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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총리가된 요셉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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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6-14 12:10 조회1,7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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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총리(總理)가 된 요셉 

                                       (2022년06월18일 (안) / 19시56분) 


(06월12일(일) <권력(權力)의 자리에 오른 요셉>


(Q)~ (창 41:37~57) 꿈의 계시(啓示)를 통(通)하여 하나님께서 역사(歷史)하실 때 바로의 반응(反應)은 어떤 쪽으로 반응(反應)했으며, 요셉의 성공(成功)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役割)은 어떠하셨으며 요셉은 어떻게 반응(反應)하였으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靈的)인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 하나님께서 꿈의 계시(啓示)를 통하여 역사(歷史)하실 때 바로는 경제적(經濟的)인 부분(部分)에만 관심(關心)을 가짐으로써 실용적(實用的)인 측면(側面)으로써의 인간적(人間的)인 생각만을 위한 목적(目的)의 추구(追求)가 전부(全部)였지만, 요셉은 슬픔과 환란(患亂)과 고난(苦難)을 하나님의 섭리(攝理)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영적(靈的)인 경험(經驗)의 축복(祝福)을 두 아들(므낫세=아픔의 기억(記憶)을 기쁨으로 바꾸셨다는 의미(意味))와 (에브라임=이전(以前)의 고통(苦痛)을 풍성(豊盛)함으로 바꾸셨다는 의미(意味))가 “바로”와 “요셉”의 사건(事件)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靈的)인 의미(意味)이라 하겠다.    


(06월13일(월) <형(兄)들을 만난 요셉>


(Q)~(창 42:1~17) 애굽의 총리(總理)가 된 요셉이 형들을 만났던 특징(特徵)들을 통하여 오래 전 요셉이 꾸었던 예언적(豫言的) 꿈이 어떻게 성취(成就)되었으며 영적의미(靈的意味)는 무엇입니까?


(A)~○. 사람들의 악(惡)함과 불법적(不法的)인 행위(行爲)에도 불구하고 결국(結局)은 하나님의 섭리(攝理)작용(作用)한다는 사실로 꿈을 통한 계시(啓示)의 섭리(攝理)로 꿈의 성취(成就)요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 특징(特徵)들을 강조(强調)하며 특히 예수님을 통한 용서(容恕)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중요(重要)한 이유인 영적의미(靈的意味)가 담겨있다.


(06월14일(화) <요셉과 베냐민>


(Q)~(창 43:16~34) 베냐민을 대동(大同)하고 나타난 형들 앞에 요셉이 동생 베냐민만을 특별(特別)히 환대(歡待)한 이유(理由)와 어떤 효과(效果)를 가져 왔습니까?


(A)~○. 요셉은 형들로부터 받지 못했던 은혜(恩惠)를 베냐민에게 돌려주며 시기(猜忌)와 질투(嫉妬)를 그 어린 막내아우에게도 나타내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고, 형들의 본심(本心)을 좀더 시험(試驗)해보고자 했으며 은혜(恩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구원(救援)의 효과(效果)를 제공(提供)하고자하는 교훈(敎訓)으로 지난날의 요셉을 향한 아버지의 편애(偏愛)로 인해 그들이 배다른 동생(베냐민)과 아버지(야곱)에게 끔찍한 일을 자행(恣行)했던 과거(過去)와 달리 요셉의 편애(偏愛)가 그들이 화(禍)내게 하지 않았다는 영적(靈的)인 교훈(敎訓)을 제공(提供)해준다.


(06월15일(수) <점(占)치는 잔(盞)> 


(Q)~(창 44장) 요셉이 점(占)치는 잔(盞)을 다른 형제들의 자루가 아닌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 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둔 점(占)치는 잔(盞)을 통해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영역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수단(手段)으로서 하나님을 향(向)한 형제들의 죄책감(罪責感)을 일개우기위한 도구(道具)로 형제들의 마음을 시험(試驗)했고 형제들은 베냐민을 향(向)한 연합(聯合)되 마음을 통해 그들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증명(證明)해 주었다.


