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제안순서 - 세계 선교의 기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6-24 08:58 조회4,955회 댓글0건본문
22. 세계 선교의 기원
◈ 주제 : 지역별로 선교의 기원을 알아본다.
◈ 운영팁 : 안식일학교를 통해 감동적인 선교지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 순서자료 (내용이 많으면 반으로 나누어 두 주 동안 소개한다.)
1) 러시아 :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그러했듯이 미국에 이민 와서 재림성도가 된 러시아 인들이 제일 먼저 러시아에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이들은 본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에게 신앙 서적을 보내 자신들의 믿음을 나누고자 하였다. 1882년에 게하르트 퍼크(Gerhardt Perk)는 크림 반도 출신의 이웃으로부터 자기가 1879년에 미국에서 건너온 흥미 있지만 위험한 문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퍼크는 그 사람에게 애원하여 앤드루즈(J. N. Andrews)가 쓴 <셋째 천사의 기별, The Third Angel’s Message>을 빌려 볼 수 있었다. 퍼크는 이 책자를 비밀리에 읽은 후, 미국의 출판사에 더 많은 정보를 보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더 많은 서적을 읽고 재림 기별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안식일 준수는 망설였다. 당시 그는 영국 및 해외 성서 공회의 회원이 되었다. 퍼크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서적을 판매하면서 여러 번 재난당할뻔 하였으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당시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성경 진리를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 외에 재림교단의 서적도 같이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부 러시아에서 재림 기별을 전한 사람은 퍼크만은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독일계 러시아 인으로서 사우스다코타에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비록 그는 80세가 넘었고 언어 장애가 있었으며 무일푼 신세였지만, 자신의 장화를 팔아 여비의 일부를 충당하면서까지 믿음을 나누기 위해 러시아로 귀국하였다. 그는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매우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시력이 나쁜 체하며 마을 시장에 들러서 사람들에게 글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읽어주는 사람이 책 내용에 관심을 보이면 그 책자를 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서적을 전파하는 일은 당시 러시아에서 불법 행위였다. 그 지역 사제가 당국에 알려 그를 체포하려 하자 주위 사람들은 거의 앞을 못 보는 노인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사제에게 돌을 던졌다. 이 “위험하지 않은 늙은이”는 이런 식으로 1년 이상 선교하였다.
러시아에서 재림 기별은 전하는 이들은 많았다. 특히 콘라디(L. R. Conradi)라는 인물은 주목할 만한데, 그는 독일 태생으로서 미국에 이민 와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다. 1886년에 목사가 되어 유럽으로 돌아간 그는 유럽에 당도하자마자 게하르트 퍼크로부터 러시아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러시아 당국은 당시 목사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배틀크릭 소재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협회에서 잠시 일한 경력이 있는 콘라디는 입국 시 인쇄업자라고 신고하였다. 그러나 콘라디는 러시아 당국에 신고한 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입국하자 공개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을 전하였다. 그와 퍼크는 약 50명의 안식일 준수 성도들을 찾아냈는데, 침례교와 루터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곤 했었다. 어떤 경우 그 두 사람은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특히 안식일 기별을 전할 때 그러했다. 그러나 콘라디의 이런 모든 활동은 전도와 개종을 금하는 러시아 국법에 저촉되는 행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이 버드 불랏(Berde Bulat)에 당도하여, 교회를 조직하고, 흑해에서 공개적으로 침례를 베풀기 전까지는 선교 활동이 순조로웠다. 침례 당시 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려고 구경꾼들이 지붕 위로 몰려들었다. 현지 당국자들은 이런 활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당국은 콘라디와 퍼크를 체포하여, 유대교 이단 교리를 전파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침례를 주며, 러시아 인들을 개종시킨다는 혐의로 기소하였다. 두 사람은 40일 간 좁은 감옥에서 조악한 식사와 협박에 시달렸다. 그러나 결국은 주(駐) 상페테르부르그 미국 대사관이 그들의 석방을 얻어냈다. 석방된 후, 그들이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그들은 복음 전파가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콘라디는 마침내 독일에 정착하여, 그 후 35년 간 유럽에서 재림 교단을 이끌었다. 한편, 더 많은 재림성도들이 미국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후 귀한 기별을 전하였다. 그들 중 더러는 시베리아로 추방된 자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희생을 통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은 러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 전파될 수 있었다.
