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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죄를 이김(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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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1-10 16:29 조회1,6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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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9분

 

연구 범위 : 롬 6장, 요일 1:8~2:1

 

기억절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만약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왜 행위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왜 그냥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가?

로마서 6장은 이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 바울은 여기서 흔히 ‘성화’라고 부르는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죄를 극복하고 점점 그리스도의 성품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나 성화라는 단어는 로마서에서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롬 6:19, 22에서 성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하기아스모스’는 모두 ‘거룩함’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화에 대해서 바울이 할 말이 별로 없다는 뜻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은 보통 하나님께 ‘성별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과거에 완료된 행위를 의미할 때가 많다.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행 20:32)라는 구절이 좋은 예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께 성별된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성경의 용례가 성화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 성경은 성화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죄의 극복’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죄는 지배력을 잃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모든 신자가 죽음을 이겼음을 믿는다.

느끼기 : 우리가 죄의 권세와 형벌을 마주했을 때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행하기 : 이미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의 새로운 삶을 가진 자처럼 살아간다.

 

 

➋ 죄의 지배를 받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까?

※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님이 생명이 될 때 그렇게 된다.

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음에도 우리가 계속 그것과 씨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와 사망의 세상이기 때문에 환경이 우리를 죄 아래 끌고 간다.

➍ 우리가 실질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말씀을 깨닫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에 이르러야 한다.

➎ 죄의 종이 아니라 순종의 종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올바른 교리를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 순종의 종은 성경교리가 가르치는 바른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➏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지배와 그 저주와 불행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까요?

※ 진리를 바르게 깨닫도록 접촉하고 가르치는 일로 도울 수 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에서부터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죄의 지배력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첫째 날(일) 11월 12일 죄가 더한 곳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롬 5:20에서 바울은 매우 인상적인 진술을 남겼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바울의 요점은 죄가 얼마나 많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죄가 너무 많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큰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죄가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1. 롬 6:1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은 어떤 식의 논리를 대하고 있는가? 롬 6:2~11에서 바울은 그러한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는가?

[롬6:1~1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답: 은혜를 더하려면 죄를 지어야 한다는 말인가? 라는 논리를 대하고 있으며, 대답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그 가운데 살겠느냐고 대답한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 사람이 왜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논조를 이어간다. 시작부터 그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침례는 하나의 장례를 의미한다. 무엇을 장사지내는가? 옛 사람, 즉 죄를 지은 몸, 죄의 지배를 받은 몸을 장사지낸다. 이 ‘죄의 몸’은 파괴되고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다. 죄의 몸이 파괴됐으면 죄의 왕노릇은 이제 끝난 것이다. 물에서 올라온 사람은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 새 사람이다. 그는 이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다. 마찬가지로 침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다시는 그 지배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 물론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마자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본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았다’ 등의 모든 문장은 우리 안에 죄가 계속 존재할지라도 우리가 죄악의 욕망과 죄에 굴복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갈 5:17의 말씀처럼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 따라서 모든 사도와 성도들은 우리의 몸이 재가 되고 욕망과 죄에서 자유로운 영광의 새 몸으로 부활할 때까지 죄와 욕망이 우리 안에 남아 있다고 고백한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Romans, p. 100.

 

<부가설명> ‘죄의 몸’은 ‘의의 몸’의 대립개념이다. 성경은 의의 몸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신령한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대립개념으로 ‘육신의 몸’이라는 말을 썼다.(고전15:44) 로마서 7:24에는 ‘사망의 몸’이 있다. 그 대립개념은 ‘생명의 몸’일 것이다. 이런 표현은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생명이냐 사망이냐를 생각하게 한다. 사망이 지배하는 몸은 사망의 몸이고 생명이 지배하는 몸은 생명의 몸이 아니겠는가? 또 죄가 지배하는 몸은 죄의 몸이고 의가 지배하는 몸은 의의 몸일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의, 사망과 생명이라는 대립상태는 그 존재가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 확실하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루고 있는 죄와 의 문제는 행위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행위가 아니라 생명문제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 후손을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아담 안에서 죽은 아담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그 생명이 그 사람을 예수님처럼 생활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된다.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사망의 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몸이 되는 것이다. 이때는 바울의 고백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된다. 이 상태가 완전해 지는 때가 생명의 부활을 할 때이다. 아멘.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때까지 죄와 씨름해야 한다.

