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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예루살렘에서의 논쟁(질문, 대답, 설명) 08/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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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8-23 09:56 조회2,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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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8월 3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분)

   

연구 범위: 막 11; 왕상 1:32~48; 슥 9:9, 10; 사 56:7; 렘 7:11; 막 12:1~34

기억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마가복음 2장과 3장에는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다섯 가지 논쟁이 연속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번 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님에게 종교 지도자들이 벌였던 여섯 가지 논쟁을 살펴볼 것이다. 이 두 묶음의 논쟁들은 예수님 지상 사역의 시작과 끝을 말해주는 경계점이다. 각 논쟁은 그리스도인 삶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논쟁의 한가운데서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와 일상의 실제적인 문제 모두에서 신자들을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당혹하게 하고,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 주 교과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반목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할 것이다. 또 성령님의  부르심을 저항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편견을 깨트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마가복음 1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은 유월절(3월~4월)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는 일주일이 조금 넘는 기간으로, 처음 10장이 약 3년 반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서술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이러한 느린 전개는 마지막 장면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예언을 성취하시고 무화과나무와 지도자에게 경고하며 결국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느끼기: 그분의 말씀은 사랑으로 주신 사전 경고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돌이킬 기회가 있다. 

행하기: 이 땅의 도리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십자가를 모본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TMI 위로

2.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입성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슥 9:9, 10)

*답: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과 그분이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다.

3. 무화과나무를 향해 하신 말씀과 성전에서 하신 일은 서로 어떻게 연결됩니까?(막 11:12~26)

*답: 열매가 없으면 다 망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4.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을 들어 말씀하신 것은 비유의 어떤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까?(막 12:1~9)

*답: 듣는 자가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게 한다. 그들은 악한 농부였다.

5. 예수께 제기한 사두개인의 교묘한 질문은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막 12:24)

*답: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묻는 무지한 질문이었다.

6.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무엇을 묻는 질문이었습니까?(막 12:28)

*답: 성경 종교의 핵심을 알고자하는 질문이다. 

 

결론: 비밀의 때는 지나가고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분은 무화과나무에 심판을 선고하시며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고 그 제도와 지도자들의 결국을 암시하신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사랑으로 주신 사전 경고이기에 돌이키는 자에게 기회가 있다. 우리는 이 땅의 의무에 충성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해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본받아야 한다. 

 

8월 25일(일) 승리의 입성

 

마가복음 11:1~11과 스가랴 9:9, 10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막11: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슥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답: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이 이야기의 절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타고 갈 나귀를 구해 오라고 두 제자를 인근 마을로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었는가. 

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능력을 보여줌으로 예수님 오심의 신성함을 부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킨다. 둘째, 이것은 왕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는 스가랴 9:9, 10과 연결된다. 이는 아도니야가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다윗이 솔로몬에게 즉시 왕위에 오르도록 명령하여 솔로몬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장면(왕상 1:32~48)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이같이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었다.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해 오셨던 분께서 이제 다윗의 보좌의 약속된 상속자로서 예루살렘에 임하신다"(시대의 소망, 569). 

예루살렘은 해발 약 740m의 언덕이 많은 지역에 있다. 예수님 당시 인구는 40,000~50,000명 정도이겠지만 유월절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으로 도시가 붐빈다. 1,000,000m² 정도에 불과한 도시 면적에서 약 150,000m²를 성전이 차지했다. 아름다운 성전 단지는 도시를 압도했다. 

예수님은 동쪽 감람산에서 내려와 황금문(지금은 벽돌로 막혀 있는 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모두가 예수님이 취하신 상징적인 행동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그분의 입성에 도성 전체가 들썩였다. 예수님과 함께한 군중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의 본래 의미는 "이제 구원하소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전반을 통해 굳게 지키셨던 비밀의 때는 지나갔다. 예수님은 이제 모두에게 잘 알려진 왕을 표상하는 행동과 함께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분은 성전에 들어가신 후 늦은 시간이었기에 단지 주변을 둘러보신 후 열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돌아가신다. 폭동이나 반란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사건은 그분이 조용히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다음날은 다를 것이었다. 

