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제안순서 ② 효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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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10-04-28 09:56 조회4,707회 댓글0건본문
5월 제안순서 ② 효도합시다!
◈ 주제 :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교회의 어르신들께 존경을 표하고 효도에 대해 배운다.
◈ 준비물 : 가슴에 달아드릴 카네이션 10송이, 화이트보드, 마커
◈ 진행방법
1) 가장 연로하신 열 분을 앞으로 모신다. 거동이 어려우면 그 자리에 계시게 한다.
2) 나이가 많으신 분부터 한 분 한 분 연세가 얼마인지 퀴즈를 내며 꽃을 달아드린다.
3) 꽃을 달아드리면서 그분들의 신앙에서 본받을만한 점에 대해 말한다.
3) 효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각각 여쭈어보고 모두가 듣도록 반복해 본다.
4) 꽃을 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면 다른 어르신들께 효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적절히 여쭙는다.
5) 효도에 대한 의견들을 종합해서 다시 한 번 새겨본다.
◈ 순서자료
1. 효의 정의 : 효란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이다. 유교의 기본적 윤리규범의 하나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경애(敬愛)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하는 도덕이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찬술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효(孝)>는 <노(老)>자의 생략체와 <자(子)>자가 결합되어 자식이 노인을 도와서 떠받든다는 뜻, 즉 <부모를 섬기는 일>을 나타내고 있다.
2. 효 이야기 1 : 아버지와 보물궤
아버지는 차츰 기력마저 떨어졌다. 노인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곰곰이 궁리했다. 드디어 한 생각이 떠올랐다. 해가 밝자 그는 목수를 찾아가서 큰 궤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에 자물쇠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물쇠를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유리가게에 가서 깨진 유리조각을 얻어왔다.
노인은 궤짝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그 속을 깨진 유리조각으로 채우고 난 다음에 단단히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부엌 식탁밑에 놓았다. 며칠 후에 아들들이 찾아와서 저녁을 먹다가 발에 걸리는 궤를 발견했다. "궤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라고 아들들이 물었다.
별 것 아니라고 노인은 말하면서 끝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아들들은 손으로 밀어봤지만 어찌나 무거운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에는 발로 차봤다. 그러자 속에서 뭔가 달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한 평생을 두고 몰래 저축해온 금화로 가득차 있는게 틀림없다."
이렇게 세 아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보물궤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세 아들은 번갈아가며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다. 첫주에는 작은 아들이 와서 살면서 아버지를 돌보고 둘째 주에는 가운데 아들이, 그리고 셋째 주에는 큰아들이 아버지를 돌보며 궤를 지켰다.
드디어 아버지는 병들어 죽었다. 이제부터는 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세 아들은 호화로운 장례를 치렀다. 그들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 집으로 달려와서 열쇠를 찾았다. 그리고 궤를 열어 봤으나 그 속에는 깨진 유리조각들 뿐이었다. "우리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여 오다니 아버지도 너무 하셨다."
이렇게 큰아들이 소리질렀다. 그제서야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둘째 아들이 형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어? 만약에 이 궤만 없었던들 우리 모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릴 생각은 하지 않았을게 아냐." 이 말을 들으면서 막내 아들은 하염없이 뉘우침의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그래도 큰 아들은 혹시나 하고 궤 속의 유리조각들을 모두 쏟았다. 그랬더니 밑 바닥에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3. 효 이야기 2 : 향덕의 효행
향덕은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로 지금의 웅천주(熊川州:지금의 공주) 판적향(板績鄕)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善),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여 향리에서 추앙을 받았다고 합니다. 향덕도 효순(孝順)으로써 부모를 받들었다. 755년(경덕왕 14) 큰 흉년이 들고 유행병이 번져 그의 부모도 굶주리고 병까지 들었다. 더욱이 어머니는 악창[癰]이 나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임으로써 병이 낳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왕에게 보고되어 왕은 그에게 벼 300곡(斛:3,000斗), 집 1채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리고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삼강행실도》에 글과 그림으로 실렸고, 1741년(영조 17)에는 충청도관찰사이던 조영국(趙榮國)이 찬한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충남유형문화재 99)'가 공주시 소학동에 세워져 전한다. -효 세계화 운동본부
◈ 주제 :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교회의 어르신들께 존경을 표하고 효도에 대해 배운다.
