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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기 10과 담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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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하 작성일09-08-26 03:56 조회3,6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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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4-

담대함

1984년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모교인 성 빈센트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기독교 신앙이란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불꽃같은 고요한 소망입니다.”

도망가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린다. 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피할 대상이 아니라 정복해야할 대상이다. 그는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Let's face it!” 하며 외쳤다.

출애굽한 백성들의 뒤를 애굽 병사들이 쫓고 있을 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바다였다. 하지만 모세는 도망하는 대신 바다를 대면하여 손을 내밀었다. 성경 종교의 정수는 대면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은 어떤 문제와의 대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여 문제와 대면하기를 두려워한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수 1:9)

남북전쟁이 버지니아를 휩쓸고 간 뒤, 각 학교에는 학생들이 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아침 아홉시만 되면 윌리암 메리 대학의 종은 어김없이 울렸다. 이웰(Ewell) 교장은 학생도 선생도 없는 학교의 종을 7년간이나 치면서 주민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번은 주민 중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교정에서 종을 치는 이유를 물었다. 그때 이웰 교장이 말했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도 바다를 물러가게 하려면 밤새도록 바람이 불어야 한다.(출 14:21) 그렇게 놀라운 밤을 지난 뒤에야 저편 언덕에 이르러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구하면 들으신다.


하나님과 잠간 같이 살아본 사람으로서 요한이 말한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리나라 말에서 ‘들었다’는 말은 응답했다는 말이다. “너 왜 말을 안 듣니?”하는 말은 왜 순종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Why don't you listen to me?”는 ‘왜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느냐’는 말이 아니라 ‘왜 내 말에 순종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듣는다는 말은 행위를 포함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들으신 때가 응답하신 때일까?

바사왕 고레스 3년에 다니엘이 황폐한 성전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드렸다.(단 9:17) 그러나 기도하고 삼주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21일만에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와서 말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 10:12)

다니엘의 기도는 첫날부터 들으신바 되었다. 가브엘은 다니엘에게 삼주 후에 왔을지라도 기도의 응답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첫날부터 시행되었던 것이다.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5)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들이 배가 고파서 ‘엄마 배고파’하고 외칠 때 엄마가 들었으면 아들은 믿고 제방으로 들어간다. 아들에게 필요한 밥은 이미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나 총 사줘’하고 들어가면 어머니가 그 말을 들으실까? 엄마가 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총이 어머니 마음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담대한 것은 이것이니 ‘구하면’ 들으시는 게 아니라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시는 것이다. 여기서 ‘담대함’과 연결되는 말은 ‘들으심’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6:24상)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이 아니면 구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다 들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들으신다.

정말 담대한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담대하지 못한 자는 자기의 뜻대로 구할까?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은 그가 구하는 것을 보고 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다. 뒷배도 없는 사람이 뻣대는 것을 만용이라고 한다. 용기는 다부진 마음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나보다 강한 자를 뒷배로 가질 때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담대한 것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왜 용서를 구하면 즉시 용서해주시고, 자녀가 되기 원하면 즉시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이미 있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것과 일치될 때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시지’(습 3:17) 않으실까?



확신


누구 누구 말할 것 없다. 우승을 확신한다며 떠난 선수가 입국할 땐 풀이 죽어 들어오는 경우도 보고, 상대방을 이길 자신이 있다며 으르렁 거리던 선수가 일 회 초에 한 방 얻어맞고 매트 위에 쓰러지는 경우도 본다. 확신은 어디까지나 확신일 뿐 확신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확신처럼 허무한 것은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과연 구원의 확신이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구원 받았는가’라는 질문은 ‘구원의 계획을 받아들였는가’ 하는 질문이요,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말은 구원 받았음에 대한 확신은 물론 구원의 계획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는 말이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계획에 대해 아멘하는 것, 그리고 그 계획의 일원이 된 것을 기뻐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 이것이 구원 받았음을 확신 하는 자의 삶이요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의 일원으로 사는 자들에게, 그리고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감사하는 자들에게 나의 십자가는 더 이상 져야할 짐이 아니라 세상을 담대히 사는 일에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요한이 이 말씀을 쓸 때는 이미 많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아 처형당한 때였다. 한데 어떻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는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할까?

요한일서 5장 18절에서 키워드는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는 악한 자가 그들을 만져 범죄치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요한이 그때까지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입술로 범죄치 않은 그의 형제들을 보고 확신하게된 사실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We might know Him who is true,
and we are in Him who is true.(NAS)


참된 지식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어 알게 하신 것으로서 그분은 거짓이 아니라 실재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지식은 거짓 신으로 가득한 세상에 한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요 생수와 같은 지식이다. 이러한 참된 지식으로 무장될 때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담대함과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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