2) 태평양 군도 : 존 테이(John Tay)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배를 만드는 목수였으며, 피트케언(Pitcairn) 아일랜드를 들러보는 것이 오랜 희망이었다. 그 섬은 바운티(Bounty) 호에서 폭동을 일으킨 악명 높은 폭도들이 1790년에 최종적으로 정착한 섬이다. 테이는 뱃삯을 지불하기 위해 선상에서 일하면서 배를 여섯 번 갈아타고 1886년 드디어 피트케언 섬에 당도하였다. 그보다 10년 전에 제임스 화잇과 존 러프버로우는 이 섬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섬 주민들이 읽기를 희망하며 재림 기별을 담은 책자를 한 상자 보냈다. 그러나 이 상자는 10년 간 창고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책자를 읽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이 상자는 좀 더 젊은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은 토요일이 진정한 안식일임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증거에 감동을 받았으나, 신앙생활을 바꾸는 일에는 주저하였다. 바로 그 때 테이가 섬에 도착하였고, 다음 배가 올 때까지 피트케언 섬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요청하였다. 도착 후 첫 일요일에 교회에서 강연을 요청 받은 소위 자칭 “선교사”인 그는 제칠일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 하였다. 회중은 진리를 확신하는 무리와 불신하는 무리로 나뉘었다. 그러나 테이가 성경 공부를 지도하면서 모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5주 후에 그가 섬을 떠날 쯤에는 섬의 주민 모두가 제칠일 안식일 교리를 받아들였다. 피트케언 섬 주민이 개종하였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접한 미국의 재림성도들은 감동하였으며, 남태평양에서 재림 기별을 본격적으로 전해야 할 시점임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당시 이 지역은 섬을 왕래하던 정기 증기선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1887년 대총회는 20,000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가능한 한 빨리 선박을 건조하거나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시기 상조였던 것이다. 대총회는 기별 전파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다시 테이를 피트케언 섬에 보내어 신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테이는 그 고립된 섬에 자기를 데려다 줄 선박을 구하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A. J. 처드니(Chudney)도 피트케언에 파송되었으나 더 큰 재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섬까지 타고 갈 배편이 여의치 않자 값싼 배를 구입하여 떠났으나, 태평양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선원들과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이 재난을 접한 교단 지도자들은 교단이 직접 선교용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드니가 재난을 당하고 존 테이도 피트케언으로 타고 갈 배를 구하지 못해 좌절하자 대총회는 수많은 남태평양 섬 선교 봉사에 사용될 견고한 선박 건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선교용 선박 건조 사업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미국 내 안식일학교 학생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어른들은 동전과 지폐를 가지고 나왔고, 아이들은 빵을 구워 팔아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못이나 널빤지 및 범포(帆布) 등을 구입하는데 일조하였다. 안식일학교 학생들은 선박 이름을 제안하라는 요청도 받았다. 글래드 타이딩스(Glad Tidings, 기쁜 소식)라는 이름을 제의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업을 탄생시킨 섬 이름을 따서 명명하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재림교단 최초의 선교용 선박의 이름을 피트케언이라고 명명하였다. 드디어 1890년 10월, 길이 100피트에 하중이 120톤에 달하고 두 돛을 단 스쿠너 범선이 7명의 선원과 3명의 선교사 부부를 태우고 출범하였다. 첫 정박지는 당연히 피트케언 섬이었으며, 거기서 게이츠(E. H. Gates)와 리드(A. J. Read)는 섬주민 82명에게 침례를 주고 교회를 세웠다. 몇 주 후에 배는 타이티와 라로통가(Rarotonga), 사모아, 피지 및 노포크(Norfolk) 섬 지역 등지로 항해하였다. 기항지마다 승선했던 선교사들은 모임을 갖고 서적을 배포하며 기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년 후 피트케언 호는 처녀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그러나 인명 피해도 있었다. 피지에서 재림 기별을 전하기 위해 남아 있었던 존 테이는 선교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선장 마치(J. O. March)는 뉴질랜드에서 선박이 재정비되는 도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선교 사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1890년부터 1900년까지 10년 동안 피트케언 호는 여섯 번 항해하였다. 그 때쯤에는 증기선 선편이 개선되어 교단은 더 이상 자체 선교용 선박을 보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10년 동안에 태평양 군도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피트케언의 용감한 선교 활동은 다른 어떤 단일 사건보다도 재림교단의 선교와 선교 봉사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3) 남미 : 재림교회 선교 초창기에 활동했던 많은 선교사들은 어떤 “조직”의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자력으로 선교하였다. 남미 지역 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미 대륙에서 주로 쓰이던 언어가 스페인 어와 포르투갈 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로 처음 개종한 사람들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및 브라질 등지로 이민 온 독일어나 프랑스어권 사람들이었다. 그 이유는 주로, 당시 교단에 스페인 어나 포르투갈 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언어로 된 책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미에 당도한 최초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프랑스에서 1885년에 보도우(D. T. Bourdeau)를 통해 재림 기별을 받아들이고, 칠레로 이민 왔던 클라우디오와 안토니에타 드 데시그네(Antonieta de Dessignet)였다. 그 무렵에 아르헨티나의 각기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두 가정이 유럽으로부터 받아 본 정기 간행물을 통해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다. 북부 아르헨티나에 살던 이탈리아 출신 페베리니(Peverini) 부부는 프랑스어 판 <시조>인 <레시그네드땅>의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주장을 조소하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페베리니 부인은 이탈리아에 사는 자신의 오빠로부터 재림교회의 잡지 한 부를 구해 읽은 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다. 남부 아르헨티나에 자리잡은 스위스 및 프랑스 침례교인촌에 거주하던 훌리오와 이다 두페르튀스(Julio와 Ida Dupertuis) 부부도 유사한 경험을 하였다. 두페르튀스 가족은 이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침례교인촌에 거주하던 다른 가족들에게도 전도하여 자신들이 발견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1889년에 그들은 배틀크릭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들의 질문에 관심을 갖게 된 교단 지도자들은 남미 지역 선교를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자금 문제는 늘 있었고, 자금은 늘 안식일학교협회로부터 나왔다. 안식일학교협회는 기꺼이 이 사업을 추진하여 1890년대 후반에 헌금을 모아 남미 선교에 투입하였다.
