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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 모세와 아론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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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11-21 09:15 조회4,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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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11월 28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5분)

제9과 모세와 아론의 죄(罪)

<記憶節>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 3:27)
(硏究範圍) : 민수기 20~21장, 요 3:14~15, 약 4:4~15. / (核心本文) : 신명기 3:27

<學習目標>
(깨닫기)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기까지 거쳤던 수많은 시행착오를 살펴본다. <믿음의 報償과 不信의 悲劇>
(느끼기)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다.
<우리의 唯一한 所望이신 하나님만 바라봄>
(행하기)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심한다.
<信賴하고 順從함>

<要點>
약속의 땅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은 철저한 신뢰와 순종에 달려 있는데,
그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일요일(11월 22일)
<믿음의 거인(巨人)들이 넘어질 때 (민 20:1~3)>

◈ <방황의 종착지 가데스 바네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즉 광야에서 방황한지 38년째이자 출애굽 제40년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 광야의 가데스에서 하나님을 거역(拒逆)한 후(민 14장) 38년 동안 광야 생활을 마감하고 이곳 가데스 바네아에 재차(再次) 도착 하였다.
그들은 38년간의 기나긴 시간동안 죽음과 고통의 광야를 끝없이 행진(行進)하였으나 기갈과 음식의 부족 또는 환경 때문에 죽어간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날마다 채워주시며 그들의 행군을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가데스 반역 사건 당시 20세 이상이던 자들은 계속해서 죽어갔을 것이다, 민수기 14:20-3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범죄로 가나안 입국의 영광을 얻지 못한데 대해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악한 백성들에게 시달려온 모세와 아론은 본장 (민수기 20장10-12절)을 통해 혈기를 부리며 불신앙의 자세를 노출 시킴으로써 가나안 입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적인 역할을 할뿐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자신의 사적(私的)인 권리를 주장 할 수 없으며 또 그들에게 임의대로 벌(罰)을 주고 상(賞)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그들의 위치(분수)를 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타하고 화를 발하는 등의 비신앙적(非信仰的)인 태도를 보이자 그들을 징계(懲戒)하심으로 이스라엘들의 진정한 통치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공표하셨다. 더욱이 민수기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미리암’과 ‘아론’의 2인의 죽음에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바 이는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다.
즉 ‘미리암’과 ‘아론’의 2인의 죽음은
⑴ 이스라엘을 관할하는 자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살과,
⑵ 가나안에 세워질 나라의 주역은 결코 혈기와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미리암도 민수기 12:1-2절에 원망을 한 적이 있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 가장 근실한 여호와의 종들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모세는 그처럼 큰 특권(特權)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의 죄(罪)는 더 중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수없이 목격(目擊)하였음에도 자신을 높이고 말았다.
※ 인간의 악한 감정은 하나님의 의(義)를 이룰 수 없다. (야고보서 1:20)
◈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절대 필요하다. (야고보서 5:7-11)

◉ “물은 군중이 넉넉히 마실 만큼 많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모세는 큰 과오를 범했다.
모세는 분노한 감정으로 말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분과는 거리가 먼 인간적 격정의 표출이었다. … 모세가 백성을 비난하기 위해 분노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백성에게 해를 끼쳤다.
그는 인내심과 자제력의 결핍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백성은 그의 과거의 행로를 하나님이 지도하셨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고,
자신들의 죄를 변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모세도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행위가 처음부터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통해 보내 주신 모든 책망을 거절할 구실을 발견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417).

◉ <자제력(自制力)의 결핍(缺乏)을 드러낸 모세>
“모세는 백성 앞에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는 현저한 자제의 결핍을 보였고, 불평하는 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정신을 나타냈다. 그는 대중들 앞에서 인내와 관용의 모본이 되었어야 했다. 회중은 그들의 실패와 불만, 그리고 불합리한 불평을 그의 편에서의 잘못 때문이라고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데 있었다.”(교회증언, 4권, 369-370)

◉ 하나님의 근실한 종 모세도 연약한 순간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경고가 되는가?

월요일(11월 23일)
<아론의 죽음 (민 20:23~29)>
◈ <인간 제사장직(祭司長職)의 한계(限界)>
123세의 일기로 운명한 아론의 대 제사장직의 교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⑴ 제사장직의 불완전성
인간은 죄와 죽음으로 인하여 이 직책(대 제사장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직 수행은 완전하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범죄한 인간들에 대한 거룩한 속죄 제사와 중보 사역을 집행 하신다.
(히브리서 7:24-25)

⑵ 제사장직의 일시성(一時性)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은 영원하며 또한 예수님 한분만으로도 지극히 만족스럽다.
(히브리서 7:21-25; 8:1-4)

◈ 민수기 20장은 미리암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아론의 죽음으로 마친다.
아론의 죽음은 자연사(自然死)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거역한 대가로 집행된 하나님의 징벌이다.
하나님은 한 인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그의 지위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순종 여부를 물으신다. (고후 5:10)
미리암의 죽음과 아론의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주목해 보라.
미리암의 죽음은 짧은 한 절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마치 그녀의 죽음이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닥친 것처럼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아론의 죽음은 분명히 미리 예고되었다.

