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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 성령의 열매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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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1-02 09:14 조회4,8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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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01월0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1분)

제2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
(核心本文) : 고전 13:7~8 / (硏究範圍) : 신 6:5, 마 5:43~48, 7:12, 22:39, 눅 10:25~37, 고전 13:4~7.

(記憶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學習目標 및 敎科槪要)
(깨닫기)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선물임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느끼기) → 사랑은 구원의 기초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
(행하기) →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타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한다.

◉ <하고 싶은 이야기>
성경에서 흔히들 기억에 남을 성경의 장(章)을 말하라면, 창세기 1장을 "창조의 장"으로 출애굽기 20장을 "십계명의 장"으로, 레위기 11장을 "음식물에 관한 장"으로 마태복음 24장을 "재림의 장"으로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 의 장" 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으로 기억들을 하고 있는데, 특히 이번 교과에서 다시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공부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식물에 있어서도 결과적으로는 열매인 결실(結實)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듯이, 성령의 열매도 사랑이라는 결실이 중요함을 다시금 깊이 마음에 새기며, 금번의 교과를 통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모든 은사(恩賜)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랑이 없으면 가치(價値)가 없습니다."

(要點)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 평화, 신뢰, 자유를 가져다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실 때 그들의 삶은 측량할 수 없으리만치 축복과 풍요를 경험한다.
사랑스럽고 사랑을 베푸는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일요일(1월 3일)
<사랑의 여러 측면(側面)들 (신 6:5)>

◈ 사물을 볼 때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매우 크고 다를 수가 있다.
즉 사물은 빛의 각도에 따라서 볼 때 마다 다르다. 즉 사물을 빛이 전면(前面)에서 비추이는 데 보는 사물의 인식과, 사물의 후면(後面)에서 빛을 비추고 볼 때 의 형상이 다르듯이 자세하게 온전하게 보려면 바른 위치에서 보아야 올바로 보이듯이, 더 쉽게 설명을 한다면 빨간색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과, 노란색 안경을 쓰고 보는 것과, 파란색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피사체(被寫體)가 그 안경의 색상대로 보인다.
그러나 빨간 장미꽃을 빨간색의 안경을 쓰고 보면 그 장미꽃 색깔이 희게(하야케)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보혈의 색으로 이웃과 교회와 모든 사물을 보면, 사랑의 색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은 어떤 측면에서 보고 계십니까?
◈ [Ⅰ] <사랑의 정의(定義)>
사랑이란 단어는 우리가 가장 아끼고 도 자주 사용하는 단어 이면서도 그 뜻을 한마디로 정의 하라면 쉽게 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랑이 인간의 감정과 의지에 관련된 추상적 개념으로서 너무도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사전에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면 '존재 욕구' '소유 욕구' '행복 욕구' '발전 욕구'를 일으키는 사람이나, 사물 또는 원리를 만족스럽게 또는 귀중하게 여기며 그를 위해 헌신하거나 노력하려는 의지 또는 그를 기뻐하는 감정 및 기분, 강렬한 애정의 느낌, 애착 또는 자비심' 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황한 서술적 설명이지 분명하고 한정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한편 성경에서는 구약이 주로 '아헨', 신약이 '필레오' 또는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랑이란 단어 자체의 정의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성경은 사랑을 인간이 비록 언어로는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어도 전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랑과 관련된 신학적 문제 또는 실천적 문제에 대한 교훈에 그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Ⅱ] <사랑의 기원(紀元)>
사랑의 궁극적 기원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사랑의 속성과 질,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성경은 사랑이 근본적(根本的)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였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심지어 하나님의 속성자체가 사랑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요일 4:8).
또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랑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이었을 때부터 먼저 사랑해 주셨음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 사랑이 무조건적 순수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요일 4:19)

