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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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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8-25 15:05 조회4,8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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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8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6분)

제9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

(기억절(記憶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5)

(깨닫기)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시며,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 우리가 승리(勝利)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확신(確信)을 가진다.
(행하기) : 예수님을 통(通)한 승리(勝利)의 좋은 소식(消息)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 <핵심 토의주제(核心 討議主題)>
○ 우리에게는 어떤 승리(勝利)의 약속(約束)이 주어져 있는가?
○ 요한이 언급(言及)한 “물과 피로”라는 말의 의미(意味)는 무엇인가?
○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근거(根據)는 무엇인가?
○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 요한은 영생(永生)의 약속(約束)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가?

(요점(要點))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죄 값을 지불하셨으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삶을 살 수 있으며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일(日) (8월 23일)
<예수님과 승리(勝利)를 믿음(요일 5:15)>

◉ 승리(勝利)라는 말은 = “겨루어 이기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통쾌(痛快)한 말이다. 그러나
사도(使徒)요한이 말하는 요한일서 5:4-5절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은 또한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은 군사적(軍事的)인 전투(戰鬪)와 같은 개념(槪念)이 아니다.
즉 강제적(强制的)인 성전(聖戰)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면서 다음의 이야기로 깊이 있는 신앙의 이해(理解)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사도행전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肉身)에 선(善)한 것이 거(居)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願)함은 내게 있으나 선(善)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원(願)함은 내게 있으나, 선(善)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도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方法)은 한계(限界)가 있다. 방법은 약간(若干)의 도움은 되지만 장구(長久)하게 가지는 못한다.
벧후 3:11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잠언 20:11 행동(行動)(동작)으로 품행(品行)이 나타난다.
안식일(安息日)에도 옷 입는 것이나 겉으로 나타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상(思想)이나 품행(品行)이 어떻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이 바뀌어야 되는 것이지 요식(要式) 행위(行爲)가 중요(重要)치 않다.
즉 우리가 이해(理解)하는 관(觀) 이 중요 한 것이다.

마태복음 6:19-24에는 보물(寶物)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21절에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22절에 눈(目)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은 것이요……. 보물(재물)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갑자기 눈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의 중요한 핵심(核心)이 바로 "눈"은 관(觀)으로 연결(連結)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관(觀)이란
"재물관(財物觀)" "인생관(人生觀)" "결혼관(結婚觀)"등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觀)"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다 잘못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例)를 들어서 재물관(財物觀)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배제(排除)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매사(每事)를 결정하는 즉 자기위주(自己爲主)의 삶이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초래(招來)하기 때문입니다.

☞ 사울(바울)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사울(바울)처럼 관(觀)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도(聖徒)들을 괴롭히면서 옥(獄)에 잡아넣고, 잡아 죽이는 일에 열심(熱心)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울(바울)을 제일 먼저 치신 곳(部分)이 눈인 것입니다.
사울(바울)은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하늘로부터의 강한 빛을 통하여 사울(바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사울은 똑같은 육신(肉身)이지만 보는 것 즉 관(觀)이 달러지게 되고 전에 똑 같은 열심이 즉 관(觀)만 달라져서 관(觀)을 고치니까 전에 열심을 내던 그 열심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바울로써 그의 삶이 순교자(殉敎者)로 변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장(章) 마지막 절(節) (삿21:25)에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소견"을 "눈"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자기의 관(觀)이 문제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昏迷)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의 복음의 광채(光彩)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形象) 이니라.

마귀(魔鬼)는 우리의 눈을 혼미(昏迷)하게 만든다.
우리들이 직원회(職員會)의 할 때에도 기도(祈禱)하고 말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하자고 마음을 비우고 모두가 입술로는 그렇게 기도하고 직원회를 시작(始作)할지라도 결국은 자기의 의 주장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직원회의를 끌고 가는 현실(現實)이지 않습니까?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燈)이요 내 길에 빛 이니이다.”
눈은 등불이요 밝아지게 만듭니다. 눈을 밝게 하는 관(觀)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 말씀이 인격(人格)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니이다
방법(方法)이나 수단(手段)으로는 절대로 구원(救援)받지 않고, 오직 예수님으로 구원(救援)을 받습니다.

