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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요한일서의 중요한 주제들(도입 예화와 부가설명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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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9-02 14:49 조회6,3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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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요한일서의 중요한 주제들
9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5분)

도입)
194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가 쓴 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부부가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신비한 노인이 산모에게 나타나 그 아이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산모는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정말 이 아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과 칭찬을 받기만 하는 중에 그는 교만해지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노년은 몹시 비참하고 쓸쓸했다. 그때 다시 그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너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지. 그래서 정말 행복하냐?” 이 사람은 말했다. “아닙니다. 내 마음은 너무 허전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새롭게 축복해 주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을 때보다 사랑을 할 때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자만 그런 게 아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이다. 왜 사람은 사랑할 때 더 행복해질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게 하나님의 본성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도 사랑하는 게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해야 행복한 것이다.

기억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연구범위: 마 5:13, 요 14:6, 엡 4:25~5:21, 딤전 3:15, 요한일서.

학습 포인트: 요한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교회는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그는 어떤 상징을 사용했는가?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기초는 무엇인가? 요한은 진리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안식일 오후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 C.에 일어난 테러의 비극 가운데서도 우리는 한 가지 긍정적인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도덕적 상대주의의 패배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밝은 낮에 TV 시청자들이 보는 데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처참한 살인극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대량 살상에 따른 공포감으로 치를 떨게 하였다. 아무리 문화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명확해졌다. 9월 11일에 사람들은 모든 문화와 전통과 시대를 초월한 악의 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도덕성, 특히 악의 객관적인 본질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물론 요한에게 도덕적 상대주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있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언제나 도덕성의 기초를 이루는 진리의 본질에 관해 요한일서의 중요한 주제들과 함께 복습해 볼 것이다.

일요일(9월 6일)
하나님

도입)
남자와 여자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모든 장애를 뛰어 넘는다. 그래서 사랑을 가로막는 어떤 힘에 대하여도 도전하는 담대함이 있다. 그래서 사랑을 고귀한 힘으로 예찬한다. 그러나 사랑은 마음에 생기는 것인데, 그것은 어느 사람을 향하여 생기는 것이다. 대상을 향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없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하면,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어머니는 사랑이시라'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기 자식은 사랑하면서도 남의 자식은 사랑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랑도 대상을 향하여 드러나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햇빛처럼 부어지는 것이다. 햇빛은 누구를 골라서 비추이지 않는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성한 자나 연약한 자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비추인다. 그래서 원수에게 조차도 사랑하고 축복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성부(요일 2:16), 성자(23절), 성령 하나님(요일 5:6)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로 예수님과 아버지에 대한 강조가 대부분이었다. 요한은 이 서신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조금도 어두움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사랑이시라고 말한다. 참으로 우리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자녀’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는데 이 표현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을 나타내 준다. 간단히 말해서,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이 서신은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에 관해서도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소망과 용기를 얻게 된다.

1. 요한일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으며, 또한 지금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요일 1:9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2:1~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2:27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3: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4:8~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5:1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5:1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일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과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죽으신 사실을 언급한다. 동시에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원수인 마귀의 일을 소멸하였다. 이 서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 요약하면, 다른 무엇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교훈: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제공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성 프랜시스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프랜시스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루는 길을 가다가 한센병자를 만났다. 프랜시스는 그가 불쌍해서 안고 기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너무 더럽고 흉측해서 꺼려졌다. 더욱이 병이 옮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도 되었다. 그래서 갈등하다가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계속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이일로 제 마음이 몹시 무겁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주님이 대답해주셨다. “왜 한센병자를 안고 기도해주지 못했느냐?” “그가 너무 더럽고 병이 옮을 위험이 있어서였습니다.” 주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그보다 훨씬 더 더럽고 흉측할 때 너를 안아주었느니라.” 이날 이후 프랜시스는 변했다. 모든 병자와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성자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체험하면 사랑하게 된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많이 사랑하게 된다.

월요일(9월 7일)
교회

도입)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하나님은 가족을 원하시고 우리가 가족이 되도록 만드셨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그분과 함께 통치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관계를 소중히 여기신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족으로 하나님,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표현하신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된다. 또한 모든 믿는 사람들은 형제와 자매가 되고 교회는 영적 가족이 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은 새롭데 태어나는 것뿐이다. 조건은 오직 믿음이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우리가 받을 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며 순결하고 영원한 축복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산포하는 의식이 침례이다. 침례는 우리의 믿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동참함으로 옛 사람이 죽었음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의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어떤 것도 이에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며 불안하다고 느낄 때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가족인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 속한 가족들이 모인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가족들이 모이는 집이다.

신약에서 교회는 소금(마 5:13), 기둥(딤전 3:15), 건물 또는 집(엡 2:21~22), 성전(고전 3:16~17), 어머니(계 12:1~2), 신부(계 21:2), 그리스도의 몸(엡 1:22~23) 등 여러 가지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

1. 요한일서에 교회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그 개념은 나옵니다. 이 서신에는 교회가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어떤 이미지가 나옵니까?
요일 2:9~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2: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2:12, 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일서에서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가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12회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 자신도 교인들을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름으로써(요일 2:18)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교인들은 ‘자녀’(13회), ‘아비’(2회), ‘청년들’(2회), ‘형제들’(13회) 등으로 불린다.
이 용어들은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소속되는 느낌을 준다. 각 사람은 필요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한다. 덧붙여서, 이 가족에는 하나님도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이 공동체는 수평적이며 수직적인 차원을 가진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를 어떻게 나타내 줍니까?

