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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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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5-23 07:56 조회1,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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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과-형(兄)의 축복(祝福)을 가로챈 야곱>

                                             (2022년05월28일 (안) 일몰:19시45분)


(일) 05월22일  <야곱과 에서>


(Q)~(창세기25:21~34) 야곱과 에서의 성격(性格)을 비교(比較)해 보십시오, 무엇이 이 가정(家庭)에 불행(不幸)을 초래(招來) 했습니까?


(A)~ ○.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인 야곱과 에서는 성격(性格)과 생활(生活)에서 현격(懸隔)한 차이(差異)를 드러내었다. 

○. <(에서)>

에서는 자아만족(自我滿足)을 사랑하며 그의 모든 관심(關心)을 현세(現世)에 집중(集中)시키며 자라났다. 제어(制御)받기를 싫어하며, 사냥하는 거친 자유(自由)를 즐겨 일찍부터 사냥꾼의 생활을 선택(選擇)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조용하고 평화(平和)를 사랑하는 목자(牧者)인 아버지는 이 맏아들의 대담성(大膽性)과 활기(活氣)에 끌리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산야(山野)를 넘고, 아버지를 위(爲)하여 사냥한 고기와 그의 모험적 생활(冒險的生活)의 흥미진진(興味津津)한 보고(報告)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 <(야곱)>

반면에 사려(思慮)깊고 부지런하고 집안일을 돌보며 항상(恒常) 현재(現在)보다 미래(未來)를 더 많이 생각하는 야곱은 양(羊)떼를 돌보고 밭가는 일에 종사(從事)하며 집안에 있는 것을 만족(滿足)스럽게 여겼다. 그의 꾸준한 참을성과 검약(儉約)과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그의 어머니에게 높이 평가(評價)되었다. 그의 애정(愛情)은 깊고 강(强)하였으며, 그의 온순(溫順)하고 끈질긴 친절(親切)은 에서의 소란(騷亂)스럽고 우발적(偶發的)인 친절(親切)보다 어머니를 훨씬 더 행복(幸福)스럽게 하였다. 리브가에게는 에서보다 야곱이 더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 야곱이 더 도덕적(道德的)이고, 에서가 도덕적이지 않아서 장자권(長子權)이 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윤리적(倫理的)으로 보자면 야곱이 더 적합(適合)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이 둘의 차이를 윤리적인 차원(次元)이 아니라, 무엇을 소망(所望)하느냐로 보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중요(重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윤리(倫理)보다 하나님 주신 소망(所望)이 우선(于先)한다는 뜻입니다. 

 

○. 야곱과 리브가가 그들의 목적은 성취(成就)하였으나 그들이 얻은 것은 다만 기만(欺瞞)으로 말미암은 고민(苦悶)과 슬픔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장자(長子)의 명분(名分)을 받으리라고 선언(宣言)하셨으니 그들이 만일 믿음으로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실 때까지 기다렸더라면 그분의 말씀은 그분께서 정(定)하신 때에 성취(成就)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라고 공언(公言)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 문제를 그분께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리브가는 자신이 아들에게 한 잘못된 권고(勸告)를 통절(痛切)히 회개(悔改)하였다. 


○. 이것이 야곱을 리브가에게서 분리(分離)시킨 원인(原因)이 되어 그 여자는 아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장자(長子)의 명분(名分)을 받은 그 시간부터 야곱은 자기 정죄(定罪)에 억눌리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의 형에게, 자신의 영혼(靈魂)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그는 일생 동안 후회(後悔)할 일을 저질렀다. 오랜 세월 후에 자신의 아들들의 악(惡)한 행동(行動)이 그의 마음을 억압(抑壓)하였을 때 이 광경(光景)은 그의 앞에 역력히 떠올랐다. 


○. 에서는 축복(祝福)이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가볍게 여겼으나 그에게서 영원(永遠)히 떠나간 지금에는 그것을 가지고자 하였다.


○. 에서도 회개(悔改)함으로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구(求)할 특권(特權)에서 제외(除外)된 것은 아니었으나, 장자(長子)의 명분(名分)을 회복(回復)할 방법(方法)을 발견(發見)할 수는 없었다. 그의 슬픔은 죄를 인정(認定)함으로 솟아난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기를 갈망(渴望)하지도 않았다. 그는 죄의 결과 때문에 슬퍼하였지, 죄 그 자체(自體)를 슬퍼하지는 않았다. 


