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모범순서 - 자랑스런 재림 군인 (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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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3-04 15:25 조회6,459회 댓글0건첨부파일
- 데스몬드 도스.pptx (1.3M) 399회 다운로드 DATE : 2011-03-04 15: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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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랑스런 재림 군인
◈ 주제 : 재림군인 데스몬드 도스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는다.
◈ 운영팁 : 유용한 신앙 서적에 담긴 경험담을 소개하는 것은 권장할만하다.
◈ 진행방법 : 아래 자료를 숙지하여 실감나게 전달한다. 서회에서 도서를 구할 수 있다.
◈ 순서자료
1) 어린 시절 : 어린 시절 데스몬드가 교회학교에 다닐 때 청소당번을 맡아 칠판지우개를 털게 되었다. 도스는 밖에서 지우개만 털면 곧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나가지 않고 지우개를 비비기만 해도 깨끗해 보임을 기억하고 겉만 깨끗하게 보이도록 비벼 칠판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분필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으나 겉은 깨끗해 보였다. 담임 넬 케터만 선생님은 이를 알아채고 지우개를 들어 ‘탁’하며 맞부딪치자 먼지가 풀썩하고 날렸다. 선생님은 “데스몬드야, 애초부터 올바로 할 가치가 없는 일은 전혀 할 가치가 없는 일이란다.” 하는 교훈을 주었다. 밖으로 나가 다시 지우개를 털면서 데스몬드는 선생님이 가르쳐준 교훈을 평생 잊지 않았다. 데스몬드의 어머니는 성경을 공부하고 신실한 교인이 되어 아들에게 매우 신앙적인 감화를 끼쳤으나 그의 아버지는 경제생활 때문에 관심이 있었음에도 교회를 멀리했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술과 담배도 했지만 가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가족의 신앙에 합류하였다.
2) 어린 시절의 위험들 : 심부름으로 우유병을 들고 가다 울퉁불퉁한 길에서 넘어져 병에 베어 손을 꿰맸다. 인대와 근육이 다 끊어져 왼손을 쓰지 못할거라 했으나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어린 치료로 나았다. 한 번은 암벽 꼭대기에서 놀다 넘어져 무릎을 다쳤으나 가족들에게 숨겼다. 나중에 신음하는 그를 병원으로 옮겼더니 의사는 감염된 독이 전신에 퍼져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가 핫팩으로 정성껏 간호하여 기적적으로 나았다. 그의 동생도 고열로 죽을 수 있다고 했으나 가족들의 기도로 나았다. 또 한 번은 친구와 화물열차에서 뛰어내리기를 하다가 심하게 다쳤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아버지에게 혁대로 심하게 맞아 피가 흘러 차라리 기차에서 뛰어내릴 때 죽는 게 나을 뻔 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말리며 데스몬드에게 아들을 그렇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호소했다. 18살 때는 바닷가에서 조카의 공을 건져주려다 썰물 때문에 역으로 헤엄치지 못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를 받았다. 젊은이가 되었을 때는 상황이 어떻든지 옳은 일을 위해 서며 좋은 모본을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3) 군생활 : 데스몬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교육 후 제재소에 일하다가 입대 전에는 조선소에서 일했다. 1941년 12월 7일 친구와 주말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어느 일요일에 갑자기 듣고 있던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이 끊기며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했으니 군인들은 즉시 자기 부대에 보고하라는 요청이 흘러나왔다. 그의 친구는 제대를 한 달 남겨둔 상태였고 그 역시 18세 이상이어서 등록을 해야 했다. 데스몬드는 병무청 직원에게 처음부터 재림교인이므로 안식일에는 임무 수행을 할 수 없고 살인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병무청 직원은 다른 사람이 다 그와 같이 생각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만일 그렇다면 전쟁이 날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대답했다. 병무청에서는 그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등록하겠다고 했으나 데스몬드는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전쟁을 돕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 했기에 이를 거절하고 비무장요원으로 구분해달라고 요청했다. 데스몬드는 우드 목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으며 1942년 4월 1일 정식으로 입대했다. 그 후 안식일 문제로 통행증을 끊기 위해 애를 많이 썼고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여러 번 상관들을 만나 사정을 말하며 안식일을 준수했다. 한 번은 상관이 “눈곱만큼의 기회만 보이면 군법회의에 회부할꺼야.”라고 위협했지만 “눈곱만큼이라도 기회를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군 생활 중에 후에 간호학을 공부한 도로시라는 아가씨와 사귀어 편지를 교환하며 용기를 얻고 휴가 때마다 만나다가 결혼했다. 