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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나팔, 피, 구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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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10-14 13:12 조회4,0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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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나팔, 피, 구름, 불
10월 24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3분)

도입)
인간이 걷고 있는 길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 즉 인생길, 인생사라는게 자기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l0장 23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라고 했다. 즉 하나님께서 걸음을 지도하시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두길 이다. 하나는 블레셋 땅을 통과해서 남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다른 하나는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서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험할 뿐 아니라 많은 시간이 요구되며, 고통이 따르는 길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언제나 지름길이며, 가까운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때로 하나님은 돌아가는 길도 택하심을 알아야 한다.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의 근성 때문에 싸우기보다는 도망하고, 책임을 지기보다는 적당히 하고, 모든 일에 타성이 붙어서 의욕이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군대를 만나면 도망할 것이기 때문에 광야의 훈련 속에서 종의 근성을 빼버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본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또 어려움이 있을 때 방패 역할을 하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악조건을 좋은 조건으로 바꿔 주는 역할을 했다. 오늘도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보하시고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의지하며 살아가시를 바란다.

기억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연구범위: 출 12:1~29, 민 9~10장, 마 26:36~43, 눅 22:15, 19~20, 고전 15:52.

안식일 오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실 때에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그분께서 유월절 떡을 취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잔을 취하사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없이하려고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마 26:26~29). 바울은 기록하기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하였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인의 유월절이다. 그리고 새 언약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제1주년 기념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 가운데 임재하시어 그들을 인도하신 것과, 특정한 때에 불었던 은나팔, 그리고 옛날 하나님의 백성이 처해 있었던 독특한 상황을 나타내 주는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비록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유혹을 우리도 똑 같이 겪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처한 시대와 상황에 맞는 교훈들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겠다.

일요일(10월 18일)
나를 기념하여(민 9:1~5)
도입)
죽음과 삶이 갈리던 날, 그 날이 바로 유월절이다.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던 날, 그 날이 유월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가 되던 날, 그 날이 유월절이다. 그러기에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그런 날이 유월절이다. 그 날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없는 것이다. 그 날이 아니었다면 홍해의 사건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도, 만나도 메추라기도, 볼 수도, 맛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었던 중요한 사건이 ‘유월’이다. 그 일이 일어난 날이 “유월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을 넘어간 이 날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해마다 그 날이 되면 절기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 민수기 9:1~5와 출애굽기 12:1~29을 읽으십시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읽으면서 순종, 은혜, 구속, 믿음, 심판 등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답:
마침내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였으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뛰어넘었던 놀라운 밤으로부터 1주년이 되었다. 이제 그날이 연중 의식으로 제정됨으로써, 그들은 애굽에서의 특별한 구출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을 기념하게 될 것이었다.

2.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 유월절을 기념합니까?(눅 22:15, 19~20). 이 의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줍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두 제도와 그 의식에 따르는 두 큰 축제 사이의 전환점에 서 계셨다.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막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려고 하셨으며 이렇게 함으로 그분은 4천년 동안 당신의 죽음을 가리켜 온 예표와 의식의 제도를 끝내실 것이었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실 때에 그분의 큰 희생에 대한 기념이 될 예식을 유월절 대신 세우셨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축제일은 영원히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예식은 각 시대를 통하여 온 땅에 거하는 그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예식이었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로 이루어진 큰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 주신 바 되었다. …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사업은 우리 마음속에 항상 새롭게 간직된다.”(시대의 소망, 652~653)

교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 받은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고전 5:7)에 의하여 성만찬 예식으로 전환되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지 일 년이 되어 첫 번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잘 지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유월절을 지키는 기간 동안에 시체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율법은 ‘시체를 만진 사람은 칠일 동안 부정하다’고 규정한다.(민 19:11) 부정한 사람은 거룩한 유월절 절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첫 번 유월절 절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모세를 찾아와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찜이니이까? 모세는 이 문제를 겸손히 여호와께 물었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절기 중에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들이나 여행 중에 있었던 사람은 2월 14일, 다시 말하면 정기 유월절보다 정확히 한 달 후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도록 허용해 주셨다(11절). 사정이 있어 유월절을 지키지 못해 한 달 늦게 지키는 유월절을 편의상 ‘늦은 유월절’이라 부른다. 늦은 유월절은 기회를 주시는 유월절이었다. 이 점에 있어 유월절은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다. 또 ‘그 의미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나에게 어떤 은혜가 되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기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때로 부정케 된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다. 이렇게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의 허물을 보며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며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월요일(10월 19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민 9:15~23)