○. 하나님의 축복과 요구(要求)에 무관심(無關心)하였으므로 에서는 성경에서 “망령(妄靈)된 자(者)”라고 불린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신 구원(救援)을 경(輕)히 여기고 없어질 세상의 사물(事物)을 위하여 하늘에 들어갈 그들의 상속권(相續權)을 희생(犧牲)하는 자들을 대표(代表)한다. 많은 무리들이 장래(將來)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나 관심(關心)도 없이 현세(現世)를 위하여 살고 있다. 에서와 같이 그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라고 부르짖는다. 그들은 기호(嗜好)의 지배(支配)를 받으며 극기(克己)를 실천(實踐)하기는 고사(固辭)하고 가장 귀중(貴重)한 사려마저 내버린다. 


○.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 중에도 건강(健康)에 해(害)롭고 영혼(靈魂)의 감수성(感受性)을 마비(痲痹)시키는 기호에 기울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상의 모든 더러움을 스스로 정결(淨潔)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함으로 거룩함을 이루라는 의무(義務)가 제시(提示)될 때, 그들은 그것을 언짢게 여긴다. 그들은 하늘을 얻기 위하여서는 이 유해(有害)한 만족(滿足)을 더 유지(維持)할 수 없음을 알고, 영생(永生)으로 가는 길은 매우 좁으므로 저들이 그리로 이상 더 행할 수 없다는 결론(結論)을 내린다. 


○. 많은 군중(群衆)들은 육욕적 방종(肉慾的放縱) 때문에 그들의 장자(長子)의 명분(名分)을 팔고 있다. 동시(同時)에 품성(稟性)을 나약(懦弱)하게 하고 저하(低下)시키는 방종(放縱), 즉 다만 일시적(一時的)인 쾌락(快樂)을 위하여 건강을 희생(犧牲)시키고 지적능력(知的能力)을 감소(減少)시키며 하늘을 잃어버린다. 에서가 자신의 경솔(輕率)한 거래(去來)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때는 그의 손실(損失)을 회복(回復)하기에 너무 늦었던 것처럼, 이기적 만족(利己的滿足) 때문에 하늘의 상속권(相續權)을 팔아버리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P.P, 176-182)


◎. 야곱과 에서는 성격(性格)도 달랐고 바라보는 관점(觀點)도 달랐다 결국(結局)에 야곱은 수단방법(手段方法)을 세상적인 측면(側面)으로 결행(決行)하는 결과로 인(因)하여 큰 불행(不幸)을 초래(招來)하게 되었는바 우리들은 이를 교훈(敎訓)으로 삼아 매사(每事)에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을 따라야 한다.


(월) 05월23일  <야곱의 사닥다리>


(Q)~(창세기 28:10~22, 11:1~9)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하늘에 닿기 위해 시도(試圖)되었던 바벨탑을 비교(比較)해 볼 때 어떤 차이점(差異點)을 발견(發見)하게 됩니까?


(A)~◎. <야곱은 고무적(鼓舞的)인 환상(幻像)을 보았다(창28:12절)> 

그는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가 닿은 사다리와 천사(天使)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광경(光景)을 보았고, 그 사다리 끝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신 것을 보았다. 이 같은 사실(事實)은 언제 어떤 경우(境遇)에든지 모든 선(善)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慰勞)를 주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야곱이 지치고, 외롭고, 슬픈 채로 그곳에 누워 있을 때, >

그의(야곱) 마음은 기도(祈禱)로 하나님께 향(向)하였다(P.P 183). 이것이 그의 꿈의 정신적 배경(精神的背景)이다. 이틀간의 기나긴 날이 지난 후(後)에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동안 그는 자신의 행동방식(行動方式)을 살펴보고 자신의 속절없음을 인식(認識)할 기회(機會)를 가졌다. 하나님의 섭리(攝理) 속에서 지체(遲滯)는 때때로 영혼(靈魂)을 순결(純潔)하게 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은혜(恩惠)에 내어 맡기도록 하는 수단(手段)이 된다(참조 소망, 200, 380~382). 사닥다리는 하늘의 하나님과 땅 위의 그의 백성(百姓)들 사이의 실제적(實際的)이고 방해(妨害)받지 않는 교제(交際)의 가시적 상징(可視的象徵)이었다. 천사(天使)들은 인간의 필요(必要)를 하나님 앞에 제시(提示)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신적(神的) 도움과 보호(保護)의 약속(約束)을 갖고 내려온다. 사닥다리는 땅 위에 놓여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곳은 야곱이 홀로, 곤고(困苦)한 중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채로 누워있던 곳이다. 하늘 위에는 여호와가 서있었다. (창 28:10~22, 재림교주석)


