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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제자들을 가르치심-2 (질문, 대답, 설명) 08/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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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8-16 00:49 조회2,4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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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제자들을 가르치심-2 

(8월 2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12분)

 

연구 범위: 막 10:, 창 1:27; 창 2:24; 갈 4:1, 2; 롬 6:1~11; 사 11:1~16

 

기억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번 주는 마가복음 10장을 다루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준비하면서 제자들을 특별히 가르치신 부분을 마무리할 것이다. 이 장은 절반 정도는 제자들과의 직접적인 이야기로, 나머지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통해 제자도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와서 이혼 문제를 놓고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다. 부모들은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며 자녀를 예수님께 데려온다. 한 부자는 영생을 구하고, 소경은 보게 해주시기를 원한다.

마가복음 10장은 특히 결혼, 자녀, 재물에 대한 태도, 그분을 따르는 보상과 대가 등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을 통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얻게 할 것이다. 두 번째 맹인의 치유(막 10:46~52)는 이 부분(막 8:22~10:52)의 마지막을 구분하는 경계점이며 예수님을 따를 때 치르는 대가와 보상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 교훈들은 2천 년 전의 제자들이나 오늘날의 제자들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제자도에 따르는 도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학습 목표

깨닫기: 사람은 영광을 구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더 좋은 은혜와 참된 소망을 보여주신다. 

느끼기: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새로운 안목과 더 귀한 영광을 주신다. 

행하기: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참 소망을 간직하며 아이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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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이혼 규정을 주셨을까요?(신 24:1~4)

*답: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 예수님은 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까?(막 10:14)

*답: 아이들도 천국 백성이고 복음 전파의 미래이다. 

4.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까?(막 10:30)

*답: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5. 영광의 자리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쳐 주셨습니까?(막 10:37)

*답: 섬기는 자라 되라고 하셔서 천국 백성의 질서를 가르치셨다. 

6. 마가복음의 맹인의 이야기는 제자도란 어떤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까?(막 8:22, 10:46) 

*답: 점점 밝히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7. 때로 예수께서 권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법으로 명령하고 가르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반드시 시행해야 할 사실의 권위를 부여하시는 것이었다.

 

결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자기 뜻대로 사용한다. 우리는 영광을 바라지만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주님의 예비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가르치신다. 바디매오의 경험은 그분을 따를 때 치르는 대가와 보상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제자도는 새로운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며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든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천국을 바라고 받는 믿음이 필요하다. 

 

8월 18일(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마가복음 10:1~12과 창세기 1:27, 2:24을 읽어 보라.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는 어떤 함정이 숨겨져 있었으며, 이에 대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어떤 교훈을 주셨는가?

[막10:1~12]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답: 바리새인들의 함정은 헤롯이 이혼하고 동생의 처와 재혼한 사실에 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예수님은 창조 원리로 대답하셨다.

 

바리새인들이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옳은지 예수님께 묻는다. 그들은 이혼을 합법적인 것으로 여겼다. 다만 이혼의 사유가 무엇인지가 문제였다. 샴마이(Shammai) 학파는 자녀가 없거나, 경제적 태만, 정서적 방임 또는 결혼생활의 불성실 등의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이혼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힐렐(Hillel) 학파는 훨씬 유연하여 거의 모든 이유의 이혼을 허용했다. 다만 성급하거나 충동적인 결정을 숙고할 시간을 마련한다는 맥락에서 이혼을 승인하는 절차가 더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께 이혼이 허용되는지를 묻는 포괄적 질문은 다소 이상한 것처럼 보인다. 이 질문의 이면에는 지금 예수께서 계시는 요단강 동편 지역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모가 숨어 있다. 안티파스는 아내와 이혼하고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헤롯이 침례 요한을 참수한 것도 그 불법적인 관계에 대한 책망 때문이었다(마 14:1~1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명령했는지 물으심으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신다. 바리새인들이 답변으로 인용한 구절은 신명기 24:1~4로 이혼 후 재혼하는 특별한 경우를 설명한다. 이미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혼하는 일이 있었으며 신명기 24장에 설명된 규정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힐렐 학파에 의해 거의 모든 이유로 이혼을 쉽게 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록된 법이 도리어 손쉽게 배척하는 근거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24장의 규정을 논하는 대신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이상을 다시 말씀하신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창 1:27) 두 개인을 만드셨다 하시고 이 진리를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창세기 2:24과 결합시키신다. 이 연합의 개념은 예수님이 결혼의 연합을 확언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된다. 

