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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신성의 증거들(질문, 대답, 설명) 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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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10-04 10:17 조회1,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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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신성의 증거들

(10월 1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59분)

  

연구 범위: 요 6:1-15, 사 53:4-6, 고전 5:7, 요 6:26-36, 요 9:1-41, 고전 1:26-29, 요 11:

 

기억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파생되지 않은 영원한 아들이시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요 1:1-3). 따라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으며 그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 하지만 언제나 신성을 간직하셨으며 필요한 때에는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셨다. 

요한이 예수님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 것은 그가 예수님의 신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말씀을 하셨을 뿐 아니라 신성을 보여주는 기적들을 통해 그 말씀을 뒷받침하셨다. 

이번 주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가장 위대한 세 가지 표적을 살펴볼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경우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믿지 않거나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경이로운 표적이 나타날 때 어떤 이는 예수에게서 돌아섰고, 다른 이들은 더 외면하고 눈을 감았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을 통해 그분에게 영원한 생명과 신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느끼기: 그분의 신성이 나타나더라도 영적으로 무감각한 이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행하기: 믿음을 통해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신성을 발견하고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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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한은 어떤 의미가 있는 표적과 기사를 다룸으로 사람들을 무엇으로 향하게 합니까?(요 6:14) 

*답: 오천명 먹이신 표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주 하나님이신 것을 보도록 이끌었다.

3.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왜 그 뜻을 보지 못했습니까?(요 6:35)

*답: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으나 사람들은 현실적 욕망에 눈이 막혀 깨닫지 못했다.

4. 왜 이 사람은 나면서 눈이 멀었습니까?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자기 잘못 때문입니까?(요 9:3) 

*답: 사람이 병드는 것은 사탄에게 속은 조상이 사망이 되어 사망의 씨러 출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런 병든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셨다.

5. 예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눈멀었던 사람과 어떻게 대조됩니까?(요 9:29) 

*답: 눈 멀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바로 보았으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생각대로 보는 눈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르게 보지 못했다.

6. 예수님은 왜 도움을 요청하는 나사로의 집으로 속히 가지 않으시고 지체하셨습니까?(요 11:6)  

*답: 나사로 누이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생명이신 자기를 확실이 알게 하여 생명의 주님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7. 생명은 그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어야 합니까?(마 4:4) 

*답: 성경을 읽고 명상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 그 생명은 말씀대로 살도록 해주는 능력이 된다.

 

결론: 예수께는 파생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과 신성이 있다. 예수님은 필요한 때에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셨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는 계기가 되었으나 어떤 이들은 기적을 믿지 않고 그것을 외면하며 그분의 신성을 부인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 어두움을 벗고서 눈에 보이는 이익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급과 그 실체를 발견하기를 원하신다. 

 

10월 6일(일) 오천 명을 먹이심

 

요한복음 6:4, 5에서 사도는 5,000명을 먹인 시기가 유월절에 가까운 것을 부각하며 시작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유월절 어린 양은 장자를 대신해서 죽었으며 이 희생은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표상한다.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내려졌다. 유월절 양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셨다(고전 5:7).

"그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외면당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의 심장은 터지고 그분의 생명은 부서졌다. 이 모든 희생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540).

 

요한복음 6:1-14을 읽어 보라. 예수님과 모세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모세의 사역을 통해 받았던 구원을 상기시킬 만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요6: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답: 모세는 유월절 행사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게 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림으로 세상 죄인을 흑암에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골1:13).

 

이 이야기의 많은 세부사항은 출애굽기의 모세와 예수님이 하신 일 사이의 평행구조를 보여준다. 유월절(요 6:4)은 애굽에서의 위대한 구원을 가리킨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처럼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다(요 6:3).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신다(요 6:5, 6). 떡을 공급하신 것(요 6:11)은 만나를 생각하게 한다. 남은 음식을 모으는 것(요 6:12)은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모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수와 같은 열두 바구니에 남은 음식이 모아진다(요 6:13).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신 18:15)를 떠올리게 하는 세상에 오는 선지자(요 6:14)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하러 오시는 새로운 모세라는 것을 가리킨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단순히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이 가진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본질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신성을 가리키고 계신 것이다.

