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예수님의 사역의 하루(질문, 대답, 설명) 07/13/24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2과 예수님의 사역의 하루(질문, 대답, 설명) 07/13/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7-05 05:35 조회2,623회 댓글0건

본문

제2과 예수님의 사역의 하루

(7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4분)

 

연구 범위: 막 1:16~45, 요 1:29~42, 막 5:41, 눅 6:12, 레 13:.

 

기억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산상수훈을 전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전하신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한복음은 맨 처음 제자 몇을 부르신 일과 예수님이 처음 이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잔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가복음은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신 일과 가버나움에서의 안식일,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일로 시작한다.

마가복음의 서두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함께한 안식일"은 독자들에게 그분이 누구인지 이해하게 한다. 이번 주 교과를 다 보아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제자가 되라는 간단한 부르심, 귀신에게 명하심, 다른 곳을 방문하실 계획,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깨끗하다는 선언을 위해 제사장 앞에 자신을 보이라는 지시 외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치유하는 행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신속한 예수님의 사역의 진행을 설명하기 위해 “곧”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들을 통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다. 

느끼기: 그분은 수많은 사역으로 분주한 중에도 시간을 구별해 기도하심으로 능력을 받으셨다. 

행하기: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사역의 모습을 살펴보고 배우며 기도의 모본을 따른다. 

 

TMI 위로

2.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응답하는 것으로 묘사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막 1:18, 20) 

*답: 우리도 부르심을 받을 때 즉시 응답하라는 기별이다.

3.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는 것은 어떤 일이 따를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까?(막 1:24)

*답: 사탄의 방해가 따른다.

4. 가버나움에서의 예수님의 봉사는 그분의 사역의 어떤 특성을 보여줍니까?(막 1:34)

*답: 메시아 비밀의 특성을 보여준다.

5.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가 배울 점은 어떤 것입니까?(막 1:35)

*답: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셨다. 기도로 하루의 삶을 시작하셨다. 

6. 예수님이 환자를 치료하고도 이를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막 1:44, 45) 

*답: 복음 사업에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조치였다. 

 

결론: 마가복음의 초반부에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다른 이들을 돌보시는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분의 사역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게 한다. 마가는 신속한 전개를 통해 그분의 부르심과 능력, 마귀를 다스리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권세를 보인다. 그분은 많은 사역으로 분주하였지만 결코 기도를 소흘히 하지 않으시고 더 많이 기도하셨다. 그분의 능력은 기도에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7월 7일(일) “나를 따라오라”

 

마가복음 1:16~20절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막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답: 어부들이었고 부르자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의 기록하지 않지만, 이후에 '베드로'라고 불리게 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이 두 어부에게 하신 말씀은 마가복음 1:17에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은 갈릴리 호수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다.

배나 다른 어업 도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두 사람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마가복음 1:19, 20에서 아버지와 하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보다 재정적으로 더 부유한 것처럼 보인다. 누가는 베드로가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동역자라고 알려준다(눅 5:1~11). 그러나 마가복음은 그들의 차이를 표현함으로 예수께서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는 것을 말하기 위해 두 형제 집단을 대조적으로 묘사하였을 수 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예언적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즉 제자가 되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이 왜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막 1:16~20) 예수님을 따랐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 장면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요 1:29~42). 이 형제들은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이었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는 요한의 선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요단강 근처에서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부름을 받아들인 것은 우발적이거나 도피가 아니었다. 그들은 제자가 되는 것을 충분히 생각했었다. 

그러면 마가는 왜 이런 내용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예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르실 때, 방금까지 어부였던 사람들이 기꺼이 응답함으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교훈> 마가복음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예언적으로 기록한다. 이는 부르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따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부가설명> 마태나 마가의 네 제자 부르시고 응답하는 장면은 대단히 극적이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이 그들에게 따르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갈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의 말대로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안드레 요한과 그 형제들에 관한 내용을 읽어야 마태 마가복음의 이 장면을 납득하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가 요한복음 1장이다. 거기는 ‘와 보라’는 단계다. 그리고 공관복음의 이 장면은 둘째 단계다. 곧 ‘나를 따르라’는 단계다. 예수님의 초기 공중봉사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었다. 그 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 나다나엘 6명의 제자를 만나시고 그들을 데리고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 그때는 제자들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단계가 아니라 그들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때때로 선생을 찾아 배우는 단계였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공관복음 기록이 시작된다. 침례요한이 잡힌 다음에 갈릴리고 가셨는데 공관복음은 주로 갈릴리 봉사을 기록하였다. 이때는 제자들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부르심의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예수님과 일년 사제 관계로 지난 후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갔다.