도입)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민족의 행진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좌표가 되며, 체류의 기한이며, 행동의 기준이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진행했다.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장막을 쳤다. 몇 날이 되었던지 간에 구름이 성막위에 멈추어 있을 동안에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구름이 떠오르면 다시 진행하였던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생활이다. 내 마음과 생각과 뜻대로 사는 생활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고 멈추는 일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신앙은 오직 여호와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믿음이 좋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한다는 것을 말한다.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 우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중심으로 사는 것과 같다. 불과 구름 기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적으로 보호해 주심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라는 가장 두드러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봄으로써 놀라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라. 2백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위험한 광야에 있었다. 그들의 진은 아마도 사방으로 멀리까지 퍼져 있었을 것이다. 라디오나 전화, 또는 인터넷 같은 직접적인 통신 수단이 전혀 없던 시대였기에 그들이 언제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1. 민수기 9:15~23을 읽으십시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는 적어도 그들에게 이동하라는 명령과 같은 그분의 뜻을 나타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답:
여호와께서 그들을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을지라도 그들의 여정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예레미야는 기록하기를, “그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셨다(렘 2:6)고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민수기 9:16에 따르면,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다(민 9:16)고 하였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어떤 시련에 직면하든지, 어떤 적을 만나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가시적인 표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마음 든든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따르도록 하지 않았겠는가?

교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 위에 떠 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부가적용)
스위스의 교육자 힐터는 말하기를 “무엇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곧 사명감이다. 무엇이 사람을 성실하고 용감하게 만드는가, 그것도 곧 사명감이다. 무엇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이 되게 하는가, 곧 사명감이다.”라고 했다. 사명감은 곧 그 사람에게 굳센 신념을 주고 부단의 용기와 성실한 삶을 살게 하는 근본이다. 똑 같은 일을 할 때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과 사명감도 없이 일하는 사람의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다. 성막은 곧 오늘날의 교회인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다. 교회에 구름기중과 불기둥이 떠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의 건물이다. 교회가 다른 건물과 다른 것은 성막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항상 임재 하여 있어야 한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머물고, 저녁에는 불기둥이 머물렀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은혜와 진리의 모형이다.

화요일(10월 20일)
은 나팔(민 10:1~10)

도입)
하나님께서는 ‘은 나팔 둘을 쳐서 만들’라고 하셨다. 나팔은 소리를 내는 기구이다. 그런데 은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은과 관련된 소리를 내는 기구라는 뜻이다. 성막의 기둥 기초들도 모두 은으로 만들었고, 나팔도 은으로 만들었는데, 성막에 사용된 은은 모두 한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세 이상 된 남자 1인당 반 세겔씩 은으로 된 속전을 내야 한다. 속전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 생명 값으로 내는 것이 속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속전을 내셨다. 우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성막의 기초를 은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제사장이 은 나팔을 분다는 것은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 나팔을 불어야 한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선포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복음의 나팔을 분명히 불어야 구원 받을 자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있다. 주님 재림하실 때도 나팔 소리와 함께 재림하신다. 은 나팔의 수가 둘이다. 숫자는 증인의 수이다. 재판을 할 때도 두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판결을 낼 수 있다. 성경도 신약과 구약 두 권이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 보내실 때도 두 사람씩 보냈다. 두 증인, 두 개의 감람나무, 모두 증인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두 종류의 나팔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통의 양각 나팔(쇼파르)과 또 하나 곧 성소에 속하여 오직 제사장들만 불었던(민 10:8) 두 개의 은 나팔이 있었다. 은 나팔은 한 덩어리의 은을 쳐서 만든 것이었는데, 그 끝이 벌어진 긴 관과 같은 것이었다.

1. 민수기 10:1~10을 읽으십시오. 이 나팔들을 부는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나팔들을 부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이 은 나팔들을 부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팔을 부는 것은 "명령"을 의미했다. 전쟁 시에 이 나팔 소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리라(9절)는 보증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나팔 소리는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10절)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많은 다른 증거들과 함께 그분의 임재와 돌보심을 상기시키는 나팔이 사용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시각적 표징뿐 아니라, 나팔소리와 같은 청각적 표징이 하나님의 인도와 임재에 대한 특별한 증거로 주어졌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임재를 상기할 수 있는 구름기둥이나 불기둥 혹은 은 나팔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 새 언약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충분히 깨달을 수 없었던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한 보증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깨닫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지식 대신 단지 표상과 그림자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다(빌 2:6~8). 이러한 그분의 사랑과 품성에 관한 지식과 나팔 소리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교훈: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이나 불기둥 혹은 귀에 들리는 나팔소리는 없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새 언약이 있다.