최초의 안식일학교 선교 헌금은 호주에 재림교회가 세워졌던 1885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선교 헌금은 1889년과 1890년 피트케언 선교 사업이 시작될 때까지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피트케언 선교 사업이 시행된 후부터 안식일학교는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전 세계 재림교회 선교 사업을 적극 지원하는 안식일학교의 두 번째 대규모 선교 사업은 1890년에 추진된 남미 선교 사업이었다. 그 때 이후 안식일학교는 전 세계 각지 선교를 위한 재정 지원을 멈춘 적이 없었다.
재림교회가 교단의 지원을 받는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전이었던 1890년도 초 조지 리펠(George Riffel)은 캔자스 주 출신의 독일 및 러시아계의 농가 네 가족을 이끌고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모두 교단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선교지로 떠난 것이다. 새로 재림교인으로 개종한 리펠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독일 및 러시아 출신 주민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편지를 썼던 적이 있었다. 주민 중에 한 사람이 누군가가 함께 안식일을 지킬 사람이 있으면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 답장은 리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기에 충분하였다. 1891년 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최초의 “정식” 선교사들을 남미에 보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스페인 어나 포르투갈 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세 명의 문서 전도인은 독일어나 영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을 팔며 전도하였다. 두페르튀스 가족으로부터 요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서 전도인들이 보낸 보고서도 접하고, 리펠 씨 부부로부터 요청도 있어서 1894년 대총회는 웨스트팔(F. H. Westphal)을 파견하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파라과이 및 브라질에서 선교 사업을 감독하게 하였다. 웨스트팔은 이들 나라와 칠레에서 20년 이상 선교 사업에 헌신하였다. 소박한 꿈이 큰일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다. 문서 전도를 통해 진리를 전하는 겸손한 평신도들이 전 세계에 재림 신앙을 전파하는 큰일을 해냈다. 이런 일들은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일이다.
4) 남아공화국 : 윌리엄 헌트는 18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채광하다가 러프버로우를 통해 안식일 진리를 받아들였다. 수년 후에 남아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를 채취하던 헌트는 두 명의 네덜란드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각기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제칠일인 토요일이 안식일임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우연인 것처럼 보였으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섭리하셨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헌트가 산책하고 있을 때, 두 농부 중 한 명인 조지 반 드루텐(George van Druten)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다이아몬드 채광인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헌트는 그 날 일하는 대신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을 준수하던 두 사람은 남아공화국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그렇게 만났다. 헌트는 드루텐과 또 혼자서 안식일을 지키던 피터 베슬즈(Pieter Wessels)라는 사람을 미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과 연락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 두 남아공화국인은 네델란드어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배틀크릭에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접한 교단은 50파운드(노동자 1년 임금보다 큰 액수임)라는 거금을 보내어 선교사 여행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88년 대총회 회의에서 누군가가 소위 “마게도냐 사람의 요청” 서한을 낭독하였다. 대표들은 편지 내용을 듣고 매우 감동한 나머지 즉석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를 불렀다. 다음해 7월 로빈슨(D. A. Robinson)이 이끄는 7명으로 구성된 선교단이 케이프 타운으로 출발하였다. 한편, 남아공화국의 두 안식일 준수 성도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약 40명에게 전도하여 신자로 만들었다. 남아공화국 선교 사업은 피터의 아버지인 조하네즈 베슬즈의 농장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된 아버지 베슬즈는 조국의 재림교회 개척에 크게 투자하였다. 얼마 안가 이 교회는 출판사와 대학, 요양원 및 기타 다른 기관을 거느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5) 로디지아 : 아프리카 대륙 선교의 시발점은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였다. 1894년 개최된 대총회는 베슬즈 가족의 촉구를 받아들여 남아공화국으로부터 동쪽에 위치한 마타벨레랜드(Matabeleland)에 선교 활동 거점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는 영국이 로디지아의 막강한 마타벨레 족을 진압한 직후였다. 제국 건설자이며 남아공화국 케이프 식민지의 수상인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이름을 딴 로디지아는 이제 막 유럽의 영향을 접하게 되었다. 로빈슨과 피터 베슬즈는 로즈와 다소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만남 후에 로즈로부터 봉인한 봉투를 받았다. 두 사람은 불라와요(Bulawayo)라는 도시 인근 12,000에이커 이상의 부지를 하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후일 솔루시 선교 본부가 될 사업 설립에 있어서 부지를 얻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솔루시 선교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한 가지 난관은 북아메리카에서 불거졌다. 존즈(A.T. Jones)는 정부의 특혜를 받아 교회와 국가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주도하였다. 존즈와 기타 <종교자유의 파수꾼(Sentinel of Religious Liberty)> 지의 편집자들은 선교사들이 “양심을 팔아 아프리카의 더러운 국물”을 얻어냈다고 비난하였다. 존즈는 재림교단이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그 사실을 원수들이 알게 되고, 일요일 준수령과 같은 조치로 미국을 기독교화하려는 무리들을 상대하는 재림교단의 입장이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영향력이 컸던 존즈는 1895년 대총회에서 대표들을 설득하여,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땅을 받지 말자는 표결을 하도록 몰아부쳤다. 한편, 엘렌 화잇은 멀리 호주에서 대총회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존즈와 다른 사람들이 느헤미야서를 읽도록 권유하였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위해 왕들과 권세자들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종교 자유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자들은 어떤 호의도 저버려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도움을 베풀어주도록 하는 손길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편지 11, 1895)