인격적(人格的)으로 예수님과 의 교제(交際)의 덕분인 것입니다.
계속하여 만나면 말투와 문체(文體)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臨)하시리라 하리라

마리아에게 수태고지(受胎告知)를 했을 때 의 사내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눅 1:34) 마리아가 천사(天使)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말의 본뜻은 겉으로 사람을 만나서 보는 것은 정보(情報)를 아는 것이지 진짜로 그 사람을 모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信仰)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정보(情報)만 아는 차원(次元)이지 예수님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시(初臨時)에는 목동(牧童)몇 명(名)과 동방박사(東方博士) 몇 사람만 예수님의 탄생(誕生)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적(聖經的)으로 즉 정보(情報)면 에서만 예수님을 알은 것이지 그 분의 오심과 그분 자체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중심(中心)이 문제이지 언제오시는 시간(時間)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초점(焦點)을 맞추어 놓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다 그 사건(事件)을 기다리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42-50) 42“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도 "좋은 편을 택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깊은 뜻을 이해(理解)하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공궤(供饋)하는 일을 했고, 마리아는 좋은 편(偏)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보(情報)만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예수님과 교제(交際)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공부도 예수님에 관(觀)하여 교회에 관하여 정보성이 있지만 예수님에 직접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 신앙(信仰)에서 승리(勝利)는 전능자(全能者)되는 분을 똑바로 잘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그분으로부터의 능력을 힘입을 때 승리는 보장되는 것인데, 그 능력자로부터 능력을 문자적(文字的)으로 지식적(知識的)으로 아는 것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이상(以上)의 설명에서처럼 사건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설명에서승리자 되시는 그분을 믿는 믿음이 승리의 보장이 된다.
◉ “믿는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으며 승리한 가운데 잠들었다(원고 35, 1906).”
◉ “십자가는 두 개의 극단, 즉 인간의 측량할 수없는 사악함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궁극적인 계시를 가능케 한다.
십자가는 자기의 독생자가 죽임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진실로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우주적 드라마의 중심 무대에 계신다. 멀지 않아 갈 바리에서 거두신 그분의 승리는 악을 완전히 제거하심으로 절정에 달할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은 다시 연합될 것이다.”(교리, 14)
◉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하나님은 뱀과 여인 사이에, 노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초자연적인 적대감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다.
창세기 3장 15절의 함축적인 진술 속에서 뱀과 그 후손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를 대표한다.
여인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구주를 대표한다. 이 진술은 선악간의 쟁투가 하나님의 아들의 승리로 종결짓게 될 것이란 점을 처음으로 약속한 것이다.”(교리, 42)

◉ <승리의 생애를 사시기 위하여. >
“그리스도의 인성만으로는 사단의 강력한 기만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골 2:9)셨기 때문에 그분은 죄를 이길 수 있으셨다.
아버지께 전적(全的)으로 의지하심으로써(요 5:19, 30, 8:28) 그분의 "인성과 결합된 신성의 능력은 인간을 위해 무한(無限)한 승리를 거두셨다."*”(교리, 53)

◉ “마리아는 큰 죄인처럼 주목을 받았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생애를 꼴지워왔던 환경들을 아셨다. 그는 마리아의 영혼 속에 있는 모든 희망의 불꽃을 끄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절망과 파멸에서 마리아를 건져 주신 분은 그리스도셨다. 마리아는 그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사귀들을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그를 위하여 아버지께 힘써 탄원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예수의 흠없는 순결에 비하여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임을 알고 예수의 능력을 통하여 승리해 왔었다.”(소망, 568)

◉ “ 믿음으로 거룩한 성품을 굳게 붙잡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는 기도하며 기도한 바를 믿을 것이다.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겪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 능력을 주장할 것이며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죄인은 바로 이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어야 하며 구원하시는 능력과 그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는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본으로 보이신 그 은사에 대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1기별, 224)

◉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남겨 놓은 여백(餘白)>
언제나 세상 쪽으로 조금씩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 감정과 계획과 생각들이 더욱 더 세상과 같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구주 사이에 여백을 남겨 놓는다. 사단은 이 빈틈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천하고 세속에 물든 이기적인 계획들이 그들의 경험과 섞여 짜여 지게 된다.” (리뷰 1887. 6. 7).

◉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예수께서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그분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勝利)할 수 있다.

월(月) (8월 24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요일 5:6~8)>

◉ 침례(浸禮)와 십자가(十字架)는 예수님이 누구이셨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두 경우(境遇)이다.
그러므로 침례와 십자가(十字架)를 온전히 이해(理解)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九州)영접(迎接)하여 믿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핵심(核心)이다.

◉ 예수님은 물과 피로 임(臨)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물로 침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사명을 완수(完遂)하셨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生命) (요한일서 5장6-12) >
“물과 피”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證言)하는 중요한 두 단어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성령(聖靈)과 물과 피”가 증거(證據)합니다.
물은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으로부터 받은 침례(浸禮)를 말하는 것이요,
피는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과 더불어 일관성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證據)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증거 중 어느 하나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증거(證據)들은 모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救援者)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참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참된 진리요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 심령에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떠한 소망(所望)도, 생명(生命)도 없습니다.

