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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생애의 리듬(질문, 대답, 설명) 0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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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03-30 04:11 조회9,9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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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생애의 리듬

 

4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9분

 

● 연구 범위 : 창 1장, 창 8:22, 시 90:10, 욥 1:13~19, 행 9:1~22, 빌 1:6, 롬 8:1.

● 기억절 :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지금까지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시문학의 일부는 솔로몬 왕의 작품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이 말씀은 인생살이, 곧 우리의 삶의 때와 주기를 너무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단계와 변화를 거친다. 그 과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한 변화가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으며, 그것들을 잘 관리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특별히 우리 자신과 가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삶의 시기들과 리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는 주기적인 또는 예상치 못한 변화의 실상을 이해한다.

느끼기 : 다양한 변화의 경험 속에서 여전히 주님의 계획 속에 머물기를 소망한다.

행하기 :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감화를 끼치고자 노력한다.

 

➋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어떤 큰 변화들을 겪습니까?

※ 성장, 교육, 결혼, 직업, 노화, 사망의 과정을 겪는다. 모두 큰 변화들이다. 

➌ 예상할 수 있는 변화와 예상하지 못하는 변화의 종류를 열거해보십시오.

※ 성장, 교육, 결혼, 직업, 노화, 등등과 사고, 질병, 결별 등등. 서로 이야기해보자.

➍ 개인의 신앙적인 발전을 위해서 변화는 얼마나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 안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변화는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➎ 그대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변화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 각자가 말해보자. 

➏ 어떻게 우리의 신앙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요?

※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한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

 

결론 : 삶은 변화의 연속입니다. 변화는 때로는 주기적으로, 때로는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형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변화 속에서 오히려 그분이 우리의 인생에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감화를 끼치며 살 수 있습니다.

 

 

3월 31일(일) 태초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태초에”(창 1:1). 성경은 왜 그 말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는 억양으로 시작한다. 첫 장은 특별히 “혼돈하고 공허”(창 1:2)한 지구가 6일 만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선언을 들을 만큼 변화된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요컨대, 그것이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작이었다.

 

1. 창세기 1장을 읽어보라. 많은 일들이 진행됐지만 이렇게 자문해 보라. 어떤 무작위성 내지 우연의 요소는 없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적시적소에 매우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는가? 그대의 대답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 무작위나 우연의 요소는 없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계획의 하나님이시다. 

 

엘렌 G. 화잇은 “질서는 하늘의 첫째 법칙”(영문시조, 1908년 6월 8일)이라고 말했다. 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죄가 천연계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여전히 질서와 주기와 규칙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다.

 

2. 창 8:22을 읽어보라.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질서를 찾을 수 있는가?

[창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답: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연속된다는 말씀은 질서에 대한 말이다. 

 

타락 후에도 계절은 보통 질서정연하게 오고 간다. 공중의 광명체들(낮과 밤을 나누고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는 태양과 달[창 1:14])과 더불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계절뿐 아니라 곳곳에 자연의 리듬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재는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지만, 사 66:23 같은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리듬감이 존재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부가설명> 질서는 평화와 행복의 보증이다. 무질서는 혼란과 불안의 앞잡이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의 질서를 세우셨다. 그것을 규례라고 말했다.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시119:91) 비록 죄와 사망이 창조에 침입하여 많은 혼란과 파괴돈 질서를 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천연계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천체는 여전히 궤도를 따라 운행하고 계절은 여전히 질서대로 순환한다. 모든 생물은 생리를 따라 생활하고 사회도 제도와 질서 안에서 운영된다. 이런 것이 깨어지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사람들은 안정과 안전을 찾을 수 없어서 불안하고 인간생활은 붕괴한다. 신앙생활도 질서가 있다. 진리도 질서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에서 진리의 질서를 찾을 줄 알아야 한다. 이 질서를 벗어나면 진리가 혼란해 지고 혼동하게 된다. 신앙이 빗나가고 하나님은 모욕을 당한다. 가정도 질서가 있다. 가정에서 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은 파괴되고 행복은 사라지며 갈등과 투쟁과 고통만 있게 된다. 무엇이든지 창조주가 세운 질서 안에서만 안전과 안정과 평화와 행복이 있다. 

 

교훈 : 창세기는 혼돈하고 공허했던 지구가 질서와 리듬을 가진 세계로 변모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타락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리듬을 간직하고 있다.

 

 

4월 1일(월) 생애의 리듬

 

과학자들은 생체리듬이라는 개념에 대해 논한다. 그들은 신체의 기능에 주기를 가져오는 생물학적 리듬(또는 신체 시계)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 자체에 어느 정도의 주기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주변과 우리 안에도 리듬이 존재한다.