 

<교훈>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주신 법이 예수님 때에는 그 반대로 사용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맺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라고 하신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혼하는 것을 언약을 어기는 것으로 규정하셨다. 결혼은 언약이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언약을 상징하는 제도이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2:14,15). 결혼은 그 제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하는 엄숙한 서약이다. 이혼하는 것은 이 서약을 파기하는 것이다. 여자에게 허물이 있다고 느끼면 이혼하자고 했던 것 같다. 그것은 한 몸을 쪼개는 것과 같다. 결혼 제도는 창조주와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 사람 사이의 언약을 상징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남편이나 아내나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한 육체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28~33).

 

8월 19일(월) 예수님과 어린이들

 

마가복음 10:13~16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막10: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답: 아이를 예수께 데리고 오는 것은 막을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아이를 안고 안수하여 축복하셨다. 

 

아이를 갖는 것을 선호하지만 남아선호도가 높고 남성 우월적 문화가 강한 고대세계에서 영 유아기는 매우 취약한 시기이다. 오늘날과 같은 의술이 없었기 때문에 산모의 출산과 신생아, 유아, 어린이를 둘러싼 위험은 더 높았다. 많은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취약한 사람을 위협하는 병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통 약과 부적을 사용했다. 

자녀는 소중한 존재이었지만 아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갈 4:1, 2).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기형이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의 아이는 버려지거나 심지어 강물에 던져지기도 했다.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보다 더 가치있게 여겼고, 때로 여자 아기는 버려져 죽기도 했다. 이런 아기는 더러 '구조'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노예로 팔기 위해 키울 뿐이었다.

제자들은 마가복음 9장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 같이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막 9:33~37).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책망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실 겨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고 예수님은 노하셨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대응하신 일은 손꼽힐 정도지만 그중에서 아이들을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강력하게 반응하신 것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들의 것이며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면서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태도와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품성으로 예수님을 잘못 나타내지 않아야 한다. 그대들의 냉랭하고 거친 태도로 어린아이들을 그분에게서 떠나가게 하지 말라. 

절대 아이들에게 그대가 하늘에 있다면 하늘이 즐거운 장소가 아닐 거라고 느끼게 만들지 말라. 종교란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마치 그들이 어린 시절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에게 그리스도교란 암울한 종교이며 구주께 나갈 때 생애를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지 말라"(치료봉사, 43).

 

<교훈> 아이들을 무시하던 시대에 예수님은 아이들을 용납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신다. 천국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며 우리도 그들처럼 천국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가정의 자녀들은 가정의 행복의 꽃이다. 열매다. 결혼한 부부에게 자녀가 없다면 삭막해진다. 요즘은 결혼 않는 것이 유행인지 한국에는 결혼해도 자녀 출산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회가 된 것 같다. 창조주의 뜻을 배반하는 정서다. 자녀는 여호와 기업이고 장사의 수중에 화살같아서 그것이 화살통에 가득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무시받지 않는다고 했다(시127:3~5).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생명의 축복인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이 축복을 잘 모르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예수님 형상으로 기르도록 성령님 은사를 간구하고 지혜를 구하여 말씀 안에서 양육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자녀들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기르는데 그런 인권법이 방해가 되는 것도 본다. 물론 부모가 성경의 원칙을 따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양육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양육권을 국가 법이 규정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닌 것 같다. 재림 성도 부모는 자녀에게 성경의 진리를 어릴 때부터 알아듣도록 확실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려면 부모가 성경 진리를 올바르게 확실이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진리 말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8월 20일(화) 최고의 투자

  

마가복음 10:17~31을 읽어 보라. 부자이든 가난하든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믿음과 제자도의 대가에 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드러나 있는가?