 

7월 8일(월) 잊지 못할 안식일

 

마가복음 1:21~28을 읽어 보라.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잊지 못할 일은 무엇이며,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진리를 배울 수 있는가?

[막1:21~28]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답: 귀신을 쫓아내신 것과 귀신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았다는 것과 예수께서 메시아의 비밀을 명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 침례를 받던 날,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꼈던 충만한 예배 등 각자의 그리스도인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이 중에 어떤 순간은 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인생을 바꾸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1장에 기록된 안식일은 가버나움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그런 날이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그분의 말씀하시는 권능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한 귀신들린 사람이 이렇게 소리쳤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그리고 예수님은 그 귀신을 내쫓으셨다.

여기 마귀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첫째,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안다. 그는 부정하고 불경스러운 마귀의 무리들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자이심을 인정한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불경하고 부정한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경건한 사람을 기대한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선과 악의 세력 사이에 뚜렷한 대비를 볼 수 있다. 대쟁투의 실체가 이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지만 마귀는 그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둘째, 그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잠잠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여기부터 마가복음에서 두드러지는 주제가 등장한다.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침묵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이다. 학자들은 이를 "메시아 비밀"이라고 부른다. 

당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침묵을 요구한 것은 납득할 만하다. 메시아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침묵의 요구와 함께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틀림없는 계시가 주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는 감춰질 수 없으며,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이 복음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오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교훈> 마귀는 그분의 정체와 권능을 알고 있지만 주님은 알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마가복음 전체에 흐르는 비밀이지만 모두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부가설명>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을 가장 확실하게 잘 아는 존재가 귀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마귀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안다고 했다. 루시퍼와 그 부하 마귀들은 원래가 하늘에서 일하던 천사들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들이다. 그러니 귀신 들린 사람의 입으로 마귀의 겁에 질린 소리가 예수님을 누군지 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구주가 아니다. 이미 그들에게 준 은혜 기간이 지난 후 남은 것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루시퍼 일당의 처지가 바로 이런 상태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맹렬한 불을 만나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연구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날도 세상은 예수님을 성인이나 현인 정도로 안다.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죽여야할 죄인으로 알았으니까 그들보다는 예수님을 좋게 평가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가? 첫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구주시며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확신하고 따르고 있는가?

 

7월 9일(화) 이어진 안식일 사역

 

마가복음 1:29~3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족을 어떻게 도우셨으며, 이 이야기에서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막1:29~34]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답: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다. 장모는 병이 낫자마자 곧 봉사했다. 성도들도 구원받자마자 곧 전도자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놀라웠던 회당 예배 후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함께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안식일의 남은 시간을 다정한 식사와 교제로 보내시려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열병은 회복이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심각한 병이었기에 그들은 모두 걱정에 휩싸였다. 제자들이 고하자 그분은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낫게 하셨다. 그러자 곧 그녀는 손님들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고 치유받은 사람이 그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례인가!

마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병자를 만지면서 치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막 1:41, 막 5:41), 예수님이 만지셨다는 기록이 없는 경우도 있다(막 2:1~12, 막 3:1~6, 막 5:7~13).

그날의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거나 소문을 듣고 온 많은 사람이 해가 진 후 예수께 치유를 받기 위해 베드로의 집을 찾아왔다. 그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저녁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기자가 밝히지 않은 이유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이 이미 안식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겼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특징은 마가복음의 독자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마가는 그날 저녁 동네 전체가 그 문 앞에 모였다고 말한다(막 1:33). 예수께서 그 모두를 돕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여러 시간 동안 사람들은 오고갔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 치료자가 내일도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실지에 대해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버나움은 이전에 이와 같은 날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늘은 승리의 소리와 구원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구주께서는 당신이 일깨워 주신 기쁨 가운데서 즐거워하셨다. 예수께서 당신에게 온 자들의 고통을 목격하실 때에 그의 마음에 동정심이 일어났으며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회복시켜 주기를 기뻐하셨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환자를 치료하시기까지는 그의 일을 쉬지 않으셨다. 깊은 밤이 되어 군중이 다 물러가고서야 시몬의 집에 쉼이 찾아왔다. 긴 흥분의 날이 지나가고 예수께서는 잠자리를 찾으셨다. 그러나 동네가 아직도 잠들어 있을 때 구주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시대의 소망, 259).