엘렌 화잇이 지적함에 따라 대총회는 솔루시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결정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선교 사업에 관한 교단 내부의 장애물은 극복된 셈이었다. 그러나 로디지아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였다. 선교사들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최근에 정복당한 마타벨레 족이 영국군에 항거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5개월 동안 철수해야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다시 현지에 돌아왔을 때는, 주민들이 기근에 봉착하였으며, 우역(牛疫)이 발병하여 최근 전쟁에서 살아남은 몇 마리 안 되는 선교 본부의 소들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더구나 선교사들은 말라리아라는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필자는 현재 솔루시 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조그만 묘지를 방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선교사들은 1890년대에 말라리아 예방약으로 알려진 유일한 약품인 키니네 사용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두 사망하였다. 그들은 왜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 사용을 거부했을까? 해로운 약품을 사용하지 말라는 엘렌 화잇의 권고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약을 융통성 없이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기까지 “충성스런 건강 개혁자”였다. 1894년에 로디지아에 파송된 7명의 초기 선교사들 중에 1898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하였다. 그 중 두 명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캐이프에서 투병해야만 하였다. 결국 남은 사람은 소위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로운 약을 사용하는 것이 치명적인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여 키니네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엘렌 화잇이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발휘하라고 권고한 “상식적인 사고”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솔루시 선교를 위해 계속 봉사하며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2007년 현재 솔루시 선교 활동은 결실을 맺어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관할하는 3개 지회 소속 수침자 수가 5백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6) 중앙아메리카 : 1883년에 뉴욕에 거주하던 한 재림교인이 어떤 배의 선장에게 부탁하여 영국령이던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에 한 묶음의 책자를 보내도록 하였다. 선장은 별로 조심스럽지 않게 그 책자를 다루었지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선장은 선착장에 꾸러미를 던져놓고는 자기가 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흩어지는 책자들을 모아서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도 권하여 읽게 하였다. 그들 중 몇 명이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으며, 한 여성은 거기서 얻은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 지 몇 권을 바바도스에 사는 여동생에게 보냈다. 그 잡지들은, 몇 해 전 자녀들에게 참 안식일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던 어떤 여인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던 고테라우(E. Gauterau) 부인은 1885년에 온두라스 해안에서 떨어진 베이 아일랜즈(Bay Islands)로 돌아갔다. 베이 아일랜즈는 카리비아 해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녀가 태어난 곳이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6년간 자신의 믿음을 나누었을 때, 재림교단은 프랭크 허친스(Hutchins)를 그 곳에 보내어 고테라우 부인을 통해 기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안식일학교 학생들은 피트케언 섬 선교 당시와 마찬가지로 허친스가 중앙아메리카 연안 지역에 재림 기별을 전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선교용 선박(헤럴드 호)을 건조할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하였다. 로스크럭(A. Roskrug) 부인은 영국에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이고, 1888년에 고국인 안티구아로 돌아와서 교회 설립을 위한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가 안티구아에서 팔렸던 재림 기별 책자가 자메이카까지 흘러 들어갔다. 한 이태리계 미국인 재단사는 문서 전도자가 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1891년 멕시코에 재림 기별이 소개되었다. 그는 스페인어로 된 책자가 없었기 때문에 <각 시대의 대쟁투> 영문판을 팔았다.
7) 인도 : 다른 많은 지역에서와 같이 인도에서도 문서전도인들이 선교 초기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을 전하였다. 윌리엄 렝커(William Lenker)와 스트롭(A. T. Stroup)은 1893년 마드라스(Madras)에 도착하여 인도 주요 도시 주민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서적을 판매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했듯이 렝커와 스트롭이 인도에서 재림 기별을 처음으로 전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로 가는 길에 런던에 머물 때, 렝커는 인도에 이미 재림성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다. 그는 “인도에 이미 진리가 전파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는 것을 알고 내 가슴은 벅찼다.”고 술회하였다. 인도에 재림 기별이 처음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미국이나 유럽 혹은 호주로부터 흘러 들어온 책자를 통해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리 없는 책자는 모든 수단을 통틀어 비교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1894년에는 적어도 다섯 명의 문서 전도인이 인도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중의 세 명은 호주 출신이었다. 서적은 잘 팔렸으며, 이윽고 주민들은 서적을 타밀 어와 기타 지역 방언으로 번역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의 최초의 정식 직원은 조지아 버러스(Georgia Burrus), 후에 조지아 버제스(Georgia Burgess)였는데, 그는 1895년 1월 캘리포니아로부터 인도로 파송된 젊은 성경 교사였다. 그는 당시 다양한 인종이 얽혀 살고 있는 인도에 유일하게 파견된 재림교회의 공식 대표였다. 대담한 조지아 버러스 양은 여행 경비만 보조 받고 인도에 파송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녀는 인도에서 뱅골 어를 배우면서도 부업을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아프리카 출신 한 사람이 그녀를 재정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버러스 양은 인도에서 40년을 지내며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1895년 말에는 다른 선교사들도 인도에 파송되었다. 1898년에는 윌리엄 스파이서(William A. Spicer, 1922년에 대총회장이 되었음)가 도착하여 <오리엔탈 워치맨, Oriental Watchman>의 출판을 시작하였다.
재림 기별 선교 활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선교 활동이 처음부터 국제적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19세기에는 주로 북아메리카 지역에 선교 활동이 집중되었지만, 살펴보면 인적 자원은 물론 책자와 자금이 여러 지역으로부터 다른 여러 지역으로 이동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재림 기별 선교는 국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찌 우리 잊으랴!