 

 

둘째 날(월) 11월 13일 죄가 지배할 때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1. 위의 말씀은 어떤 교훈을 주는가? 

 

답: 사람이 죄가 자기를 주관하지 않도록 예수님 편에 서 있으라는 교훈을 준다.

 

‘지배하다’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죄는 여기서 왕으로 묘사된다. ‘지배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왕이 되다’ 또는 ‘왕의 역할을 하다’라는 의미이다. 죄는 너무도 강력하게 우리의 육체에 대해 왕노릇을 하며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고자 한다.

바울은 죄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는 의롭다 칭함을 얻는 자가 죄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통치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의지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그대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의지의 진정한 힘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지배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지의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할 능력을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스스로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대는 그대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그리하면 그분은 그대 안에서 그대가 원하고 행하는 것을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온 본성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분은 그대의 애정의 중심이 되시며 그대의 사상은 그분과 조화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47).

롬 6:12에 “사욕”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죄가 지배할 때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은 것을 원하게 한다. 우리가 스스로 그것과 싸우려고 할지라도 욕망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죄는 마치 난폭한 독재자 같아서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오직 믿음, 오직 승리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이 이 폭군을 몰아낼 수 있다.

롬 6:12에서 “그러므로”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10~11절로 돌아가게 한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간다. 즉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계신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는 동시에 죄를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오늘 공부하는 성경구절을 읽으면 몸이 죄의 지배를 받으면 죄의 몸이고 의의 지배를 받으면 의의 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망의 지배를 받으면 사망의 몸이고 생명의 지배를 받으면 생명의 몸이다. 태초에 시조부부의 몸은 생명의 지배를 받는 몸이었는데, 뱀의 유혹을 받아들임으로 뱀의 종이 되었다. 즉 사단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사망의 세력이 그 몸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망의 몸이 되었고 그 모든 후손들도 사망의 몸으로 출생하게 되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몸을 무엇이 지배하는가에 달렸다고 이해된다. 사망의 지배를 받으면 사망의 본성이 되어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날 때 예수님의 새 생명이 지배하는 몸이 된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고후5:17) 그러므로 본성을 성품이나 도덕성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참 어렵다. 본성을 생명과 사망의 상태로 이해하면 분명해진다. 흔히 말하는 타락한 본성이란 사망이 지배하는 본성이고 거룩한 본성은 생명이 지배하는 본성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6~18) 우리는 사망의 지배를 받는가? 생명의 지배를 받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는 것은 죄의 몸이 죽고 새 생명의 지배를 받는 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예식이다. 이 예식의 의미대로 생활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지배한다는 말은 원어로 ‘바실류오’인데 왕 노릇한다는 말이다. 개역은 왕 노릇이라고 번역하였다. 

 

교훈 : 죄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우리는 그것의 지배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날(화) 11월 14일 법 아래가 아닌 은혜 아래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1. 롬 6:14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은 십계명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답: 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법을 지킬 능력을 받은 자들이 된다. 은혜는 법을 수행할 능력이 되지만 은혜 없이 법 아래 있으면 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롬 6:14은 로마서에서 중요한 성경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재림교인들에게 자주 제시하는 성경절이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죄가 존재하는 이상 도덕법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죄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로마서의 앞부분과 적어도 로마서 6장을 읽었다면, 바울이 죄의 실체에 관하여 논하다가 갑자기 “그런데 죄를 정의하는 십계명은 폐지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법 아래’란 수많은 인간의 제도와 규례를 포괄하고 있었던 당시의 유대 사회 제도 아래라는 뜻이다. 반대로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법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고 성령이 그의 걸음을 인도함으로 죄를 극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하고,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으며,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오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그의 삶의 보좌에서 죄가 물러난다. 우리는 이것이 롬 6:14의 전체 맥락이며 그 안에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법 아래’라는 말을 너무 제한적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은혜 아래’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다면 그에게는 은혜가 아닌 정죄가 주어질 것이다.