◉ 아론의 죽음은 세대교체를 의미했다.
그의 대제사장 예복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힌 것은, 비록 그는 죽을지라도 대제사장의 직무는 계속되어야 함을 암시하였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직분에 최선을 다함으로 그 책임을 벗는 날에는 후회함이 없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겠다.

◉ <아론의 죽음에 대한 모세의 슬픔>
“온 회중이 아론을 위하여 슬퍼했으나 그들은 모세만큼 그런 통절한 손실을 느낄 수 없었다. 아론의 죽음은 모세에게 자신의 종말이 가까움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시간이 짧음을 알수록 그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를 같이 겪은 충실한 친구 아론을 잃은 것을 슬퍼하였다. 그 사업을 모세는 이제 홀로 계속해야 했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친구이심을 알고 더 열렬히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27)

◉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을 때에 모세는 형 아론의 대제사장 의복을 벗겨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 주었다. 아론의 죽음은 세대교체를 의미했다.

화요일(11월 24일)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죄(罪)(민 21:1~5)>
◈ 이스라엘은 이제 죽음의 땅인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아직도 헤쳐 나가야할 장애들이 많았다.
즉 그들은 ⑴ 자신들의 삶에 내재해 있던 불신앙과 싸워야 했으며, 동시에
⑵ 가나안 입성을 가로막는 원주민들과의 접전(接戰)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두 싸움에서 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성된다는 원리와 통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8)
인간 자신을 바라볼 때는 실망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을 신뢰할 때 무한한 가능성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고후 4:7-15; 빌 4:13)

◈ 가나안 원주민의 습격으로(창 9:18; 12:6) 동족이 포로(捕虜)로 잡혀가는 등의 피해를 본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회복하기위해 여호와께 승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간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에 기초하였다기보다는 다분히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민족 우월감(優越感)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아랏을 중심한 가나안세력을 파멸시키셨다. 한편 이스라엘은 이처럼 민족적 자존심이 훼손되고 궁지에 몰릴 때는 우상숭배자들을 철저히 괴멸시켰으나 자신들의 자존심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는 민족들에 대해서는 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신 7:1-7)에도 불구하고 관용정책을 펼치는 등의 여유를 즐겼다. (여호수아 9:3-27; 11:19)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자존심과 이익에 집착한 사고(思考)를 하고 있었다.

☞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멀리 돌아가야만 했다(참조 민 20:14~21).
이러한 잠시 자신들을 위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지 않고 길을 인하여 불평하였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보호하심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보라.
그들이 아무리 많은 불평의 이유를 댄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날마다의 여행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의 기적으로 보호를 받아왔다. 그들은 사막에서도 필요한 물을 공급받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곧 “천사의 양식”(시 78:25)을 먹었으며, 낮에 그늘을 제공하는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 덕분에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내왔다. 백성 중에는 아무도 몸이 약한 사람이 없었으며, 기나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은 부르트지 않았고 그들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다 해어8:3~4, 시 105:37). 의심할 바 없이 물론 그들도 우리처럼 문제와 시련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오랫동안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선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의례히 베풀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감사함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너무나 쉽게 은혜를 망각하게 되었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대신 불평거리를 찾아 그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성토하기를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라고 하였다.

◉ 배은망덕(背恩忘德)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은 날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찬양(讚揚)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에 목말라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는 만큼 그것을 통해 그분의 고마우심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인은 모든 사고(思考)와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을 둔다. (로마서 14:8; 갈라디아서 2:20-22)

◉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認識)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크다. …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하신 일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여러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의 선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쳐 버린다.”(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43)

◉ 하나님께서 지난 날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를 표현할 때에 우리의 입술에는 불평(不平)이 사라지고 더 많은 감사한 일들을 경험(經驗)하게 된다.