◈ 주제 : 지역별로 선교의 기원을 알아본다.
◈ 운영팁 : 안식일학교를 통해 감동적인 선교지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 순서자료 (내용이 많으면 반으로 나누어 두 주 동안 소개한다.)
1) 러시아 :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그러했듯이 미국에 이민 와서 재림성도가 된 러시아 인들이 제일 먼저 러시아에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이들은 본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에게 신앙 서적을 보내 자신들의 믿음을 나누고자 하였다. 1882년에 게하르트 퍼크(Gerhardt Perk)는 크림 반도 출신의 이웃으로부터 자기가 1879년에 미국에서 건너온 흥미 있지만 위험한 문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퍼크는 그 사람에게 애원하여 앤드루즈(J. N. Andrews)가 쓴 <셋째 천사의 기별, The Third Angel’s Message>을 빌려 볼 수 있었다. 퍼크는 이 책자를 비밀리에 읽은 후, 미국의 출판사에 더 많은 정보를 보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더 많은 서적을 읽고 재림 기별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안식일 준수는 망설였다. 당시 그는 영국 및 해외 성서 공회의 회원이 되었다. 퍼크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서적을 판매하면서 여러 번 재난당할뻔 하였으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당시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성경 진리를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 외에 재림교단의 서적도 같이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부 러시아에서 재림 기별을 전한 사람은 퍼크만은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독일계 러시아 인으로서 사우스다코타에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비록 그는 80세가 넘었고 언어 장애가 있었으며 무일푼 신세였지만, 자신의 장화를 팔아 여비의 일부를 충당하면서까지 믿음을 나누기 위해 러시아로 귀국하였다. 그는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매우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시력이 나쁜 체하며 마을 시장에 들러서 사람들에게 글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읽어주는 사람이 책 내용에 관심을 보이면 그 책자를 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서적을 전파하는 일은 당시 러시아에서 불법 행위였다. 그 지역 사제가 당국에 알려 그를 체포하려 하자 주위 사람들은 거의 앞을 못 보는 노인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사제에게 돌을 던졌다. 이 “위험하지 않은 늙은이”는 이런 식으로 1년 이상 선교하였다.
러시아에서 재림 기별은 전하는 이들은 많았다. 특히 콘라디(L. R. Conradi)라는 인물은 주목할 만한데, 그는 독일 태생으로서 미국에 이민 와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다. 1886년에 목사가 되어 유럽으로 돌아간 그는 유럽에 당도하자마자 게하르트 퍼크로부터 러시아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러시아 당국은 당시 목사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배틀크릭 소재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협회에서 잠시 일한 경력이 있는 콘라디는 입국 시 인쇄업자라고 신고하였다. 그러나 콘라디는 러시아 당국에 신고한 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입국하자 공개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을 전하였다. 그와 퍼크는 약 50명의 안식일 준수 성도들을 찾아냈는데, 침례교와 루터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곤 했었다. 어떤 경우 그 두 사람은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특히 안식일 기별을 전할 때 그러했다. 그러나 콘라디의 이런 모든 활동은 전도와 개종을 금하는 러시아 국법에 저촉되는 행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이 버드 불랏(Berde Bulat)에 당도하여, 교회를 조직하고, 흑해에서 공개적으로 침례를 베풀기 전까지는 선교 활동이 순조로웠다. 침례 당시 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려고 구경꾼들이 지붕 위로 몰려들었다. 현지 당국자들은 이런 활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당국은 콘라디와 퍼크를 체포하여, 유대교 이단 교리를 전파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침례를 주며, 러시아 인들을 개종시킨다는 혐의로 기소하였다. 두 사람은 40일 간 좁은 감옥에서 조악한 식사와 협박에 시달렸다. 그러나 결국은 주(駐) 상페테르부르그 미국 대사관이 그들의 석방을 얻어냈다. 석방된 후, 그들이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그들은 복음 전파가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콘라디는 마침내 독일에 정착하여, 그 후 35년 간 유럽에서 재림 교단을 이끌었다. 한편, 더 많은 재림성도들이 미국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후 귀한 기별을 전하였다. 그들 중 더러는 시베리아로 추방된 자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희생을 통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은 러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 전파될 수 있었다.