(06월16일(목)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 


(Q)~(창세기45장)의 이야기 속에서 요셉을 통(通)하여 사랑과 믿음과 그리고 소망(所望)에 관(關)하여 어떤 교훈(敎訓)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리고 (창 45:4~8)에 형제(兄弟)들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告白)한 요셉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A)~○. 나는 요셉이라. 얼마나 드라마틱한 말인가.  요셉은 진심(眞心)으로 형들을 용서(容恕)했을 뿐만 아니라 이 악(惡)한 형들의 행동(行動)까지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도구(道具)로 사용(使用)하셨다. 먼 이국(異國)에 노예(奴隸)로 팔았던 동생(同生)이 이제는 자신들의 구주(救主)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보복(報服)을 위한 심판자(審判者)로서가 아니라 화해(和解)를 위한 용서자(容恕者)로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저들이 회개(悔改)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罪人)을 용서(容恕)하시는 예수의 사랑을 연상(聯想)할 수 있다. (요 3:17). (창 45장, 만나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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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 부록>

 

<좀 더 깊이 살펴 봄>

 

(06월12일(일) <권력(權力)의 자리에 오른 요셉>


(Q)~ (창 41:37~57) 꿈의 계시(啓示)를 통(通)하여 하나님께서 역사(歷史)하실 때 바로의 반응(反應)은 어떤 쪽으로 반응(反應)했으며, 요셉의 성공(成功)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役割)은 어떠하셨으며 요셉은 어떻게 반응(反應)하였으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靈的)인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 (창41:38) <충실(忠實)하게 사는 비결(秘訣)>

요셉은 그의 신앙(信仰)을 모든 곳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그의 요동(搖動)함이 없는 충실(忠實)한 삶의 비결(秘訣)이었다(원고 59, 1897).


○. <하나님과 생명적(生命的) 관계(關係)를 맺고 살면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봄>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적(生命的) 관계(關係)를 갖는다. 그것이 바로 존귀(尊貴)로 통(通)하는 길이다. 그는 하늘의 분위기(雰圍氣)를 지니고 다닌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세상이 돈으로 살 수 없는 보화(寶貨)이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비록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의 도덕적(道德的) 가치(價値)는 이방(異邦)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의 신(神)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알아주었던 요셉과 다니엘의 그것처럼 귀중(貴重)한 것이다. (원고 54, 1894).


○. (창41:38)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感動)한 사람>

요셉의 권유(勸諭)는 너무도 건전(健全)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臣下)들을 기쁘게 했으므로 왕(바로)은 요셉을 식량관리자(食糧管理者)로 임명(任命)할 것을 제안(提案)하고 그에게 비상조치(非常措置) 권한(權限)을 부여(附與)했다. 있음직한 일이지만, 이 바로가 셈족의 힉소스인 이었다면 요셉을 “하나님[’Elohim]의 신(神)이 감동(感動)한 사람”으로 말한 그의 평가(評價)는 쉽게 이해(理解)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가 어떤 의미(意味)로 엘로아(’Eloah)의 복수형태(複數形態)인 엘로힘(’Elohim)을 이해(理解)했는지는 분명(分明)치 않다. 그것은 참 하나님과 이교(異敎)의 신(神)들을 다 같이 가리키기 위하여 성경기자(聖經記者)들에 의해 사용(使用)된다. 요셉이 하나님의 활동(活動)들을 묘사(描寫)하면서 단수(單數) 동사형(動詞型)을 사용(使用)하기는 했지만, 왕(王)이 한 분이신 요셉의 엘로힘을 언급(言及)했는지(16, 25, 28, 32절), 아니면 자신(自身)의 여러 신(神)들을 언급했는지 분명치 않다. 바로는 분명 우상숭배자(偶像崇拜者)요 다신론자(多神論者)였기 때문에 아마도 요셉이 “신(神)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생각(生覺)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바로의 언급(言及)은 문자적(文字的)으로 “그의 안에 신(神)들의 영(靈)이 있는 사람”으로 번역(飜譯)될 수 있다.(창 41:37~57, 재림교주석)


○. <사브낫바네아>

바로가 요셉에게 지어준 이름은 오래 전부터 애굽어로 생각(生覺)되어 왔지만, 그 의미(意味)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後期) 부바스티드 왕조(Bubastid) 시대(BC 9세기)의 한 명각에서 그 이름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살 수 있도록 신(神)이 말한다”라는 뜻을 가진 제드-파-네체르-이우판크(Djed-pa-netjer-iufankh)라는 애굽어로 기록(記錄)되었다. 요셉의 이름은 당시(當時)의 사건(事件)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分明)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명은 물론, 왕과 요셉의 생명까지 보존(保存)하기 위해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몽(解夢) 및 권유(勸諭)를 통하여 말씀하셨음을 의미(意味)한다. 