부가적용)
은 나팔을 만드는 방법을 보면, 주물 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일일이 망치로 쳐서 만들게 하셨다. 나팔 하나를 만들 때 망치질을 몇 번이나 할까? 아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할 것이다. 이렇게 망치질을 해서 나팔을 만드는 모습이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들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만드시기 위해 계속 망치질해서 우리를 다듬어 가신다. 복음 전파는 이론이 아니고 경험이다. 자신이 복음으로 깨어지고 다듬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구원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복음의 증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확실한 구원의 체험, 복음을 통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은 나팔을 불 때 어떤 목적으로 부는가? 회중을 모을 때 불고, 진을 진행케 할 때 부는데, 하나를 불면 동편으로 가고, 다른 하나를 불면 서편으로 가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 택함을 받은 구원 받은 백성들을 위하여 부는 나팔이 은 나팔이고, 적들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낼 때 부는 나팔이 일곱 양각 나팔이다. 즉 은 나팔은 복음의 나팔이고, 양각 나팔은 심판의 나팔이라고 할 수 있다.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복음의 은 나팔을 불어야 한다. 택함 받은 백성은 복음의 은 나팔 소리를 듣고 하나님 앞으로 반드시 나아오게 된다.

수요일(10월 21일)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 10:29~32)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탈출하여 시내 광야에 왔을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왔다.(출18:1-12) 그 후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노쇠한 상태로써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드로는 자기의 고향 미디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모세의 장인은 자기의 아들 호밥을 모세와 함께 있도록 하여 모세에게 힘이 되어 주도록 했던 것이다. 모세에게 처남이 되는 호밥은 광야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모세도 이를 좋게 여겨 약속하기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모세의 처남 호밥은 모세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모세가 아무리 좋은 조건의 약속을 하여도 막무가내로 말하기를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고 한다. 모세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을 한다. 본문 31-32절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 라고 하여 나아갈 길을 모르는 외로운 길을 가는 모세에게 인간적으로 처남을 의지하고 싶었던 모세였지만 결국 호밥은 자기의 친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모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된 것이다.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다시 결혼하였다. 그의 아내 그두라는 여러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미디안이다(창 25:1~6).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함으로 르우엘(출 2:18)로도 불리는 이드로('하나님의 친구'를 뜻함)가 그의 장인이 되었는데, 그는 미디안 제사장으로(출 18:1), 참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12절).

1. 모세는 이드로의 아들 호밥에게 어떤 요청을 하였습니까? 호밥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민 10:29~32)
답:
모세는 하나님께 여쭙지도 않고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광야를 지나는 민족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낮의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광야에 길을 여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신뢰하지 못한 채 당면한 도전 앞에 연약성을 드러내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된다.

2. 마태복음 26:36~43을 읽으십시오. 이 기사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우리 구주께서도 때때로 인간적인 동정과 지지를 필요로 하셨다. 그분은 모든 제자들은 사랑하셨지만,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가까이 지내셨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께서 이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에 그들은 기도하는 대신 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보내졌다. 그들은 그분께서 대속적 죽음으로 나아가시도록 격려하였다(눅 9:28~31). “이제 하늘은 예수님께 사자들을 보냈다. 그들은 천사가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당하였기에 지상 생애에서 시련을 당하시는 구주를 동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동역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졌었다. … 세상의 희망, 곧 각 사람의 구원이 그들의 대화의 요지였다.”(시대의 소망, 422, 425)

교훈: 모세는 때때로 믿음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 백성을 인도하기를 갈망하였다. 이 모세가 십자가를 앞두고 피땀 흘리시던 예수님께 보내졌다.

부가적용)
모세가 호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꼭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과 같이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지만, 때론 호밥과 같은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도 인도하신다.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다. 하나님은 그 손길들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는 아는 바도 없고, 또 살아 계시는 하나님보다도 다른 피조물들을 더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의탁하며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태의 근원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속에서 우리 자신을 분석해 보면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신뢰의 누룩을 상당량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환경과 부차적인 것과 그 밖에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경향성이 더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덮였었더라”(34절)고 한 것처럼 광야에 복된 피난처와 모든 것에 부족이 없는 복스러운 자원이 있다는 것과 우리의 인도자가 계시다는 항상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요일(10월 22일)
본향을 향하여?(민 10:11~36)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기는 했지만 어떤 길로 가야할 지 전혀 몰랐다. 그들이 애굽은 벗어났고,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막연히 알았지만, 어떤 길로 가야만 하는지 몰랐다. 그들이 가장 가기 쉬운 길은 흔히 카라반이라고 하는 해변 가의 장사꾼들이 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거의 유일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길은 쉽고 편하기는 하지만 길목을 지키는 불레셋 이라고 하는 강력한 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편하고 빠른 길로 인도하는 대신에, 힘들고 거친 광야길,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길,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길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만약 해변 가의 길로 그들을 인도했더라면, 길목을 지키는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면 전쟁이라는 것은 처음 당해보는 그들이 두려워서 애굽으로 발길을 돌려 도망칠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노예 노릇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광야 길로 인도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체험시키려고 하셨다. 광야의 사정은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광야에서 훈련시켜야만 했다. 그래야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속히 도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준비하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훈련을 받을 장소인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1.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조직을 갖춘 이스라엘 백성이 첫 여정을 떠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민수기 10:11~36을 읽으십시오. 그들이 이동한 방식에 있어서 두드러진 한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왜 그렇게 중요하였습니까?
답:

