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질문, 대답, 설명) 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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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0-24 05:38 조회151회 댓글1건본문
제5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11월 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34분)
연구 범위: 창 15:16; 레 18:24–30; 딤후 4:1, 8; 출 23:28–30; 신 20:10, 15–18; 사 9:6
기억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수 10:42).
여호수아서는 몇 가지 불편한 장면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전쟁 또는 신성한 전쟁이라는 명제 하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멸망시키는 모습은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
구약의 하나님의 전쟁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권자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구약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떻게든 그분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뜻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그런 일들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지난주 우리는 하나님 당신이 인류 역사상 어떤 전쟁이나 전투보다 훨씬 더 크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큰 전쟁에 직접 관여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또 성경 역사와 세속 역사의 사건 모두는 이 대쟁투의 관점에서 볼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번 주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이라는 문제, 하나님의 전쟁의 한계와 조건, 구약성경 선지자들이 제시한 궁극적인 평화의 이상,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우주적 대쟁투의 측면에서 가나안인과의 전쟁에서 싸우셨다.
느끼기: 주님은 기회와 자비를 베푸시지만 악인은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여 악한 편에 선다.
행하기: 싸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따라 평화의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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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은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어떤 시간이 되었습니까?(민 14:33)
*답: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대적했다.
3.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은 가나안 정벌 가운데 어떤 목적을 위해 일하십니까?(창 18:25)
*답: 공의를 드러내는 일을 하신다.
4.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원계획이 아니라면 왜 가나안인들은 모두 멸망당해야 했습니까?(수 11:19)
*답: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멸망이 정해진 도성의 모든 사람은 주께서 멸하시기로 운명을 정하신 것입니까?(신 20:10)
*답: 그들은 주어진 기회를 무시하고 대적하는 데 머물렀기 때문에 말했다.
6. 전쟁을 명하신 하나님은 호전적인 분입니까? 그분의 이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사 60:17)
*답: 평활의 하나님이시다.
7. 하나님께서 심판을 연기하셨음에도 가나안은 어떤 상태로 나아갔습니까?(창 15:16)
*답: 더욱 대적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상태로 나아갔다.
결론: 하나님께서 전쟁에 관여하신다는 생각은 질문을 낳게 하지만 그분은 어떤 전쟁보다 중요한 대쟁투에 임하시며 세계사 속의 사건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며 민족에게 자비의 시간을 주신다. 멸망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언제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가나안인들은 바로처럼 기회에 문을 닫음으로 그들의 악한 문화와 함께 소멸되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기에 정복과 심판이 있었지만 그분이 싸우시는 것은 전쟁의 승리가 아닌 정의와 평화의 회복을 위함이다.
10월 26일(일)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
창세기 15:16, 레위기 18:24–30, 신명기 18:9–14, 에스라 9:11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창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레18:24~30]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27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신18: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스9:11]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답: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이 회개하도록 자비의 기회를 430년이나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가나안에 거주하던 민족들의 죄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서 너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민족들이 행했던 아동 제사, 점술, 마술, 주술, 강신술, 영매술과 같은 끔찍한 관습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신 18:9–12).
라스 샴라(Ras Shamra)에서 발견된 고대 우가리트 문서의 발굴은 가나안 종교와 사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며, 그 문화에 대한 정죄가 그저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구약성경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가나안 종교는 풍요를 가져오는 자연 현상이 신들과 여신들 간의 성적 결합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신들의 관계를 자신들의 성적 행위에 빗대어 이해했고 신들과 여신들의 반응을 이끌기 위해 종교예식에서 그 같은 행위를 일삼았다. 이 개념은 남여 매춘부들이 난잡한 의식을 벌이는 제의적 매춘 제도로 이어졌으며,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 행위에 불과했다.