○. 하나님이 요셉의 생애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變化)를 일으키셨던가! 그의 족쇄(足鎖)는 금(金) 사슬로, 죄수(罪囚)의 누더기는 세마포(細麻布) 옷으로, 그의 감방(監房)은 수레로, 그리고 그의 감옥은 왕궁(王宮)으로 바뀌었다. 보디발의 종이 그의 주인(主人)이 되고, 철커덕거리던 쇠사슬 소리는 “엎드리라!”는 외침에 자리를 내주었다. 겸손(謙遜)은 존귀(尊貴)의 앞잡이고, 노역(勞役)과 고난(苦難)은 권좌(權座)에 이르는 디딤돌이 되었다. 하나님의 충성(忠誠)된 종은 그의 충성과 인내(忍耐)에 대하여 얼마나 훌륭한 보답(報答)을 받았던가! (창 41:45, 재림교주석)


(06월13일(월) <형(兄)들을 만난 요셉>


(Q)~(창 42:1~17) 애굽의 총리(總理)가 된 요셉이 형들을 만났던 특징(特徵)들을 통하여 오래 전 요셉이 꾸었던 예언적(豫言的) 꿈이 어떻게 성취(成就)되었으며 영적의미(靈的意味)는 무엇입니까?


(A)~○. <우리가…범죄(犯罪)하였도다>

  이 애굽의 영주(領主)가 단지(但只) 혐의(嫌疑) 때문에 그들을 벌(罰)하거나 죽이지 않고 공정(公正)하게 판단(判斷)하고자 함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의 양심(良心)이 작용(作用)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요셉을 얼마나 다르게 대했던가!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내버려두어 굶어 죽게 하려 했는데 가나안에서 굶주림으로 고생(苦生)하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애굽의 재상(宰相)이 동정(同情)을 보이다니! 이 같은 생각(生覺)들이 그들의 머리를 스치자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認定)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들 자신의 불행(不幸)이 형제(兄弟)의 고뇌(苦惱)를 생각나게 하였다. 르우벤은 그 소년(少年)에게 죄(罪)를 행(行)치 말라고 형제들을 경고(警告)했으나 그들이 듣지 않아 그 소년 요셉에게 냉정(冷靜)하게 행한 그대로 정당(正當)한 보응(報應)을 그들이 받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요셉의 면전(面前)에서 그가 모든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들을 고발(告發)하였다. (창 42장, 화잇주석)


○. <형들을 시험(試驗)하는 요셉(창세기 42:7-20)>

우리는 요셉이 2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지냈고, 게다가 최근(最近) 7년간은 권좌(權座)에서 지냈는데도 자기 아버지에게 자기 형편(形便)에 관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는 "애굽의 온 땅을 두루 다닌" 적이 많았었는데도(41:45, 46), 애굽의 변경(邊境) 지방(地方)을 지날 때 그의 연로(年老)한 아버지를 방문(訪問)하여 한 번도 가나안을 여행(旅行)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상(異常)한 일이다. 아마도 마차(馬車)를 타고 가면, 요셉으로서는 3, 4일만 여행(旅行)하면 될 수 있는 그러한 일정(日程)이었다. 아마 이 모든 요셉의 처신(處身)에는 하나님의 지시(指示)가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식구(食口)들을 돌볼 수 있는 기회(機會)를 마련했던 것 같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을 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그런 곳에 요셉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8절). 요셉은 "꿈을 기억(記憶)" 하고 있었지만(9절), 형들은 그 꿈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중(心中)에 담고 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처신(處身)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셉은 자기의 꿈을 유념(留念)하고 있었고, 그 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제들에 대해 담 대(膽大)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이전(以前)에 지은 죄를 회개(悔改)하게 되고, 그 꿈은 실현(實現)되리라고 생각(生覺)했다. 이 두 가지 점이 이루어졌다.


○. <그들이(兄) 꾀하였던 그 야만(野蠻)스런 잔학행위(殘虐行爲)를 기억(記憶)하면서 후회(後悔)했다. 