모세의 기록에 따르면, 시내산(호렙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열 하룻길밖에 되지 않았다. 가데스바네아는 후에 유다의 남방 경계가 된 지역의 성읍이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어떤 순서로 행진하였는지 주목해 보라. 구름기둥과 함께 법궤를 앞세우고 세 지파의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 다음에 레위인들이 성막의 여러 기구들을 옮기는 수레와 함께 나아갔다. 또 다른 세 지파의 군대가 그 뒤를 따랐으며, 그 다음에는 고핫 자손이 성막의 기구들을 메고 따라갔다. 그 다음에 여섯 지파의 군대가 후방을 방어하면서 따랐다. 모든 것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만약 그들이 무질서하게 행진하였더라면 아마도 끔찍한 재난이 일어났을 것이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땅을 통과하는 해변 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아셨다(출 13:17). 그리하여 구름기둥은 이스라엘 민족을 북동쪽에 있는 바란 광야로 인도하여 3일 길을 행하게 하였다(민 10:11~12, 33). “그들이 전진할수록 길은 더욱 험해졌다. 그들이 가는 길은 돌 많은 협곡과 불모의 황야를 가로질러 뻗어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다 황량한 광야뿐이었다. … 멀고 가까운 바위투성이의 좁은 골짜기에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수레들과 짐승들, 양떼와 가축 떼의 긴 행렬로 혼잡을 이루었다. 그들의 행진은 느리고 고통스러웠으며 군중은 오랫동안 장막을 치고 평안이 있던 뒤라 노중의 위험과 불편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377)

교훈: 이스라엘 백성은 군대로 조직되었으나 아직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름길 대신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

부가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대처럼 열을 지어 애굽을 나왔다. 그런데 열을 지었다고 해서 다 싸움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싸움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다. 그들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란 것을 몰랐다. 애굽 왕들은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이 적의 편에 가담할까 두려워서 그들의 손에는 전쟁무기를 주지 않았고, 노예처럼 일만 시켰고 박해만 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군대처럼 항오를 지어서 행진했지만, 실상은 노예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지, 무엇 하나 자기가 책임지고 해 본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약 전쟁을 만나면 오합지졸이 되어 애굽으로 도망쳐 버릴 것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체질을 아셨다. 그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라도 가나안으로 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들이 불레셋 사람들과 싸울 힘이나 용기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불평이나 원망뿐이지 어떤 어려움이든지 뚫고 나갈 각오나 결심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들은 크고 넓고 쉬운 길을 원했다. 아무 부담 없이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안 되면 되돌아오면 되는 그런 길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실 리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빨리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다. 그들은 체력이 아니라 믿음이 강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만 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에 가장 합당한 장소로는 아무 대책이 없는 광야가 제격이었다. 그리고 광야는 길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되돌아갈 길을 알 수 없는 광야가 제격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해변 길로 가려는 것을 막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금요일(10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우리는 매일 매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다음의 약속들을 숙고하라. 시 31:3, 32:8, 48:14, 78:52, 사 58:10~11.

“만일,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바친 상태라면 내일을 위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를 종으로 삼으신 그분께서는 처음과 끝을 다 아신다. 미래의 사건들이 비록 그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능하신 그분의 눈에는 훤히 다 보인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 우리는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삼켜지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산상보훈, 100~10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성경에서 인간적인 지지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로는 또 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인간적인 지지가 얼마나 중요다고 생각합니까?

2.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때에 어떠한 믿음을 갖는 것이 그 예식의 참된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해 줍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시내산 아래서 1년간이나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은 진을 떠나기 전에 유월절 1주년 기념일을 자유로이 경축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했다. 지파별로 질서정연하게 3일간 행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들의 행진은 은 나팔의 신호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되었으며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맨 앞에 섰다. 구름기둥은 북동쪽의 바란 광야로 그들을 인도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힘들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인도하실 때에도 지혜가 풍성하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축복의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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