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로 인한 고아 (11월 16일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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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19-09-09 13:25 조회835회 댓글0건본문
11월 16일 안식일 르완다
대학살로 인한 고아
델핀(25세)
- 르완다는 인구의 약 90%가 주로 생계형 농업에 종사하는 시골 국가입니다.
- 르완다는 야생의 마운틴고릴라를 볼 수 있는 세 곳의 아프리카 국가 중 한 곳입니다. 고릴라는 르완다의 서부 지역을 아우르는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흔한 유인원입니다. 고릴라 관광 사업은 연간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르완다의 주요 활동입니다.
제 부모님은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기독교 고아원에서 부모님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곳 직원들에게 언제 엄마를 볼 수 있냐고 거듭 물었습니다.
“엄마를 보게 될 거야.”라며 그들은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엄마가 어디론가 가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직원들 중에는 대체 엄마로 지정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제 엄마는 브리짓이라는 이름의 재림교인이었습니다. 새 엄마는 저를 교회에 데려갔고 저는 그런 환경의 변화가 좋았습니다. 교인들은 친절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제가 7살 때 모든 고아원을 폐쇄했고 저는 한 가족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저는 그 가족이 제 삶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반대였습니다.
처음에 그 가족은 저를 애정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 또래의 무테시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사랑하듯이 저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저는 행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저는 학교 가기 전에 집을 청소하고 물을 길어 놓아야 했습니다. 집안일로 인해 저는 수업에 지각했고 선생님은 매질로 저를 벌했습니다. 때때로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저는 무테시와 함께 집에 돌아가기 위해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 건물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새 엄마는 그녀가 저의 문제의 원인임을 알았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노골적으로 증오심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식사 시간에 저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네 친 엄마가 아니야.”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무테시는 그녀의 엄마와 달리 저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는 엄마에게 혼이 나면서도 저에게 자신의 음식과 우유를 나눠 주었습니다. 무테시의 아빠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13살인 학년 말에 최악의 상황이 이르렀습니다. 저는 시험에 합격했지만 무테시는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무테시의 엄마는 저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다행히 고아들을 데리고 있던 다른 가족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 그 후 몇 년 동안 저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정부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되면서 제 삶은 점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모두를 미워했고, 모두가 저를 싫어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아시는지 궁금했고 그분도 미워했습니다.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냐마타 마을의 거리를 걷고 있다가 스피커 너머로 울리는 한 설교자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레드릭 무소니라는 이름의 그 설교자는 재림교회에서 전도회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온전하게 되고 싶습니까?”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마치 그가 저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잠시 귀를 기울였습니다. 저는 제 마음 속에 “평안하여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느꼈습니다.
설교자가 호소했을 때, 그 음성은 제 마음 속에 다시 말했고 저는 응답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설교자는 저를 위해 기도해주었고 저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저는 난생 처음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저는 그 전도회가 끝날 때 약 150명의 사람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저희는 2016년 5월에 르완다 전역의 2,027개 지역에서 3주간의 전도회를 마친 후 침례를 받은 기록적인 11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왔을 때 저는 마음속으로 평안과 자유를 느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저를 버린 적이 결코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서 저에게 부모님을 돌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날 저는 25살이고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편안한 가정의 부모라면, 가난한 아이를 돌보아 주세요. 아이는 성장한 후에도 그들이 들은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성난 말을 하지 마세요.
만약 여러분이 저처럼 친부모에게 양육 받지 못해 고통 받고 있다면, 평안은 오직 예수님을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예수님은 진정한 부모, 위로자, 그리고 편안한 안식처이십니다.
* 여청년이 1인칭 시점의 이번 이야기를 발표하도록 합니다.
* 델핀은 고등학생 때 키갈리 대학살 기념 지구를 방문함으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학살의 참상을 보고 나서 그녀는 6개월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 다음 링크에서 델핀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세요
* 이 이야기에 대한 중해상도 사진들을 페이스북 링크 bit.ly/fb-mq에서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사진들은 선교지소식이 발표되기 6일 전 일요일에 올려집니다
* 고해상도 사진 다운로드 링크
* 13째 안식일학교 특별 선교 계획 고해상도 사진 다운로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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