○.<십분(十分)의 일(一)>

아브라함과 야곱은 둘 다 십일조(十一條)를 바치는 것에 대해 이해(理解)하고 실행(實行)하였다(참조 창14:20). 야곱의 말은 이것이 그의 과거(過去)의 습관(習慣)이 아니었음을 함축(含蓄)한다. 그는 자기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움켜쥐는 정신(精神) 때문에 자기 것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 부주의(不注意)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지라도 그는 앞으로는 십일조를 충실(忠實)히 드리기로 했는데, 하늘의 은총(恩寵)을 얻기 위(爲)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容恕)와 총애(寵愛)를 겸비(謙卑)하고 감사(感謝)하게 인식(認識)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약속(約束)을 “내가 반드시 … 드리겠나이다”, 문자적(文字的)으로는 “드리고 내가 드리겠나이다”라고 강조형(强調形)으로 말하였다. 확언(確言)하자면 그는 그것을 계속(繼續)해서 드릴 것이었다. 그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忠誠)과 헌신(獻身)의 미래생활(未來生活)로 판단(判斷)한다면, 그가 약속(約束)을 충실(忠實)히 지켰음을 불신(不信)할 이유가 전혀 없다. 후년(後年)에 하나님이 야곱을 풍성(豊盛)하게 축복한 것은 이 점에서의 신실성(信實性)에 대한 증거(證據)이다(참조 말 3:8~11). (창 28:10~22, 재림교주석)


○.<예수는 하늘로 가는 사다리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이 사다리를 오르게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땅의 보물(寶物)을 우리 몸에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이 사다리를 오를 수가 없다. 하나님의 것보다 우리의 편의(便宜)나 개인적(個人的)인 이익(利益)을 앞세울 때 우리는 자신에게 해(害)를 끼치는 것이 된다. 이 땅의 재산(財産)이나 환경(環境)에는 구원(救援)이 없다. 사람이 땅에서 부자(富者)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거나 선(善)을 소유(所有)한 것으로 인정(認定)받지는 못한다. 만약(萬若) 우리들이 이 사다리를 오르는 참된 경험(經驗)을 얻으려면 모든 방해(妨害)거리를 뒤에 내버려야할 것이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은 사다리의 매 계단(階段)마다 발을 확실(確實)히 딛고 있어야 한다. (사인즈 1899. 2. 1). (창 28:10~22, EG주석)


○.<그리스도께서 심연(深淵)에 다리를 놓으심>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長子權)을 얻으리라고 생각(生覺)했지만 실망(失望)으로 끝났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곧 하나님과 그의 연합(聯合), 그의 집, 게다가 이제는 절망(絶望)에 찬 도망자(逃亡者)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그분은 희망(希望) 잃은 야곱의 상태(常態)를 보셨다. 그의 절망(絶望)을 보셨다. 그분이 야곱의 이 같은 상태(常態)를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인 그 신비(神秘)한 사다리를 보여 주셨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연합(聯合)을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보시고 죄(罪)가 만들어 놓은 심연(深淵) 위에다 그리스도께서 사다리를 놓게 하신다.


○.<야곱의 서원(誓願)> (창 28:10~22, EG주석)

 이 곳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약정(約定)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주께서 이미 그에게 번영(繁榮)을 약속(約束)하셨으며 이 맹세(盟勢)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慈悲)의 보증(保證)에 대한 감사(感謝)로 그의 마음에서 넘쳐 나온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요구(要求)하신 것들을 시인(是認)해야함을 느꼈으며 또 자기에게 부여(附與)된 하나님의 은총(恩寵)의 특별한 표에 보답(報答)해야함을 느꼈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모든 축복(祝福)은 우리에게 모든 긍휼(矜恤)을 베푸신 분에게 보답(報答)하기를 요구(要求)한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지난 생애(生涯)를 회고(回顧)하면서 시련(試鍊) 중에 붙드시고, 모든 것이 어둡고 험악(險惡)하게 보일 때에 그의 앞에 길을 열어 주시고, 힘이 쇠(衰)할 때에 그를 소생(蘇生)시킨 하나님의 귀중(貴重)한 구원(救援)을 생각하고 감사(感謝)해야 한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 천사(天使)들이 돌보신 증거(證據)로 인식(認識)하여야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축복들을 고려(考慮)하여 종종 그는 겸허(謙虛)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恩惠)를 무엇으로 보답(報答)할꼬”(시 116:12)라고 여쭈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祝福)이 큰만큼 우리의 의무(義務)도 그에 따라 증가(增加)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측량(測量)할 수 없는 사랑과 헤아릴 수 없는 값진 선물(膳物)에 보답(報答)함에 있어서 수학적(數學的) 법칙(法則)으로 시간과 돈과 사랑을 측정(測定)하려는 노력(努力)은 얼마나 헛된가! 그리스도께 드리는 십일조(十一條)! 오! 보잘것없는 금액(金額)이요 그렇게 값진 것에 대하여 얼마나 빈약(貧弱)하고 부끄러운 보상(報償)이 아닌가! 갈바리의 십자가(十字架)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남김없는 봉헌(奉獻)을 요구(要求)하신다. 우리의 모든 소유(所有)와 우리의 모든 존재(存在)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P.P 187,188).