◯ 요한일서에서는 물이라는 단어가 오직 오늘 본문에만 나오지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는 매우 자주 등장한다. 요한이 요한일서 5:6, 8에 언급한 물은 예수님의 초림과 관계된 구절과 조화를 이루며, 예수님이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 '물과 피'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9:34에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나, 이것이 요한일서 5:6~8에 언급된 그 물은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 서두에 나오는 물은 침례와 연관되어 있다(요 1:26, 31, 33, 3:5, 23). 이것이 요한일서의 배경이다.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신 주님으로 오셨고 물로 침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지상 사역을 마치셨는데, 그 때에 그분은 피를 흘리셨다. 분명히 물은 예수님의 침례를, 피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요일 1:7). 침례와 십자가는 예수님이 누구이셨으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보여준다. 이 두 경우 다 신성의 현현(顯現)과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거하였다.(마 3:17, 27:50-54)

◯ 이 구절들에서 요한은 여전히 적그리스도들의 거짓 가르침에 관해 다루고 있다. 그러한 가르침은 신자들의 마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메시야도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죽음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구원과 하나님에 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갖게 한다. 즉 구속은 십자가가 아닌, 지식(그노시스)을 통해 얻는다는 오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이셨으며, 그분의 생애와 죽음이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사람들이 명확히 알기를 원했다. 요한은 사람들이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 <침례(浸禮)와 구원(救援)>
그리스도는 "믿고 침례(浸禮)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막 16:16)이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곧 침례(浸禮)를 베풀었다.
그것은 새신자의 믿음에 대한 확인(確認)이었다(행 8:12, 16:30-34 참조).

베드로는 침례(浸禮)와 구원(救援)의 관계를 예시하기 위해 홍수시(洪水時) 겪은 노아의 경험을 사용했다. 홍수이전 시대에 죄는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회개(悔改)하든지 멸망(滅亡)을 당하든지 선택(選擇)하라고 세상을 경고(警告)하셨다.
단 여덟 사람만 믿고 방주(方舟)에 들어갔고, 그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救援)을 얻"었다.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救援)하는 표니 곧 침례(浸禮)라 육체(六體)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 21)고 말했다.
베드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는 침례(浸禮)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물론 홍수의 물이 아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다. 신자에게서 죄를 제거하는 것은 침례(浸禮)의 물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러나 침례(浸禮)는 방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노아의] 순종처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찾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준비된 구원이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침례(浸禮)는 구원(救援)과 매우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하게 연결(連結)되어 있지만 구원(救援)을 보증(保證)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침례(浸禮)의 한 상징적(象徵的) 표상(表象)으로 간주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浸禮)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통과할 때 위의 구름과 양편의 물로 말미암아 "물속에 잠김으로" 상징적으로 침례(浸禮)를 받았다. 이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리하"셨다(고전 10:1-5). 그와 같이 오늘날도, 침례(浸禮)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경험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 12). (교리, 172-179)

◉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復活)의 상징(象徵)>
물로 덮이는 것이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상징했듯이(시 42:7, 69:2, 124:4, 5) 예수님의 물 침례(浸禮)는 그분의 고통, 죽음, 그리고 장사(葬事)지냄에 대한 예언적 실연(實演)을 상징했으며(막 10:38; 눅 12:50), 그분께서 물에서부터 올라오심은 그분의 뒤이은 부활(復活)을 상징했다(롬 6:3-5).
"사도 교회가 물에 잠금이 아닌 다른 침례(浸禮)방식으로 침례(浸禮)를 베풀었다면, 침례(浸禮)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으로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에 잠금에 의한 침례(浸禮)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신학적인 것이다."*

◉ <침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에 대한 상징>.
침례(浸禮)로 신자들은 우리 주님의 수난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 4)고 말하였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의 밀접성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음으로", 그리고 "침례(浸禮)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등의 표현을 통해 드러났다. 호와드는 이렇게 주석하였다. "침례(浸禮)라는 상징적 행위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분의 죽음이 그의 죽음이 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분의 부활이 그의 부활이 된다." (침례(浸禮) :교리, 172-179)
◉ <역사(歷史)가운데 나타난 침례(浸禮)>
그리스도 이전시대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방인 개종자들을 물에 잠금으로 침례(浸禮)를 베풀었다.
쿰란의 에세네파(The Essenes)는 그들의 단원(團員)들과 회심(悔心)자들을 모두 물에 잠그는 관습(慣習)을 따랐다. 지하 동굴이나 교회의 그림이나 벽화, 바닥, 벽, 천장의 모자이크, 조각된 부조, 그리고 고대 신약 시대의 그림들이 제공하는 증거들은 "물에 잠금이 첫세기부터 14세기까지 그리스도 교회의 정상적인 침례(浸禮) 방식임을 압도적으로 증명한다."* 북아프리카,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고대 성당, 교회 그리고 폐허 등에서 발견되는 침례(浸禮)탕들은 아직도 이 관습이 옛적부터 시행되어 온 제도임을 증거한다.*