[Ⅲ] <사랑의 당위성>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救援)받는 성도는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듯이 나도 남을 먼저 사랑해야 마땅함을 계속 가르쳐 준다.
대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악순환은 나는 네가 나에게 행한 그대로만 해주겠다,
내가 왜 먼저 손해(損害)를 보느냐는 지극히 산술적(算術的)이고 소극적인 사고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남을 일부러 해치는 것도 나쁘지만 이런 자세도 결코 선(善)하고 좋은 것은 없다.
성경이 말하는 먼저 남을 사랑해 주어야 할 이유로는.
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마 19:19)
⑵ 성도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빛이 의무적으로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빛은 빛으로서 자연스럽게 빛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자연스럽게 그 인격이 변화되어서
자발적으로 남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먼저 사랑함은 당연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聖徒)라 불리면서 고의적으로 미움을 일삼는다면 참 성도가 아니다. (요일 4:20).
⑶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고 어서 속히 구속사업(救贖事業)을 완성시켜
천국이 도래(到來)하도록 하기위해서이다. (롬 1:14).

[Ⅳ] <사랑의 실천적 양상>
앞 [1}에서 언급한대로 성경은 사랑의 이론적 정의에는 무관심하지만 그 실천적 측면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고전 13:4-7)

[Ⅴ] <사랑의 역할과 중요성>
성도의 구원과 또 이 세상에서의 생활 안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요한일서에서 전반적으로 잘 다루고 있고,
사랑의 필수성과 그 중요성 및 가치(價値)에 대해서는 고전 13:1-3; 8-13절에 웅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① (구원(救援)의 동기)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또한 의(義)로우신 하나님과 죄인(罪人)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점도 없었을 것이다.
② (구원(救援)의 실천 목적)
사랑으로 인간의 구원(救援)을 계획하신 하나님은 신약 구약 성경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인간의 배반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으로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사랑의 구원을 수행해 나가셨다.
즉 그 어떤 인간의 도움이나 감사를 받기 전에 오직 사랑으로서 십자가의 구원(救援)의 길을 이루어 놓으셨다.

③ (구원(救援)의 결과와 증거)
하나님은 사랑을 동기와 동력으로 하여 구원을 행하셨지만 그 사랑은 구원 받은 성도의 가슴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우러나온다. 따라서 역으로 성도가 사랑을 하는가 안하는가는 그가 구원 받고 그 심경이 변화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 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도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인격 전체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한은 것은 아니다. 다만 성도는 물론 성자와 같은 사랑을 끊임없이 뿜어낼 수는 없어도 그 마음의 방향만은 사랑으로 기울여서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야 한다.

[Ⅵ] (사랑의 대상)
사랑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일러준 성경은 그 사랑의 대상을 먼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이라고 가르쳐 준다.
즉 수직적(垂直的)으로 하나님을 , 수평적(水平的)으로 이웃을 동시에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더욱이 성경은 원수(怨讐)까지도, 짐승과 자연까지도 사랑할 것을 가르친다.
요컨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 대상의 우선순위는 있을 수 있어도 대상의 제한은 있을 수 없다.

◈ <가장 큰 은사(恩賜)>
성령의 은사를 앞세우고 불화와 반목을 일삼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은사의 목적과 활용자세를 논하던 사도 바울은 이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곧 사랑을 노래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시편"(the psalm of Love)으로 일컬어진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단순히 하나의 덕목으로 찬양하거나 교훈 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랑의 신앙적 의미를 시적 문제로 압축하여 아름다운 서정성과 더불어 한편의 완벽한 문장으로 구성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은
⑴ 사랑의 절대 우의와 필요성으로 (1-3절)
⑵ 사랑의 실천적 특성 (4-7절)
⑶ 사랑의 영원성 (8-13)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된 사랑은 인본주의적 사랑 곧 남녀간(男女間)의 애정(愛情)인 '에로스', 친구간의 우정인 '필리아', 혈연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스톨게'와는 다른 것으로 자기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실천을 진지하게 호소함으로써, 성도들의 가슴에 숙연한 마음자세와 참된 각성을 던져 준다.