(창세기28:10~22)의 “서 있는” 사닥다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늘로 가는 사다리로 예수님 말씀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상징한다. 즉 예수님의 통하여 하늘에 가는 것을 말씀하지만, (창세기11:01~09)의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는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寶座)를 높이리라’(이사야14:13)고 한 사탄의 자만(自慢)과 도 같은 자만심(自慢心)으로 인간의 방법(方法)과 노력(努力)으로 사단의 술수(術數)이며 마음이다.


(화) 05월24일  <속이는 자, 속임을 당하다>


(Q)~(창세기 29:1~30)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삼촌에게(라반의) 속임수를 왜 허락(許諾)하셨으며 속임을 당한 야곱은 어떤 교훈(敎訓)을 배웠을까요?


(A)~○. <(창세기29:25)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나이까>

  이 질문(質問)은 ‘외삼촌(外三寸) 라반이 조카인 나의 순결(純潔)한 사랑에 모욕(侮辱)을 줄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을 묵살(黙殺)할 수 있겠느냐’는 야곱의 억울(抑鬱)한 심사(心思)를 대변(代辨)한다. 그러나 레아가 야곱의 아내가 될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특별(特別)한 간섭(干涉)이다. 즉 레아를 통해 메시아의 족보(族譜)를 형성(形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작용(作用)한 것이다(35절, 마 1:2). 이처럼 구속사(救贖史)의 전개(展開)는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작정(作定)에 의해 이루어진다(잠 16:33).


○. <(창세기29:25) 어찜이니이까.>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기만(欺瞞)의 명수(名手) 야곱은 자기가 기만(欺瞞)의 희생자(犧牲者)가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냉혹(冷酷)한 공의(公義)는 그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함에 대해 갑절로 갚아 주었다. 라반은 자기방어(自己防禦)로 지방(地方)의 사회적(社會的)인 관습(慣習)에 있을 법(法)한 요구(要求)에 호소(呼訴)하였다. 다른 여러 고대국가(古代國家)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實際)로 이것이 하란에서도 관례(慣例)였다면, 그는 야곱이 라헬을 위해 일하기로 제안(提案)하였을 때, 이에 관해 그에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 드린 서원(誓願)과 라헬에 대한 갈망(渴望) 때문에, 그 결혼(結婚)을 거부(拒否)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라반과 함께 머물기로 하였다.


○. 야곱의 중혼(重婚)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결국 그것이 야곱의 후손(後孫)을 증가(增加)시켜 그의 약속(約束)을 성취(成就)시키는 수단(手段)이 되었다는 구실(口實)로써 정당화(正當化)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但只) 인간의 과오(過誤)를 반전(反轉)시켰으며, 이러한 것들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挫折)시킬 수는 없었다(참조 시편 76:10). 라반의 기만(欺瞞)과 야곱의 애정(愛情)으로 야기(惹起)된 중혼(重婚)은 두 사람의 가정(家庭)에 마찰(摩擦)과 후회(後悔)를 안겨주었다. 이 고난(苦難)의 학교에서 야곱은 “궤사(詭詐)한 자의 길은 험(險)하니라”(잠 13:15)는 교훈(敎訓)을 배웠다. 이 결혼에 수반(隨伴)된 질투(嫉妬)와 불행(不幸)은 한 남자가 동시(同時)에 두 자매(姉妹)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禁止)한 모세의 특정적(特定的)인 금령(禁令)에 대한 하나의 해설(解說)이다(레 18:18).