2) 태평양 군도 : 존 테이(John Tay)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배를 만드는 목수였으며, 피트케언(Pitcairn) 아일랜드를 들러보는 것이 오랜 희망이었다. 그 섬은 바운티(Bounty) 호에서 폭동을 일으킨 악명 높은 폭도들이 1790년에 최종적으로 정착한 섬이다. 테이는 뱃삯을 지불하기 위해 선상에서 일하면서 배를 여섯 번 갈아타고 1886년 드디어 피트케언 섬에 당도하였다. 그보다 10년 전에 제임스 화잇과 존 러프버로우는 이 섬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섬 주민들이 읽기를 희망하며 재림 기별을 담은 책자를 한 상자 보냈다. 그러나 이 상자는 10년 간 창고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책자를 읽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이 상자는 좀 더 젊은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은 토요일이 진정한 안식일임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증거에 감동을 받았으나, 신앙생활을 바꾸는 일에는 주저하였다. 바로 그 때 테이가 섬에 도착하였고, 다음 배가 올 때까지 피트케언 섬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요청하였다. 도착 후 첫 일요일에 교회에서 강연을 요청 받은 소위 자칭 “선교사”인 그는 제칠일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 하였다. 회중은 진리를 확신하는 무리와 불신하는 무리로 나뉘었다. 그러나 테이가 성경 공부를 지도하면서 모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5주 후에 그가 섬을 떠날 쯤에는 섬의 주민 모두가 제칠일 안식일 교리를 받아들였다. 피트케언 섬 주민이 개종하였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접한 미국의 재림성도들은 감동하였으며, 남태평양에서 재림 기별을 본격적으로 전해야 할 시점임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당시 이 지역은 섬을 왕래하던 정기 증기선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1887년 대총회는 20,000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가능한 한 빨리 선박을 건조하거나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시기 상조였던 것이다. 대총회는 기별 전파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다시 테이를 피트케언 섬에 보내어 신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테이는 그 고립된 섬에 자기를 데려다 줄 선박을 구하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A. J. 처드니(Chudney)도 피트케언에 파송되었으나 더 큰 재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섬까지 타고 갈 배편이 여의치 않자 값싼 배를 구입하여 떠났으나, 태평양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선원들과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이 재난을 접한 교단 지도자들은 교단이 직접 선교용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드니가 재난을 당하고 존 테이도 피트케언으로 타고 갈 배를 구하지 못해 좌절하자 대총회는 수많은 남태평양 섬 선교 봉사에 사용될 견고한 선박 건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선교용 선박 건조 사업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미국 내 안식일학교 학생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어른들은 동전과 지폐를 가지고 나왔고, 아이들은 빵을 구워 팔아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못이나 널빤지 및 범포(帆布) 등을 구입하는데 일조하였다. 안식일학교 학생들은 선박 이름을 제안하라는 요청도 받았다. 글래드 타이딩스(Glad Tidings, 기쁜 소식)라는 이름을 제의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업을 탄생시킨 섬 이름을 따서 명명하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재림교단 최초의 선교용 선박의 이름을 피트케언이라고 명명하였다. 드디어 1890년 10월, 길이 100피트에 하중이 120톤에 달하고 두 돛을 단 스쿠너 범선이 7명의 선원과 3명의 선교사 부부를 태우고 출범하였다. 첫 정박지는 당연히 피트케언 섬이었으며, 거기서 게이츠(E. H. Gates)와 리드(A. J. Read)는 섬주민 82명에게 침례를 주고 교회를 세웠다. 몇 주 후에 배는 타이티와 라로통가(Rarotonga), 사모아, 피지 및 노포크(Norfolk) 섬 지역 등지로 항해하였다. 기항지마다 승선했던 선교사들은 모임을 갖고 서적을 배포하며 기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년 후 피트케언 호는 처녀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그러나 인명 피해도 있었다. 피지에서 재림 기별을 전하기 위해 남아 있었던 존 테이는 선교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선장 마치(J. O. March)는 뉴질랜드에서 선박이 재정비되는 도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선교 사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1890년부터 1900년까지 10년 동안 피트케언 호는 여섯 번 항해하였다. 그 때쯤에는 증기선 선편이 개선되어 교단은 더 이상 자체 선교용 선박을 보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10년 동안에 태평양 군도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피트케언의 용감한 선교 활동은 다른 어떤 단일 사건보다도 재림교단의 선교와 선교 봉사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3) 남미 : 재림교회 선교 초창기에 활동했던 많은 선교사들은 어떤 “조직”의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자력으로 선교하였다. 남미 지역 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미 대륙에서 주로 쓰이던 언어가 스페인 어와 포르투갈 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로 처음 개종한 사람들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및 브라질 등지로 이민 온 독일어나 프랑스어권 사람들이었다. 그 이유는 주로, 당시 교단에 스페인 어나 포르투갈 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언어로 된 책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미에 당도한 최초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프랑스에서 1885년에 보도우(D. T. Bourdeau)를 통해 재림 기별을 받아들이고, 칠레로 이민 왔던 클라우디오와 안토니에타 드 데시그네(Antonieta de Dessignet)였다. 그 무렵에 아르헨티나의 각기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두 가정이 유럽으로부터 받아 본 정기 간행물을 통해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다. 북부 아르헨티나에 살던 이탈리아 출신 페베리니(Peverini) 부부는 프랑스어 판 <시조>인 <레시그네드땅>의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주장을 조소하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페베리니 부인은 이탈리아에 사는 자신의 오빠로부터 재림교회의 잡지 한 부를 구해 읽은 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다. 남부 아르헨티나에 자리잡은 스위스 및 프랑스 침례교인촌에 거주하던 훌리오와 이다 두페르튀스(Julio와 Ida Dupertuis) 부부도 유사한 경험을 하였다. 두페르튀스 가족은 이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침례교인촌에 거주하던 다른 가족들에게도 전도하여 자신들이 발견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1889년에 그들은 배틀크릭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들의 질문에 관심을 갖게 된 교단 지도자들은 남미 지역 선교를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자금 문제는 늘 있었고, 자금은 늘 안식일학교협회로부터 나왔다. 안식일학교협회는 기꺼이 이 사업을 추진하여 1890년대 후반에 헌금을 모아 남미 선교에 투입하였다.