부대를 여러 번 옮기는 중에 어떤 군인이든 잘 대접했던 마음씨 좋은 집사님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융통성 있고 지혜롭게 고된 훈련을 잘 견뎌내며 안식일을 준수했다. 데스몬드는 뜨거운 사막의 부대에서 근무할 때 결국 군생활 부적격자로 제대위원회에 소환되었다. 이는 정신이상자를 의미했기 때문에 그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의 중대가 전 연대에서 환자 요청수가 가장 낮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안식일에는 환자를 돌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편안하게 제대하는 편을 택하지 않고 군대에 남았다. 그러나 끝까지 총을 잡지 않았고 아내와는 계속해서 떨어져 생활해야 했다. 고된 훈련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를 거쳐 괌에 이르렀으며 이때 미국은 일본의 공격으로 잃었던 기지들을 하나씩 어렵게 되찾으면서 전쟁은 3년째로 접어들었다. 괌과 레이테에서 너무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으며 레이테에서 가장 친했던 두 친구를 잃었다.
4) 기적의 날 : 데스몬드가 속한 77사단은 오키나와로 파견되었다. 섬을 가로질러 마에다 단층애라고 불리는 12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다. 그 꼭대기는 넓이가 69미터에서 92미터쯤인데 뒤편으로 경사가 져 있었다. 77사단의 그 120미터 높이 절벽 앞에서 야영하면서 그 단층애의 꼭대기와 뒤편에 있는 일본군을 사살해야 했다. 1945년 4월 29일 마에다 단층애를 점령하기 위한 실제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전투는 병사들이 단층애 꼭대기에 올라간 후에 거기서 전개되었다. 일본군들은 참호와 은신처들을 많이 파 놓았으며 숨겨진 총이 멋모르는 미군들을 사살하기 위해 총구를 내밀고 있었다. 셀 수 없는 산과 산호바위의 오키나와 지역은 일본군들이 단호한 방어를 하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이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데스몬드는 전투에 나가기 전에 기도를 하자고 제안했으며 한때 채식한다고 놀림 받았던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중위는 데스몬드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데스몬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먼저 A중대가 싸워 상당히 많이 죽었으므로 데스몬드가 속한 B 중대원은 언덕 위를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아무도 죽지 않고 8내지 9개의 일본군 토치카를 파괴했다. 이 뉴스는 미국 본토까지 전달되었으며 모두들 도스의 기도덕분이라고 말했다. 5월 5일 안식일 아침 데스몬드는 위생병으로 단층애에 올라갔으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일본군 진지를 파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미군이 던진 수류탄이 참호 속에서 대거 폭발하면서 일본군은 각 은신처에서 사방으로 뛰어 나왔고 공격은 맹렬했다. 후퇴 명령으로 퇴각하면서 데스몬드는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차례로 밧줄에 달아 내렸다. 그는 “주님 한 사람을 더 구하도록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며 5시간 동안 모든 부상자를 구출해 냈다. 그는 피로 범벅되었지만 거짓말 같이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데스몬드가 단층애에서 내려 보낸 병사의 수는 계산상 100명이었으나 그는 결코 50명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가운데 숫자인 75명으로 숫자를 조정했으며 본부로부터 추천을 받아 미국 최고의 훈장인 국회 명예훈장을 받게 되었다. 후에 수류탄을 발로 막아 다리를 다치고 팔에 총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의식을 잃었다. 수술을 받은 후 미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데스몬드는 가족을 만나고 대총회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 잔디밭에서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트루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분보다 그 훈장을 더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명예롭고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질병으로 고통 받았다. 부상치료와 폐결핵, 각혈과 청력 상실, 부인의 암진단과 교통사고로 인한 즉사, 재혼과 방광암 진단 및 치료, 그러나 그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경험을 책으로 엮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주된 관심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을 격려하여 주님께 여러분의 삶을 바치게 하고 곧 오실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프란세스와 나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바쳤으며 그분께 우리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베푸셨으며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국회 명예훈장(미국 최고 훈장) 내용 : 미국 대통령은 국회의 이름으로 데스몬드 T. 도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합니다.