 

<교훈> 그동안 지키셨던 비밀의 때는 지나갔다. 그분은 예언자적 면모를 보이시면서 잘 알려진 왕을 표상하는 행동을 통해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부가설명> 이제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그 사건을 이루실 때가 되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과 풀어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미리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는 기회를 다시 주셨다. 예수님이 곧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그래도 제자들이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실물교훈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욕망에 억눌려 교훈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예언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환영하는 군중을 선동하지 않으셨다. 조용히 나오셨다. 어쩌면 그분이 왕위에 오르기를 열망하던 군중에게는 실망을 안겨줬을 것이다. 이런 실망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분노로 바뀌었을까? 사탄은 군중심리를 잘 이용하는 존재이니 선동하는데 이런 심리를 잘 활용했을 것이다. 옛날 왕들이 평화 행진에는 나귀를 탔고 전쟁을 위할 때는 말을 탔다고 한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겸손한 것이라고 했다. 그분은 겸손하여 기록한 말씀대로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셨다. 

 

8월 26일(월) 저주받은 나무와 깨끗해진 성전 

  

마가복음 11:12~26을 읽어 보라. 여기에 묘사된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막11:12~26]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어떤 사본에, 26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가 있음〕

*답: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무엇(열매)이 없어서 저주하였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 나무는 말랐다. 그리고 성전 청결하시고 무화과나무 마른 것을 통하여 기도와 응답에 관한 교훈을 주셨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아침에 약 3Km 조금 넘는 길을 걷다가 시장하셨다. 그분은 잎이 달린 무화과나무를 보셨고, 이른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 그 나무로 가셨다. 율법에 따르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이웃의 밭이나 과수원에서 음식을 먹는(레 19:9, 레 23:22, 신 23:25) 행위는 도둑질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매를 찾지 못하시고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막 11:14)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평상시 행동과는 다른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일은 더욱 놀랍다.

그 일은 가야바에 의해 근래에 제물을 파는 일이 시작된 이방인의 뜰에서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경건한 예배가 다시 드려질 수 있도록 성전 뜰에서 제물 파는 자들을 쫓아내셨다. 예수의 행동은 성전 제도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직접적인 모욕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두 구절을 연결하셔서 불경한 거래를 통렬하게 책망하셨다. 성전은 이방인을 포함한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이 되어야 하는데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다(렘 7:11). 이 놀라운 하루가 끝날 무렵,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도성을 떠나신다(막 11:19). 

다음날 아침, 다시 성으로 향하던 제자들은(막 11:20~26)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예수님은 이 일을 설명하시면서 기도와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신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네 번째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유사한 인물이 상반되는 행동을 하거나 정반대의 인물이 유사한 행동을 함으로써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이야기에서는 무화과나무와 성전이 평행을 이룬다. 예수님은 나무를 저주하고 성전은 깨끗하게 하는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그 행동은 성전 제도의 의미를 예수 안에서 성취함으로 그 종말을 고하게 할 것이다. 

 

<교훈>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한 그분의 선고와 결과는 성전 정결로 그분에 대한 음모를 꾸민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성전 제도의 결국과 유사점을 보인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가야바에 의하여 제물 판매가 시작되었다고 썼는데, 어쩌면 예레미야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렘7:11) 책망했을 때 그런 일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제사장들은 성전 봉사라는 그들의 직임을 이용하여 재물을 쌓았을 수 있다. 오늘날 교회 현상은 그때도 있었다. 사탄의 계략은 인간의 욕심과 결탁해서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을 세운다. 그러므로 성전 직임을 맡은 사람들은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다. 이 나무를 저주한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고 유대 나라의 현상을 꾸짖으신 것이다. 마가는 이 구절에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3절 하단)라는 문장을 첨가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문장을 두고 버트런드 러셀은 예수님을 맹비난했다. 무화과 철이 아니라서 열매가 없는 나무를 저주하는 것은 정신 빠진 사람의 행태라는 것이다. 러셀의 이 공격을 읽고 나는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깊이 빠졌다.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하고 내게 물으면 합리적인 대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나는 답을 찾았다. F. F. Bruce 박사의 NEW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이라는 책이다. 그는 팔레스틴의 무화과 생태를 알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잎이 나면 잎고 가지 사이에 탁쉬라는 선무화과가 함께 나온다. 그것은 3월경이다. 그런데 진짜 열매는 6월부터 열린다. 그러므로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쓴 것이다. 마가는 이곳 무화과 생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화과 때에 열리는 무화과는 비쿠르라고 한다. 탁쉬가 열리지 않은 나무에는 비쿠르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의 지도를 받는 유다는 예수님 당시 탁쉬가 없었다. 그 현상이 성전을 도둑 소굴로 만든 것으로 증명 되었다. 그래서 민족적 유대인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었고 우리도 복음을 믿어 열매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탁쉬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러면 비쿠르는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8월 27일(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마가복음 11:27~33을 읽어 보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도전을 제기했으며, 그분은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막11:27~33]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 성전 청결하는 권세를 누구에게 받았는지 물었다. 예수님은 침례요한의 권위에 대하여 묻는 것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다음날,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뜰에서 그분을 만나 예수께서 무슨 권위로 그렇게 행하셨는지 묻는다.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그저 시골 목수에 불과한 자가 그런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분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답하시면 그들은 그분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을 꿰뚫어 보시고 만약 그들이 당신의 질문에 대답한다면 당신도 그들의 질문에 답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에게서냐, 사람에게서냐”라고 물으신다. 지도자들은 즉시 자신들이 오히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대답하면 예수님은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분노할 것이 두렵다. 그래서 그들은 모른다고 거짓말했고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다. 