 

1. 다음의 성경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측 가능한 생애의 시기들은 무엇이며 그것들은 가정생활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창 21: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삿 13:24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시 71: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잠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삿 8:3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묘실에 장사되었더라”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답: 출생, 성장, 결혼, 사망 등등이 예측 가능한 생애의 시기들이며 가정생활은 이런 질서와 리듬의 연속으로 운영된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두 표지 사이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다양한 삶의 시기들을 지나간다. 어떤 아이는 태어난 뒤에 오래 살지 못하고, 어떤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해 노년에 이른다.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에 따라 자라며 발달한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걷거나 말한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며 성장하여 전문직 종사자가 되는 반면 어떤 아이들은 다른 형태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아이들은 가족을 이룰 테지만 어떤 아이들은 결혼하지 않거나 자녀를 낳지 않는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산다. 우리는 공통점들이 상당히 많지만(참고 행 17:26), 각각 다른 개인이기에 삶에도 차이점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차이점들이 중요한 이유는 각자가 삶의 독특한 면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들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에게 있는 차이점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젊은이든 노인이든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받을 수 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 20:29). 우리가 어떤 단계에 와 있든지 우리의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주님뿐 아니라 서로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

 

<부가설명> 사람은 모든 피조물보다 더욱 질서 있는 피조물이다. 생체리듬도 있고 생각의 질서도 있고 언어도 질서를 따라 해야 뜻이 전달된다. 이런 질서들을 말하는 것이 법이다. 어법이 있고 사고방식이 있고 문법이 있다. 사람의 삶에 이런 질서가 무너지면 정신병자라고 진단받는다. 음식 먹는 것, 운동하는 것, 개인이 수행해야 하는 모든 일에 질서가 있다. 이 질서를 따라서 각 개인의 생활이 영위된다. 혈액순환, 소화기관의 작용, 신경계통의 질서 등등이 다 창조주께서 세운 질서들이다. 귀신이 들리면 사람의 이런 질서 체계를 파괴한다. 이것을 볼 때 사탄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소위 과학이라는 것과 인권이라는 것과 자유라는 것을 내세워 창조주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동성연애나 결혼거부나 이런 것들은 다 질서파괴의 형태들이다. 창조주의 창조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들이다. 소위 성경으로 가지고 신앙을 가르치며 교회를 운영한다고 하면서 이런 사상에 동조하는 것은 창조주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사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 몸이 질서 안에 있을 때 건강하고 안정되는 것처럼 교회와 사회도 그렇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교훈 :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서로 다른 속도로 다양한 삶의 시기를 지난다. 하지만 각자 고유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를 복되게 할 수 있다.

 

 

4월 2일(화) 예상치 못한 일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1. 욥 1:13~19, 2:7~9을 읽어보라. 욥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가 당한 경험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가?

[욥1:13~19]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2:7~9]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답: 예상치 않았던 재난이 갑자기 닥쳤다. 가정생활 질서가 깨어졌고, 몸의 생체 리듬이 깨어졌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외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이 순탄해 보이는 때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직업이나 팔다리를 잃는 사건이나 우리를 병원 또는 일찍 무덤으로 보내는 질병이 될 수도 있고, 화재, 자동차 사고, 또는 애완동물과 걷다가 일어나는 낙상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변화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승진을 하면 경제적인 여건이 나아진다. 또는 배우자가 될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변화는 누구라도 환영한다.

무엇이 됐든지 우리는 일상적인 리듬에 따라 살아가다가 갑자기 예기지 않게 큰 변화를 맞이한다.

욥도 자신의 삶에 새로운 때가 이를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성경은 그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고 묘사했다. 그는 결혼해서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둔 부자였다(욥 1:2~3). 그러나 욥기 중간을 보면 그는 6가지의 커다란 손실, 즉 사업, 노동력, 자녀, 부, 아내의 지지, 친구의 격려를 잃고 시름한다. 그의 세계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가족의 삶은 황폐해졌다.

사실 욥에게 일어난 일들이 매우 극단적이지만 우리 중에도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은 아무 문제없이 순탄해 보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이 바뀌고 우리의 삶과 가족의 생활까지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변하기도 한다.

이것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아벨은 아마도 자신이 살해당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도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가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둘 다 가족에게 배반을 당했다. 두 이야기 모두 가족 구성원에게 일어난 일이 가족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과 가족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부가설명> 욥의 경험은 정말 극단적인 사건이다. 인생의 일상에서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 사고가 났다고 표현하는 것 아닌가. 사고는 일상적 상식이 파괴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 죄와 사망도 그 나름의 질서와 법칙이 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조금은 재미를 누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욥처럼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면 죄와 사망이 예기치 못한 일들을 일으켜 낙심하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한다. 위에 예를 든 아벨, 요셉,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질서의 혼란을 경험했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니라 예언을 연구해서 개인이나 교회에 환난이 닥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평안한 때에 더욱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 안에 거하여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우리의 삶에 리듬과 주기가 있을지라도 예상치 않은 일로 인한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올 수 있고, 그런 변화가 가족 사이에서 생길 수도 있다.

 

 

4월 3일(수) 전환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방식을 고정시킨다면 그 방식이 오래될수록 그 방식을 바꾸기는 더 어려워진다.