수요일(11월 25일)
<불 뱀 (요 3:14~15)>

◈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旅程)중에서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사게 되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원망과 불평은 광야생활 초기 즉 그들이 출애굽한 직후부터 시작하여 거의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출 14:10-12; 15:24).
이러한 맥락에서 본 민수기21장에서는 인간의 죄악(罪惡)을 상징(象徵)하는 놋 뱀에 관한 기사(記事)가 대조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는 비록 인간의 죄악이 극(極)에 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설정해두신 계획은 반듯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본 민수기서 21장의 '놋 뱀' 사건은 예수님의 구속사역(救贖使役)을 예표(豫表)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14-15)

◈ <구리 뱀> = (1-5까지 부조와 선지자 430-432 인용(引用)함).
1. 모세는 산 뱀과 비슷하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백성 중에 높이 세워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물린 자마다 이것을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모세는 그렇게 하였고 물린 자는 모두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 살리라는 기쁜 소식이 온 진영에 전하여졌다. 이때에 많은 사람이 이미 죽었고 모세가 장대에 구리 뱀을 달아 올렸을 때에 어떤 사람은 다만 그것을 바라봄으로 나으리라는 것을 믿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저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길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가 많았다. 부모, 형제, 자매들은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근친들의 희미한 눈들을 그 뱀에게 향하도록 도와주려고 근심스럽게 노력하였다. 비록 힘없이 죽어가는 자들이라도 한번 쳐다보기만 하면 저들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2. 백성들은 구리로 만든 뱀에게는 그것을 쳐다보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치료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방법으로 백성들은 이 고통이 저희 죄로 인하여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었다. 저들은 또한 하나님을 순종하는 동안에는 저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호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구리 뱀을 든 것은 이스라엘에게 중대한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저들은 치명상을 입은 독의 결과에서 자신들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만 저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길에 대한 저들의 신앙을 나타내어야 하였다. 저들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아야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저들의 신앙이었고 그 뱀을 바라봄으로써 저들의 신앙을 나타내었다. 저들은 뱀 그 자체에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요 이는 다만 그리스도의 상징에 불과하며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신앙의 필요가 저들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제물을 가져왔고 이렇게 함으로 저희 죄를 위한 충분한 속죄가 이루어진 줄 알았다. 저들은 이 제물들의 유일한 예표이신 장차 오실 구세주를 의지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저희 희생제물 그 자체는 구리처럼 아무 능력도 효력도 없고 다만 저희 마음을 크신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임을 저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일찍이 세상에 산 자들은 모두 “옛 뱀 곧 마귀라고). 고 사단이라고). 는”(계 12:9) 자의 치명적인 독아(毒牙)를 잘 알고 있다. 죄의 치명적 결과는 하나님께서 준비 신 구원의 길로만 제거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이 쳐들린 뱀을 쳐다봄으로 생명을 구하였다. 그 쳐다봄은 믿음을 의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저들의 회복을 위하여 준비된 방법을 의지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그처럼 오늘날 죄인들).그리스도를 쳐다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즉 죄인들은 속죄의 희생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용서를 받는다. 활력이 없고 생명이 없는 상징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회개하는 죄인을 고치실 능력과 효력을 가지고 계시다.

5. 비록 죄인들은 저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용서하심을 믿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나, 신앙을 행사하는 능력은 우리의 것이다.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은혜와 자비를 붙잡는 손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주시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 사람의 마음은 흑암 중에 남게 된다. 만일 뱀에게 물린 자들이 쳐다보기로 동의하기 전에 멈추어 의심과 의문을 일으켰다면 멸망을 당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쳐다보는 일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면 믿음으로 쳐다봄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부조 430-432).

◈ <기적으로 보호를 받음>
그들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태도(態度)와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불만(不滿)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주께서는 불 뱀들이 그들을 물도록 허락하셨다. 이 뱀들을 “불뱀”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리면 살이 불에 타는 것 같이 아프고 금방 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이적으로 이 뱀들에게 물리지 않고 보호를 받아왔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행하는 광야에는 독뱀들이 득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영적 41).

◈ <치명적(致命的)인 결정>
이러한 방법에 회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구리 조각 하나를 쳐다보면 치료가 된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쳐다보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결정이었고 그 치료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모두 다 죽었다.
구리 뱀은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들리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복시키시고 치료하시는 기별을 보내시고 땅에 있는 것이나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 두라고 호소하신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주셨고, 진리를 갈구하여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열어 주셨지만 이 기별지들이 받은바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믿지 않았다. 겸손한 寄別者들이 그들에게 전한 진리를 헐뜯는 사람도 많다. (원고 75, 1899).