 

<교훈> 안식일 사역은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가버나움은 이전에 경험한 적 없었던 놀라움과 구원의 기쁨으로 찼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뻐하셨다. 

 

<부가설명> 복음서를 읽으면 어떤 경우는 치료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떤 경우는 동네에 가서 말하라고 하셨다(막5:19). 왜 그랬을까? 면밀히 살핀 것은 아니지만 경우를 분석해보면 유대인 환자들을 고치신 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고 이방인 환자들을 고치신 후에는 나가서 주께서 큰 일 한 것을 전하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구속사업을 이루셔야 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자기 입으로 직접 메시아라는 말을 하게 하려고 여러모로 시도한 것을 볼 수 있다. 나사렛 촌 사람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하면 죽일 죄라고 벼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사업을 진행하고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메시아인 것을 말씀하지 말라고 하셨다. 즉 ‘메이아 비밀’을 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메시아에 관한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을 알리셔야 했다. 그래서 그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원하시는 구주이심을 알도록 전하라고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7월 10일(수) 예수의 사역의 비밀

 

마가복음 1:35~3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은 어떤 중요한 교훈을 주는가? 

[막1:35~39]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답: 기도하시고 전도하셨다. 전도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라고 말씀하셨다. 기도는 예수님 봉사의 동력이었다.

 

예수님은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마가복음 1:35은 기도가 예수님의 행동의 초점임을 강조하고 있다. 문장의 다른 모든 동사(일어나, 나가, 가셨다)는 완료를 의미하는 헬라어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로 사용되었으나 "기도하"다는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 여기서는 특별히 계속 진행 중인 과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고 계셨고, 계속해서 기도하셨다. 본문은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신 시간이 얼마나 이른 시간이었는지를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홀로 기도하셨던 시간이 상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사람, 예수를 만난다(마 14:23, 막 6:46, 요 17:). 이는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의 핵심 비밀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누가복음 6:1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답: 예수님은 철야기도를 하셨다. 예수님은 기도가 생활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정하여 기도한다. 이 관행은 훌륭하고 옳은 일이지만, 거의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정형화된 틀을 바꾸는 방법은 기도 시간을 변경하거나 때때로 평소보다 더 오래 기도하는 것이다.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틀을 반복하며 그것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의 기도처에 동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그곳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보고는 예수님께서 더 많은 치유와 가르침으로 전날의 흥미진진한 경험을 이어 가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시고 다른 지역을 가리키며 더 넓은 봉사의 영역을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

 

<교훈> 예수님이 능력있는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은 기도에 있었다. 그분의 기도는 지속적이지만 기계적이거나 정형화되지 않은 살아있는 기도였다. 

 

<부가설명>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향한 영혼의 호흡인 기도의 정신을 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증언 4권 443). 호흡은 멈출 수 없다. 호흡을 멈추면 생명이 소진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그리스도인은(롬8:9) 기도를 멈출 수 없다. 환자라도 호흡은 계속한다. 호흡이 힘들면 산소통을 차고서도 호흡한다. 그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재림성도들은 그렇게 기도가 생활이요 생활이 기도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진단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무시로 기도하라고 한다(엡6:18). 이런 말씀들은 생활이 기도라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호흡을 의식하고 하는 생물은 없을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호흡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지만 호흡한다. 그러나 심호흡을 하려면 의식해야 하고 호흡하지 않으려면 의식하고 결심해야 한다. 그래서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은 의식하고 한다. 그러나 일상 기도는 생활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심해야 한다. 호흡하지 않는 것을 결심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호흡을 오래 중단할 수 없다. 몸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심하고 숨 안쉬더라고 1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날 재림 성도들의 기도생활이 어떤지 묻고 답을 해야 할 것이다.