  (1) 양심(良心)의 직능(職能)은 무엇인가! 

양심(良心)은 지나간 옛 언행(言行)을 깨우쳐 주는 역할(役割)을 했다. 비록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일지라도,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여기에서처럼 20년 전(前)의 죄를 반성(反省)케 해준다. 시간의 흐름이 죄책(罪責)을 없애주지 못하듯이, 또한 시간은 양심(良心)의 기록을 말살(抹殺)하지 못 할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야곱에 의해서 자기들의 죄악(罪惡)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는 그런 죄를 짓고도 옆에 앉자마자 떡을 먹고 있던 그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비록 오랜 후(後)이지만, 양심(良心)이 그들을 깨우쳐 준 것이다.

  (2) 고통(苦痛)의 혜택(惠澤)은 무엇인가! 

고통(苦痛)은 종종 양심(良心)을 깨우쳐 주는 복(福)되고 효과적(效果的)인 방편이 되는 수가 있다. 고통이 죄를 기억(記憶)나게 해 준다(욥 13:26).

  (3) 형제에 대한 죄책(罪責)의 벌(罰)은 무엇인가! 

모든 죄악(罪惡)의 벌(罰)은 양심(良心)이 그들 자신을 비난(非難)하는 그 사실(事實)이다. 우리에게 해(害)로운 일을 당했다고 생각될 때에는, 우리가 남에게 행한 악행(惡行)도 기억(記憶)해야 한다(전 7:21, 22). (창 42장, 매튜헨리)


(06월14일(화) <요셉과 베냐민>


(Q)~(창 43:16~34) 베냐민을 대동(大同)하고 나타난 형들 앞에 요셉이 동생 베냐민만을 특별(特別)히 환대(歡待)한 이유(理由)와 어떤 효과(效果)를 가져 왔습니까?


(A)~○. <너희 하나님 … 주신 것이니라>

요셉의 청(廳)지기도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當時) 요셉이 자신의 집을 여호와 신앙(信仰)으로 철저(徹底)히 훈련(訓練)했다는 암시(暗示)가 된다(Murphy). 또한 청지기의 말은 이 사건의 핵심(核心)을 지적(指摘)한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요셉의 명령(命令)에 의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지만(42:25) 이것은 그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도우려는 친절(親切)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行爲)였기 때문이다.


○. <땅에 엎드려 절하니.>

 요셉이 17세 때에 꾼 꿈이 성취(成就)되는 순간(瞬間)이다(37:2, 5-9). 요셉의 꿈에 대하여 반감(反感)을 품고 그 꿈을 무산(霧散)시키려고 획책(劃策)했던 형들의 간계(奸計)(창37:18-20)가 이처럼 그 꿈을 성취(成就)시켜 주는 계기(繼起)가 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1) 인간들의 생각(生覺)을 초월(超越)하여 세상만사(世上萬事)를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主管)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攝理)와(사 55:8, 9). 

(2)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啓示)와 약속(約束)은 비록 더디 성취(成就)되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합 2:3).


○. 그는(요셉)게 아주 풍성(豊盛)한 환대(歡待)를 베풀었고, 또한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식탁(食卓)에서 음식물(飮食物)을 보냈다. 이것은 그 때의 식량부족(食糧不足)에 비추어 그에게 있어서는 보다 큰 관대(寬待)함이었고 그들에게는 보다 큰 은혜(恩惠)였다. 기근(饑饉)의 때에는 끼니를 이어 가는 것으로도 충분(充分)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잔치로 대접(待接) 받았다. 아마도 그들은 여러 달 동안 그렇게 좋은 정찬(正餐)을 가져 보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들이 마시며 즐거워하였더라" 고 씌어 있다. 그들의 근심(謹審)과 공포(恐怖)가 이제는 끝났고 즐거움으로 식사(食事)를 했으니 그들이 지금 그 사람, 즉 그 땅의 주인(主人)과 친밀(親密)하게 지내고 있다고 결론(結論)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작품(作品) "우리의 선물(膳物)" 을 받으신다면 우리는 즐거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서 그것처럼 우리가 지도자(指導者)와 함께 식탁(食卓)에 앉으면 우리는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生覺)하고, 탐식(貪食)하거나 진찬(珍饌)을 탐(貪)하지 말아야 한다(잠 23:1-3). 요셉은 베냐민이 그의 총애(寵愛)를 받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즉 베냐민의 음식물(飮食物)은 다른 사람의 5배(倍)나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렇게 많이 먹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몸에 이로운 정도이상(程度以上) 먹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마시도록 강요(强要)하는 것은 친절(親切)이 아니고 해(害)침이며 불친절(不親切)이다). 또 그에 대한 특별한 관심(關心)으로써 그의 형제들이 전에 자기 자신을 좋은 옷 때문에 시기(猜忌)했던 것 같이 더 많은 음식 때문에 베냐민을 시기(猜忌)하는지 어떤지를 시험(試驗)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境遇)에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因)해 슬퍼하지 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滿足)하는 것이 우리의 규율(規律)이 되어야 한다.” (창 43장, 매튜헨리)