◈ 신명기 6:5절에서 말씀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마음"과 "뜻"과 "힘"은 한 인간의 전인격을 중언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지(知).정(情). 의(意)를 포함한 전인격으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그 마음에 두 주인을 겸(兼)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마 6:24)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존재 자체와 마음, 애정, 능력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한다. (살전 5:23).
여기서(신명기 6:5절)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동기, 애정, 감정, 욕구, 의지 등을 일컫는 용어이다.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며 생각과 감정의 중심이다. (출 31:6; 36:2; 대하 9:23; 전 2:23)
"성품"(soul)으로 번역된 단어는 근본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을 불어넣는 원리를 나타내지만, 신체적 욕구와 갈망까지도 포함한다. (참조 민 21:5) 잠언 23:2와 전도서 6:7에서는 이 단어를 "탐심(貪心)"으로 번역하였다.
"힘"으로 번역된 단어는 "증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그 명사형은 "풍부(豊富)"를 뜻하며, 사람이 이생에서 축적한 것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신명기 6:5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사랑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갈망", "애정", "경향" 등 영혼과 영혼 사이의 더욱 친밀한 결합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하나님과 믿는 자들과의 관계는 사랑에 기초되어있다. (요일 4:19). 또한 사랑은 그분의 율법의 근본적인 원칙이다. (막 12:9, 30절).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곧 전신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 14:15; 15:10).
<본교 성경주석(한) 2권 526-527p>

◉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온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이 “둘째 되는 계명”에 언급된 사랑도 “첫째 되는 계명”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뜻과 의도가 내포된 행동하는 사랑이다. 우리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자신의 몸을 돌보듯 다른 사람을 보살피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아끼며 돌보듯 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 <사랑의 원칙의 표현>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큰 계명으로 요약된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른 계명 가운데 포함된다.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보좌에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때에 우리 이웃에게도 바른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 이웃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607)

◉ 사랑에는 여러 측면이 있는데,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다 포함되어 있다.

월요일(1월 4일)
<“사랑은 … 하며”(고전 13:4~8)>

◈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인간으로서의 도리(道理)를 정의 한다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실천(준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규범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십계명을 주셨는데 이 십계명인 10가지의 계명에서도 하라는 명령으로 4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와 5번째의 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라 이고 나머지 8가지는 하지 말라 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를 준행하는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구별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이지 않는가?
마찬 가지로 사랑도 ‘하며’ 와 ‘아니 하며’로 정의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溫柔)하며 …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8)

◈ <사랑은 …….하며>
(고전 13:4절) 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溫柔)하며 →친절을 베풀며

⑴ <온유(溫柔)하며> → 친절을 베풀며
하나님의 영(靈)으로 움직이는 자는 다른 사람의 고투(苦鬪)와 어려움을 감지하고 말과 행동으로 사려(思慮)깊은 동정심을 나타내고자 늘 노력하고 있는 자의 자비로운 본성을 묘사한다.
온유라는 단어에는 가혹하고 짜증나든지 고통스럽거나 슬프든지 간에 인생의 어떤 환경에서도 사랑은 온순하고 온화하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사랑은 매정함. 분노. 가혹함. 불친절. 복수를 통해 드러나는 증오심과는 반대이다.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친절하고, 너그럽고, 예모(禮貌)있게 대하고 싶어 하는데, 이는 상대방의 감정에 상처내기를 원치 않고 상대방의 행복을 증진시켜 주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벧전 3:8 참조)
즉 온유는 친절을 베풀며 인정이 있고 온순한 것을 말한다. (<본교 성경주석(한)12권 299p 참조>

