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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비 켈록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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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08-02-25 11:21 조회5,1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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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비 켈록의 생애
(John Harvey Kellogg; 1852-1943)

◆ 순서의 목적
재림교회의 초창기 선구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그의 업적과 실패를 되새기고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 주제 성구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 사전 준비
파워포인트 영상 자료를 띄우고 나레이터가 읽어 나가면서 순서를 진행한다.
(파워포인트 자료는 안식일학교 홈페이지 자료실에 있다.)

◆ 순서 진행
내레이터(남): 존 하비 켈록(John Harvey Kellogg)은 리빙스턴 카운티의 타이런(Tyrone, Livingston county)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존 프레스턴 켈록(John Preston Kellogg)이었는데 그의 선조는 메사추세츠 주의 설립자인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입니다. 그의 모친은 앤 제넷 스탠리 켈록(Ann Jeanette Stanley Kellogg)으로 자녀들을 사랑하고 개척자 시대의 가정 예술에 조예가 있었으며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내레이터(여): 죤 하비 켈록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과 의사, 외과 치료 장비의 발명가, 운동요법의 창안자, 물리요법과 영양학의 개척자, 그리고 경이적인 저술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의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켈록의 말을 들어봅시다.
음성(켈록): “나는 어쨌든 내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에 대하여 변명할 생각은 없다. 나는 본성적으로 의지가 강하고 호전적이며 투쟁적이고 게다가 회의적이다. 내가 휴식을 취하고 좋은 상황 가운데 있다면 나는 이성적으로 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내가 지치게 되면 이러한 성격들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스스로를 거의 통제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처럼 비평적인 시기에 내가 목사들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나는 이 당시 항상 위기 상황들과 나를 항상 짓누르는 것처럼 보이는 과외의 짐들로 인해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다.”
내레이터(남):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16명의 자녀들 중 하나였습니다. 10살 때 그는 미시건 주 베틀크릭에 있는 아버지의 빗자루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16세에 그는 공립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그 해에 졸업하였습니다. 1873년에 그는 의과 대학에 가도록 격려를 받았는데 이는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이 학비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레이터(여): 1876년 의과대학의 2년 과정을 마친 후 24세의 나이로 그는 미시건 주 베틀크릭에 있는 건강 개혁협회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이 협회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이러한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엘렌 화잇의 요청에 의한 설립된 협회였습니다. 켈록 박사의 관리 하에서 이 병원은 성장하고 발전하여 베틀크릭 요양소로서 세계적인 인정과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레이터(남): 그 후에 이 병원에서 J. C. 페니(J. C. Penney), 몽고메리 와드(Montgomery Ward),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듀랑(Will Durant), 알프레드 듀퐁(Alfred Dupont), 록펠러(John D. Rockefeller), 버뱅크(Luther Burbank), 발명가 에디슨(Thomas Edison),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호머 로드히버(Homer Rodeheaver), 어드미럴 버드(Admiral Byrd) 등이 그 곳에서 치료를 받을 만큼 명성이 높았습니다. 1900년대가 가까웠을 때에 켈록 박사는 교회 지도자들이 모든 재림교회 의료원을 관리하는 것에 대하여 지도자들과 다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베틀크릭 요양소의 관리권을 얻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내레이터(여): 그런데 그는 또한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이상한 이론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903년에 그는 ‘산 성전’(The Living Temple)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것 범신론을 조심스럽게 다룬 것이었습니다. 엘렌 화잇은 그에게 많은 개인적인 경고의 편지들을 보냈지만 그는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켈록 박사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베틀크릭에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동안에 어느 누구보다도 재림교회 사업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도록 공헌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강의들과 50권 이상이나 되는 저술들도 베틀크릭 요양소의 명성과 함께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켈록은 그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는 매우 힘든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내레이터(남): 초기에 그는 엘렌 화잇과 그의 건강 기별의 강력한 옹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신조와 실험들에 대하여 수정토록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교회를 앞질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목사들이 비교적 교육받지 못했고, 특히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있어서 건강 개혁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의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당시의 대총회장 다니엘스(A. G. Daniells)에 대해 특별한 반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극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2,000명이 넘는 직원들을 두고 있었던 반면에, 교회는 모든 교역자 수를 모두 합쳐 1,500명에 불과했습니다.
내레이터(여): 엘렌 화잇은 그에게 의료사업을 교회로부터 분리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말도록 경고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그가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켈록이 그녀를 불신임하려는 반면, 엘렌 화잇은 그를 반역에서 건지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1901년의 대총회 기간동안 그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에게 계속적인 조언을 주었고 충고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충고는 완전히 무시되었고 1902년에 베틀크릭 요양소가 전소되었을 때, 그녀는 이것을 켈록의 가르침과 정책에 대한 심판으로 보았습니다.
내레이터(남): 결국, 1907년 11월 10일 베틀크릭 교회는 켈록의 이름을 녹명책에서 제외시켰는데 이는 30년 이상 재림교회에 영향을 끼쳐 온 그의 비극적인 결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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