한 나라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들의 수준보다 더 높은 도덕적 수준으로 넘어설 수 없다. 이러한 신들을 믿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의식에 성경이 강하게 경고하며 금지했던 아동 인신 제사가 포함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가나안 사람들은 사실상 악마였음이 분명한 그들이 숭배하는 신들에게 정기적으로 첫 자녀를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의 유골이 부서진 채 담겨있는 봉헌문이 새겨진 큰 항아리들은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으며, 그것이 가나안의 많은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말해준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결정한 것에 따라 갑자기 주어진 생각이 아니었다. 가나안의 주민들은 유예된 시간, 즉 추가적인 은혜의 시간을 부여받았고 이 기간 동안 그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던 족장들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기회를 얻었음에도, 분명히 그 기회를 허비하고 끔찍한 행위를 계속하여 마침내 주께서 그들을 멈추게 하실 지경에 이르렀다.
<교훈> 가나안의 멸망은 이스라엘에게 유업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족장들을 통한 증거, 유예된 기간을 주셨지만 그들은 기회를 저버렸다.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죽어서(고전15:22) 썩어가는(엡4:22)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다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구원의 복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했기에 그들을 깨닫도록 430년의 기간을 줬다. 그러나 그들도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출애굽 후에도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40년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 모든 기간에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신인지 충분히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행습을 버리지 않고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않았고 더욱 심하게 썩어갔다. 그래서 그 땅이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베푼 은혜의 기회가 다 지났으므로 은혜의 손길을 거두셨다. 그래서 그들을 토해내는 땅으로 인하여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굴빛을 비칠 때 돌아왔어야 했다.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31:16~18). 그들에게 닥친 멸망은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굴을 숨긴 결과다. 아래 증언의 말씀대로 “그분의 보호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히브리 사람들의 손쉬운 먹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0월 27일(월) 최고 심판자
창 18:25; 시 7:11; 시 50:6; 시 82:1; 시 96:10; 딤후 4:1, 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온 우주 만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질문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창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시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50: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시96:10]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딤후4:1,8]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답: 하나님은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전쟁은 이 원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분이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죄는 그 최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롬 6:23).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이든 가나안 사람들의 죄이든 관계없이 모든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했다고 해서 다른 민족들보다 거룩해진 것은 아니다(신 9:4, 5; 신 12:29, 30). 다른 민족들조차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향한 심판의 도구가 되었던 것을 보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 편에서 싸우지 않으시고 적들이 그들을 압제하도록 허락하셨을 때,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은 겪어보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거꾸로 자신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는 것을 경험했다(수 7: 비교).
하나님의 전쟁 개념은 심판자로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다. 고대 세계 그리고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전쟁과 달리, 이스라엘의 전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쟁의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라는 개념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을 왕이나 심판자로 나타낼 때에 그것이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을 용사로 묘사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용사로서 여호와는 심판자로서 법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고, 세우시며, 유지하기 위해 싸우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당신의 성품이 반영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사로 나타나시는 것은 심판자나 왕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당신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반역을 영원히 용납하지 않으실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의 목적은 결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의 회복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행위의 주체시라면, 재판과 전쟁을 벌이는 것, 또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다.
