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안식일학교 I (‘첫 번째 추수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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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08-04-10 17:14 조회3,586회 댓글0건본문
추수감사절 안식일학교 I
(‘첫 번째 추수감사절’)
<순서 설명>
추수감사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청교도 이민자들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줌으로써 그들의 어려운 상황과 감사드리는 신앙적인 마음자세를 조명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마음을 강조하는 이야기식의 순서이다.
<준비 사항>
▶ 이야기를 전할 이야기 할 사람(여성)의 의상은 남루한 옛날 패션으로 그 당시의 모습으로 준비하여 사실적인 현장감을 최대한 살린다.
▶ 음향효과를 준비하여 해당되는 내용이 나오면 무대 뒤에서 들리게 한다.
(ex: 배경음악,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바람 소리, 인디언들의 괴성, 총 쏘는 소리, 동물 소리, 배의 기적 소리 등…) (공립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순서 내용>
▶ 첫 찬미: 찬미가 633장 ‘넓은 들에 익은 곡식’
▶ 기 도
▶ 교장 인사
▶ 사회자: 매해 맞이하는 추석(또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참으로 감격스럽고 풍요로운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역사적 축제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이 맞이했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어떠했는지 그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한 여인을 직접 만나보시겠습니다…
'첫 번째 추수 감사절(The First Thanksgiving Day)'
1620년 영국 플리머스(Plymouth)의 부두에는 배 하나가 정착해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후일에 역사적으로 알려질 사람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가난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낯선 땅으로 떠나는 그 사람들은 순례자들이었습니다.
낯선 땅에 가면 인디언들이 쳐들어 올 것도 알았고
이미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해적들의 손에 아니면, 사나운 바다의 허리케인 푹풍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험한 고난의 길을 떠나려하는 그들은 이미 여러 척의 배가
같은 항로의 순례의 항해에서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파도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숨을 내던지며 떠나가는 순례의 길! 그들은 왜 이 험한 길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 사람들이 살고 있던 영국이라는 나라에는 한 왕이 있었습니다.
국왕이 믿는 신앙을 온 국민에게 강요하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려는 신앙의 양심을 따르고자 했던 그 사람들은 남의 눈을 피하여 숨어서 드려야하는 예배로 인해서 갖은 수모와 고통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저희의 신앙을 위해 정든 나라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들여서 가꾸어온 생활 터를 버리고 아늑했던 집까지 포기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며 조국을 떠나려하는 그들은 모두 한 희망을 품은 채 메이플라워 (Mayflower)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춥고 습기 찬 배안은 102명의 순례자들로 차 있었고,
마실만한 물이나 씻을 물도 없이 마르고 딱딱한 빵 조각에 허기를 달래면서
끝없는 고통의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굳어진 빵 조각 속에는 벌레가 우글거렸고,
산같이 크고 높은 무시무시한 파도가 갑판 위를 때리고 덮칠 때마다
배안은 공포와 어지러움으로 절망의 늪으로 빠지곤 하였습니다.
기나긴 항해에서 수없이 만나는 폭풍우와 회오리바람은
배를 두 조각으로 부수어버릴 듯 요동하곤 하였습니다.
63일간의 죽음의 바다와의 싸움에서 기진맥진해진 어느 개인 날 아침,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까만 점 하나, 땅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지!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새 땅- 새 안식처가 보인 것이었습니다.
배가 점점 육지에 다다르자 모래가 깔린 해변과 그 위의 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아메리카라는 땅은 무척 거칠고 생소해 보여 불안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있는 인디언들이 창을 던지며 뛰어나올 것도 같았습니다.
이젠 그들이 안착할 곳을 찾아야했습니다.
배가 드나들고 외부와 소식이 닿을 수 있는 항구가 가까우면서도
마실 물이 있고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밭이 있는 그런 곳을 찾아야했습니다.