 

7월 11일(목)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마가복음 1:40~4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과 그분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셨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막1: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답: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손을 대어 치료해주셨다. 그분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동정과 친절을 베푸셨다.

 

이 구절과 구약성경 전체에 기록된 나병은 오늘날의 한센병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용어는 "무서운 피부병"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여러 가지 피부 질환을 포함한다. 한센병은 기원전 3세기경 고대 근동 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David P. Wright, “Leprosy”[나병], The Anchor Bible Dictionary, 4권, 뉴욕, 277). 이 구절에 언급된 나병 환자는 한센병 환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병이 심각했다는 것 외에는 정확히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접촉을 피해야 했다(레 13:45, 46).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만지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1) 말씀하셨다. 이 행동은 저녁까지(레 13:~15:) 만진 사람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하는 접촉이었으며 다시 정결해지기 위해 목욕을 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병자를 만지신 것이 그의 나병을 깨끗하게 했다고 마가는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진 것이 당신을 부정하게 만들 수 없었다. 

예수님은 모세가 레위기 14장에서 명령한 제사를 드리라는 지시와 함께 그를 제사장에게 보냈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그분은 모세가 가르친 것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막 7:10, 막 10:3, 4, 막 12:26, 29~31).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가르침의 원래 의도를 뒤집는 종교 지도자들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막 7:, 10:, 12:). 

마가복음 1:44은 예수께서 나음을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신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만약 그가 예수님에게 치료받았다고 말한다면, 예수에 대한 편견으로 제사장의 판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깨끗해진 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이 소식을 널리 퍼뜨렸고 예수께서 사역을 위해 마을에 공개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교훈> 예수님은 환자를 만지시며 깨끗함을 주셨지만 제사장의 편견 때문에 치료해 주신 것을 비밀로 부탁했다. 그런 소식은 그분의 공적 사역에 어려움을 더했다. 

 

<부가설명>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너무나 고마웠을 것이다. 격리 생활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곁에만 와도 부정해지는데, 그런 자기 몸에 예수님은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다. 그러니 예수님 부탁은 건성으로 듣고 자기 기분대로 그 기쁜 결과를 퍼뜨린 것이다. 결과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지장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할 때 생기는 일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지금도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자기 기분대로 일을하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기분을 푸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상이 따로 없다. 말씀과 증언을 따라 신앙생활 하지 않을 때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할 우려가 대단히 많다. 주님을 위한 열심이 실은 자기를 위한 열심으로 변하게 된다. 교회에서 이렇게 열심을 내면 교회는 소란해지고 자기 열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오직 말씀과 증거의 말씀대로 신앙생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오직 말씀이 생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고 하라고 한 것은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7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26장 “가버나움에서,” 27장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를 읽어 보라.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권세를 갖고 계시고, 제자들은 이에 응답한다. 선과 악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악마들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도우시며, 그 누구도 가까이 않으려 하는 이들을 기꺼이 만져 주신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당신이 세우려고 오신 나라와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기 위한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은 광인의 두려움 가득한 비명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모두가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사람들의 주의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으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사탄이 사로잡고 있던 자를 회당 안에 뛰어들게 한 이유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귀신을 책망하시고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을 정복하신 그분께서 당신의 원수와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마귀는 그의 희생자를 계속 지배하기 위해 온갖 능력을 다 발휘하였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위엄을 가지시고 말씀하셨고 그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셨다"(시대의 소망, 255). 

주께서 다양한 사역을 하시고 수많은 사람을 대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꾸준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의 기도의 경험 때문이었다.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 일과를 조정하고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그 시간을 사용하라.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기도에 대하여, 또 기도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토의해 보라. 사람들이 기도의 목적과 효과에 대해 어떤 것을 궁금해하는가?

*답: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므로 기도 없이는 구원받은 영혼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2. 우리의 신앙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어떤 때 그런 선택이 지혜로운 일이며 어떻게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답: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말씀을 사용할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 될 수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3. 오늘날 당신의 문화권에서 '나병 환자'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 교회는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 "접촉"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답: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 이름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방법으로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