<교훈>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법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고 세우기 위해 싸우시는 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의 회복이 그 목적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나 전쟁을 생각할 때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본질이다. 사람이 죄인이라고 할 때 신학이나 주석은 사람의 삶이 선했는지 악했는지를 전제로 판단한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도덕적으로 선을 행했는지 악행을 했는지는 차후 문제로 나타낸다. 먼저 죽은 자인지 살아있는 자인지 보신다. 여호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는 죽은 자다. 태초에 아담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은(요일2:25)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깨뜨렸을 때 회수되었다. 그래서 아담은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가 되었는데, 그는 종신하는 존재라고 선고하셨다(창3:17). 아담에게서 출생하는 모든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종신수가 된 것이다(롬5:12, 18, 고전15:22).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이다. 다만 그들에 존재를 종신할 때까지 유지하게 한 것은 그 기간에 주신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 기간을 은혜의 기간이라고 한다(고후6:1,2). 이것을 헛되이 보내면 그는 생명이 없는 자가 된다. 종신수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그는 썩는 삶을 이어가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그의 생명이 되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생명있는 자가 된다(요5:24,25, 요일5:11,12). 그들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다. 이것은 예수 생명이 맺는 열매들이다. 이렇게 되라고 은혜의 기간을 주셨는데 그 기간을 헛되게 보냈을 때 그들은 썩기만 하는 폐물이다. 이것을 처리해서 없애야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에게 파멸의 독소를 뿜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악을 없애는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분의 공의는 형벌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10월 28일(화) 축출인가 멸절인가
출애굽기 23:28–30; 출애굽기 33:2; 출애굽기 34:11; 민수기 33:52; 신명기 7:20을 출애굽기 34:13; 신명기 7:5; 신명기 9:3; 신명기 12:2, 3; 신명기 31:3, 4과 비교해 보라. 이 구절은 정복의 목적과 멸망의 성격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출23:28~30]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29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30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출33: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출34: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민33: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신7: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출34: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신7: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신9:3]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신12:2,3]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신31:3,4]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답: 신7:20까지는 가나안 족속들을 축출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내가’ 한다고 하셨는데, 출13부터는 그들의 산당과 주상을 멸절하라고 하시고 너희가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문화를 파괴하고 그들을 구원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멸절이 아니라, 축출이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에 관여했던 방식을 묘사하는 본문들을 살펴보면 가나안 땅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내쫓고, 흩음을 말하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을 행위의 주체로 나타내며 파괴를 나타내는 두 번째 본문들은 주로 이교 예배의 도구나 파괴에 바쳐진 물건인 무생물을 대상으로 한다. 이교 숭배의 장소와 제단은 분명히 가나안 종교의 주요 구심점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주로 가나안의 부패한 사회와 문화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부패를 가져오는 사소한 것까지 모두 파괴해야 했다. 그러나 가나안의 모든 거민 가운데, 정복 전쟁 전이나 정복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던 사람들은 이동을 통해 피할 수 있었다(수 2:9–14; 삿 1:24–26 비교). 가나안 인구 중 멸망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요새와 같은 도성을 의지한 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저항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한 자들이었다(수 11:19, 20).
그런데 가나안 정복의 원래 목적이 땅의 주민을 몰아내는 것이었지 그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는가?
가나안 정복과 관련된 성경 본문을 분석해 보면 정복의 원래 의도는 가나안 사람들을 분산시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 대부분은 애굽의 바로처럼 마음을 굳게 닫았고, 자신들의 악한 문화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그들의 문화가 파괴될 때 그들도 멸망해야 했다.
<교훈> 정복의 원래 목적은 주민을 몰아내고 부패한 문화를 파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처럼 마음을 닫고 악한 문화와 하나되어 문화와 함께 멸망했다.
<부가설명> 자비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겔16: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 그런데 기어이 이대로 썩다가 죽겠다고 하면 은혜의 손길을 거두신다. 그러면 그는 곧 죽어서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오늘날 이 죄의 세상을 아직도 참으시며 기다리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때문이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 그래서 바울은 이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후6:1). 이 은혜를 무시하고 썩는 상태를 그냥 유지하면 은혜를 유용하게 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진다. 그러면 그대로 사망의 재앙에 떨어지고 만다.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9:12 후반). 이것을 재앙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이것을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는 재앙이라고 성경은 계시했다(렘6:19). 문화로 인하여 임하는 재앙이 바로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라는 재앙이다. 지금도 세상에 이 재앙이 만연하고 있다.
10월 29일(수) 자유로운 선택
신명기 20:10, 15–18; 신명기 13:12–18; 그리고 여호수아 10:40을 읽어 보라. 신명기에 기록된 전쟁의 규칙과 이스라엘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도성을 대하는 절차는 이스라엘이 전면적 파괴를 수행할 때 어떤 한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가?