 

<교훈> 유월절이 가까울 무렵 행하신 5,000명을 먹이신 표적은 모세의 경험과 평행구조를 이루며 유대 민족에게 특별한 표적을 통해 당신의 신성을 말한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때는 예수님이 공중 봉사를 시작하시고 세 번째 맞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는 표적이었는데, 유대인은 먹는데 몰두하느라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또 먹으러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출애굽 때 있었던 만나 사건을 들어 영생의 양식을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생각을 했고 그 계획에 몰두했다(요6:15). 이런 군중의 생각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엄밀히 시행하는 일에 가룟유다가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과 만나의 역사를 생각나게 말씀하셔서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깨닫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은 무가내였다. 결국 그들은 돌아섰다. 그가 어떻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것인가라고 수군거렸고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까지도 이 말을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떠났다. 실제와 상징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10월 7일(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요한복음 6:14, 15, 26-36을 읽어 보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어떻게 반응했고, 그분은 이 기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가르치려고 하셨는가?

[요6:14,15,26~36]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답: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라고 생각해서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셨으나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이 땅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두 가지 문제는 군대를 먹이는 일과 부상자와 사망자를 관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이 모든 것이 가능하신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아니었고, 기적을 행하신 목적도 아니었다. 대신 5,000명을 먹이신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으며,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신 것을 보여줄 기회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요 6:35)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나는(I AM)”으로 시작하는 일곱 개(“생명의 떡,” 요 6:35; “세상의 빛,” 요 8:12; “문,” 요 10:7, 9; “선한 목자,” 요 10:11, 14; “부활과 생명,” 요 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 요 14:6; “참 포도나무,” 요 15:1, 5)의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이다. 이 기록은 각각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드러낸다. “나는”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나타내신 출애굽기 3장을 생각하게 한다(요 8:58, 비교). 예수님이 바로 그 위대한 '나는(I AM)'이시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불만스러운 마음은 예수께서 저희가 목격하였던 바 그렇게 많은 이적을 행하실 수 있으신데도 어찌하여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건강과 힘과 재물을 주시고 그들을 억압하는 자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능력과 영예를 주어서 그들을 높이실 수가 없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품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 주장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신 사실은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거절한 것을 오해했다. 

많은 사람은 예수 자신이 스스로의 신성한 사명의 본질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펴지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의 마음을 불신을 향해서 열었으며 곡해와 배반 가운데서 사탄이 심은 씨는 그에 걸맞은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385).

그들은 영생에 이르는 진리 대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직면할 수 있는 함정이다.

 

<교훈> 군중을 먹인 일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 하셨으나 사람들은 그 대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찾고 있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유월절 행사가 바로 예수님의 희생과 영원한 구원을 상징하는 것을 군중들이 깨닫기를 원했으나 그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해방과 국력 신장을 원했다. 그들이 처지는 애굽에 종노릇하던 그 조상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조상들은 애굽의 종이었으나 그들은 로마제국의 종이었다. 그 조상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그분이 이제 사람이 되어 로마의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켜서 영생하는 나라에 옮기려고 하시는 일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만나 내린 사실을 말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으나 결국 깨닫지 못했다. 우리도 표상에 사로잡혀 참 의미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문자(의문)는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읽고 깨달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고후3:6). 우리는 영으로 말씀을 읽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10월 8일(화) 눈먼 자를 치유하심 -1

 

요한복음 9:1-16을 읽어 보라. 제자들은 이 사람이 보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바로잡으셨는가?