○. 라반의 무자비(無慈悲)한 사기행각(詐欺行脚)의 동조자(同調者)인 레아는 남편(男便)의 애정(愛情)을 얻는 일에 실패(失敗)하였다. 그 결과 그 가정(家庭)은 시기(時期)와 질투(嫉妬)와 다툼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과 행복한 가정을 꾸릴 날을 위해 일하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다툼을 벌이는 두 아내로 억눌린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창세기 30:1, 2, 8, 15). 그의 아버지 이삭의 결혼 초년생활(初年生活)은 얼마나 달랐던가. 그 가정에는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어두운 그늘이나 그 쓰라린 결과들이 머물지 않았다(창24:67). 야곱의 쓰라린 경험(經驗)은, 이삭이 메소보다미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은 아브라함의 지혜(智慧)를 보여 준다(24:6).” (창 29:24~30, 재림교주석)


○. 라반의 속임수에 가장 큰 희생(犧牲)을 치른 사람은 사실 레아였다. 레아에게도 책임(責任)은 있다. 야곱과의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자신이 라헬이 아님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도 이 속임수에 가담(加擔)한 것이다. 그녀도 야곱을 사랑했다. 하지만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레아의 삶은 여인(女人)으로서 불행(不幸)한 삶이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태(胎)를 열어주셨다.(창29:31) 네 명의 아들을 줄줄이 주시는데, 

  ①.르우벤’주님께서 나의 고통(苦痛)을 살피셨다. 이젠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 

  ②.시므온’하나님께서 사랑받지 못하는 내 하소연을 들으시고 또 아들을 주셨다.’(들으심) 

  ③.레위 ‘이제는 남편도 내게 매이겠지’(연합(聯合)) 

  ④.유다 ‘이제야 말로 여호와를 찬송하겠다.’(찬송(讚頌)) 

   그러나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子女)가 없었다.(창 29:31) 


○.앞으로 야곱의 인생에 적지 않은 갈등(葛藤)이 예상(豫想)된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計劃)이 있다. 속아서 결혼한 여인,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여인(女人)을 통해 메시아가 오신다. 넷째를 낳았다고 레아가 ‘여호와를 찬송(讚頌)하리로다’ 기뻐했지만, 우리가 찬송(讚頌)하는 이유(理由)는 이 ‘유다의 계열(系列)’에서 약속(約束)하신 ‘여자의 후손(後孫)’이 나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罪)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들어 사용하셔서 자신의 계획(計劃)을 이루시고 약속(約束)하심을 이루시는데 실패(失敗)하심이 없으시다. 하지만 동시(同時)에 그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값을 요구(要求)하시고 갚으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속임을 당하고 고생(苦生)하도록 허락(許諾)하셨다. 그렇게 자기 백성을 연단(鍊鍛)시키시고 훈련(訓練)시키신다. 우리 역시(亦是) 은혜(恩惠)아래 거하는 동안에, 속였던 자 야곱이 라반에게 속은 일을 기억(記憶)해야만 한다. 우리가 혹 다른 사람으로 인(因)해 크고 작은 고통(苦痛)을 겪을 때, 혹(或) 이 주어진 현실(現實)이 먼저 누군가에게 이렇게 똑같이 행한 내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질책(叱責)은 아닐까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고통(苦痛)의 일들에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구(求)하며 묵묵히 감당(堪當)해 나가야 한다. 인생의 크고 작은 비극(悲劇)들이 여기에서 시작(始作)된다. 우리는 은혜(恩惠) 중에라도 이 사실(事實)을 기억(記憶)하며, 신실(信實)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依支)하는 삶을 살아가자. 


○.야곱은 속이는 형 에서와 아버지를 속이는 자였지만 그 역시(亦是) 삼촌 라반의 속임을 당하였다. 정의(定義)롭지 못한 상황(狀況)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법을 배웠다. 야곱의 경험(經驗)을 통해서 속이는 것은 절대(絶對) 옳지 않다는 것을 교훈(敎訓)해주신다.


(수) 05월25일  <가족(家族)을 이루는 축복(祝福)>


(Q)~(창세기 29:31~30:22) 야곱이 뿌린 대로 거두는 고통(苦痛)스러운 상황(狀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분의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까?


(A)~○.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後孫)들보다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애정(愛情)을 느끼고 나타냈다. 하나님이 에서보다 야곱을 선호(選好)하여 세상에 그의 축복을 베풀 특별한 통로(通路)로 그를 선택(選擇)한 것은 독단적(獨斷的) 근거(根據)가 아니라 품성(稟性) 때문이었다(참조 신 7:6~8).