이리저리 떼 지어 다니면서 찾고 또 찾다가 결국 그들이 원하던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시냇물이 흐르고 큰 바위가 우뚝 서있으며 경작할 땅이 있는 바로 그곳을
'뉴 플리머스(New Plymouth)'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들 순례자들은 이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배가 영국으로 다시 떠나기 전에 빨리 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임시로 배안에 거처할 수도 있었으나 배는 곧 떠나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매서운 겨울 날씨 때문에 집을 짓는 일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겨울 동안 먹을 음식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무뿌리도 먹어야 했고
야생 조류들을 잡아먹거나 바닷가의 조개를 주워서 먹어야했습니다.
고국 땅의 고향집에서 먹었던 맛있는 음식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을 괴롭힌 것은 인디언들의 공격이었습니다.
인디언의 공격 신호가 늘 그들을 따라다녔으며 총을 가진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망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 맞이한 그 겨울은 유난히도 지독하게 추웠습니다.
으시시한 바람과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했고 얼음 조각이 날리는 듯한 눈보라와 씨름하면서 모닥불 주위에 앉아 한없이 기도드리곤 하였습니다.
외로움과 절망감을 떨치려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그 해의 그 첫 겨울에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죽어서 묻히는 숫자가 늘어가면서 살아남은 무리들의 모습도 점점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거의 지나갔을 무렵에는 함께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의 반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인디언의 공격도 더욱 살벌해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긴 추위가 끝나고 처음 맞는 봄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봄볕을 쬐고 있던 움막 쪽으로 한 인디언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서움에 하얗게 질려 있었지요.
그런데 그 인디언은 갑자기 자기 손을 내밀면서 "웰컴!(Welcome)"이라고 하였어요.
이상한 일이었어요! 인디언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요…
그의 이름은 사모셋(Samoset)이었고 그들과 쉽게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이민 정착자들과 인디언들 간의 역사적 친교가 문을 열게 되었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동물을 잡는 방법과 야생 과일을 찾아내는 방법, 그리고 옥수수를 심는 법과 물고기를 잡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 한 가지는 인디언들이 밭에 씨를 뿌린 후에는 잡아온 물고기를 한 마리씩 묻는 것이었는데 바로 거름으로 만드는 지혜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4월이 되자 우리를 싣고 와서 함께 지내던 Mayflower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때 배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례자들은 섭섭함과 서글픔과 두려움, 그리고 두고 온 고향에 대한 미련으로 말없이 눈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배를 다시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놓고 기도드리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 자유의 땅 뿐이었으니까요
그 해 여름 그들은 열심히 땅을 일구고 밭을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기적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피땀 흘려 가꾼 푸른 초원과 들판위에는
온갖 과일과 곡식과 먹을 것들로 가득가득 차고 넘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감사와 기쁨이 말없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먹을 음식과 누워 잘 수 있는 집이 있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고 마음껏 기도드릴 수 있는 평화의 자유가 있었으니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축제를 열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축제를 말입니다.
이웃의 친절한 인디언들도 많이 초청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감사의 파티를 열게 된 것입니다.
칠면조 요리와 거위 요리부터 시작해서 사슴 바베큐와 호박 찜,그리고 옥수수 빵과 블루베리 파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또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들의 진정한 감사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삼일 동안 계속된 기쁨의 축제는 신대륙 미국의 역사상 첫 번째의 추수 감사절로 기록되었고,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러 1863년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의해 미국의 국가 공휴일로 선포되었습니다.
믿음의 시련과 절망의 시련, 그리고 외로움의 시련… 그리고 가장 힘든 시련이었던 배고픔의 시련들… 그러나 끊임없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과 축복들…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리던 그들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야기하는 사람이 조용히 사라진다.)
▶ 사회자: "미국 신대륙의 역사적인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추수감사절의 절실한 의미를 되새기면서 기쁘게 맞이한 오늘의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럼, 지금 이 시간에는 그 첫 번째 추수 감사절에서 믿음의 순례자들이 불렀던 감사의 찬미를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 특별 찬미: (8명의 혼성사중창으로 준비하되 의상을 초기 이민자들의 의상으로 입고 나와서 부르도록 한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
<순서 설명>
추수감사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청교도 이민자들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줌으로써 그들의 어려운 상황과 감사드리는 신앙적인 마음자세를 조명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마음을 강조하는 이야기식의 순서이다.