교훈: 요한일서에서 교회는 가족으로 표상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수평적으로는 형제자매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

부가적용)
영지주의의 특징은 ‘물질이란 영원히 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에 속한 육신은 항상 금욕과 고행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경건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육체를 가지신 것으로 보여 졌을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한다. 그들은 신적인 그리스도가 침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결합했다가, 예수가 죽기 전에 그에게서 떠나가 버렸다고 한다. 이 견해는 요한일서의 많은 부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견해의 오염으로부터의 보호가 요한서신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적 이론들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1:5) 하나님은 생명이시다.(2:2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관념적 구원을 꿈꾸며 영지주의를 통해 빛에 이르려는 자들에게 ‘빛 가운데 살아라’ ‘형제와 세상을 사랑하라’ ‘빛처럼 사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는 실천적인 말씀은 실로 영지주의자들의 심중을 꿰뚫었다. 요한은 거듭 거듭 교회를 가족으로 표상하며 하늘 아버지와의 사랑과 형제자매와의 사랑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실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육신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부모가 했던 말을 거듭거듭 되풀이하듯이 요한은 독자들이 혹여 알아듣지 못할까 염려하여 되풀이하여 이 사실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다.

화요일(9월 8일)
구원

도입)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인간의 구원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얻을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은 열쇠를 가졌어도 문에 맞는 열쇠는 단 하나이듯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의 영혼은 구원 받을 수가 없다. 브라질의 아마존 강은 세계 최대의 하구를 가졌다. 그 폭이 7만 평방 킬로미터나 되기 때문에 양쪽 언덕이 보이지 않아 처음 가는 사람은 강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바다 한복판에 있는 줄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대서양에서 폭풍 때문에 오래 표류한 배 한 척이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겨우 이 하구에 도착했다. 해도상으로는 분명히 아마존 하구에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언덕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다른 배 한척이 내려오고 있었기에 소리를 질렀다. “식수를 구하고 있는데 아마존 강은 어느 쪽이요?” “아직 모르셨소, 당신들은 지금 맑은 물 한 복판에 있소. 물통을 내려 뜨기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은혜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성취되어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맑은 물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는 물통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미 넘치도록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보혈)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은혜의 생명수는 믿음으로 물통을 내리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질 것이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관한 기록이다. 이는 우리를 원래의 상태보다 더 낫게 회복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놀랍게 자신을 희생하신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구원에 관한 기록이며 그것은 또한 요한일서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1. 다음 구절들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요일 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4:9~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의 보혈(요일 1:7, 5:6, 8), 곧 그분의 구속적 희생(요일 2:2, 4:10)이 우리 구원의 수단이다. 요한일서에는 십자가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피와 속죄의 희생이란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본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이다. 그러나 그분의 모본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처럼 행하라고 촉구한다.(요일 2:6)
요한에게 있어서 신자들의 구원은 ‘현재적 실제’였다. 그는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요일 2:2~3)
* 그들은 그분 안에 있었다.(요일 2:5, 5:20)
*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요일 2:12)
* 그들은 악한 자를 이겼다.(요일 2:13)
*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일 3:14)
* 그들은 영생을 가졌다.(요일 5:12~13)
이것은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놀라운 묘사가 아닐 수 없다.

교훈: 성경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요한일서에는 십자가라는 단어가 안 나오지만 그분의 속죄의 희생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부가적용)
예수의 죽음은 단지 무죄한 의인의 죽음이나 종교적 위인의 죽음을 넘어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나 부처나 마호메트의 죽음과도 다르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한 죽음이었다.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이 단지 의인의 무죄한 죽음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속하는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죄인의 대속을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라고 수차례 고난에 대한 예언을 하셨다. 복음의 진리란 하나님 사랑의 진리이다. 그것은 대속(代贖)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독생자(the one and only son)가 이 세상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스스로 신적 존엄 속에만 계시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죄인과 연대하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죄인과의 연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의 내용이다.

수요일(9월 9일)
그리스도인의 행실

도입)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죄인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은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누구나 우리의 형제자매로 받아주는 사랑이다. 교회 안에 아무리 못되고 악해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은 교인까지도 여전히 우리교회의 교인으로 받아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아주 어려운 과제가 하나가 더 있다. 악한 사람을 형제자매로 받아서 방치하는 게 아니라 꾸준히 정의와 진리의 사람으로 고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온갖 죄인들이 다 모인 곳이지만 더럽고 방탕한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악한 사람들이 꾸준히 변화되고 거룩해져서 모든 교인이 방탕과 악에서 멀어지고 교회도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가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첫 편지에서 그릇된 신학의 해악을 다루고 있지만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두고 있다. 요한은 분명히 신학이 윤리를 특징짓고,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행동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신학을 갖는 것은 중요한다. 예를 들어 율법과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안식일을 짓밟도록 이끌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이해를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정확한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바른 신학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소위 정통 신학을 크게 옹호한다는 사람이 이웃집 아내와 함께 도피행각을 벌인다면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시험시간에 부정행위를 저지른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구원과 하늘 성소와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진리를 아는 안식일 준수자가 거짓말을 한다면 얼마나 통탄스런 일이겠는가?