○. (창세기30:22) 하나님께서는 장구(長久)한 세월 동안 라헬에게 무자(無子)의 서러움을 체험(體驗)케 함으로써 그녀에게 엄숙(嚴肅)한 교훈(敎訓)을 베푸셨다. 그것은 곧 인간의 모든 소원성취(所願成就)는 사람의 능력(能力)이나 수단(手段) 여하(如何)에 의한 것이 아니라(1-3) 오직 하나님의 섭리(攝理)와 뜻에 달려있으므로 소원(所願)자는 믿음과 인내(忍耐)로써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전 3:1-11, 요 2:4).” (창 30:22, 만나주석)


○. 야곱은 라헬이 겪는 어려움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신" 것이니라. 우리가 원(願)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승낙(承諾)하시지 않는 것은 주권(主權)을 가지신 주님이시며 가장 현명(賢明)하시고 거룩하시며 공평(公平)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곳을 명심(銘心)하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行)하신다. 하나님은 인간 누구에게도 빚지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被造物)에 대해서도 악(惡)을 행하신 적이 없으시며, 또 그러실 수도 없는 분이시다(랍비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네 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구름과 마음과 무덤과 태도(態度)를 열고 닫으시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열쇠들을 스스로 지니시지 결코 천사(天使)들이나 최고의 천사에게도 주지 않으신다(계 3:7; 욥 11:10; 12:14 참조).


○.  야곱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자기가 변경(變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도대체(都大體)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 만들 셈이냐?" 하고 그는 외친다. Deos qui rogat ille facit 우리의 간청(懇請) 대상(對象)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 


○. <라헬도 마침내 아이를 낳게 되었다(창세기30:22절).>

우리가 무절제(無節制)한 욕망(慾望)으로 간구(懇求)할 때는, 하나님께서 응당(應當) 그 자비(慈悲)를 거부(拒否)하시지만, 마침내 은혜(恩惠)롭게 그 소원(所願)을 허락(許諾)하시기로 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고쳐 주신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상(傷)함을 생각하시기 때문에 영원(永遠)히 우리와 다투시는 분은 아니시다. 라헬은 그의 아들의 이름은 요셉이라 하였다. 요셉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두 가지 정반대(正反對)의 뜻이 있다. 하나는 아삽(Asaph: abstulit) 곧 "그는 나의 치욕(恥辱)을 없애 버렸다" 는 말이다. 마침 그 아들 때문에 라헬은 자기의 신용(信用)을 회복(回復)했다는 그런 뜻이다. 또 하나는 야삽(Jasaph: addidit) 곧 "주님께서는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리라" 는 뜻이다. 이 말은 분수없이 더 바라는 라헬의 욕심(慾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라헬은 하나를 가지고 만족(滿足)하고 감사(感謝)하지 못하고 언제나 더 바라는 삶이었다). 겸허(謙虛)하게 또 다른 자비(慈悲)를 기다리는 경건(敬虔)한 신앙(信仰)의 표현(表現)일 수도 있다. (창 30:22, 매튜헨리)


○. <(창30:4)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야곱의 흐트러진 결혼생활(結婚生活)은 일부다처(一夫多妻)로 시작(始作)하여 축첩(蓄妾)으로 끝이 났다. 하나님은 이를 역전(逆轉)시켜서 이스라엘 자손(子孫)을 발생(發生)하게 하셨으나, 그 때문에 그러한 관습(慣習)을 승인(承認)하신 것은 아니다.


○. <(창세기 30:9)야곱의 경우(境遇)>

 저들의 후손(後孫)을 증가(增加)시키기 위한 그의 아내들의 저급(低級)한 제안(提案)을 그가 그토록 쉽게 동의(同意)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가 자신의 자녀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랑하는 라헬을 만족(滿足)시키기 위하여 빌하를 취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핑계거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 이미 네 아들이나 둔 레아의 제안(提案)에 대해서 자신의 양심(良心)을 어떤 변명(辨明)으로 잠잠케 할 수 있었겠는가? 이미 그릇된 길에 들어선 그는 자기의 행동(行動)의 잘못된 점을 볼 수 없었고, 그 가능(可能)한 결과(結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반면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당시(當時)의 일반적(一般的)인 관습(慣習)을 따랐다는 점에 대해서도 인정(認定)해야 한다. 함무라비법전(法典)과 다른 설형(楔形) 문자(文字) 문서(文書)들을 통하여 그러한 관습(慣習)이 법적(法的)으로 또한 사회적(社會的)으로 용납(容納)되었으며, 특히 불임(不姙)으로 자녀를 낳지 못할 경우(境遇)에 그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습(風習)이 존재(存在)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그들의 종들을 첩(妾)으로 취(取)하는 일을 별로 큰 잘못으로 간주(看做)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 30:9, 재림교주석)