 

마가복음 12:1~12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대답을 거부하신 후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으며 그것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막12:1~12]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답: 포도원을 세로 받아 관리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관한 비유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상태를 묘사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셨다. 그들은 비유의 뜻을 알았다.

 

예수님은 포도원과 주인, 그리고 그 밭을 경작하는 농부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불충실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이사야 5장의 포도원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 누구나 그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는 농부들이 밭의 수확물을 주인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학대하고 죽인다. 마침내 주인은 그들이 존중할 것으로 기대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괴하게도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비논리는 충격적이고, 그들에게 내려질 심판은 확정되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엄숙히 경고하고 계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사랑으로 주신 사전 경고이다.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선포된 심판을 피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어떤 이는 회개하고 변화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거절할 것이다. 

 

<교훈> 그분은 종교 지도자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혜롭게 반문하시며 가르침을 주셨다. 이는 사랑으로 주신 사전 경고이기에 듣고 돌이키는 자는 기회가 있었다. 

 

<부가설명>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대로 메시아가 임하기를 바랐다. 그들이 구약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을 것이다. 헤롯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메시아가 어디서 날 것인지 물었을 때 지체없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면서 미가 5:2을 말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따. 그런데 그들은 나사렛에서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선입관이 진리를 깨달을 길을 막은 것이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고 자기의 지식과 상식을 버려야 한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위신을 위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메시아가 오면 자기들과 먼저 관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에 천민과 죄인들과 가까이 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고상하고 높은 메시아라면 어떻게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나겠는가? 그들의 의식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맡은 포도원을 망치고 포도원 주인의 뜻을 자기들의 생각에 맞추려고 했다. 그들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요 더럽혀진 성전이며 신앙이 아니라 종교인이었다. 오늘 우리 재림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고후13:5을 읽으면서 깊이 생각해보면 어떨까?

 

8월 28일(수) 이 땅의 의무와 하늘의 상급

 

마가복음 12:13~27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예수님은 어떤 진리를 가르치시는가?

[막12:13~27]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답: 세상 정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도록 하시고 죽은 자의 부활은 모세의 책 출3:6을 인용하여 증거하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에게나 아니면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할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했다. 이 논쟁의 쟁점은 세금 납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에서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이가 있다면 로마 정부에 반역으로 간주되어 심각한 범죄자로 정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대답으로 자신을 함정에서 건질 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신자의 의무에 관해 중요한 교훈을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로마 권력의 보호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높은 의무와 충돌하지 않는 한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선언하셨다. 그들은 국법을 평화롭게 따르면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충성을 드려야 했다”(시대의 소망, 602). 

그다음 주어진 질문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사두개인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제사장 집단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께 제시한 일곱 형제와 한 여자가 관계된 복잡한 상황은 아마 지어낸 이야기였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남자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과부와 결혼하여 후손을 낳아서 대를 잇고 유산을 상속하게 하였다. 그 결혼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은 법적으로 죽은 사람의 후손이 되었다(신 25:5~10).

사두개인은 부활에 대한 불신을 제기하기 위해 부활할 때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도덕적 난제를 제시한다. 예수님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하면서 두 단계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신다. 먼저 부활 때의 하나님의 권능을 설명하시며 천국에서는 혼인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그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출애굽기 3:1~22을 인용하여 부활 교리를 옹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이 죽은 채로 있을 수 없기에, 현재 죽어 있는 그들이 부활할 것을 암시한다. 

 

<교훈> 논쟁 앞에서 그분은 땅의 정부와 하늘나라에 대해 어떻게 충성할 것을 말하시고,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능력과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들어 가르쳐 주셨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고 있지 않아도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에 무시하면 안 된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29:7)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이 평안해야 거기 사는 그리스도인도 평안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 국가에 대한 의무는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국가와 정치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국가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롬13:1~7). 사두개인들이 믿지 않는 부활에 관한 괴상한 논리를 그들이 믿는 모세 5경에서 대답을 하셨다.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말씀이라고 대답하셨다. 막12:24~27을 자세히 읽어보라. 예수님이 말씀하실 그때 조상 세 사람은 죽어서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산 자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 좋은 예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조상들이 부활하여 산 자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치를 모르는 것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것이다. 