[요9:1~16]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답: 부모나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은 질병을 죄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했다. 구약의 어떤 구절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여지가 있지만(출 20:5, 왕하 5:15-27, 왕하 15:5, 대하 26:16-21 참조), 욥의 이야기를 통해 질병이 꼭 죄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죄와 고통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으셨지만, 이 경우에 그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더 높은 목적을 제시하시면서 문제를 바로잡으셨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눈먼 사람에게 태어날 때 빠졌던 것을 진흙을 이겨 바르심으로 채워 주는 듯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창조의 이야기(창 2:7)를 떠올리게 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들은 모두 문제를 진술하고,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가 일어나고, 그가 치유 받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정한 흐름을 따른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이런 전개가 7절에서 완결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른 기적과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보다, 그 일이 가지는 의미라는 더 큰 주제에 대해 치유받은 사람과 종교 지도자 간의 긴 대화가 이어진다. 이 논의는 죄/하나님이 하시는 일, 보지 못함/보는 것이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 있는 대조적인 개념 쌍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한복음은 9:14까지 예수께서 이 치유를 행하신 날이 안식일인 것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의 전통으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위반한 것이기에 바리새인들은 그분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문제 삼았다(요 9:16). 

토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분열이 시작되었다. 눈먼 사람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이해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진짜 정체성에 대해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거나 보지 못하고 있다.

 

<교훈> 눈먼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대해 그분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맹인은 예수를 보기 시작하지만, 보던 이들은 그 실체를 보지 못한다. 

 

<부가설명>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는데 엄청난 오해다. 9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씀을 한 일이 없다. 유대인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이 있을 뿐이다.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고 그(소경)에게서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런 나면서 눈이 멀게 된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낼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한 것은 사탄이 해놓은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사탄이 저질러놓은 일을 바로잡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요한은 요한일서 3:8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셔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계시하셨다. 예수께서 흙을 발라 고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원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했다는 것을 암시하시고 이렇게 망가뜨린 것은 사탄이 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10월 9일(수) 눈먼 자를 치유하심 -2

 

요한복음 9:17-34을 읽어 보라. 지도자들은 어떤 질문을 했고, 눈먼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요9:17~34]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답: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죄인인줄 안다고 말했고 눈뜬 사람은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가 장님으로 있다가 밝히 보게 된 한 가지는 분명히 안다고 말했다. 24~34에 눈을 뜬 사람의 대답이 있다. 확인하라.

 

요한복음 9장의 이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무대의 주인공이 아닌 부분이지만, 토론의 주제가 예수님인 것은 분명하다. 죄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가 시작한 것처럼(요 9:2),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에(요 9:16, 24) 죄인이라 여기고,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는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라고 비방한다(요 9:34).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커지고 그분을 더욱 굳게 믿으면서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요 9:16), 다음에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 것에 이어 예수님에 대해 점점 더 보지 못하게 된다(요 9:29). 

한편, 요한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할 기회를 얻는다.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이 표적의 주제는 복음서의 다른 여러 주제와 교차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다시 확인한다(요 9:5, 요 8:12 비교). 이 본문은 또한 예수님의 신비한 기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그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9:12, 29; 요 1:14 비교)

이전의 기적 이야기에서 언급된 모세의 모습이 이 장에 다시 나타난다(요 9:28, 29; 요 5:45, 46, 요 6:32 비교).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주제도 있다. 어떤 이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반응한다(요 9:16-18, 35-41, 요 1:9-16, 3:16-21, 6:60-71 비교). 

이 대목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어두움이다. 

한때 눈먼 자였던 거지가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2, 33)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영적 지도자이자 가장 먼저 예수를 알아보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모든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에 대한 얼마나 강력한 경고인가!

 

<교훈> 요한복음 9장은 세상의 빛이신 그분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지만,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는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다. 