◈ <고린도전서 13장(章)은 사랑 장(章)>
성령의 은사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아름답게 엮어져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송가(頌歌)로 불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말로는 사랑을 장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코 진실 된 사랑을 지속해 나갈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다면,
그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복이 되도록 사랑으로 행해져야 하겠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중요한 특성15가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그 내용은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나,
여러 가지 실천적 윤리(倫理)들 중에서 성도의 인내(忍耐)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⑴ 사랑은 창조주 하나님 적(的) 기원을 갖는 것으로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아니며, (요 13:35)
⑵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 윤리로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실로써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요일 3:18)

☞ 그러나 시기(猜忌)는 타인(他人)의 번영(繁榮)과 높아짐에 대한 질투심(嫉妬心)이나 자신을 우월(優越)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타인을 낮추려는 것을 가리키지만. 진정한 사랑에 대한 진리는 거짓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반대 개념이라는 점과 따라서 이 말은 '옳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진리(眞理)는 불의와 공존할 수 없는 윤리적, 종교적 원리(原理)임을 강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結論)은 '사랑의 영원성(永遠性)과 지속성(持續性)'이 특별히 강조(强調)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모든 은사(恩賜)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불완전(不完全)하여 하늘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폐(廢)하여지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本質)로서 영속(永續)하는 것이다. 이것은
⑴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⑵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인간적인 모든 수단들이 무위(無爲)로 돌아간다는 점과
⑶ 사랑의 참된 가치는 종말론적 상황에서 더욱 밝히 드러남을 교훈해 준다.

◉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우선적인 단계일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경에 표현된 사랑의 원칙들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 <고린도전서 13장을 매일 읽으라.>
“주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당신의 백성의 주의를 환기시키라고 나에게 지시하셨다. 이 장을 매일 읽고 여기에서 위로와 힘을 얻으라. 하나님께서 성화된 사랑, 하늘에서 난 사랑에 부여하시는 가치가 어떠함을 배우고, 그것이 가르치는바 교훈들을 그대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두라.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은 하늘에서 나는 것임을 배우고, 그것이 없는 다른 모든 자질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배우라.”(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91).
(리뷰 1904. 7. 21).

◈ <순종(順從)의 표현(表現)>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같은 참된 사랑을 정의하였다.
이 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의 순종의 표현이다.
그것은 모든 참된 신자들의 생활 속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편지 156, 1900).”

◉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 때에 거기에는 강력한 영향력이 나타난다. 아무도 무아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다.

화요일(1월 5일)
<“사랑은 … 아니하며”(고전 13:4~8)>

고린도전서 13:4~8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다른 관점에서 이 구절들을 살펴보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보라.
비록 이러한 진술들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지만, 사실은 사랑의 긍정적인 속성의 다른 측면인 것이다.

◉ <사랑은>
① 투기(妬忌)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사랑은 진심으로 인정해 주며
② 자랑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겸비(謙卑)하며
③ 교만(驕慢)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겸손(謙遜)하며 (뽐내지 않으며)
④ 무례(無禮)히 행치 아니하며 → 사랑은 예의(禮儀)있게 행하며. (예의 없이 안하며)
⑤ 자기의 유익(有益)을 구(求)치 아니하며 →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有益)을 생각하며
(사욕(私慾)을 품지 않으며)
⑥ 성(분(憤)내지 아니하며 → 사랑은 온유(溫柔)하며 (화내지 않으며)
⑦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사랑은 선(善)한 것을 생각하며. (앙심(怏心)을 품지 아니하며)
⑧ 불의(不義)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의(義)를 기뻐하며. (선(善)한 것을 좋아하며)