○. <(창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生覺)하신지라.>

결국(結局) 라헬이 자신의 문제를 기도(祈禱)로써 여호와께 가져간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간구(懇求)는 들으신바 되었고, 조급(躁急)함과 불신(不信)이 여태껏 막아왔던 것을 믿음이 얻어냈다. ” (창 30:22, 재림교주석)


○. 인간 야곱은 많은 아내들로 12명의 자식(子息)들을 낳는 과정(過程)에서 인간의 죄 된 문제(問題)와 모습(模襲)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지만 이러한 죄인(罪人)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方法)대로 하나님의 계획(計劃)대로 차질(蹉跌)없이 목적(目的)을 성취(成就)시키심을 명심(銘心)하고 교훈(敎訓)하자.


(목) 05월26일  <야곱이 떠나다>


(Q)~(창세기 30:25~32) 야곱은 삼촌(三寸)의 집을 떠나기 위해 무엇이라고 설득(說得)했으며 외삼촌 라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A)~○. <(창세기30:25) 나를 보내어 내 고향(故鄕) 내 본토(本土)로 가게 하시되>

라반을 위해 봉사(奉仕)하는 데 싫증이 난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提議)할 때에 장인(丈人)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故鄕) 내 본토(本土)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外三寸)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妻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창 30:25, 26)고 하였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에게 유(留)하기를 강권(强勸)하며 “여호와께서 너로 인(因)하여 내게 복(福)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창 30:27)라고 언명(言明)하였다. 그는 자기(自己)의 재산(財産)이 사위의 보호(保護) 아래서 증가(增加)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부조 192).


○. 요셉이 태어날 무렵에 두 번째의 7년 기간(期間)이 끝났기 때문에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반의 허락(許諾)을 요청(要請)하였다(25절). 그러나 라반은 그토록 가치 있는 사람을 잃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며, 그를 더 오래 붙들어 둘 계책(計策) 때문에 고심(苦心)하였다. 그가 야곱에게 자기의 품삯을 정하도록 초청(招請)한 사실도 그가 6년간 10회나 품삯을 바꾸는 일을 막지는 못했다(31:7). 라반의 배후(背後)에는 악(惡)한 자, 곧 가능(可能)하면 야곱이 약속(約束)의 땅으로 돌아가는 일을 막아 하나님의 계획(計劃)을 좌절(挫折)시키려는 자가 있었다.


○. <야곱과 라반의 계약(契約)(창세기 30:25-36)>

  야곱은 자기 집을 그리워하였다. 야곱은 나이가 많았지만 성실(誠實)하게 두 번 의 약속 기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했다. 이제는 먹여 살려야 할 큰 가족(家族)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록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 고생(苦生)스러웠지만, 그리고 첫 번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라반이 속였지만 야곱은 정직(正直)하게 계약된 자기의 의무(義務)를 수행(遂行)하였다. 선(善)한 사람은 자기가 해(害)를 입어도 결정(決定)된 바를 변경(變更)하지 않는다. 그리도 비록 다른 사람이 우리를 속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법칙(法則)은 대접(待接)받은 대로가 아니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야곱의 약속된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는 고향에 돌아가기를 허락(許諾)해 달라고 간청(懇請)한다(25절)> 


○. <(창세기30:25) 나를 … 가게 하시되>

문자적(文字的)으로 ‘내가 가리이다’란 말로 결단(決斷)을 나타낸다. 

야곱에게 있어서 (1) 라반의 밑에서 일한 14년 동안 부양(扶養)할 대가족(大家族)이 생겼지만 아직까지 무일푼 신세인데다 (2) 돌아와도 좋다는 어머니의 전갈(傳喝)(창27:45)은 아직도 없는 상태(常態)이며 (3) 돌아갈 가나안 땅은 형의 보복(報服)만이 기다릴 따름이어서 객관적(客觀的)으로 볼 때 아직은 그가 귀향(歸鄕)할 시기(時期)가 아니었다. 그러나 (1) 고향을 향(向)한 열망(熱望)과 (2) 분가(分家)가 절대 요청(要請)되는 대가족으로 인(因)해 야곱은 늦게나마 벧엘의 언약(言約)을(창28:13-15) 상기(想起)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안일(安逸)한 예속(隸屬)으로부터의 독립(獨立)을 담대(膽大)히 선언(宣言)한 것이다.