[막10:17~31]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답: 재물 많은 것이 영생 얻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르치시고 영생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 남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방식은 그의 진실함과 존경심을 보여준다. 그는 달려가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즉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두 번째 판을 가리키시며 대답하신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말하며 자신의 높은 이상주의를 다시 보여준다. 

사복음서 중 마가복음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이상주의는 꽤 훌륭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팔고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심으로 그의 진정성을 물으신다. 그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상심하여 떠난다. 결국 그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김으로 첫 번째 계명을 어겼다. 그의 재물은 그에게 우상이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 같은 큰 짐승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시며 재물의 유혹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설명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27에서 핵심을 말씀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당신은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없으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교훈은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아름다운 구절처럼 보이지만 이내 베드로가 불쑥 자신과 친구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이 무엇이든지 현세와 오는 세상에 너희가 받게 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힘은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활로부터 온다. 이것이 핵심이다. 

 

<교훈>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던지 내세에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이 부자 청년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였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하고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자살하는 것은 자기 기대와 소원대로 삶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택하는 길일 뿐이다. 그가 기대하는 삶이 이어진다면 왜 자살하겠는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자기 욕망이 이루어질 가망이 없어서 자기를 죽여버리는 것이 자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영생의 길이 있는데 믿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부활하셨다. 영생하는 생명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뿐이다. 그것이 참 생명이고 오늘날 사람이 생명이라고 하는 목숨은 살아가는 생명이 아니고 죽어가는 생명이다. 아기는 출생할 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시작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다(히9:27).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정해졌다. 아담 자손은 누구도 이 정해진 죽음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 죽음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셨다. 그것을 믿을 때 우리도 첫째 부활로 예수님과 함께 영생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8월 21일(수)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마가복음 10:32~4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는 예수님의 사명만 아니라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몰랐던 제자들의 무지함이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

[막10:32~45]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답: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있었다. 세상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상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면서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날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윤곽에 대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표현은 충격적이다. 제자들은 그 말을 믿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무시하기도 쉽다. 

야고보와 요한이 개인의 요청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예수께서 즉시 무엇을 구하는지 구체적으로 물었을 때, 그들은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좌우편에 앉고 싶다고 대답한다. 그들의 요청을 지독한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냐고 비판하기 쉽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해왔고, 그들이 바랐던 본질이 전적으로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요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당신의 잔을 마실 수 있는지, 혹은 당신의 침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으신다. 잔은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고난의 잔(막 14:36)일 것이고, 침례는 그분의 죽음과 장사(막 15:33~47)를 말하는 것이며, 마가복음 1장에 기록된 침례와 유사한 사건들이 그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 말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이를 기꺼이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도 분명 당신의 잔을 마시고 당신이 받으시는 침례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야고보는 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요한은 사도 중 가장 오래 살았고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계 1:9).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영광의 처소를 예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제자들은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기 사용된 “분노하다, 분개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아가낙테오(aganakteō)가 마가복음 10:41, 14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어린아이들을 못 오게 막은 것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에 사용된 것과 같은 강력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분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 중 하나를 주신다. 그분은 이방인 통치자들이 개인의 유익을 위해 힘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힘은 항상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고 축복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드리심으로 하늘 왕국의 왕으로서 모범을 보이신다. 그것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교훈>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를 구했지만, 주님은 고난의 잔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은 고난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는 주께서 예비한 영광의 처소에 들어갈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섬기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생명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고전15:22). 또 죽은 자를 장사하는 또 하나의 죽은 자들이다(마8:21.22). 예수님만이 아담의 자손이 아닌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다(고전15:45). 그분은 이 세상의 논리로 말하면 태초의 아담이 죽었기 때문에 그 아담 대신에 오신 생명의 아담이시다. 인류가 첫 아담 안에서 출생하는 것과 같이 하늘 백성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출생해야 한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1:12,13은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계시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처음에는 첫 사람 아담, 하나님과 언약을 어겨서 사망이 된 아담에게서 죽는 목숨을 받아서 출생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오셔서 그 죽음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죽지 않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영생한다(딤후1:9,10). 부활후에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왕노릇 한다(계3:21, 계20:4~6). 제자들은 오순절 후에 이것을 깨달았고 한 번 죽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잔도 마시고 침례도 받았다. 