*계급 및 소속 : 일등병, 미 육군, 의무대, 제307 보병, 제77보병 사단
*장소와 일자 : 류큐섬 오키나와 우라소에 무라 근방, 1945년 4월 29-5월 21일
*복무 시작한 곳 : 버지니아 린츠버그 *출생 : 버지니아 린츠버그
*표창내용 : 그는 120미터 높이의 톱니 같은 단층애를 제 1대대가 공격했을 때 중대 위생병이었다. 우리 군대가 정상을 차지했을 때 강력한 집중포화 그리고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이 그들에게 쏟아졌으며 부상자 약 75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후퇴했다. 도스 일병은 참호에 숨으려 하지 않고 많은 부상자와 함께 포화가 휩쓴 그 지역에 남아 그들을 한 명씩 단층애 가장자리로 운반하여 로프를 맨 들것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까지 달아 내렸다. 5월 2일에 그는 동일한 단층애에서 격렬한 소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으면서 전선 앞 180미터에 있는 한 부상병을 구출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그는 강력한 방어진지가 구축된 동굴을 공격하다가 부상한 병사 4명을 구조했는데 비 오듯 하는 수류탄을 뚫고 동굴 입구에 있는 적군으로부터 7미터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 동료의 상처를 붕대로 싸맸으며 포화 속에서도 4번을 왕복해 그들을 안전한 장소로 끌어냈다. 5월 5일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적군의 포탄과 소총 사격을 무릅쓰고 한 포병 장교를 도왔다. 그는 환자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소총 사격에서 안전한 장소로 옮겼으며, 근처에 포와 박격포가 떨어짐에도 수고를 감수하며 혈장을 공급했다. 또 나중에 한 미군 병사가 동굴에서 발사한 총알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도스 일병은 적군이 있는 곳에서 7미터쯤에 쓰러진 그에게로 포복해 가서 도움을 주었으며 계속 적의 화기에 노출되면서도 그를 90미터쯤 끌고 와서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5월 21일 슈리 근처 고지를 야간 공격할 때 그의 중대원들은 참호로 숨었으나 그는 노출된 지역에 남아 잠입하는 일본군으로 오인될 위험을 대담하게 감수하면서, 수류탄 복발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기까지 부상자들을 도왔다. 참호에 있는 다른 위생병을 부르는 대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상처에 조치를 취했으며 들것을 나르는 병사들이 그에게 와서 그를 참호로 나르기 시작할 때까지 5시간을 기다렸다. 그 세 명은 적군의 탱크 공격을 받았으며 도스 일병은 더 심한 부상을 입은 사병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들것에서 기어 내려와 다른 병사를 먼저 돌보도록 들것을 나르는 병사들에게 요청했다. 들것을 나르는 병사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그는 다시 총에 맞아 팔 하나가 복합골절이 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엄청난 인내를 발휘하여 소총 개머리판을 그의 부러진 팔에 부목으로 대고 울퉁불퉁한 땅 위 275미터를 기어 응급치료소까지 왔다. 절망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발휘한 이 괄목할 만한 용기와 단호한 결단을 통해 도스 일병은 많은 병사의 생명을 구했다. 그의 이름은 제77보병사단 전체에 의무에 대한 부름을 훨씬 뛰어넘고 초월하는 뛰어난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1945년 10월 12일 해리 트루만
- 출처 : 데스몬드 도스/ 시조사 출판
◈ 주제 : 재림군인 데스몬드 도스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는다.