○. <(창30:31)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라반을 신뢰(信賴)하지 않겠다는 야곱의 강한 의지(依支)가 내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품삯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야곱의 기지(機智)가 다시 한 번 드러난 부분(部分)이기도 하다. 즉 라반의 탐심(貪心)과 간교성(奸巧性)을 익히 알고 있었던 야곱은 자신에게 절대(絶對) 불리(不利)한 듯한 조건부(條件附) 비율(比率) 분배(分配) 방식(方式)을 제안(提案)함으로써 즉시(卽時) 일정한 액수(額數)를 지불(支拂)치 않게 된 라반을 계약에 끌어들인 뒤 가축(家畜)의 생식(生殖) 습성에 대한 자신의 목자적(牧者的) 재질(才質)을 십분 활용(活用)하려 했다(37-39절).


○. 지금까지는 야곱에게 호의적(好意的)이었으나 그 표정(表情)이 이번에는 달라졌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의 표정(表情)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2, 5절). 라반은 본래(本來) 야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보다 더 심했다. 질투(嫉妬)는 흔히 표정(表情)에서까지 나타나는 죄임을 명심(銘心)하자. 그렇기 때문에 "악(惡)한 자의 눈" 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잠 23:6). 기분 좋지 않는 표정은 가정의 평화(平和)와 사랑을 깨뜨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라반의 노(怒)한 표정(表情) 때문에, 그의 가정이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최대(最大)의 축복(祝福)을 상실(喪失)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당연지사(當然之事)이다.


○. 야곱이 떠나기로 결정(決定)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指示)와 인도(引導)하시겠다는 약속(約束)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3절). 비록 야곱이 여기에서 지극히 어려운 곤란(困難)에 직면(直面)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命令)하시기 전에는 그 일은 고만두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命令)에 좇아 거기에 왔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되돌아가지 않을 작정(作定)이었다. 우리의 태도(態度)를 결정(決定)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들의 의무(義務)임을 명심(銘心)하자. 또한 우리가 나가든 들어오든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야말로 큰 위로(慰勞)가 되는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시(指示)의 내용(內容)은 자기 아내들에게 하는 이야기 속에서 잘 드러나 있다(10-13절). 야곱은 그가 가축(家畜)에 대하여 꾼 꿈을 자기 아내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자기가 선택(選擇)한 얼룩진 양들이 한없이 불어났고, 하나님의 천사(天使)가 어떻게 그 꿈속에서(나는 창31:10절과11절)의 꿈이 동일(同一)한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 양떼를 보여 주면서, 그가 크게 많은 재산(財産)을 갖게 된 것은 우연(偶然)도 아니고 그 자신의 지혜로운 계략(計略) 때문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들려주고 있다.


○.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이 야곱에게 행한 모든 괴로움을 보시고 그를 보상(報償)해 주어야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보았노라. 내가 한 시도 그 일에서부터 눈을 떼지 않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닫는 것 이상으로 그 섭리(攝理)하심에 있어서 공평(公平)하신 분이심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러한 공평(公平)한 섭리하심에 의 하여 피해(被害) 입은 자들은 진정(眞正)한 보상(報償)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야곱이 그처럼 부자(富者)가 된 것도 그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섭리(攝理) 때문이었다.


○. <(창31:3) 돌아가라 … 함께 있으리라>

이곳으로 너의 길을 인도(引導)할 때처럼 이제는 귀향(歸鄕)길을 돌봐주시겠다는 20년 전의 벧엘 언약(言約)(창28:15)에 근거(根據)한 하나님의 자비(慈悲)로운 약속(約束)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잊지 않고 반드시 불러내신다(요 10:28, 29).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의 성도(聖徒)들에게 때가 차면 언젠가는 하늘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想起)시켜 준다(고후 5:1, 벧전 1:17).” (창 31:3, 만나주석)


○. 야곱이 고향(故鄕)을 떠나 도망(逃亡)하여 외삼촌(外三寸) 라반과 함께하여 수년(數年)을 지내면서 믿음에 대한 중요(重要)한 공과(工課)를 배우고 하나님의 명령(命令)에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기위한 과정(過程)과 행동(行動)에서 야곱의 달라진 순종적(順從的)인 모습(模襲)에서 마침내 믿음에 대한 많은 교훈(敎訓)을 우리에게 제공(提供)해 주심에 대하여 감사(感謝)함드리고 우리의 신앙(信仰)에 적용(適用)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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