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하는 자살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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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10-15 09:06 조회2,844회 댓글0건본문
요즘 자살이 유행되고 있다.
죽는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죽겠지만 참 불행한 일이다.
이 자살도 유행을 탄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건듯하면 자살해 버린다.
살기 어렵다고 죽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직장 얻기 힘들다고 죽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혼자 죽고 아이들과 함께 죽고 투신해서 죽는다.
참 무서운 일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쉽게 포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값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렇다.
요3: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고 했다.
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구속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심지어는 예수까지 포기하셨다.
성경을 보면 관통해서 흐르는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구속사상이다.
이 사상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성경의 가장
무게가 있는 중심사상이다. 이것이 구속사상이다. 성경에 보면
나 한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예수의 오심과 오셔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 승천하심 등
이 모든 내용들이 모두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위한 목적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나 한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값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즉, 나의 한 사람의 값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을 내세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다.
모르면 우습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 업신여기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한 세월을 방탕하고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구속받은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고가의 값을 치루고 구속하였는가?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증거 하는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삶에서
하나님이 묻어나고 표현되고 보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대충 살고 살다가 어렵거든 죽어버리라고 부르신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를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살라고 불러내시고 구속하여 세워놓으셨다.
우리는 이점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값이 있게 구원받고 구속받았다고 해도 존대 받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천박한 신앙인이 된다. 삶이 천박해진다.
삶의 과정도 생각도 삶의 모양도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속담에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라는 말이 있다.
장자의 책에 보면 “원추”(鵷鶵)라는 새가 나온다.
이 새는 남해에서 출발해서 북해로 날아가는데 가는 도중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감로천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았다고 했다.
새도 하룻밤을 앉아 쉬어 가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고
먹을 것을 가려서 먹는다는데 내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고 선택을 받고 구속받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렇게 천박하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구속받은 사람은 그만한 값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값이 없고 천박해진다.
값이 있으면 그만한 책임도 주어지고 의무도 주어지고
높은 질서의식도 있어야 한다. 값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다.
죽는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죽겠지만 참 불행한 일이다.
이 자살도 유행을 탄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건듯하면 자살해 버린다.
살기 어렵다고 죽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직장 얻기 힘들다고 죽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혼자 죽고 아이들과 함께 죽고 투신해서 죽는다.
참 무서운 일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쉽게 포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값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렇다.
요3: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고 했다.
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구속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심지어는 예수까지 포기하셨다.
성경을 보면 관통해서 흐르는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구속사상이다.
이 사상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성경의 가장
무게가 있는 중심사상이다. 이것이 구속사상이다. 성경에 보면
나 한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예수의 오심과 오셔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 승천하심 등
이 모든 내용들이 모두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위한 목적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나 한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값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즉, 나의 한 사람의 값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을 내세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다.
모르면 우습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 업신여기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한 세월을 방탕하고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구속받은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고가의 값을 치루고 구속하였는가?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증거 하는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삶에서
하나님이 묻어나고 표현되고 보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대충 살고 살다가 어렵거든 죽어버리라고 부르신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를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살라고 불러내시고 구속하여 세워놓으셨다.
우리는 이점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값이 있게 구원받고 구속받았다고 해도 존대 받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천박한 신앙인이 된다. 삶이 천박해진다.
삶의 과정도 생각도 삶의 모양도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속담에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라는 말이 있다.
장자의 책에 보면 “원추”(鵷鶵)라는 새가 나온다.
이 새는 남해에서 출발해서 북해로 날아가는데 가는 도중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감로천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았다고 했다.
새도 하룻밤을 앉아 쉬어 가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고
먹을 것을 가려서 먹는다는데 내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고 선택을 받고 구속받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렇게 천박하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구속받은 사람은 그만한 값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값이 없고 천박해진다.
값이 있으면 그만한 책임도 주어지고 의무도 주어지고
높은 질서의식도 있어야 한다. 값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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