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제안 순서 - 신약시대의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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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12-14 09:42 조회5,18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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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약 시대의 십일조
◈ 주제 : 전 교회적으로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교육을 실시한다.
◈ 진행방법
교회의 재정관리 지도자가 내용을 준비하여 교육한다.
◈ 순서자료
-전 이스라엘 기원 아브라함과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으며(창 14:20, 28:22) 창세기는 모세 이전에 드린 십일조를 나타내었고 신정 국가가 형성됨
-마23:23/눅11:42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극단적으로 십일조에만 관심을 가지고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눅11:42)은 저버리는 것을 정죄하시고 계신다. 다른 말로, 마태복음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마23:23)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열정, 공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헌신은 함께 지켜져야 한다(cf. 눅 18:12)는 아모스의 말을 반복하고 계신다. 그러고 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부언하신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헌신한 자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의 중요성에 관하여 신자들을 권면하였다. 그는 고린도 전서 9:13에서 성소에서 시무자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구약에 나타난 이 제도를 근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십일조와 어느 정도 제한된 헌물로 행해졌다(민 18:8-24). 바울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비교해 나간다. 그는 복음 사역에 참여한 자들이 최소한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서 행해졌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생계를 부양받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십일조에 대한 구약법을 그리스도인의 드림(giving)을 위한 모델로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가장 광대한 구절은 히브리서 7:1~10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 관해 하나의 긍정적인 방향(경향)을 보여준다. 저자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을 분석하면서 그의 논증 속에서 어떤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서 바쳤다는 사실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반차보다 우월하다는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이 구절은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임을 전제한다. 십일조를 부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묵인하고 있다. 누군가가 시사할 수 있듯이 멜기세덱이 예수님의 표상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의 십일조를 “예수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십일조에 관해서라면 적은 분량이지만 신약성경은 그것이 우리의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구약의 원칙과 일치한다고 시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목적과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신약 성경은 십일조를 자신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을 정죄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더불어서 공의와 자비와 사랑을 행하도록 도전하고 있다(눅18:12; 마23:23). 십일조를 드리는 근본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즉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드린 자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신다.
-이스라엘 체제에서 레위인은 십일조를 받고 그것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렸다. 그리스도교에는 더 이상 제사장이 없기 때문이 이러한 관례를 따르는 것은 간단히 말해 불가능하다. 구약성경의 십일조는 십일조에 대한 레위기적 집행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으며 그것이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한 똑같은 제도를 신약에 도입하는 것을 불가능케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십일조는 레위인이 있기 전부터 실행되었으며 레위법의 체계는 십일조에 필수적이 아니다. 십일조는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구체적일 표현이다. 십일조의 수혜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다.
-그리스도 교회는 직분에 있어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복음 사역자는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특정한 봉사를 하는 평신도이다. 일반적인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마찬가지로 목사들에게도 요구된다. 즉 그들 모두는 그들의 십일조를 주님께 가져간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구약성경의 구분은 신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불연속성의 이러한 요인은 목사가 그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한다.
-역대하의 십일조 : 십일조와 헌금 모금은 중앙화, 분배도 중앙화, 레위인에게 몫이 할당됨
-느헤미야의 십일조 : 사람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왔음
-구약의 십일조 창고는 성전 단지 내에 위치했으며 성전에서부터 분배함
-신약 성경의 침묵 : 신약 성경에 관한 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우리에게는 사도 교회에서의 십일조에 관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의 부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르게 될 어떤 결론이라도 어떤 역사적 혹은 본문상의 증거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침묵에 기초할 것이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제한된 가치를 가질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교회들이 사도들과 복음 사역자들의 생활 자금을 공급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 보다는 다른 자금원으로 교회의 사업을 지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행 2:34,35,44). 교회 재정 공급의 변화는 그들 사이에 가난한 자들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행6:1~6). 신약 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침묵은 신자들이 그것을 실천하기를 거절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태도와 바울의 언급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거절 보다는 오히려 십일조에 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의 기록 가운데 이 주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한데 즉,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거부하시지 않고 그것을 권장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웠음에 틀림이 없다.
-사도 시대 이후 처음 3세기까지는 교부들의 저술 가운데서 십일조에 관한 내용은 미비했다. 십일조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폐지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사도시대 이후의 십일조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그들[유대인들]은 참으로 이익(good)의 십분의 일(the tithes)을 하나님께 성별했지만 자유함을 입은 자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주님의 사업(purpose)을 위해서 떼어놓고 기꺼이 아낌없이 드렸다...”고 기록했다. 십일조는 4세기 초에 더 많이 장려되었으며 동방교회에서 정규적인 습관이 되었다. 어거스틴(c.354~430)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드리는 일에 있어 최소한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질 만 하다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의 주교 씨프리언은 “그 당시 그들은 집과 토지를 팔아서 하늘에 자신을 위하여 보화를 쌓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용도로 수입(proceeds)을 사도들에게 드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가전(patrimony)의 십일조조차 드리지 않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팔라고 명하셨음에도 오히려 사고 증식시킨다.”고 말했다.
-안디옥의 주교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도왔다. 어떤 이들은 크게 의아해하며 여차여차해서 십일조를 드린다고 나에게 말했다. 유대인들 사이에 당연시 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놀랄 만 한 일이 되다니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리고 만약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험스럽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늘날 그러한 위험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라.”로 말했다.