 

8월 29일(목) 가장 큰 계명

  

마가복음 12:28~34을 읽어 보라. 우호적인 서기관은 어떤 심오한 질문을 했으며 예수님은 어떤 중의적인 대답을 하셨는가?

[막12:28~34]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답: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고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

 

마가복음의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핵심인 성전 예배를 둘러싸고 지도자들은 그분과 대립했다. 이런 적대감이 만연한 가운데서 서기관이 예수님의 논쟁을 경청하고 그분의 대답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그의 정직과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한발 물러서서 관망하고 있는 것이 더 쉬웠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기관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종교의 핵심을 파고든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6:4, 5의 유대교의 신앙고백인 셰마를 인용하여 간단명료하게 답하신다.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즉 자신의 전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 레위기 19:18을 인용하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도 들어 보이시면서 서기관에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더러 우리는 과연 사랑을 명령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해한다. 신명기에 기록된 이 명령의 문화적 맥락을 아는 것은 이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당사자 간의 고대 조약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랑'이라는 용어는 조약의 요구 사항에 충실하고 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당사자간의 강력한 우호라는 개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충성을 나타내는 행동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기관은 정직했고 예수님의 간단하고 명확한 대답에 그것이 옳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정직한 서기관의 대답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도 서기관의 정직한 대답을 인정하시고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멀지 않다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기관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은 믿음의 여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교훈>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이는 명령이 아니며 고대 조약에서 유래한 충성이라는 개념에서 더 확대되는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확정적으로 대답하셨다. “신명기에 기록된 이 명령의 문화적 맥락을 아는 것은 이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당사자 간의 고대 조약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랑'이라는 용어는 조약의 요구 사항에 충실하고 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의 이 설명은 가장 큰 계명 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라는 뜻이다. 언약은 지킬 때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5~10계명은 이웃 사랑을 요약한 언약문이다. 언약은 두 사이에 관계를 맺는 형식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관계를 맺은 것을 뜻한다. 언약서는 두 벌을 만든다.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가 각각 한 벌씩 갖는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 돌판이 두 개다. 똑같은 내용이다. 언약궤 안에서 돌판 둘이 들어 있다. 그 돌판에는 앞뒤로 열 조문이 기록되었다. 다 하나님께서 친필로 새긴 것이다(출32:15). 우리가 한 판에는 1~4, 다른 한 판에는 5~10계명이 새겨져 있어서 10조문을 다 읽으려면 접힌 두 돌판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성경과 다른 생각이다. 이것을 우리는 십계명이라고 하지만 원문 성경에는 십계명이라는 말이 없다. 언약의 열 말씀들이라고 되어있다(출34:28, 신4:13, 10:4). 그래서 두 판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것, 또 하나는 백성의 것이다. 그것을 신전에 보관한다. 성소는 하나님의 집이요, 또 이스라엘 백성의 신전이다. 그래서 두 개가 한 궤속에 들어갔고 언약궤라는 이름을 가진다. 언약을 지키니 않으면 사랑을 깨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깨지 않고 하나님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롬5:8,10, 요일3:16). 

 

8월 3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64장 “운명 지어진 백성,” 65장 “다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심,” 66장 “논쟁”을 읽어 보라. 

 

“당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 나무를 저주하신 그리스도의 행위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경고가 된다. 다른 이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인자하고 이타적인 생애를 따라 살지 않는다.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계획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 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만이 귀중하며 인생의 모든 일에서 이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 하나님은 이타적인 봉사를 실천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저희 동료들을 도와주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들은 인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같이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온갖 허세를 부렸으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 그들은 예배의 외형은 지키지만 내적인 회개나 믿음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한다고 공언하지만 순종하지 않는다. 말은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다.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선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헛된 가식이 당신의 눈에 얼마나 가증한가를 보이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긴다고 공언하면서 당신의 영광에 합당한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는 자보다 드러나게 죄를 저지르는 죄인의 죄가 오히려 가볍다고 선언하신다"(시대의 소망, 584).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그 원리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 

*답: 교회가 장사하는 집 도둑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님은 성경이 어떻게 성취되어야 하는지 거듭 언급하신다. 이것은 성경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경의 권위를 경시하려는 모든 시도, 특히 성경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꼭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3.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적절한 경계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답: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

4. 부활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보라. 이 교리는 왜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는가?

*답: 부활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다(고전1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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