최초의 안식일학교 선교 헌금은 호주에 재림교회가 세워졌던 1885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선교 헌금은 1889년과 1890년 피트케언 선교 사업이 시작될 때까지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피트케언 선교 사업이 시행된 후부터 안식일학교는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전 세계 재림교회 선교 사업을 적극 지원하는 안식일학교의 두 번째 대규모 선교 사업은 1890년에 추진된 남미 선교 사업이었다. 그 때 이후 안식일학교는 전 세계 각지 선교를 위한 재정 지원을 멈춘 적이 없었다.
재림교회가 교단의 지원을 받는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전이었던 1890년도 초 조지 리펠(George Riffel)은 캔자스 주 출신의 독일 및 러시아계의 농가 네 가족을 이끌고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모두 교단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선교지로 떠난 것이다. 새로 재림교인으로 개종한 리펠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독일 및 러시아 출신 주민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편지를 썼던 적이 있었다. 주민 중에 한 사람이 누군가가 함께 안식일을 지킬 사람이 있으면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 답장은 리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기에 충분하였다. 1891년 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최초의 “정식” 선교사들을 남미에 보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스페인 어나 포르투갈 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세 명의 문서 전도인은 독일어나 영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을 팔며 전도하였다. 두페르튀스 가족으로부터 요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서 전도인들이 보낸 보고서도 접하고, 리펠 씨 부부로부터 요청도 있어서 1894년 대총회는 웨스트팔(F. H. Westphal)을 파견하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파라과이 및 브라질에서 선교 사업을 감독하게 하였다. 웨스트팔은 이들 나라와 칠레에서 20년 이상 선교 사업에 헌신하였다. 소박한 꿈이 큰일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다. 문서 전도를 통해 진리를 전하는 겸손한 평신도들이 전 세계에 재림 신앙을 전파하는 큰일을 해냈다. 이런 일들은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일이다.
4) 남아공화국 : 윌리엄 헌트는 18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채광하다가 러프버로우를 통해 안식일 진리를 받아들였다. 수년 후에 남아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를 채취하던 헌트는 두 명의 네덜란드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각기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제칠일인 토요일이 안식일임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우연인 것처럼 보였으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섭리하셨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헌트가 산책하고 있을 때, 두 농부 중 한 명인 조지 반 드루텐(George van Druten)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다이아몬드 채광인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헌트는 그 날 일하는 대신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을 준수하던 두 사람은 남아공화국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그렇게 만났다. 헌트는 드루텐과 또 혼자서 안식일을 지키던 피터 베슬즈(Pieter Wessels)라는 사람을 미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과 연락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 두 남아공화국인은 네델란드어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배틀크릭에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접한 교단은 50파운드(노동자 1년 임금보다 큰 액수임)라는 거금을 보내어 선교사 여행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88년 대총회 회의에서 누군가가 소위 “마게도냐 사람의 요청” 서한을 낭독하였다. 대표들은 편지 내용을 듣고 매우 감동한 나머지 즉석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를 불렀다. 다음해 7월 로빈슨(D. A. Robinson)이 이끄는 7명으로 구성된 선교단이 케이프 타운으로 출발하였다. 한편, 남아공화국의 두 안식일 준수 성도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약 40명에게 전도하여 신자로 만들었다. 남아공화국 선교 사업은 피터의 아버지인 조하네즈 베슬즈의 농장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된 아버지 베슬즈는 조국의 재림교회 개척에 크게 투자하였다. 얼마 안가 이 교회는 출판사와 대학, 요양원 및 기타 다른 기관을 거느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5) 로디지아 : 아프리카 대륙 선교의 시발점은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였다. 1894년 개최된 대총회는 베슬즈 가족의 촉구를 받아들여 남아공화국으로부터 동쪽에 위치한 마타벨레랜드(Matabeleland)에 선교 활동 거점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는 영국이 로디지아의 막강한 마타벨레 족을 진압한 직후였다. 제국 건설자이며 남아공화국 케이프 식민지의 수상인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이름을 딴 로디지아는 이제 막 유럽의 영향을 접하게 되었다. 로빈슨과 피터 베슬즈는 로즈와 다소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만남 후에 로즈로부터 봉인한 봉투를 받았다. 두 사람은 불라와요(Bulawayo)라는 도시 인근 12,000에이커 이상의 부지를 하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후일 솔루시 선교 본부가 될 사업 설립에 있어서 부지를 얻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솔루시 선교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한 가지 난관은 북아메리카에서 불거졌다. 존즈(A.T. Jones)는 정부의 특혜를 받아 교회와 국가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주도하였다. 존즈와 기타 <종교자유의 파수꾼(Sentinel of Religious Liberty)> 지의 편집자들은 선교사들이 “양심을 팔아 아프리카의 더러운 국물”을 얻어냈다고 비난하였다. 존즈는 재림교단이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그 사실을 원수들이 알게 되고, 일요일 준수령과 같은 조치로 미국을 기독교화하려는 무리들을 상대하는 재림교단의 입장이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영향력이 컸던 존즈는 1895년 대총회에서 대표들을 설득하여,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땅을 받지 말자는 표결을 하도록 몰아부쳤다. 한편, 엘렌 화잇은 멀리 호주에서 대총회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존즈와 다른 사람들이 느헤미야서를 읽도록 권유하였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위해 왕들과 권세자들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종교 자유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자들은 어떤 호의도 저버려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도움을 베풀어주도록 하는 손길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편지 11, 1895)