[신20:10, 15~18]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신13:12~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수10:40]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답: 회개의 기회를 웃어넘긴 족속들은 처리하고 아직도 기회가 있는 족속들은 유예하셔서 그들의 반응을 기다리신다.
히브리어 본문은 전쟁에서 사람들의 멸망을 말하기 위해 독특한 용어인 헤렘(cḥerem)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금지된,’ ‘저주받은’ 또는 ‘파멸을 위해 바쳐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 동물, 또는 무생물을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독점적 영역에 두는 것을 말하며, 전쟁 상황에서는 대체로 파괴당하게 된다. 전쟁에서 한 민족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헤렘의 개념과 그 이행은 하나님의 성품과 명예가 달려있는 우주의 악의 세력에 대한 여호와의 전쟁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중립은 없으며 하나님의 편에 서거나 그분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는 것만 있을 뿐이다. 한쪽은 삶, 곧 영원한 생명에, 다른 한쪽은 죽음,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완전한 멸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의 일부분의 집행을 택하신 민족인 고대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위임하셨다. 심판 집행의 위임은 하나님의 엄격한 신정의 지휘 아래, 가나안 정복 기간이라는 역사상의 특정 시기 동안, 명확히 정해주신 고대 가나안에 국한되었다. 어제 연구에서 보았듯이, 파멸의 명령 아래 놓인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반역하고 거역했으며,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한 결정은 결코 자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택한다면 그와 같이 멸망 당할 것이었다(신 13장 비교).
이스라엘은 땅을 상속받고 가나안인은 멸망 당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과 집행자 집단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라합, 아간, 기브온 사람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했다.
하나님의 보호는 임의로 주어지거나 자의적으로 진멸하신 것이 아니다. 여호와와의 관계로 인해 특권을 얻었던 자들도 반역하면 그 권리를 잃을 수 있었고, 멸망의 대상이었던 이들도 여호와의 권위에 순종하면 살 수 있었다.
<교훈>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는 것은 악과 싸우는 대쟁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면 살 수 있었고 특권을 얻은 자라도 반역하면 제외되었다.
<부가설명> 사람의 선택은 자유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 중에 선택하는 것 외에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을 학자들은 자유의지의 자유선택이라고 말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하는 문제다. 선택 문제를 논의 할 때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이미 사망의 존재(고전15:22, 롬5:12,18)라는 것을 간과하고 사람은 살아있는 죄인이라는 전제로 논의 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도덕론적 관점에서 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망과 생명을 사람들 앞에 두고 그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사망은 이미 아담이 골라서 그에게서 출생하는 사람은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선택을 논의 하는 것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사망을 선택하거나 생명을 선택을 자유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조치를 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 외에는 아무것도 성택할 수 없다. 그런대로 자유선택이고 자유의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에 긍정적 반응을 하든지 부정적 반응을 하든지 뿐이다. 하나님은 부디 생명을 택하라고 하신다. 그것을 택하지 않으면 이미 사망에 있는 그 상태로 존재를 상실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핵심이다. 나는 그렇게 깨닫는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10월 30일(목) 평화의 왕
이사야 9:6, 이사야 11:1–5, 이사야 60:17, 호세아 2:18, 미가 4:3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보여주신 미래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11: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60:17]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호2: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미4: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답: 의와 공의가 실현되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묘사하고 있다.
이번 주 교과의 주요 초점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하시고 도우신 전쟁에 맞추어져 있지만, 구약의 예언서가 말하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인 다가올 평화로운 메시아 시대에 대한 이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시아는 “평강의 왕”(사 9:6)으로 묘사된다. 그분은 우리를 평화로 가득한 왕국 곧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으며(사 11:1–8), 해나 상함이 없고(사 11:9), 평화가 다스리며(사 60:17)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사 66:12) 세상으로 이끄실 것이다.