◈ 운영팁 : 유용한 신앙 서적에 담긴 경험담을 소개하는 것은 권장할만하다.
◈ 진행방법 : 아래 자료를 숙지하여 실감나게 전달한다. 서회에서 도서를 구할 수 있다.
◈ 순서자료
1) 어린 시절 : 어린 시절 데스몬드가 교회학교에 다닐 때 청소당번을 맡아 칠판지우개를 털게 되었다. 도스는 밖에서 지우개만 털면 곧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나가지 않고 지우개를 비비기만 해도 깨끗해 보임을 기억하고 겉만 깨끗하게 보이도록 비벼 칠판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분필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으나 겉은 깨끗해 보였다. 담임 넬 케터만 선생님은 이를 알아채고 지우개를 들어 ‘탁’하며 맞부딪치자 먼지가 풀썩하고 날렸다. 선생님은 “데스몬드야, 애초부터 올바로 할 가치가 없는 일은 전혀 할 가치가 없는 일이란다.” 하는 교훈을 주었다. 밖으로 나가 다시 지우개를 털면서 데스몬드는 선생님이 가르쳐준 교훈을 평생 잊지 않았다. 데스몬드의 어머니는 성경을 공부하고 신실한 교인이 되어 아들에게 매우 신앙적인 감화를 끼쳤으나 그의 아버지는 경제생활 때문에 관심이 있었음에도 교회를 멀리했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술과 담배도 했지만 가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가족의 신앙에 합류하였다.
2) 어린 시절의 위험들 : 심부름으로 우유병을 들고 가다 울퉁불퉁한 길에서 넘어져 병에 베어 손을 꿰맸다. 인대와 근육이 다 끊어져 왼손을 쓰지 못할거라 했으나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어린 치료로 나았다. 한 번은 암벽 꼭대기에서 놀다 넘어져 무릎을 다쳤으나 가족들에게 숨겼다. 나중에 신음하는 그를 병원으로 옮겼더니 의사는 감염된 독이 전신에 퍼져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가 핫팩으로 정성껏 간호하여 기적적으로 나았다. 그의 동생도 고열로 죽을 수 있다고 했으나 가족들의 기도로 나았다. 또 한 번은 친구와 화물열차에서 뛰어내리기를 하다가 심하게 다쳤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아버지에게 혁대로 심하게 맞아 피가 흘러 차라리 기차에서 뛰어내릴 때 죽는 게 나을 뻔 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말리며 데스몬드에게 아들을 그렇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호소했다. 18살 때는 바닷가에서 조카의 공을 건져주려다 썰물 때문에 역으로 헤엄치지 못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를 받았다. 젊은이가 되었을 때는 상황이 어떻든지 옳은 일을 위해 서며 좋은 모본을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3) 군생활 : 데스몬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교육 후 제재소에 일하다가 입대 전에는 조선소에서 일했다. 1941년 12월 7일 친구와 주말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어느 일요일에 갑자기 듣고 있던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이 끊기며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했으니 군인들은 즉시 자기 부대에 보고하라는 요청이 흘러나왔다. 그의 친구는 제대를 한 달 남겨둔 상태였고 그 역시 18세 이상이어서 등록을 해야 했다. 데스몬드는 병무청 직원에게 처음부터 재림교인이므로 안식일에는 임무 수행을 할 수 없고 살인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병무청 직원은 다른 사람이 다 그와 같이 생각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만일 그렇다면 전쟁이 날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대답했다. 병무청에서는 그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등록하겠다고 했으나 데스몬드는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전쟁을 돕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 했기에 이를 거절하고 비무장요원으로 구분해달라고 요청했다. 데스몬드는 우드 목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으며 1942년 4월 1일 정식으로 입대했다. 그 후 안식일 문제로 통행증을 끊기 위해 애를 많이 썼고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여러 번 상관들을 만나 사정을 말하며 안식일을 준수했다. 한 번은 상관이 “눈곱만큼의 기회만 보이면 군법회의에 회부할꺼야.”라고 위협했지만 “눈곱만큼이라도 기회를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군 생활 중에 후에 간호학을 공부한 도로시라는 아가씨와 사귀어 편지를 교환하며 용기를 얻고 휴가 때마다 만나다가 결혼했다. 부대를 여러 번 옮기는 중에 어떤 군인이든 잘 대접했던 마음씨 좋은 집사님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융통성 있고 지혜롭게 고된 훈련을 잘 견뎌내며 안식일을 준수했다. 데스몬드는 뜨거운 사막의 부대에서 근무할 때 결국 군생활 부적격자로 제대위원회에 소환되었다. 이는 정신이상자를 의미했기 때문에 그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의 중대가 전 연대에서 환자 요청수가 가장 낮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안식일에는 환자를 돌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편안하게 제대하는 편을 택하지 않고 군대에 남았다. 그러나 끝까지 총을 잡지 않았고 아내와는 계속해서 떨어져 생활해야 했다. 고된 훈련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를 거쳐 괌에 이르렀으며 이때 미국은 일본의 공격으로 잃었던 기지들을 하나씩 어렵게 되찾으면서 전쟁은 3년째로 접어들었다. 괌과 레이테에서 너무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으며 레이테에서 가장 친했던 두 친구를 잃었다.