 

<부가설명> 사람들이 어떤 사상에 점령되면 오직 그 사상이 잣대가 되어 그것에 맞지 않으면 거절한다. 확증편향(確證偏向)이라는 말로 이런 상태를 표현한다.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강력한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기꾼으로 규정해놓고 그분의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르게 볼 수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어떤 사람은 완전주의에 빠져 있고 어떤 사람은 무원칙 주의에 빠져있고 어떤 사람은 사데교회 상태에 빠져있고 어떤 사람은 세상 학문에서 배운 합리적 논리에 빠져있지 않은가? 성경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그 해석을 찾아서 진리를 진리대로 깨달아야 한다. 그러려면 바울처럼 전에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운 것을 여기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자. 

 

10월 10일(목) 나사로의 부활

 

요한복음 11장은 사랑하는 친구가 병에 걸린 슬픈 소식(요 11:1-3), 그의 죽음에 대한 애곡(요 11:19, 31, 33); 예수께서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매들의 비탄(요 11:21, 32),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요 11:35) 등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가는 여정을 이틀 늦추셨고(요 11:6), 심지어 더 일찍 가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14, 15). 이 행동은 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1:17-27에 이르렀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라고 마르다가 말한 것처럼 그의 시신은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체하셨던 것은 뒤이어 일어난 기적을 더욱 놀랍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썩어가는 시체를 다시 살리다니,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이보다 더한 증거가 있겠는가? 

하나님으로서, 생명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당신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 26).

 

요한복음 11:38-4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요11:38~44]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답: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하여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예수께서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심으로서 당신이 세상의 빛(요 8:12, 요 9:5)임을 보여주신 것처럼(요 9:7),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서(요 11:43, 44)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심을 보여주셨다.

다른 어떤 기적보다도 이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낸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성한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요한의 주제를 강력하게 증거한다(요 20:30, 31). 

이 표적을 본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요 11:45) 불구하고, 이 놀라운 이야기(요 11:45-54)의 끝에는 참혹한 역설이 펼쳐진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으나 그런 때에도 어떤 이들은 그분을 죽여서 막아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그에 대조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더 이상의 예가 있겠는가!

 

<교훈>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셨다. 

 

<부가설명> 죽음은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사람들이 맞을 수밖에 없는 결과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이미 죽었다. 다만 종신하기까지 은혜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고후6:1,2)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회로 수명을 주셨을 뿐이다. 이 수명이 다할 때를 종신이라고 한다. 종신은 사람따라 각각 그 연대가 다르다. 일찍 종신하는 사람도 있고 므두셀라처럼 969년을 살다가 종신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종신한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나사로는 젊어서 종신한 것 같다. 그것은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질병이다. 그래서 출생하는 모든 사람들은 종신이라는 불치병자로 출생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기에(딤후1:10)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을 받는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이 있는 생명 자체이심을 증명하는 이적이었다. 예수님이 생명의 시여자라는 것을 드러내셨고 재림하실 때 모든 의인들을 불러내시고 천년기 후에는 모든 악인들을 불러내실 것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셨으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부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종신해야 하는 육체의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생명이시며 사망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주라는 것을 확증하는 이적이었다.

 

10월 1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41장 “갈릴리에서의 위기,” 58장 “나사로야 나오라,” 59장 “제사장들의 음모”를 읽어 보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은 그의 말씀으로 하신 것이었으며,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교사들을 통하여 옛적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셨다. 온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며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말씀에 고정시키기를 원하셨다. 육체로 계신 예수께서 물러가실 때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능력의 원천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주와 같이 그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마 4:4)었다.

육체의 생명이 음식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처럼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각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한다. 자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말씀을 자신을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을 얻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깊게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시대의 소망, 39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어떤 사람들은 의심으로 반응했다. 이 이야기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답: 사람은 진리가 맞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택하는 사망의 성질이 지배한다. 

2. 교과에 기록된 기적은 모두 그리스도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가리킨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는데 그분의 신성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그분의 신성이 아니면 우리가 재창조 받을 수 없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다.

3. 고린도전서 1:26-29을 다시 보라. 우리가 사는 시간과 장소에는 이 원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들이 조롱하고 거부하는 어떤 “미련한 것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가? 오늘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가?

*답: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신의 성품을 지닌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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