(06월15일(수) <점(占)치는 잔(盞)> 


(Q)~(창 44장) 요셉이 점(占)치는 잔(盞)을 다른 형제들의 자루가 아닌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 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점(占)치는 데에 쓰는 것>

‘점(占)을 치다’(divine)란 말의 ‘나하쉬’는 본래 뱀이 기어 다닐 때 내는 소리를 가리키나 여기서 ‘속삭이다’, ‘주문(呪文)을 외우다’란 의미(意味)가 파생(派生)되었다. 이는 점(占)의 사탄적 속성(屬性)을 암시(暗示)해 주는데 특히 애굽에서는 술잔에 물을 채우고 악령(惡靈)에게 기도(祈禱)한 후(後) 물을 관찰(觀察)하여 점(占)을 쳤다(Kalisch). 이러한 점술(占術)은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完全)히 배치(背馳)되는 것이므로 훗날 모세 율법(律法)은 이를 엄격(嚴格)히 금(禁)하였다(레 19:26, 신 18:9-14). 한편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敬虔)한 사람 요셉이 실제(實際)로 애굽의 미신적(迷信的) 행위(行爲)인 점술(占術)을 행(行)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는

 (1) 자신이 애굽인인 양 신분(身分)을 철저(徹底)히 은폐(隱蔽)시키기 위한 목적(目的)과 

 (2) 애굽인들은 점(占)치는 술잔을 아주 중요(重要)하게 여긴다는 점을 염두(念頭)에 두고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재판관(裁判官)의 풍채(風采)로써 베냐민만 억류(抑留)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떠나도록 언도(言渡)한다. 죄 없는 사람들이 왜 벌(罰)을 받을 것인가? 


○. 아마도 요셉은 여기서 베냐민의 성품(性稟)을 시험(試驗)하려는 의도(意圖)였을 것이니 그가 이와 같은 고통(苦痛)을 현명(賢明)하고 착한 사람의 조용하고 침착(沈着)한 마음으로 인내(忍耐)할 수 있는지 어떤지, 한 마디로 그가 혈육(血肉)으로 뿐 아니라 영(靈)으로도 진짜 그의 친동생(親同生)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試驗)하려 했다. 왜냐하면 요셉 자신도 억울(抑鬱)한 비난(非難)을 받았고, 계속(繼續)하여 어려운 일들을 겪었으나 자기 자신의 영혼(靈魂)을 견지(見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베냐민과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그의 형제들의 애정(愛情)을 시험(試驗)해 보려고 했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必要)도 없다. 만약 그들이 베냐민을 억류(抑留)된 채 남겨 두고 만족(滿足)하여 가 버렸다면 물론 요셉은 곧 그를 풀어서 위로(慰勞)해 주고 야곱에게 전갈(傳喝)을 보내어 그의 나머지 형제들을 그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에 고생(苦生)하도록 남겨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염려(念慮)했던 것보다 더 베냐민을 사랑하고 있음이 증명(證明)됐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과거(過去)에 어떠했다는 것으로 그들이 지금 어떠하리라고 판단(判斷)하거나 그들이 행(行)한 바를 봐서 미래(未來)에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이라고 판단(判斷)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나이와 경험(經驗)이 사람들을 보다 현명(賢明)하고 보다 선(善)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요셉을 팔았던 그들이 이제는 베냐민을 포기(抛棄)하려 하지 않았다. 가장 악(惡)한 자(者)들도 시간(時間)이 되면 치료(治療)될 수 있다.  (창 44장, 매튜헨리)