4) 기적의 날 : 데스몬드가 속한 77사단은 오키나와로 파견되었다. 섬을 가로질러 마에다 단층애라고 불리는 12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다. 그 꼭대기는 넓이가 69미터에서 92미터쯤인데 뒤편으로 경사가 져 있었다. 77사단의 그 120미터 높이 절벽 앞에서 야영하면서 그 단층애의 꼭대기와 뒤편에 있는 일본군을 사살해야 했다. 1945년 4월 29일 마에다 단층애를 점령하기 위한 실제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전투는 병사들이 단층애 꼭대기에 올라간 후에 거기서 전개되었다. 일본군들은 참호와 은신처들을 많이 파 놓았으며 숨겨진 총이 멋모르는 미군들을 사살하기 위해 총구를 내밀고 있었다. 셀 수 없는 산과 산호바위의 오키나와 지역은 일본군들이 단호한 방어를 하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이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데스몬드는 전투에 나가기 전에 기도를 하자고 제안했으며 한때 채식한다고 놀림 받았던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중위는 데스몬드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데스몬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먼저 A중대가 싸워 상당히 많이 죽었으므로 데스몬드가 속한 B 중대원은 언덕 위를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아무도 죽지 않고 8내지 9개의 일본군 토치카를 파괴했다. 이 뉴스는 미국 본토까지 전달되었으며 모두들 도스의 기도덕분이라고 말했다. 5월 5일 안식일 아침 데스몬드는 위생병으로 단층애에 올라갔으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일본군 진지를 파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미군이 던진 수류탄이 참호 속에서 대거 폭발하면서 일본군은 각 은신처에서 사방으로 뛰어 나왔고 공격은 맹렬했다. 후퇴 명령으로 퇴각하면서 데스몬드는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차례로 밧줄에 달아 내렸다. 그는 “주님 한 사람을 더 구하도록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며 5시간 동안 모든 부상자를 구출해 냈다. 그는 피로 범벅되었지만 거짓말 같이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데스몬드가 단층애에서 내려 보낸 병사의 수는 계산상 100명이었으나 그는 결코 50명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가운데 숫자인 75명으로 숫자를 조정했으며 본부로부터 추천을 받아 미국 최고의 훈장인 국회 명예훈장을 받게 되었다. 후에 수류탄을 발로 막아 다리를 다치고 팔에 총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의식을 잃었다. 수술을 받은 후 미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데스몬드는 가족을 만나고 대총회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 잔디밭에서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트루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분보다 그 훈장을 더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명예롭고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질병으로 고통 받았다. 부상치료와 폐결핵, 각혈과 청력 상실, 부인의 암진단과 교통사고로 인한 즉사, 재혼과 방광암 진단 및 치료, 그러나 그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경험을 책으로 엮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주된 관심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을 격려하여 주님께 여러분의 삶을 바치게 하고 곧 오실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프란세스와 나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바쳤으며 그분께 우리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베푸셨으며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국회 명예훈장(미국 최고 훈장) 내용 : 미국 대통령은 국회의 이름으로 데스몬드 T. 도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합니다.