사랑 장(章)(고전 13장)에 세세히 묘사된 사랑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신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사랑이라는 말이 그분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⑴ <투기(妬忌)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시기(猜忌)하지 않으며>
투기하는 자란 좋은 혹은 나쁜 의미로 "질투하다" 이지만, 여기서는 나쁜 의미로 "투기(妬忌)"하다이다.
즉 다른 사람이 소유한 특권 때문에 그에 대해 좋지 않는 혹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과 정반대되는 분란과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는 그분이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연합해서 함께 살라고 권면하셨기 때문이다. (참조 요한복음 15:12; 17:22; 요일 3:23).
투기나 질투는 인간의 모든 결점(缺點)중에 가장 잔인하고 비열한 것이다. (참조 잠언 27:4; 아가 8:6).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덮는 그룹에 속하는 특권을 누린 고상한 천사 루시퍼는 투기에 넘어가서 높은 지위를 상실했다. (참조 이사야 14:12-15; 겔 28:14-15)
사단은 타락 이후에 자기의 무서운 투기의 악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서 모두 자기처럼 멸망 받게 되도록 애썼다. 오직 사랑만이 질투를 쫒아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소유해도 좋다고 허락하신 만족감은 가장 좋은 은사들을 열렬하게 바라고 본 장에 묘사된 사랑이라는 "제일 좋은 길"을 간결하게 갈망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참조 고전 12:31)

⑵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 자랑하지 않으며>
헬라어 '페르페류오마이(perpereuomai)'는 '허영심이 강하다' '스스로 뽐내다'라는 뜻이다.
사랑은 자기 자랑을 말하지 않고 겸손하며 자아를 높이고자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지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기억하고자기 칭송에 이르게 할 모든 생각과 암시를 즉시 물리친다. (참조 초기문집 112-113). 성령의 은사인 사랑은 각양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분에게 받는 것이라고 여기기에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은사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헛된 자랑을 할 근거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⑶ <교만(驕慢)하지 아니하며 → 뽐내지 않으며>
헬라어 '퓌시오오(phusioo')'는 '부풀어 오르다' '공기가 꽉 차다' '부풀리다'라는 뜻이며 은유적으로는 '자랑하다'.
사랑은 사람을 허영심으로부터 부풀리지 않으며 자만과 자기를 칭송하는 상태를 초래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자주 우월한 지식과 재능을 가진 자들의 특징을 이루는 자만과 자부라는 주관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참조 고전 8:1). 사랑은 가장 좋은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허영심을 부추기면서 정신적 자만에 빠지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자기가 성취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아첨을 구하지도 않는다. (참조 교회증언 5권124p)

⑷ <무례(無禮)히 행(行)치 아니하며 → 예의(禮儀)없이 안하며>
헬라어 '아스케모네오(asche'moneo)는 '부당한 행동을 하다' '수치스럽게 행동을 하다' 70인 역에서는 '벌거벗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참조 겔 16:7, 22절 등).
사랑은 결코 난폭하거나 무례하거나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감수성을 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지상에 거하실 때 사람들의 감정을 언제나 염두에 두셨고, 모든 사람을 향해 늘 예의와 예절을 갖춰 행동하셨다. (참조: 복음교역자 121p).
진실로 주를 따르는 모든 자는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무례함과 난폭함에 보복하고자 본성의 충동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조 : 복음교역자 12p).
사랑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올바르고 적절하고 조화로운 것을 찾는데, 이는 사랑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진정한 기쁨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을 피하도록 필연적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개인의 의견과 욕망과 관습이 다른 사람의 안락과 편의와 행복에 관한 관심에 나타나는 사랑으로 대체된다. 적절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해 제멋대로 감정 폭발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대의에 먹칠을 하는 모든 광신(狂信)과 불안정한 태도가 차단된다.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이 진술을 통해 사랑이 언제나 이성의 통제아래 있으므로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일 수 없다는 점이 입증된다. 단순히 느낌과 감정에 반응하는 것, 곧 사랑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감수성을 반드시 고려하지도 않는다.

