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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 - 1부 (11월 26일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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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16-09-21 11:09 조회1,9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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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일 안식일 프랑스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 - 1

 

리차드

 

저는 우리나라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얻은 해인 1956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정통파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향신료를 수출하는 매우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저희 가문은 모로코에서 약 500년간 살았습니다. 그 전에 저희는 세파르디 유대인으로 스페인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1492, 스페인 여왕의 통치 아래 유대인들은 가톨릭교로 개종하든지 모든 재산을 두고 그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 네덜란드, 터키, 모로코,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로 갔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모로코로 왔습니다.

부모님이 모로코를 떠나기로 한 것은 제가 8살 때였습니다. 유대인이 회교 국가에서 사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친척들은 점차적으로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일부는 캐나다로 갔고 나머지는 이스라엘로 갔지만, 제 아버지는 프랑스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저희는 1964년 마르세유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저희는 파리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남성복 옷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간단히 속셔츠, 속옷, 양말만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남성용 셔츠, 그 다음은 풀오버로 상품을 확대했고, 마침내 정장까지 팔게 되었습니다. 사업이 너무 잘 되어 그는 두 번째 가게를 열었습니다.

 

빌쥐프에서의 생활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집값이 모로코보다 너무 비쌌으므로, 저희는 유대인 도시라는 의미의 빌쥐프라고 부르는 교외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그곳에는 유대교 회당도, 랍비 학교도, 유대인 도시라고 불릴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9살이었던 저는 빌쥐프에서 공립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 삶은 유대인의 삶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자유분방했습니다. 11살 즈음, 저는 원하면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자유롭게 여자 아이들과 데이트를 했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했습니다. 음악과 춤이 있는 파티들을 열 수 있었고, 디스코텍과 극장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는 요즘보다 훨씬 안전했습니다.

1968년에 파리의 거리에서는 학생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대학교와 학교들이 폐쇄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사임을 했고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들의 구호는 자유, 독립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프랑스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제 부모님의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종교적인 측면

그렇지만 또한 제 가족에게는 종교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침, 점심, 저녁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시작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저는 안식일을 시작하기 위해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저희는 모든 유대교 의식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유대교 회당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작은 부지에 세 채가 연결된 빌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빌라에는 저의 사촌이 살았고, 두 번째에는 우리 가족이, 세 번째에는 젊은 랍비 학생(나중에 프랑스에서 훌륭한 랍비가 됨)이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종교를 가진 세 가정이 서로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안식일 예배 모임을 구성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안식일 아침, 그리고 유대교 축일들에는 마치 유대교 가정 회당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촌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주인에게 사촌이 살던 빌라를 우리가 기도의 장소로 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허락했고, 아버지는 그곳을 실제 유대교 회당처럼 꾸몄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토라 경전 두루마리가 들어있는 성궤까지 놓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그 빌라를 오직 기도의 장소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그곳이 매우 거룩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토라 경전 두루마리가 들어있는 그 성궤 안에 계셨습니다.

 

다급한 기도

어느 날 저는 형과 함께 놀다가 집 문을 세게 닫았습니다. 그 문은 특별했는데 매우 아름답고 비싼 장식 유리가 가운데에 위치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었습니다. 제가 문을 쾅 닫았을 때, 그 아름다운 유리가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정말 후회스러웠고, 불같은 성미를 가진 아버지가 두려웠습니다. 저는 저녁에 아버지가 집에 와서 제가 한 짓을 보는 것이 겁났습니다.

저는 회당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회당 문 열쇠를 갖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저는 성궤로 갔습니다. 그 앞에서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실재하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당신의 존재하심을 시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이 실제로 계신 것을 저에게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한 짓을 아실 것입니다. 제 아버지가 얼마나 쉽게 화를 내는지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버지가 오늘 저녁 집에 왔을 때 그 깨진 유리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는 그것이 불가능한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저녁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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