‘은혜 아래’라는 것은 율법이 불가피하게 죄인에게 선고한 정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거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하여 죽음으로 이제 율법이 가져오는 죽음의 정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부가설명> 로마서의 부가설명을 쓰면서 여러 번 말했지만, 성경을 율법과 범법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설명은 석연하지 않은 점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성문법을 주시지 않았다. 다만 동산 중앙에 있는 그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서 죽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록된 율법을 말하지만 당시는 다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만 있었다. 여자는 뱀에게 대답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자가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말을 하나님이 했다고 말해서 거짓말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 있겠는가? 이때는 아직 죄가 들어오지 않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그대로의 상태였다. 우리번역에 ‘죽을까 하노라’는 번역은 잘 된 번역이 아니다. 원어 직역하면 “죽지 않으려거든”이다. 즉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고 번역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친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그 나무의 과실을 먹었을 때 말씀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떠났고(고후11:3) 죄에 빠졌다.(딤전2:14) 죄에 빠진 결과는 사망이 되었다. 지금은 성문화된 율법을 지켜도 그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못하고 율법을 폐한다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지 않는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사망이 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은혜아래 있다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생명이 있으니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된다. 그 법은 생명 있는 자가 살아가는 삶의 길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으면 그 길을 벗어날 수 없다. 기차가 철로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교훈 : 우리가 법 아래가 아닌 은혜 아래 산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넷째 날(수) 11월 15일 죄의 종인가? 순종의 종인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1. 롬 6:16을 읽어 보라. 바울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이 흑백논리인 이유는 무엇인가? 중간지대 없이 뚜렷하게 나눠지는 대조적인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답: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편에 서든지 아니면 사단 편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사는 삶이 죄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의 삶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이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승리를 줄 수 있다. 앞서 바울은 죄를 의인화하여 신하를 다스리는 왕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종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이 어떤 주인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섬길 수도 있고, 영생에 이르는 의를 섬길 수도 있다. 중간지대는 없으며 절충의 여지도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영생하든지 영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롬 6:17의 말씀을 읽어 보라. 바울은 여기서 16절의 말씀을 어떻게 확대시키는가?

[롬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답: 교훈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에게 종이 된다고 가르친다. (교훈은 헬라어로 디다케인데 이것을 영어는 교리doctrine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순종이 어떻게 바른 교리와 연결되어 있는지 주목하라. ‘교리’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가 여기서는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원칙들을 배우고 순종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보기에는 로마 신자들이 바른 교리와 바른 교훈을 “마음으로 순종”할 때, 그것이 그들을 “의의 종”(18절)이 되도록 이끌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한다면, 교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거짓 교리에 대하여 상당히 염려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세상은 자유의지를 말한다. 아니 교회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선택의 자유에 대하여 이번 로마서 교과에서도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은 자유의지도, 자유선택도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람은 종이라고 한다. 죄의 종이든지 의의 종이든지 둘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종류의 종일뿐이다. 자유선택과 자유의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어떻게 선택하라고 하느냐? 라고 반문할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이미 해놓으셨고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은 것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뿐이다. 그게 무엇이 대단하다고 자유의지 자유선택이라고 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신30:15, 11:26)를 우리 앞에 두었다. 이것뿐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것을 고르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를 수 있는 것도 생명이 있고 정신이 온전할 때 가능하다. 생명은 있어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면 고르는 것도 스스로 못할 수 있다. 호흡이 끊어지면 아무것도 못한다. 이것이 이 세상에 호흡하고 있는 인생의 실상이다. 우리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 성경을 연구하여 바른 진리에 서도록 성령의 인도를 겸손하고 간절하게 구하여야 한다. 그래서 부디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다.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자신을 진실로 예수님께 드리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 

 

교훈 : 우리가 의의 주인을 섬기기 원한다면 올바른 교리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섯째 날(목) 11월 16일 죄로부터의 자유

 

1. 지금까지 로마서 6장에서 공부한 것을 기억하면서 19~23절을 읽어 보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아래에 정리해 보라.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 진리를 그대의 삶에 실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쟁점은 무엇인가?