 

8월 22일(목)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가복음 10장 46~52을 읽어 보라.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어떻게 반응했는가?

[막10:46~52]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답: 

 

이 시점까지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기적과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침묵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분이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길가에서 구걸하던 맹인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이 책의 계시/비밀 주제에 맞추어 군중은 이 시끄러운 거지를 조용히 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침묵을 요구하는 그들 앞에서 바디매오는 단념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8). 그의 외침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의 고백이면서 그분이 자신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예수님 시대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에는 한 왕이 이스라엘 왕좌를 회복할 것과(사 11:, 렘 23:5, 6, 렘 33:15, 겔 34:23, 24, 겔 37:24, 미 5:2~4; 슥 3:8; 슥 6:12) 그 왕이 치유자이며 악귀를 몰아내는 자라는 두 가지 개념이 결부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그 맹인을 부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진 건 대단히 의미 있는 행동이다. 예수님 당시 눈먼 사람들은 과부, 고아와 함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절대빈곤층이고 말 그대로 실제적인 위험 가운데 살고 있었다. 겉옷은 그의 전 재산이요, 중요한 안전장치였다. 그런 겉옷을 던지고 나간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그분께 오는 사람은 언제나 도움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에게도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36, 51). 

그는 망설임 없이 보기를 원한다고 요청하고, 예수님은 즉시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그분의 뒤를 따른다. 이 맹인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8:22~26의 맹인 이야기와 함께 마가복음의 제자훈련 부분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경계점이다. 이 두 이야기는 제자도란 새로운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처음에는 비록 명확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교훈> 믿음으로 외투를 던지고 예수를 따른 바디매오는 제자도란 새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어려움이 있어도 항상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시한 복음 진리를 단번에 깨닫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8장에서 맹인을 두 번 치료하셔서 밝히 보게 하시는 이적으로 이 사실을 암시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10장에까지도 눈이 밝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명예라는 것이 눈에 딱지로 붙어 있었다. 부자 청년처럼 재물에는 집착하지 않은 것 같다. 베드로가 대변하듯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명예와 지위와 권력에는 강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본 것은 하늘 나라의 권력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권력은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오신 세상에는 생명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뿐이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을 가지신 산 사람이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있을 때 누가 섬기겠는가? 당연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섬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셨다. 또 대속의 죽음으로 죽은 사람들을 살려주실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바디메오를 단번에 고쳐주셨다. 그는 밝히 보며 예수님을 따랐다. 이제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눈이 밝아질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할 것이다. 우리는 밝은 눈이 있는가? 

 

8월 2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56장 "아이들을 축복하심," 57장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를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아이들의 해맑은 공감과 편견 없고 꾸밈없는 사랑을 받아들이셨다. 그들의 순진한 입술에서 나오는 감사의 찬양은 그분의 귀에 음악이 되었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과 접촉하심으로 말미암아 억눌렸던 그분의 마음에 힘을 더해 주었다.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의 인자하신 용모와 온화하고 친절하신 태도는 어린이들의 사랑과 신임을 얻었다"(시대의 소망, 511).

"젊은 관원처럼 신임받는 높은 지위에 있고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 너무 큰 희생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행동방침이다. 순종만이 유일한 길이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지이다. 그것이 자주 권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제시되고 명령된 이유는 받아들인다면 사람을 송두리째 타락시키게 될 것들을 잘라버리는 길 외에는 사람을 구원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523).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어떻게 하면 어린이와 청소년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계속해서 연결되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답: 어린이는 교회의 장래다. 성도 가정의 자녀들을 신앙에 굳게 세우라. 이것이 첫째 할 일이다. 다음은 그들이 동무들을 불러들이게 해야 할 것이다.

2.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이 돈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돈에 관심 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돈의 문제는 무엇이며, 부자이든 가난하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돈에 대해서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돈은 주님의 사업에도 유용하다.

3. 만약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답: 각자 대답해보자. 

4. 마가복음 10:43~45의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해 보라. 이렇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하면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진정한 사랑이 있을 때 이런 삶이 일어날 것이다(요일3:14~1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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