○. 유다는 베냐민에게 언도(言渡)된 죄목(罪目)에 대해 얼마나 현명(賢明)하게 입을 다물었는가! 유다가 그것을 승인(承認)하는 어떤 말을 했다면 그는 베냐민의 정직(正直)함에 대해 손상(損傷)을 입혔을 것이니, 그것을 의심(疑心)하는 것은 너무 어니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또한 그가 그것을 부정(否定)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요셉의 정의(定義)와 그가 내린 언도(言渡)에 대해 손상(損傷)을 입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적(全的)으로 요셉의 동정(同情)에만 호소(呼訴)한다. 이것을 욥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겸손(謙遜)히 하는 것과 비교(比較)해 보라(욥 9:15). "내가 의(義)로울지라도 감(敢)히 대답(對答)하지 못하리 이다." 그는 논박(論駁)하지 않고 다만 동정(同情)을 구(求)할 뿐이다. "나를 심판(審判)하실 그 분에게 간구(懇求)하였을 뿐이다."  (창 44장, 매튜헨리)


○. 유다는 요셉의 판결(判決)의 공평(公平)함을 존중(尊重)하고 이 탄원(歎願)에 있어서의 자기의 진지함을 보여 주기 위하여 자기가 베냐민 대신 노예(奴隸)가 되겠다고 자청(自請)한다.(33절). 그러면 법(法)도 지켜질 것이다. 요셉도 손해(損害)는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가 베냐민보다 유능(有能)한 체구(體軀)를 가진 사람이며 일에 더 적합(適合)할 것이라고 상상(想像)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야곱도 베냐민보다 그를 잃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자, 그는 그의 아버지의 베냐민에 대한 총애(寵愛)를 슬퍼하기는 고사(固辭)하고 그것을 만족(滿足)시켜 드리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노예(奴隸)가 되기를 희망(希望)하고 있었다. 요셉이 설사 유다가 생각한 대로 그 가족에 대해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평범(平凡)한 인간성(人間性)으로서도 이와 같은 힘 있는 논증(論證)에 감동(感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이보다 더 감동적(感動的)이며 부드럽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 같은 마음까지도 녹이기에 충분(充分)했다. 그러나 유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혈육(血肉)이었으며, 또 지금 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유다보다 더 큰 애착(愛着)을 느낀 요셉에게 있어서 어떤 것도 보다 기쁘고 행복하게 들릴 수는 없었다. 야곱도 베냐민도 요셉과의 중개자(仲介者)를 필요(必要)로 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사람 자신이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 유다의 간절(懇切)한 호소(呼訴) (창세기 44:18-34)

여기에 유다가 베냐민에 대한 판결(判決)의 취소(取消)를 획득(獲得)하기 위해 행한 가장 훌륭하고 정열적(情熱的)인 연설(演說)이 있다. 어쩌면 유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베냐민에게 더 좋은 친구였는지 모르며, 그를 데려가는 데에 더 열심(熱心)이었는지 모른다. 또는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안전(安全)한 귀가(歸家)에 대해 약속(約束)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義務)가 더 크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그가 다른 사람보다 재치(才致) 있고 용기(勇氣) 있으며 말을 잘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그들의 대변인(代辯人)으로 선출(選出)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연설(演說)은 여기 씌여진 것과 같이 아주 자연(自然)스럽고 현재(現在)의 감정(感情)을 잘 표현(表現)했기 때문에 이것을 오랜 후(後)에 기록(記錄)한 모세가 그에게 특별(特別)히 초점(焦點)을 맞춰 기록(記錄)해서 인류의 대변인(代辯人)이 되게 했다고 생각(生覺)하지 않을 수 없다.