[롬6:19~2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답: 육신에 있는 자는 연약하여 불법을 저지르고 사망에 이르지만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하면 거룩함에 이르고 영생하게 된다. 바울은 죄의 종으로 있지 말고 의의 종이 되라고 강권한다.

 

바울의 설명은 그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한다. ‘연약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허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능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능력이란 의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께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맡기기로 선택하는 능력이다.

롬 6:23은 죄의 형벌, 즉 범법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의 형벌이 죽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뿐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죄는 자기 종들을 속이고 실컷 부려먹다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주인과 같다.

두 주인의 비유에서 바울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다른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중간지대는 없다. 동시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죄의 통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며, 죄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우리에게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죄가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가 죄를 극복하리라는 승리의 약속을 매일 주장해야 할지라도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죄를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한다. 이 폭군은 수치스런 일을 행한 대가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폭군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해야 한다.

반대로 의를 섬기는 자는 바르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행한다. 그들의 행위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새로운 경험에서 비롯된 열매로서 나타난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복음의 핵심, 구원의 핵심,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께서 필요한 이유를 완전히 잃고 있는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누구를 섬기느냐고 묻고 있다. 누구를 섬기려고 선택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미 누구를 섬기고 있는데 그가 누구냐고 묻는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된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5장에서 말했듯이 이미 아담 안에서 운명적으로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생을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예수께서 오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사망을 폐하셨다.(딤후1:10) 또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셨다.(히2:14) 그리고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살게 하셨다.(고전15:22) 이것을 믿으면 사람은 주인을 바꾸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주인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면 틀린 말이다. 우리 중에 누가 사망을 스스로 택했다는 말인가? 태어나면서 사망으로 달려간다. 태어나는 것은 스스로 택했는가? 아니다. 굳이 선택을 말한다면 부모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부모의 선택도 아니다. 이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 안에 우리는 태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도 결혼하지 않으면 태어나는 일이 없겠지만 인생이 어디 그런가? 우리는 이미 사망이 선택된 상태로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택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생명을 받으라고 하신다. 사망에 처하여 있는데 생명을 받으라고 하시니 받으면 된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이렇게 믿으면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진정으로 부르게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 우리 안에 사신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하고 당연히 예수님이 하신 것을 하게 된다. 예수님이 하지 않으신 것은 하지 않게 된다. 그가 우리 생명이기 때문이다.(갈2:20) 이것이 구원이요 구원의 역사(役事)이다. 아멘.

 

교훈 : 우리는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연약해져 있지만 그런 자신을 구원의 주님께 맡긴다면 죄는 우리에게서 지배력을 잃게 된다.

 

 

여섯째 날(금) 11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05~106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교회증언 3권>, 365 “청년들에게 호소함”을 읽어 보라.

 

“그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품성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신다.”(시대의 소망, 123)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사탄과 그의 대리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직접 약속하였고, 지성과 감성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화된 인간 도구들과 협력하기로 맹세한다”(화잇 주석, 롬 6:1~4).

 

“믿음과 행실이 일치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악한 자의 자녀들은 그 주인의 종이다.… 그들이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분리시켜 당신 앞에서 정결하게 하시고자 신성하고 거룩한 진리를 계시하셨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교회증언 1권, 4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죄를 극복하리라는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 우리 마음이 부패했다면 뭔가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 우리가 죄의 세상 죄의 환경에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죄를 지을 생각이 없어도 세상이 우리에게 죄를 가져다 묻힌다. 우리는 또 연약한 몸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지체가운데 있는 죄가 우리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가는 경험을 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씻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➋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일에 의존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이 두 측면을 함께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것을 간과하면 방종할 위험에 놓인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께서 나의 생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내가 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이 하지 않는 것은 나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20의 바울의 고백이다. 그 경험에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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