*계급 및 소속 : 일등병, 미 육군, 의무대, 제307 보병, 제77보병 사단
*장소와 일자 : 류큐섬 오키나와 우라소에 무라 근방, 1945년 4월 29-5월 21일
*복무 시작한 곳 : 버지니아 린츠버그 *출생 : 버지니아 린츠버그
*표창내용 : 그는 120미터 높이의 톱니 같은 단층애를 제 1대대가 공격했을 때 중대 위생병이었다. 우리 군대가 정상을 차지했을 때 강력한 집중포화 그리고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이 그들에게 쏟아졌으며 부상자 약 75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후퇴했다. 도스 일병은 참호에 숨으려 하지 않고 많은 부상자와 함께 포화가 휩쓴 그 지역에 남아 그들을 한 명씩 단층애 가장자리로 운반하여 로프를 맨 들것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까지 달아 내렸다. 5월 2일에 그는 동일한 단층애에서 격렬한 소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으면서 전선 앞 180미터에 있는 한 부상병을 구출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그는 강력한 방어진지가 구축된 동굴을 공격하다가 부상한 병사 4명을 구조했는데 비 오듯 하는 수류탄을 뚫고 동굴 입구에 있는 적군으로부터 7미터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 동료의 상처를 붕대로 싸맸으며 포화 속에서도 4번을 왕복해 그들을 안전한 장소로 끌어냈다. 5월 5일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적군의 포탄과 소총 사격을 무릅쓰고 한 포병 장교를 도왔다. 그는 환자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소총 사격에서 안전한 장소로 옮겼으며, 근처에 포와 박격포가 떨어짐에도 수고를 감수하며 혈장을 공급했다. 또 나중에 한 미군 병사가 동굴에서 발사한 총알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도스 일병은 적군이 있는 곳에서 7미터쯤에 쓰러진 그에게로 포복해 가서 도움을 주었으며 계속 적의 화기에 노출되면서도 그를 90미터쯤 끌고 와서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5월 21일 슈리 근처 고지를 야간 공격할 때 그의 중대원들은 참호로 숨었으나 그는 노출된 지역에 남아 잠입하는 일본군으로 오인될 위험을 대담하게 감수하면서, 수류탄 복발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기까지 부상자들을 도왔다. 참호에 있는 다른 위생병을 부르는 대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상처에 조치를 취했으며 들것을 나르는 병사들이 그에게 와서 그를 참호로 나르기 시작할 때까지 5시간을 기다렸다. 그 세 명은 적군의 탱크 공격을 받았으며 도스 일병은 더 심한 부상을 입은 사병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들것에서 기어 내려와 다른 병사를 먼저 돌보도록 들것을 나르는 병사들에게 요청했다. 들것을 나르는 병사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그는 다시 총에 맞아 팔 하나가 복합골절이 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엄청난 인내를 발휘하여 소총 개머리판을 그의 부러진 팔에 부목으로 대고 울퉁불퉁한 땅 위 275미터를 기어 응급치료소까지 왔다. 절망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발휘한 이 괄목할 만한 용기와 단호한 결단을 통해 도스 일병은 많은 병사의 생명을 구했다. 그의 이름은 제77보병사단 전체에 의무에 대한 부름을 훨씬 뛰어넘고 초월하는 뛰어난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1945년 10월 12일 해리 트루만
- 출처 : 데스몬드 도스/ 시조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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