1. 다음 구절들은 도덕적 행실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요일 1:7, 2:1, 15~16, 3:4, 7, 15, 17~18, 4:7, 5:2~3)
답:
요한은 직접 혹은 간접적인 호소와 함께 도덕적 행실을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죄를 짓지 말며,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말고, 세상에 속한 정욕을 사랑하거나 자랑하지 말며, 불법을 행치 말라고 호소한다. 그 대신 순종하고, 옳은 일을 행하며, 실제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보다 더 세부적으로 말했으나(참조 엡 4:25~5:21),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라는 말로써 이 개념을 잘 요약했다.(요일 2:6)
요한은 하나님께로 나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는 단지 신념이 아니라, 생활이었던 것이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3:7)라는 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 준다.

교훈: 요한은 우리가 믿는 진리가 결코 이론에 그쳐서는 안 되며,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데서 나타났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 사랑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우리를 용서해주기 위해 우리 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아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랑이다. 이것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정의의 사랑이다. 죄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는 진리의 사랑인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악을 방치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악을 없애고 의롭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다. 요한일서는 방탕한 삶을 조장하는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 쓰인 책이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왜 그럴까? 사랑이야 말로 방탕하고 악한 삶을 고치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사랑만 받고 자라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헤르만 헤세의 글도 사랑을 받기만 한 사람은 교만해지고 성품이 나빠진다고 한다. 왜 그런가? 우리의 사랑에는 정의와 진리가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목요일(9월 10일)
진리와 오류

도입)
진리는 오류와 싸울 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나, 오류는 진리와 싸울 때 절대로 조용한 법이 없다. -De Malstre-
무엇을 가리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감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며,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에 절대적이라면, 개인의 감정이나 인간의 관계나 개인의 체험 혹은 개인의 환경은 진리 속에 있지 않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이 기쁘거나 기쁘지 않거나,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어야 하며, 가장 큰 고통을 느낄지라도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나쁘게 대하고 경시하여도, 우리를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는 사람으로 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진리에 견고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의 감정을 좇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실제로 너무도 담대해져서 항상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 자신을 좇아가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을 보아야 하며, 이 안에 자신의 감정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진리와 비교할 때, 「나」라는 존재는 진리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진리 속에 조금만 개입시켜도 즉시 문제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고대 헬라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리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관념이 존재해 왔다. 즉 인간은 어떤 뛰어난 절대적 표준에 의해 그 행동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들 스스로 옳고 그름,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왔었다. 이러한 개념을 상대주의라고 부르는데, 비록 그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근본적인 개념은 같다. 즉 절대적인 진리와 선과 도덕의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와 공동체의 전통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답: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예수님은 분명히 거부하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말씀으로 절대적인 진리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그 진리가 그분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의 인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셨다.

2. 요한은 진리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요일 2:4, 21, 3:19, 4:6, 5:20)
답:
요한은 절대적인 것이 있음을 알았으며, 더군다나 그는 흐릿하고 상대적인 세상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진리와 오류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예수님과 성령님이 진리이시라는 것이다. 한편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자와, 사랑을 고백하면서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이다. 반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에 속한다. 따라서 진리는 우리가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교훈: 요한일서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주제는 진리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상대주의가 우세한 듯 보이지만, 진리는 절대적이며 실제적이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진리의 절대성을 지켜서 적용해야 한다. 그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어떤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여 그에게 진리를 적용시킨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낮추는 것이 된다. 이것은 당신이 말한 것이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우리의 친척이라고 해서 진리에 대한 그의 절대성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금요일(9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제54장 “충실한 증인”(546~554).

오늘날 온갖 종류의 그릇된 사상들이 머리를 들고 있기 때문에 요한일서가 매우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요한은 그의 독자들과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믿지 말고 분별없이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지 말며, 어떤 가르침이든지 성경으로 시험해 보라고 권면한다. 진리와 오류를 구분할 줄 아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요한에 따르면,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1)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2)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3)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자 굳건한 토대를 놓기 원하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도덕적 절대주의를 믿는 자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상대주의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이나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순전히 우연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다면, 도덕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도덕적 기준을 바꿔버릴 경우엔 어떻게 되겠습니까?

2. 라과디아(Fiorello Enrico La Guardia)는 미국에 경제 공황이 계속되던 시절에 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아버지가 빵을 훔친 죄로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라과디아 판사가 그 사람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흐느끼면서 배고픈 아이들을 먹이려고 그랬다고 대답했습니다. 라과디아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압니까?”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뉘우치면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머리를 끄덕이며, “네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죄이지만 형벌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의 벌금을 내가 지불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과, 예수님처럼 사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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