열왕기하 6:16–2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인류를 위해 갖고 계신 원대한 목적에 관한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가?
[왕하6:16~23]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답: 하늘 군대에 의하여 엘리사에게 포로된 아람 군사들을 대접하여 보낸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엘리사의 주도로 아람 군대를 먹인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엘리사는 그들을 학살하는 대신(왕하 6:22),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항상 바라시던 평화라는 최고의 이상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엘리사가 적군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군대의 압도적인 우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음을(왕하 6:17)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우주적 전쟁에 관여하고 계시고, 그 전쟁이 이 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구속의 궁극적인 목표는 끝없는 갈등이나 원수의 영원한 종속 상태가 아니라 완전하고도 영원한 평화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지만(마 26:52), 평화는 평화를 낳는다. 그 이야기는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왕하 6:23) 않았음을 말하며 마쳐진다.
<교훈> 하나님은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기에 구원의 목표는 영원한 평화이며 우리를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으로 이끄실 것이다.
<부가설명> 싸움은 루시퍼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발생했다. 그가 지구로 내려와서 아담 부부를 꾀어서 그들을 자기 편에 끌어넣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사망의 존재가 된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사망으로 멸망시켜서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화 하여 우주에 창조주를 모독하고 자기도 존재를 상실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의 상태에 있다. 혹시 이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지구에 영속(永續)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후손이 자기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선고로 그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괴롭게 하려고 사망의 하수인들인 모든 죄악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의 왕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정복하고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대러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은 존재고 그날 생명의 땅에 들어갈 것이다(시27:13). 그러나 사망에 그대로 있으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은 그들을 정중히 장례하실 것인데 매장이 아니고 화장을 하신다. 그래서 사망으로 더러원진 지구를 정화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세상을 회복하셔서 함께 영생희 복을 누릴 것이다.
10월 3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5장 “여리고의 함락” 491–493을 읽어 보라.
성경의 모든 내용에서 문맥과 배경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본 것처럼, 우주적 대쟁투와 심판자이신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그는 악한 나라들에게도 은혜의 기간을 주시는데 이는 그들로 하나님과 그의 품성을 알게 하시고자 함이다.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은 빛을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좇아갔기 때문이겠지만 이 모든 판결도 주어진 빛의 분량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않으신 이유가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넘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자신들의 죄악으로 그들은 점차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죄악의 잔이 차서 그 한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된다. 어느 나라든지 다 은혜의 기간이 주어져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한 단계의 죄악으로부터 다음 단계의 죄악으로 나아갔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반역적인 정신을 이어 받았으며, 부모들보다 더욱 악해져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다. 징벌이 연기되었다고 해서 결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화잇주석, 삿 11:23).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하나님이 우리의 심판자이시며 우주 최고의 심판자이신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의해 보라. 하나님이 심판자시라는 사실이 복음과 우리의 구원에 기초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심판으로 생명에 속한 사람과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분별하여 생명에 속한 사람은 산자의 땅으로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사망의 땅으로 보낸다.
2. 가나안 사람들의 사례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의로우심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이웃을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가?
*답: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애굽에서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고 그들도 회개할 기회를 430년 더하기 40년을 주셨다. 그들이 라합처럼 기브온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이 선택을 받아들였으면 그들도 생명의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3. 자유의지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랑과 선택의 자유는 서로 어떻게&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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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
3. 자유의지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랑과 선택의 자유는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답: 자유의지와 자유선택에 대하여 이미 수요일 부가 설명에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택한 사망을 용납하셨으나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여서 그 선택에서 생명으로 옮길 길을 열어주셨다. 그래도 사망에 머물기로 한 사람들은 그들의 결정을 그대로 집행하신다.
4. 구약성경은 많은 전쟁과 갈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평화의 이상을 예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평화를 세우는 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겠는가?
*답: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