⑸ <자기의 유익(有益)을 구(求)치 아니하며 → 사욕(私慾)을 품지 않으며>
문자적으로 ‘자기의 것’ 진정한 사랑의 본질과 정반대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이나 영향력이나 명예를 인생의 큰 목적으로 삼는 이기적인 추구이다. (참조 요 10:24, 33절).
사랑의 모든 특성 가운데서도 이것은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먼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런 관심으로 인해 번번이 다른 모든 사람이 가려져 버리지만, 그리스도의 길, 사랑의 길에서는 자아를 마지막에 두고 다른 사람을 첫째에 둔다. (참조 : 마태 5:43-46; 7:12).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은 죄로 인해 인류의 경험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이 완전히 뒤집혀서 사람들이 애정과 관심을 자신에게로 집중하게 됐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참조: 마태 10:39; 렘 17:9; 롬 7:14-18, 20절; 롬 8:5-8; 야고보서 4:4). 이기심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자아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한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자기 생애를 즐겨 바치는 이유이다. (참조: 마태 22:37-39; 행 10:38; 복음교역자 112p ; 교회증언 7권9-10p).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아에 전념하라는 본성의 아우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안락과 시간과 편의와 부와 재능을 인류의 복리를 증진시키는데 즐겨 희생한다.

⑹ <성(분(憤))내지 아니하며 → 화내지 않으며>
제임스 역에는 ‘쉽게’(easily)라는 단어가 삽입돼 있지만 그럴만한 근거는 분명히 없다.
실제로는 오히려 이 진술의 의미에 잘못된 색조를 더해 주고 만다. 사랑은 쉽게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성내지 않으며 아무것도 완전한 사랑의 평정심을 방해하지 못하고 곤혹이나 초조나 분노를 일으키지 못한다.
‘쉽게’라는 단어를 삽입하면 일정량의 분노나 성급함이나 분개가 허용되는 때도 있다는 암시가 되지만 진정한 사랑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참조: 시편 119:165; 히 12:3; 벧전 2:23). 자아 곧 본성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며 자기를 주님에게 바치면 죄에 대하서 죽는 것임을 아는 그 2:23). 안달하거나 불쾌해 할 이유가 없다. 그. 무슨 일뭴슨 어나든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분의 배려와 사랑의 눈길아래 있음을 알기에 모든 것을 단순히 하나님에게 맡긴다. (참조: 롬 6:11; 8:28; 벧전 5:6-7).
가장 두드러진 회심의 결과는 본성적으로 기질이 불안하고 성마르며 쉽게 화를 내던 사람의 품성에 나타나는 현저한 변화이다. 성령의 감화아래 그런 사람이 온화하고 친절하고 침착해진다. 그를 괴롭혀 성 잘 내던 옛 정신으로 돌이키려는 사단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⑺ <악(惡)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앙심(怏心)을 품지 아니하며>
문자적으로 ‘악한 것을 헤아리지 않으며’헬라어 단어에는 저질러진 잘못을 고려하지 않는 다는 개념이 들어 있는데 곧 그것은 그 잘못을 헤아리거나 덮어씌우지 않고 어떤 사람의 계정에 그 잘못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뜻이 실려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아름답고 그리스도인다운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되도록 가장 좋게 해석 한다는 점이 여기에 나타난다. 사랑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비판적이지 않으며 결점을 찾아내거나 다른 사람의 동기를 왜곡시키지 않는다.

⑻ <불의(不義)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 선(善)한 것을 좋아하며>
헬라어 ‘아디키아(adikia)는 사랑은 친구이든 적이든 간에 불의를 행할 때 기뻐하지 않는다.
불의 곧 죄(참조: 요일 5:17)는 거룩한 사랑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에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기뻐할 수 없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악을 보고 기뻐하거나 행복해 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악행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기 때문이다. 사랑은 누군가가 실수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심술궂게 기뻐하지 않는다. (참조: 잠언 10:12; 11:13; 17:9; 벧전 4:8). 성화되지 못한 마음은 원수가 죄를 범할 때 혹은 반대자가 자기 명예에 먹칠을 하는 실수를 저지를 때 기뻐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정반대의 길을 취하여 심지어 원수가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도와주려고 한다. (참조; 잠언 24:17; 25:21; 마태 5:44; 롬 12:20).
진리로 성화되지 못한 자들만이 다른 사람의 악행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참조: 롬 1:32; 12:9).
<본교 성경주석(한)12권 299-301p 참조>

◉ <사랑은 원칙이며 능력이다.>
“사랑은 충동적이고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원칙이며, 영원한 능력이다. 우리의 영혼은 결코 다함이 없는 샘물 같은 사랑 곧 그리스도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순결한 사랑의 시냇물을 먹고 자란다.”(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40)

◉ 고린도전서 13장에 자세히 묘사된 사랑의 속성들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의 면면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도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자.