엘렌 화잇이 지적함에 따라 대총회는 솔루시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결정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선교 사업에 관한 교단 내부의 장애물은 극복된 셈이었다. 그러나 로디지아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였다. 선교사들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최근에 정복당한 마타벨레 족이 영국군에 항거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5개월 동안 철수해야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다시 현지에 돌아왔을 때는, 주민들이 기근에 봉착하였으며, 우역(牛疫)이 발병하여 최근 전쟁에서 살아남은 몇 마리 안 되는 선교 본부의 소들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더구나 선교사들은 말라리아라는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필자는 현재 솔루시 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조그만 묘지를 방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선교사들은 1890년대에 말라리아 예방약으로 알려진 유일한 약품인 키니네 사용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두 사망하였다. 그들은 왜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 사용을 거부했을까? 해로운 약품을 사용하지 말라는 엘렌 화잇의 권고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약을 융통성 없이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기까지 “충성스런 건강 개혁자”였다. 1894년에 로디지아에 파송된 7명의 초기 선교사들 중에 1898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하였다. 그 중 두 명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캐이프에서 투병해야만 하였다. 결국 남은 사람은 소위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로운 약을 사용하는 것이 치명적인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여 키니네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엘렌 화잇이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발휘하라고 권고한 “상식적인 사고”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솔루시 선교를 위해 계속 봉사하며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2007년 현재 솔루시 선교 활동은 결실을 맺어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관할하는 3개 지회 소속 수침자 수가 5백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6) 중앙아메리카 : 1883년에 뉴욕에 거주하던 한 재림교인이 어떤 배의 선장에게 부탁하여 영국령이던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에 한 묶음의 책자를 보내도록 하였다. 선장은 별로 조심스럽지 않게 그 책자를 다루었지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선장은 선착장에 꾸러미를 던져놓고는 자기가 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흩어지는 책자들을 모아서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도 권하여 읽게 하였다. 그들 중 몇 명이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으며, 한 여성은 거기서 얻은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 지 몇 권을 바바도스에 사는 여동생에게 보냈다. 그 잡지들은, 몇 해 전 자녀들에게 참 안식일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던 어떤 여인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던 고테라우(E. Gauterau) 부인은 1885년에 온두라스 해안에서 떨어진 베이 아일랜즈(Bay Islands)로 돌아갔다. 베이 아일랜즈는 카리비아 해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녀가 태어난 곳이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6년간 자신의 믿음을 나누었을 때, 재림교단은 프랭크 허친스(Hutchins)를 그 곳에 보내어 고테라우 부인을 통해 기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안식일학교 학생들은 피트케언 섬 선교 당시와 마찬가지로 허친스가 중앙아메리카 연안 지역에 재림 기별을 전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선교용 선박(헤럴드 호)을 건조할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하였다. 로스크럭(A. Roskrug) 부인은 영국에서 재림 기별을 받아들이고, 1888년에 고국인 안티구아로 돌아와서 교회 설립을 위한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가 안티구아에서 팔렸던 재림 기별 책자가 자메이카까지 흘러 들어갔다. 한 이태리계 미국인 재단사는 문서 전도자가 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1891년 멕시코에 재림 기별이 소개되었다. 그는 스페인어로 된 책자가 없었기 때문에 <각 시대의 대쟁투> 영문판을 팔았다.
7) 인도 : 다른 많은 지역에서와 같이 인도에서도 문서전도인들이 선교 초기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을 전하였다. 윌리엄 렝커(William Lenker)와 스트롭(A. T. Stroup)은 1893년 마드라스(Madras)에 도착하여 인도 주요 도시 주민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서적을 판매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했듯이 렝커와 스트롭이 인도에서 재림 기별을 처음으로 전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로 가는 길에 런던에 머물 때, 렝커는 인도에 이미 재림성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다. 그는 “인도에 이미 진리가 전파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는 것을 알고 내 가슴은 벅찼다.”고 술회하였다. 인도에 재림 기별이 처음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미국이나 유럽 혹은 호주로부터 흘러 들어온 책자를 통해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리 없는 책자는 모든 수단을 통틀어 비교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1894년에는 적어도 다섯 명의 문서 전도인이 인도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중의 세 명은 호주 출신이었다. 서적은 잘 팔렸으며, 이윽고 주민들은 서적을 타밀 어와 기타 지역 방언으로 번역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의 최초의 정식 직원은 조지아 버러스(Georgia Burrus), 후에 조지아 버제스(Georgia Burgess)였는데, 그는 1895년 1월 캘리포니아로부터 인도로 파송된 젊은 성경 교사였다. 그는 당시 다양한 인종이 얽혀 살고 있는 인도에 유일하게 파견된 재림교회의 공식 대표였다. 대담한 조지아 버러스 양은 여행 경비만 보조 받고 인도에 파송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녀는 인도에서 뱅골 어를 배우면서도 부업을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아프리카 출신 한 사람이 그녀를 재정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버러스 양은 인도에서 40년을 지내며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1895년 말에는 다른 선교사들도 인도에 파송되었다. 1898년에는 윌리엄 스파이서(William A. Spicer, 1922년에 대총회장이 되었음)가 도착하여 <오리엔탈 워치맨, Oriental Watchman>의 출판을 시작하였다.
재림 기별 선교 활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선교 활동이 처음부터 국제적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19세기에는 주로 북아메리카 지역에 선교 활동이 집중되었지만, 살펴보면 인적 자원은 물론 책자와 자금이 여러 지역으로부터 다른 여러 지역으로 이동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재림 기별 선교는 국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찌 우리 잊으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