◉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확실한 불평의 이유를 가졌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불평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광야를 배회하는 그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았으나 그들은 반복하여 자기들을 광야로 끌고 와서 죽이려 한다고 해묵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호와께서 동조하지 않으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불평이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방금 가나안 사람들에 대해 큰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은 다 하나님을 원망하므로 범죄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원망의 결과가 죽음으로 다가왔다. 생명을 위한 중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모든 인류는 아담으로 인하여 다 뱀에게 물린 존재들이다. 여자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은 뱀이었다. 그것은 곧 옛 뱀 사담이요 마귀이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후손들은 다 뱀에게 물려 죽은 상태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 놋뱀을 장대 위에 다는 것만으로는 뱀에 물려 죽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그들은 순종하기로 선택하고 그들을 위해 제공된 유일한 해결책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죽음이 구원의 수단으로 제공되었으나 광야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값없는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믿어야 한다.

◉ 불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
우리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아야만 살 수 있다.

목요일(11월 26일)
<초기정복(初期征服) (민 21:10~35)>

◈ 가나안의 목전에 다다른 이스라엘은 호르 산 (민 20:22)을 출발하여 바로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홍해 광야 길 (민수기 21:4)을 돌아 비스가 산(민 21:20)까지 행군해 갔다. 이 행군은 가나안에 이르는 지름길을 포기하고 (신명기 2:4-6에 언급된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기위해) 좁고 경사진 소로(小路)를 따른 것이었지만 지난번처럼(1절) 실패는 경험하지 않았다. 즉 비록 현실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준하여 행동함으로써 승리에 찬 행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아모리족속의 섬멸(殲滅)>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들의 형제나라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기업을 받았던 에돔족속과는 달리 이방족속인 아모리 및 바사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다. 이들 족속은 하나님께서 멸하고자하신 족속들 중의 하나이다.
(출애굽기 23:23; 33:2; 34:11)
이들은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에 의해 멸망으로 이르고 말았으며, 이 멸망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방 족속들을 무찌른 사건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명기 31:4; 시편 135:11; 136:19)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수행하는 전쟁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를 대행하는 심판과 결부되어있었다.

◈ <정복전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
아모리 족속이 전복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신 7:1) 이스라엘 백성이 평화스럽게 접근한 것은 그 당시 그들의 멸절보다 가나안입성이 더 시급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판단을 불식시키시고 아모리인들의 멸망을 앞당기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실행하고야 마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엄정성은 단순히 파괴적인 성향만 지닌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악인에 대한 심판은 곧 의인에 대한 구원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성도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멸하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

◈ <전쟁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
이스라엘이 모압족속을 정복한 아모리 인들을 진멸시킨 사건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는
⑴ 이스라엘의 위업을 노래하기보다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신(神)이시다. (삼상 17:47; 시편 24:8)
⑵ 더욱이 정복자를 정복함으로서 세상 역사의 주역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임을 제시하고 있다.
⑶ 악이 기승할지라도 종국(終局)에가서는 의(義)가 승리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 두려움은 인간이 범죄(犯罪)함으로써 생겨난 것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에게서만 발견된다. (창세기 3:8-10). 따라서 하나님이 두려워 말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이다. (요 141-27)

◈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대로로만 통행하리. 이다 하나”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그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민 21:22), 아모리 왕은 거절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왔다.

◉ “가나안 국경에 있는 이 민족들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여 이스라엘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멸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 원래 아모리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으며 큰 죄를 범하였으므로 전멸되는 것이 당연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4백 년 동안이나 자비를 베푸셨다. …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434)

이 두 족속에 대한 전략의 차이점을 주목해 보라. 옥 왕에게는 그의 땅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해 달라는 예의바른 요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높은 성벽이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한(신 3:5) 그 성으로부터 그 왕과 그의 군대를 이끌어 내셨다. 그들이 요새를 떠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인도와 약속을 따라 옥 왕과 그 군대를 들에서 진멸하였다.

◉ <언약(言約)에 충실(忠實)하신 하나님>
“광야에서 방황하는 사십 년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셨다. 그분에게 순종한 자들은 약속된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이 언약은 여전히 힘이 있다.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늘의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설교와 강연, 2권, 228)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아모리 족속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첫 번째 승리였다.

◉ “구주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였을 때에 그는 이 변화가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다.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서 회중 가운데 높이 달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진중에서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살 것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나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이는 것 외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174~175)

<요약(要約)>
민수기의 이 부분은 40년간의 방황(彷徨)이 끝나는 시점에 해당한다.
모세와 아론은 그들의 누이 미리암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여호와께 대한 반역(叛逆)에 대해 분노(憤怒)하였다.
그 후에 불평하던 회중은 불 뱀에 물리게 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세우게 하신 놋 뱀을 믿음으로 쳐다볼 때에 그들에게 육체적 및 영적인 치유(治癒)가 일어났다.
이 겸비(謙卑)케 하는 경험 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아모리 족속을 정복(征服)하고 그 땅을 점령(占領)할 수 있게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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