◈ <하나님은 천평 저울을 갖고 계심>
“말을 잘하거나 예리한 지성을 소유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뚜렷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진지한 목적과 깊은 경건과 진리를 사랑함, 하나님을 두려워함 등이다. 입에 궤사가 없고, 충만한 믿음과 겸손한 신뢰심을 가진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진실한 증언은 비록 더듬거리는 말로 하는 증언일지라도 하나님에게서 온 황금같이 귀한 것으로 인정을 받지만, 반대로 큰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미끈한 말과 탁월한 웅변이라도 그 속에 진실과 확고한 목적과 순결과 희생정신이 부족하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다. 그가 재치 있는 말을 할지 몰라도,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또 감정을 잘 요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 예수님의 정신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성화되지 못한 마음을 즐겁게 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의 손에 천평 저울을 가지시고 말과 정신과 성실성과 헌신의 정도를 달아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헛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편지 38, 1890).”

◈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完全) (막 12:30, 31; 눅 10:27; 골 2:10)>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그 이웃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를 온전히 행할 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질 것이다.
(편지 11, 1892)”

수요일(1월 6일)
<사랑의 시금석(試金石) (마 5:43~48)>
◈ 시금석(試金石)이란?
귀금속의 순도를 판정하는데 쓰는 것을 시금석이라 한다.
즉 사람들이 금반지를 손에 끼고 다니는데 눈으로 보아서는 그 금반지가 14K,금반지인지, 24K,금반지인지, 아니면 99.99%의 정금(正金)인지 눈으로 보아서는 정확히 식별할 수가 없다. 이를 정확히 알려면 시금석에 분석을 해보아야 그의 정확한 순도를 알 수가 있다.

† <사랑의 시금석은 어떠한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3-48에서 ‘사랑의 무제한적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저항(無抵抗)의 교훈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는 이번에는 더 나아가 원수(怨讐)까지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이러한 명령을 명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히브리서 9:28; 벧전 2:24).실천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요 15:9-10; 벧전 4:8)
예수님은 사랑 운동을 명(命)하시되 사랑의 질(質)과 양(量)의 문제뿐 아니라 그 사랑의 대상 문제까지도 규명해 놓으셨다. (요일 4:11참조). 원수(怨讐)나 박해자에게 대한 사랑까지 말씀하심은 바로 사랑의 시금석이 무엇인지 정의가 되었으리라. 원수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으신 그 사랑이 바로 사랑의 시금석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는 차별이 없고 한계도 없다.
원수(怨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사랑의 은사(恩賜)를 소유한 자이다.
만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면, 원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만 원수라고 정의한다면 이 본문의 말씀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의 목숨을 위협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수(怨讐)란 반대자(反對者), 적수(敵手), 경쟁자(競爭者), 도전자(挑戰者), 다투는 자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원수는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핍박(逼迫)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들 중에도 원수가 있을 수 있다. 가족이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보복(報復)하려 하거나 옹졸하게 대하기가 쉽다.