(06월16일(목)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 


(Q)~(창세기45장)의 이야기 속에서 요셉을 통(通)하여 사랑과 믿음과 그리고 소망(所望)에 관(關)하여 어떤 교훈(敎訓)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리고 (창 45:4~8)에 형제(兄弟)들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告白)한 요셉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A)~○. <요셉의 생애(生涯)는 그리스도의 생애(生涯)의 대표(代表)임>

요셉의 생애(生涯)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표한다. 요셉의 형제들을 움직여 그를 노예(奴隸)로 팔게 한 것은 시기심(猜忌心)이었다. 저들은 요셉이 저들보다 더 크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요셉이 애굽으로 옮겨졌을 때에 저들은 그의 꿈이 실현(實現)될 가능성(可能性)을 모두 제거(除去)하였으므로 이제 더 이상 그의 꿈 때문에 번민(煩悶)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행한 일을 가지시고 저희가 방해(妨害)하고자 계획(計劃)한 바로 그 일을 실현(實現)시키셨다. 그와 같이 유대 제사장(祭司長)들과 장로(長老)들은 그리스도를 질투(嫉妬)하고 그분께서 저들에게서 백성의 관심(關心)을 끌어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저들은 그분께서 왕이 되시는 것을 방해(妨害)하고자 그분을 죽였으나 이로 인(因)하여 저들은 그분을 왕이 되시게 하는 결과(結果)를 가져왔다.


○. 요셉은 애굽의 노예(奴隸)가 됨으로 인(因)하여 그의 아버지의 가족(家族)을 구원(救援)한 구주(救主)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형들의 죄(罪)가 감소(減少)된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그분의 원수(怨讐)들로 인한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심은 그분을 인류(人類)의 구속자(救贖者)요, 타락(墮落)한 인류의 구주(救主)요, 온 세상의 통치자(統治者)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분을 살해(殺害)한 자들의 죄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손길이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인류의 행복(幸福)을 위하여 그 사건(事件)을 지배(支配)하지 않으신 경우(境遇)와 꼭 같이 극악(極惡)한 것이었다.


○. 요셉이 그의 친형(親兄)들에 의하여 이방인(異邦人)에게 팔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예수님의 제자(弟子)들 중 한 사람에 의하여 가장 큰 원수(怨讐)들에게 팔리셨다. 요셉은 그의 결백(潔白) 때문에 거짓 고소(告訴)당하고 투옥(投獄)되었다. 그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예수님의 의(義)로우신 극기(克己)의 생애(生涯)가 죄에 대하여 견책(譴責)이 되었기 때문에 멸시(蔑視)와 거절(拒絶)을 당하셨다. 요셉이 불공평(不公平)과 압박(壓迫) 아래서도 인내(忍耐)하고 온유(溫柔)하게 행하였으며 인도(人道)를 어긴 그의 형들을 기꺼이 용서(容恕)해 주고 고상(高尙)한 자비심(慈悲心)을 베푼 것은 구주(救主)께서 악인(惡人)들의 악행(惡行)과 능욕(凌辱)을 불평(不平)없이 참으시고 예수님을 살해(殺害)한 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와 저희 죄를 고백(告白)하고 용서(容恕)를 구(求)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容恕)해 주신 것을 예표(豫表)한다. (부조 239,240).


○. <형제(兄弟)들의 마음이 쉼을 얻었음>

그들은 겸손(謙遜)하게 요셉에게 범(犯)한 그들의 잘못을 고백(告白)하고 그의 용서(容恕)를 구(求)했다. 그들은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요셉을 그토록 잔인(殘忍)하게 팔아버리고 난 이후(以後)로 마음에는 늘 큰 고통(苦痛)과 자책(自責)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피를 흘린 죄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고통(苦痛) 당하는 그들의 마음이 쉼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3영적 167).” (창 45장, 화잇주석)


○. <형(兄)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사건(事件)의 이 새로운 전환(轉換)은 너무도 컸고, 그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요셉의 위대(偉大)함뿐만 아니라 이전(以前)에 그에게 저지른 그들의 범죄(犯罪)를 회상(回想)하고는 두려워졌다. 지금까지는 그들의 범죄가 그들 자신의 작은 집단(集團) 외(外)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행위(行爲)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報應)만을 생각해 왔지 인간의 형벌(刑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이 그처럼 크게 잘못을 범(犯)한 당사자(當事者) 앞에 섰다. 이제 도단에서 저지른 행동(行動)에 대한 보응(報應)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요셉 앞에서 공포(恐怖)로 움츠러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창 45장, 재림교주석)


○. “요셉은 만족(滿足)했다. 그는 형들의 진심(眞心)을 확인(確認)했으며, 형들로부터 자신들의 죄에 대한 참된 회개(悔改)의 열매를 보았다”(엘렌 G. 화잇, Spiritual Gifts, book 3, 1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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