◈ 준비물 : 가슴에 달아드릴 카네이션 10송이, 화이트보드, 마커
◈ 진행방법
1) 가장 연로하신 열 분을 앞으로 모신다. 거동이 어려우면 그 자리에 계시게 한다.
2) 나이가 많으신 분부터 한 분 한 분 연세가 얼마인지 퀴즈를 내며 꽃을 달아드린다.
3) 꽃을 달아드리면서 그분들의 신앙에서 본받을만한 점에 대해 말한다.
3) 효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각각 여쭈어보고 모두가 듣도록 반복해 본다.
4) 꽃을 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면 다른 어르신들께 효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적절히 여쭙는다.
5) 효도에 대한 의견들을 종합해서 다시 한 번 새겨본다.
◈ 순서자료
1. 효의 정의 : 효란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이다. 유교의 기본적 윤리규범의 하나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경애(敬愛)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하는 도덕이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찬술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효(孝)>는 <노(老)>자의 생략체와 <자(子)>자가 결합되어 자식이 노인을 도와서 떠받든다는 뜻, 즉 <부모를 섬기는 일>을 나타내고 있다.
2. 효 이야기 1 : 아버지와 보물궤
아버지는 차츰 기력마저 떨어졌다. 노인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곰곰이 궁리했다. 드디어 한 생각이 떠올랐다. 해가 밝자 그는 목수를 찾아가서 큰 궤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에 자물쇠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물쇠를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유리가게에 가서 깨진 유리조각을 얻어왔다.
노인은 궤짝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그 속을 깨진 유리조각으로 채우고 난 다음에 단단히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부엌 식탁밑에 놓았다. 며칠 후에 아들들이 찾아와서 저녁을 먹다가 발에 걸리는 궤를 발견했다. "궤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라고 아들들이 물었다.
별 것 아니라고 노인은 말하면서 끝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아들들은 손으로 밀어봤지만 어찌나 무거운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에는 발로 차봤다. 그러자 속에서 뭔가 달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한 평생을 두고 몰래 저축해온 금화로 가득차 있는게 틀림없다."
이렇게 세 아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보물궤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세 아들은 번갈아가며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다. 첫주에는 작은 아들이 와서 살면서 아버지를 돌보고 둘째 주에는 가운데 아들이, 그리고 셋째 주에는 큰아들이 아버지를 돌보며 궤를 지켰다.
드디어 아버지는 병들어 죽었다. 이제부터는 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세 아들은 호화로운 장례를 치렀다. 그들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 집으로 달려와서 열쇠를 찾았다. 그리고 궤를 열어 봤으나 그 속에는 깨진 유리조각들 뿐이었다. "우리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여 오다니 아버지도 너무 하셨다."
이렇게 큰아들이 소리질렀다. 그제서야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둘째 아들이 형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어? 만약에 이 궤만 없었던들 우리 모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릴 생각은 하지 않았을게 아냐." 이 말을 들으면서 막내 아들은 하염없이 뉘우침의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그래도 큰 아들은 혹시나 하고 궤 속의 유리조각들을 모두 쏟았다. 그랬더니 밑 바닥에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3. 효 이야기 2 : 향덕의 효행
향덕은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로 지금의 웅천주(熊川州:지금의 공주) 판적향(板績鄕)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善),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여 향리에서 추앙을 받았다고 합니다. 향덕도 효순(孝順)으로써 부모를 받들었다. 755년(경덕왕 14) 큰 흉년이 들고 유행병이 번져 그의 부모도 굶주리고 병까지 들었다. 더욱이 어머니는 악창[癰]이 나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임으로써 병이 낳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왕에게 보고되어 왕은 그에게 벼 300곡(斛:3,000斗), 집 1채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리고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삼강행실도》에 글과 그림으로 실렸고, 1741년(영조 17)에는 충청도관찰사이던 조영국(趙榮國)이 찬한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충남유형문화재 99)'가 공주시 소학동에 세워져 전한다. -효 세계화 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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