무죄(無罪)한 사람을 죽게 했다. 


⑻.만일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良心)을 따라 행동(行動)했더라면 그는 예수를 정죄(定罪)하는 일에 관여(關與)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174). 


⑼.빌라도는 예수에게 무죄(無罪)를 선언(宣言)하고 그분의 명패(名牌)에 자신의 증언(證言)을 남겼다. 그런데도 사형(死刑)을 선고(宣告)한 것은 그의 양심(良心)과 마음의 음성(音聲)을 거스른 참담(慘憺)한 사례(事例)이다. 


⑽.요한복음의 다른 증인(證人)들은 대부분 유대인과 평민(平民)이기 때문에 로마인이자 총독(總督)이며 재판관(裁判官)이었던 빌라도의 증언(證言)은 매우 중요한 증언(證言)이었다.


(11월 13일) (수) <도마의 증언(證言)>


(Q)~도마의 이야기에서 믿음과 의심(疑心)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도마는 어떤 중대(重大)한 실수(失手)를 저질렀는가? (요한복음 20:19~31)


(A)~<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순순히 믿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을 만져 보고 자기의 손으로 창에 찔린 그 옆구리의 흔적(痕迹)을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고집하였다. 그는 이 일로 그 형제들에게 자신의 믿음의 부족(不足)을 나타내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다 그와 같은 증거(證據)를 요구한다면 지금은 한 사람도 예수를 믿지 못했을 것이요 예수의 부활(復活)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활(復活)하신 구주(救主)를 친히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제자(弟子)들의 말을 믿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었다> (살아남은 SR 236)


⑴.도마의 사건(事件)은 신앙(信仰)과 신뢰(信賴)에 대한 교훈(敎訓)이 담긴 책(冊)으로써 도마는 자신의 믿음의 조건을 제시(提示)하는 실수를 범(犯)했다.


⑵.예수님을 믿는 인간적인 믿음의 접근방식(接近方式)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느냐?" (요 3:4)고 대답했으며, 우물가의 여인은 "선생님, 물통도 없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습니까?" (요 4:11)'이라고 물었고.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은 무리가 "무슨 표적(表迹)을 보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요 6:30)'이라고 자신들의 믿음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⑶.우리가 믿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은 기꺼이 제공(提供)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절망(絶望), 낙담(落膽), 의심(疑心)에 빠진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⑷.구주(救主)께서는 도마에게 온유하셨고, 그에게 자신의 상처(傷處)를 만지라고 권(勸)하셨다.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가 "와서 보라"고, 그분을 직접경험(直接經驗)하기를 원(願)하신다.


⑸.요한의 시대(時代)에도 우리 시대에도 과학적(科學的)이든 철학적(哲學的)이든 원(願)하는 모든 증거(證據)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⑹.믿음의 증거(證據)가 있지만, 성경은 보고 나서 믿는 관점(觀點)을 반박(反駁)한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만져 보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지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福)되다 하셨다. 


⑺.오늘날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메시아 직에 대한 반대(反對)에서 제기(提起)된 모든 의심(疑心)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실재(實在)와 사명(使命)에 대한 엄청난 증거(證據)를 무시(無視)한다. 

이 의심(疑心)하는 사람들은 믿기로 선택하기 전(前)에 증거의 잔(盞) 전체가 가득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⑻.이 타락(墮落)한 세상에는 항상 의심(疑心)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증거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創造物), 생명자체(生命自體), 신성한 섭리(攝理), 우리의 양심(良心), 그리고 우리가 태어난 믿음의 척도(尺度)이다. 그런 종류의 증거가 있으면 진정(眞正)으로 보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⑼.요한복음은 "보고 믿으라"라는 관점(觀點)을 반박(反駁)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를 만나셨을 때, 그는 그에게 와서 보고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만져 보라고 권(勸)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20:29).


⑽.충실하고 열성적이었으나 더디 믿은 빌립과 도마, 같이 뽑힌 형제 중에 과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결점(缺點)과 미덕(美德)이 모두 확실히 나타난 유력자(有力者) 야고보와 유다, 아기처럼 순진하고 신뢰심(信賴心)을 한 나다나엘, 대망(大望)과 애정(愛情)을 가진 세베대의 아들들이 있었다. (교육 85)


(11월 14일) (목) <예수에 대한 우리의 증언(證言)>


(Q)~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가 믿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무엇이며,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수에 대한 증거를 가질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4:2, 마태복음 24:6~8, 마태복음 24:14)


(A)~<오늘날, 약 2천 년 후,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또한 예수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증거로 제시할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다나엘,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의 추론이나 바리새인의 가르침으로 우리가 예수를 우리 스스로 메시아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확신시키는 능력으로 성경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를 세상의 구세주(救世主)로 받아들입니다.>


⑴.사람이 증언(證言)하려면 증언할 내용이 있어야 하고 증언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聖靈)을 통해 성경을 읽음으로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받아들이고 개인적(個人的)인 경험(經驗)을 통해 우리도 복음서(福音書)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증거(證據) 할 수 있다. 


⑵.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경향(傾向)이 있다. 진리(眞理)의 근원(根源)이신 예수님은 그 반대(反對)이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의미(意味)하는 것을 말하고 자신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과 그가 의미하는 것을 온전히 신뢰(信賴)할 수 있다.


⑶.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聖靈)을 통해 우리 안에 영광(榮光)의 소망(所望)이신 예수님을 형성(形成)해 주십니다.


⑷.우리는 많은 성취(成就)된 예언(豫言)의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연구하여 그분의 위대(偉大)한 행적(行蹟)과 생명을 주는 말씀에 대해 배울 수 있으며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내재(內在)되어 있는데, 그분의 기록된 말씀은 그분의 인격(人格)과 일치(一致)하기 때문이다. 


⑸.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신성(神性)과 신성(神聖)한 사명(使命)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자(證據者)이십니다. 


⑹.특히 복음증거(福音證據)는 다른 증거(證據)들보다 성령(聖靈)을 통해 성경(聖經)을 읽음으로 예수를 구주(救主)로 받아들이고 개인적(個人的)인 경험(經驗)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증거(證據) 할 수 있다. 


⑺.성도(聖徒)가 복음을 말로 전(傳)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위대(偉大)하시다는 증거(證據)를 제시(提示)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주신다.


⑻.예수님의 증인(證人)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위험(危險)을 감수(甘受)할 각오(覺悟)가 필요하다.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殉敎)하는 것도 증인의 삶이고, 평안(平安)의 때에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는 것도 증인(證人)의 삶이다.


⑼.성도(聖徒)는 삶의 자리에서 선(善)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대(擴大)시켜 나가야 한다. 


⑽.성도(聖徒)들이 선(善)한 영향력(影響力)을 회복(回復)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증인이 되려면 우선 성령(聖靈)의 충만(充滿)함을 입어야 한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은사를 받는다. 이는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의 영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와 인격적으로 연합한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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