<준비 사항>
▶ 이야기를 전할 이야기 할 사람(여성)의 의상은 남루한 옛날 패션으로 그 당시의 모습으로 준비하여 사실적인 현장감을 최대한 살린다.
▶ 음향효과를 준비하여 해당되는 내용이 나오면 무대 뒤에서 들리게 한다.
(ex: 배경음악,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바람 소리, 인디언들의 괴성, 총 쏘는 소리, 동물 소리, 배의 기적 소리 등…) (공립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순서 내용>
▶ 첫 찬미: 찬미가 633장 ‘넓은 들에 익은 곡식’
▶ 기 도
▶ 교장 인사
▶ 사회자: 매해 맞이하는 추석(또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참으로 감격스럽고 풍요로운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역사적 축제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이 맞이했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어떠했는지 그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한 여인을 직접 만나보시겠습니다…
'첫 번째 추수 감사절(The First Thanksgiving Day)'
1620년 영국 플리머스(Plymouth)의 부두에는 배 하나가 정착해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후일에 역사적으로 알려질 사람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가난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낯선 땅으로 떠나는 그 사람들은 순례자들이었습니다.
낯선 땅에 가면 인디언들이 쳐들어 올 것도 알았고
이미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해적들의 손에 아니면, 사나운 바다의 허리케인 푹풍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험한 고난의 길을 떠나려하는 그들은 이미 여러 척의 배가
같은 항로의 순례의 항해에서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파도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숨을 내던지며 떠나가는 순례의 길! 그들은 왜 이 험한 길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 사람들이 살고 있던 영국이라는 나라에는 한 왕이 있었습니다.
국왕이 믿는 신앙을 온 국민에게 강요하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려는 신앙의 양심을 따르고자 했던 그 사람들은 남의 눈을 피하여 숨어서 드려야하는 예배로 인해서 갖은 수모와 고통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저희의 신앙을 위해 정든 나라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들여서 가꾸어온 생활 터를 버리고 아늑했던 집까지 포기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며 조국을 떠나려하는 그들은 모두 한 희망을 품은 채 메이플라워 (Mayflower)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춥고 습기 찬 배안은 102명의 순례자들로 차 있었고,
마실만한 물이나 씻을 물도 없이 마르고 딱딱한 빵 조각에 허기를 달래면서
끝없는 고통의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굳어진 빵 조각 속에는 벌레가 우글거렸고,
산같이 크고 높은 무시무시한 파도가 갑판 위를 때리고 덮칠 때마다
배안은 공포와 어지러움으로 절망의 늪으로 빠지곤 하였습니다.
기나긴 항해에서 수없이 만나는 폭풍우와 회오리바람은
배를 두 조각으로 부수어버릴 듯 요동하곤 하였습니다.
63일간의 죽음의 바다와의 싸움에서 기진맥진해진 어느 개인 날 아침,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까만 점 하나, 땅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지!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새 땅- 새 안식처가 보인 것이었습니다.
배가 점점 육지에 다다르자 모래가 깔린 해변과 그 위의 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아메리카라는 땅은 무척 거칠고 생소해 보여 불안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있는 인디언들이 창을 던지며 뛰어나올 것도 같았습니다.
이젠 그들이 안착할 곳을 찾아야했습니다.
배가 드나들고 외부와 소식이 닿을 수 있는 항구가 가까우면서도
마실 물이 있고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밭이 있는 그런 곳을 찾아야했습니다.