◈ 주제 : 전 교회적으로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교육을 실시한다.
◈ 진행방법
교회의 재정관리 지도자가 내용을 준비하여 교육한다.
◈ 순서자료
-전 이스라엘 기원 아브라함과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으며(창 14:20, 28:22) 창세기는 모세 이전에 드린 십일조를 나타내었고 신정 국가가 형성됨
-마23:23/눅11:42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극단적으로 십일조에만 관심을 가지고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눅11:42)은 저버리는 것을 정죄하시고 계신다. 다른 말로, 마태복음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마23:23)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열정, 공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헌신은 함께 지켜져야 한다(cf. 눅 18:12)는 아모스의 말을 반복하고 계신다. 그러고 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부언하신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헌신한 자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의 중요성에 관하여 신자들을 권면하였다. 그는 고린도 전서 9:13에서 성소에서 시무자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구약에 나타난 이 제도를 근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십일조와 어느 정도 제한된 헌물로 행해졌다(민 18:8-24). 바울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비교해 나간다. 그는 복음 사역에 참여한 자들이 최소한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서 행해졌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생계를 부양받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십일조에 대한 구약법을 그리스도인의 드림(giving)을 위한 모델로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가장 광대한 구절은 히브리서 7:1~10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 관해 하나의 긍정적인 방향(경향)을 보여준다. 저자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을 분석하면서 그의 논증 속에서 어떤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서 바쳤다는 사실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반차보다 우월하다는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이 구절은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임을 전제한다. 십일조를 부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묵인하고 있다. 누군가가 시사할 수 있듯이 멜기세덱이 예수님의 표상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의 십일조를 “예수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십일조에 관해서라면 적은 분량이지만 신약성경은 그것이 우리의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구약의 원칙과 일치한다고 시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목적과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신약 성경은 십일조를 자신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을 정죄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더불어서 공의와 자비와 사랑을 행하도록 도전하고 있다(눅18:12; 마23:23). 십일조를 드리는 근본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즉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드린 자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신다.
-이스라엘 체제에서 레위인은 십일조를 받고 그것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렸다. 그리스도교에는 더 이상 제사장이 없기 때문이 이러한 관례를 따르는 것은 간단히 말해 불가능하다. 구약성경의 십일조는 십일조에 대한 레위기적 집행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으며 그것이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한 똑같은 제도를 신약에 도입하는 것을 불가능케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십일조는 레위인이 있기 전부터 실행되었으며 레위법의 체계는 십일조에 필수적이 아니다. 십일조는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구체적일 표현이다. 십일조의 수혜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다.
-그리스도 교회는 직분에 있어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복음 사역자는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특정한 봉사를 하는 평신도이다. 일반적인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마찬가지로 목사들에게도 요구된다. 즉 그들 모두는 그들의 십일조를 주님께 가져간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구약성경의 구분은 신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불연속성의 이러한 요인은 목사가 그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한다.
-역대하의 십일조 : 십일조와 헌금 모금은 중앙화, 분배도 중앙화, 레위인에게 몫이 할당됨
-느헤미야의 십일조 : 사람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왔음
-구약의 십일조 창고는 성전 단지 내에 위치했으며 성전에서부터 분배함
-신약 성경의 침묵 : 신약 성경에 관한 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우리에게는 사도 교회에서의 십일조에 관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의 부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르게 될 어떤 결론이라도 어떤 역사적 혹은 본문상의 증거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침묵에 기초할 것이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제한된 가치를 가질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교회들이 사도들과 복음 사역자들의 생활 자금을 공급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 보다는 다른 자금원으로 교회의 사업을 지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행 2:34,35,44). 교회 재정 공급의 변화는 그들 사이에 가난한 자들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행6:1~6). 신약 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침묵은 신자들이 그것을 실천하기를 거절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태도와 바울의 언급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거절 보다는 오히려 십일조에 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의 기록 가운데 이 주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한데 즉,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거부하시지 않고 그것을 권장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웠음에 틀림이 없다.
-사도 시대 이후 처음 3세기까지는 교부들의 저술 가운데서 십일조에 관한 내용은 미비했다. 십일조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폐지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사도시대 이후의 십일조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그들[유대인들]은 참으로 이익(good)의 십분의 일(the tithes)을 하나님께 성별했지만 자유함을 입은 자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주님의 사업(purpose)을 위해서 떼어놓고 기꺼이 아낌없이 드렸다...”고 기록했다. 십일조는 4세기 초에 더 많이 장려되었으며 동방교회에서 정규적인 습관이 되었다. 어거스틴(c.354~430)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드리는 일에 있어 최소한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질 만 하다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의 주교 씨프리언은 “그 당시 그들은 집과 토지를 팔아서 하늘에 자신을 위하여 보화를 쌓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용도로 수입(proceeds)을 사도들에게 드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가전(patrimony)의 십일조조차 드리지 않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팔라고 명하셨음에도 오히려 사고 증식시킨다.”고 말했다.
-안디옥의 주교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도왔다. 어떤 이들은 크게 의아해하며 여차여차해서 십일조를 드린다고 나에게 말했다. 유대인들 사이에 당연시 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놀랄 만 한 일이 되다니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리고 만약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험스럽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늘날 그러한 위험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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