사실 우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남편을 바꾸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아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개성보다는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계신다. 구원의 계획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안에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1. 다소 사람 사울에게 어떤 큰 변화가 생겼는가?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났는가?(행 8:1, 3, 9:1~22, 갈 1:15~17)

[행8:1,3]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9:1~2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갈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답: 그리스도인을 박멸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고 거기 응답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자신을 완전히 굴복했을 때에, 그는 자신의 생애의 잘못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율법의 원대한 요구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거만한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이제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과 단순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간구하였다. 사울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과 완전히 조화되고 교제하기를 갈망하였으며, 용서와 용납하심을 구하는 그의 열렬한 소망을 은혜의 보좌 앞에 뜨겁게 탄원하였다.

“참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헛되지 아니하였다.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사상과 감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고, 그의 고상한 능력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일치하게 되었다. 사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는 온 세상보다 더 귀중하게 되었다”(사도행적, 119~120).

우리가 회심한 사연이 비록 사울의 것처럼 극적이지 못할지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주님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일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변화시키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길 수도 있고, 때로는 변화할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위의 두 성경절을 묵상하고 그 약속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개성이 바뀌는 것보다는 그 개성이 예수님을 위하여 올바르게 발휘되도록 바뀌는 것이다. 개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사망의 존재가 되면서 많이 비뚤어지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개성이 주님을 위한 열정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모습을 보면 그의 개성이 열정이 있고 추진력이 있으며 때로는 과격하고 급하기도 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개성이 예수님을 핍박하는데 강하게 작용했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난 후에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선교열정으로 바뀌었고 많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복음 진리를 굳게 하는 열심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성품이 변한다는 것과 개성이 변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바울이 변화한 성품으로 자기의 개성을 주님께 충성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우리의 성격은 예수님께로 전환되었는가? 

 

교훈 : 습관에 고정된 삶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일하시며 그 일을 끝까지 이루신다.

 

 

4월 4일(목) 상호작용

 

성경은 관계를 다룬 책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 중 완전한 고립 속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남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태어난 뒤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일정한 나이가 돼서야 우리는 혼자 살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살 수 있어도 누가 그렇게 살고 싶겠는가? 우리는 대부분 동료들을 원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을 갈망한다. 물론 강아지 같은 애완동물도 정겨운 동반자가 될 수 있겠지만 깊고 의미 있는, 그리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상호작용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가족 또는 가족관계가 우리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과 항상 교류하기 때문에 이런 상호작용은 삶의 변화와 리듬에 항상 영향을 미친다. 우리와 교류하는 다른 이들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과 교류하는 우리는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대부분 인식하지 못함), 그러한 상호작용은 서로에게 그리고 선악 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남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그것이 항상 선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항상 주도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가족같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을 읽어보라. 이 말씀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상호작용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롬 15:7, 엡 4:2, 32, 살전 3:12, 약 5:16

[롬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엡4:2,3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답: 서로 용납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친다. 

 

원리는 단순하다. 우리가 남에게 바르고, 친절하며, 정겹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매우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그들에게 좋은 감화를 끼칠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매우 긍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감화를 준다는 것은 아주 큰 특권이다. 잊지 말자. 우리는 선악간에 심지어 미묘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우리의 감화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으며 그것은 우리 가정에서 더 깊이 나타난다.

 

<부가설명>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가정을 부부로 출발한다. 그들의 사랑으로 자녀들이 출생하고 식구, 가족이 형성되며 가족들은 사랑으로 연결된다. 가정에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협력하는 것을 생활을 통하여 익히게 된다. 증언은 가정은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기초라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가정이 파괴되면 이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다. 기초가 무너지면 집이 내려앉는 것과 같다. 가정에서 상호관계가 원만하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원만한 성품을 형성하는 장소가 가정이다. 원만하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부드럽고 화기애애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처음부터 관계로 존재하게 되었다. 창조주,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창조주와 인간은 생명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와 관계를 끊으면 생명을 잃게 된다. 태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이 관계를 끊었고 결과로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생명으로 오셔서 아담을 대속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이 관계가 회복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이 관계가 회복된 것을 사회에 드러내어야 하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이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가 남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선한 감화를 끼쳐서 다른 사람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야 한다.

 

 

4월 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과 동거할 때에 그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고, 단순하며, 유대 신앙의 교훈과 전통에 익숙한 자들이었으나, 이제 갈릴리 출신 랍비의 사상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시기(마 20:20~24)와 갈등(요 3:25)을 겪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했다(마 26:56, 69~74).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였고(마 26:73), 산헤드린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았다(행 4:13).

우리 가족들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살 때 그들에게 미칠 크고 긍정적인 감화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들도 우리가 “예수와 함께 있던 줄”로 알 것이다.

가정에 미치는 감화력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권면을 보라. “가정은 검소하되, 언제나 유쾌한 말과 친절이 오가며 예모와 사랑이 영속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재림신도의 가정, 1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전 3:1~8을 읽어보세요. 우리는 이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 [전3:1~8]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ㅡ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모든 것을 때에 합당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권면한다. 

 

➋ 자신이 경험한 삶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대가 그것으로부터 배웠던 교훈과 배워야 했던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깨닫지 못했던 교훈에 대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대의 삶의 변화는 그대의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 각자가 서로 이야기해 보자.

 

➌ 그대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그대의 삶은 얼마나 심각하게 달랐을까요? 지금 그대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는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증언합니까?

※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았으면 불신자로서 사망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었을 것이다. 각자가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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