이리저리 떼 지어 다니면서 찾고 또 찾다가 결국 그들이 원하던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시냇물이 흐르고 큰 바위가 우뚝 서있으며 경작할 땅이 있는 바로 그곳을
'뉴 플리머스(New Plymouth)'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들 순례자들은 이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배가 영국으로 다시 떠나기 전에 빨리 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임시로 배안에 거처할 수도 있었으나 배는 곧 떠나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매서운 겨울 날씨 때문에 집을 짓는 일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겨울 동안 먹을 음식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무뿌리도 먹어야 했고
야생 조류들을 잡아먹거나 바닷가의 조개를 주워서 먹어야했습니다.
고국 땅의 고향집에서 먹었던 맛있는 음식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을 괴롭힌 것은 인디언들의 공격이었습니다.
인디언의 공격 신호가 늘 그들을 따라다녔으며 총을 가진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망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 맞이한 그 겨울은 유난히도 지독하게 추웠습니다.
으시시한 바람과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했고 얼음 조각이 날리는 듯한 눈보라와 씨름하면서 모닥불 주위에 앉아 한없이 기도드리곤 하였습니다.
외로움과 절망감을 떨치려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그 해의 그 첫 겨울에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죽어서 묻히는 숫자가 늘어가면서 살아남은 무리들의 모습도 점점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거의 지나갔을 무렵에는 함께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의 반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인디언의 공격도 더욱 살벌해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긴 추위가 끝나고 처음 맞는 봄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봄볕을 쬐고 있던 움막 쪽으로 한 인디언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서움에 하얗게 질려 있었지요.
그런데 그 인디언은 갑자기 자기 손을 내밀면서 "웰컴!(Welcome)"이라고 하였어요.
이상한 일이었어요! 인디언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요…
그의 이름은 사모셋(Samoset)이었고 그들과 쉽게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이민 정착자들과 인디언들 간의 역사적 친교가 문을 열게 되었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동물을 잡는 방법과 야생 과일을 찾아내는 방법, 그리고 옥수수를 심는 법과 물고기를 잡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 한 가지는 인디언들이 밭에 씨를 뿌린 후에는 잡아온 물고기를 한 마리씩 묻는 것이었는데 바로 거름으로 만드는 지혜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4월이 되자 우리를 싣고 와서 함께 지내던 Mayflower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때 배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례자들은 섭섭함과 서글픔과 두려움, 그리고 두고 온 고향에 대한 미련으로 말없이 눈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배를 다시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놓고 기도드리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 자유의 땅 뿐이었으니까요
그 해 여름 그들은 열심히 땅을 일구고 밭을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기적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피땀 흘려 가꾼 푸른 초원과 들판위에는
온갖 과일과 곡식과 먹을 것들로 가득가득 차고 넘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감사와 기쁨이 말없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먹을 음식과 누워 잘 수 있는 집이 있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고 마음껏 기도드릴 수 있는 평화의 자유가 있었으니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축제를 열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축제를 말입니다.
이웃의 친절한 인디언들도 많이 초청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감사의 파티를 열게 된 것입니다.
칠면조 요리와 거위 요리부터 시작해서 사슴 바베큐와 호박 찜,그리고 옥수수 빵과 블루베리 파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또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들의 진정한 감사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삼일 동안 계속된 기쁨의 축제는 신대륙 미국의 역사상 첫 번째의 추수 감사절로 기록되었고,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러 1863년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의해 미국의 국가 공휴일로 선포되었습니다.
믿음의 시련과 절망의 시련, 그리고 외로움의 시련… 그리고 가장 힘든 시련이었던 배고픔의 시련들… 그러나 끊임없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과 축복들…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리던 그들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야기하는 사람이 조용히 사라진다.)
▶ 사회자: "미국 신대륙의 역사적인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추수감사절의 절실한 의미를 되새기면서 기쁘게 맞이한 오늘의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럼, 지금 이 시간에는 그 첫 번째 추수 감사절에서 믿음의 순례자들이 불렀던 감사의 찬미를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 특별 찬미: (8명의 혼성사중창으로 준비하되 의상을 초기 이민자들의 의상으로 입고 나와서 부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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