(예) 때때로 직장에서 다툼을 경험하거나, 수년 동안 함께 일해오던 사람이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사람이 원수로 변할 수 있고, 심지어 교회 안의 어떤 사람도 원수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원수는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보복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모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 나를 해하는 자에게 보복하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본>
“우리 구주께서 하늘의 집을 떠나신 것은 원수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비록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중상과 핍박을 많이 받으셨지만 그 때마다 용서와 사랑만을 나타내셨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 당신을 죽인 자들을 위한 기도와 죽어 가는 강도에게 전한 소망의 기별은 갈 바리의 십자가를 통해 각 시대로 전달되고 있다.”(산상보훈, 71)

◉ 참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최종적인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목요일(1월 7일)
<행동(行動)하는 사랑(눅 10:25~37)>
◈ 율법의 완성이 곧 사랑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임을 교훈해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4복음 서중에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참된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 되는 시에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남을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자임을 교훈해 준다. 사실 나와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자에 대하여선 그의 불행을 보고서도 지나치기 일쑤이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미치지 않을까 전전 긍긍해 하는 오늘날의 세태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같은 교훈은 누구나가 선뜻 실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못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 (요일 4:20)라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앉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눅 10:27)

◈ <누가복음 10장25-37절의 제사장과 레위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특별히 온 백성을 대표하여 선택된 자들로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무를 맡은 자들이다. (민수기 18:1-32).
따라서 이들은 강도 만난 자를 누구보다도 먼저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였으니 비난을 받아 마당 하다. 물론 이들이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한 것은 그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유대인들의 의식법상 시체를 만지면 부정함을 입게 되는 규례(레 21:1-3)를 어기지 않으려 취한 행동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 해도 그들은 율법의 형식은 지켰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실천하지 못하였다. (눅 6:3-4).
그러나 평소 유대인들로부터 개 취급을 당하던 한 사마리아 사람(요 4:4)이 인종적 적대 감정조차 개의치 않고 강도만난 유대인을 위해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한 것은 우리에게 참된 사랑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참 종교는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하는 행위를 이루는데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또 다시 논쟁 가운데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순한 이야기로써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율법사로 하여금 진리를 고백하게 한 천래(天來)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장면을 청중들에게 묘사하셨다.… 이렇게 하여 “누가 내 이웃이나이까. 라는 질문은 영원한 답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다만 우리가 속하고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인종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계급의 구별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대적에게 상처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

2.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정신이 곧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에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20, 12) (소망 497-498, 503, 505).

◉ <복음의 신앙이란?>
1.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심령이 성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질을 사람 속에 부식(扶植)하는 것이다.
복음의 신앙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 생애 가운데 사시는 것이니 곧 살아서 활동하는 원칙을 말한다.
이 신앙은 품성 가운데 그리스도의 덕성이 드러나고 그것이 선한 행실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원칙들은 우리 실생활의 어떤 부문으로부터도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과 활동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2. <사랑은 경건(敬虔)의 기초(基礎)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에게 대하여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 대한 순진한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씀으로써 만도 결코 이런 정신을 갖게 될 수가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융화(融化)되는 때에는 사랑은 저절로 생겨난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계속하여 일어나는 때 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충만하고 얼굴에 나타날 때에 성취된다. (실물 402).

3.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음>
그리스도께서 거(居)하시는 마음에 사랑이 결핍(缺乏)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는 신성과 접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우리는 사랑의 사슬의 금 고리로 말미암아 우리 동포들과 연결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긍휼과 동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궁핍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이 우리에게 이끌려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여 달라는 간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선을 행하신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궁핍한 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을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사랑과 동정의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복(福) 주고 향상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넓고, 너무나 깊고, 충만함으로 어디든지 뚫고 들어간다. 이러한 사랑은 사단의 세력의 범위에서 사단의 기만으로 미혹된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낸다. 이 사랑은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바 그 보좌는 허락의 무지개로 둘린 보좌이다. (실물 403-404).

◉ 사랑은 이론이나 신조가 아니고 몸소 실천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행동이 없이 말로만 하는 사랑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과일나무와 같다.

<초점(焦點)>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때, 다른 사람에게나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가 있다.
사랑은 그 가치를 경험한 자만이 그 사랑을 나눌 수가 있다. †




2010년 신년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많은 축복들을 믿음으로 추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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