◉ <침례(浸禮)를 베풀다"라는 단어(單語)의 의미(意味).>
"침례(浸禮)를 베풀다"(baptize)라는 영어 단어는 헬라어 동사 밥티조(baptizo)로부터 왔으며 그 의미는 물에 잠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에 담그다 혹은 밑에 담그다"*를 의미하는 동사 밥토(bapto)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침례(浸禮)를 베풀다"라는 동사가 물의 침례(浸禮)를 지칭할 때 그것은 물속에 한 사람을 잠금 혹은 담금의 개념(槪念)을 담고 있다.*

○ 신약에서 "침례(浸禮)를 베풀다"라는 동사는
(1) 물의 침례(浸禮)를 지칭하기 위하여(예컨대, 마 3:6; 막 1:8; 행 2:41),
(2)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은유로(마 20:22, 23; 막 10:38, 39; 눅 12:50),
(3) 성령의 강림에 대하여(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그리고 (
(4) 목욕(ablutions) 혹은 손을 의식적(儀式的)으로 씻는 일(막 7:3, 4; 눅 11:38) 등에 사용되었다.
이 네 번째 용례(用例)는 단순히 의식(儀式)상의 부정(不淨)을 정결(淨潔)케 하기 위한 씻음을 의미(意味)하며 물 붓기에 의한 침례(浸禮)의 합법성(合法性)을 인정(認定)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물 침례(浸禮)와 그리스도의 죽음 모두에 대하여 침례(浸禮)라는 명사를 사용한다(마 3:7, 22:20).
호와드(J. K. Howard)는, 신약에는 "물 뿌림이 사도적 관습(慣習)이 된 적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모든 증거를 취합(聚合)해 볼 때 그것이 후기에 도입(導入)된 것임이 명백해진다"고 말하였다.

◉ <신약(新約)의 침례(浸禮)>
신약에 기록된 물로 침례(浸禮)를 베푼 사례들은 물에 잠금이 수반되었다.
우리는 요한이 요단강 (안)에서(마 3:6; 막 1:5 참조)그리고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浸禮)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요 3:23)는 말씀을 읽는다. "많은 물"은 물에 잠금으로 시행하는 침례(浸禮) 때만 필요(必要) 된다. 요한은 예수님을 물속에 잠갔다.
피는 "요단강 (안)에서" 예수께 침례(浸禮)를 베풀었으며, 침례(浸禮) 후에 예수님은 "물에서 올라 오"(막 1:9, 10; 마 3:16 참조)섰다.*
사도 교회도 물에 잠금으로 침례(浸禮)를 베풀었다. 전도자 빌립이 구스 내시에게 침례(浸禮)를 베풀었을 때 둘 다 "물에 내려"갔고 "물에서 올라"(행 8:38, 39 참조)왔다.

◉ <침례(浸禮)>
“침례(浸禮)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復活)을 믿는 신앙을 고백(告白)하고, 죄(罪)에 대하여 죽고 새 생활을 살려는 우리의 의도를 나타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九州)로서 인정하여, 그분의 백성이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된다. 침례(浸禮)는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聯合), 우리 죄의 용서(容恕), 성령을 받아들임에 대한 상징이다. 이 예식(禮式)은 물에 잠그는 방식(方式)으로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죄를 회개(悔改)한 증거(證據)가 확인(確認)될 때 베풀어진다.
침례(浸禮)는 성경을 가르쳐서 그 가르침들을 받아들인 후에 시행된다. - <기본 신조, 14.>

예수님의 침례(浸禮)로 이 예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다(마 3:13-17, 21:25 참조).
침례(浸禮)는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의(義)의 한 부분이다. 무죄(無罪)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義)를 이루"시기 위하여 침례(浸禮)를 받으셨으므로 죄인(罪人)인 우리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 십자가(十字架)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셨다.
그분을 통하여 만물(萬物)이 창조(創造)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稟性)이 계시(啓示)되었고, 인류의 구원(救援)이 성취(成就)되었으며, 세상이 심판(審判)을 받는다.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신 분이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분은 성령(聖靈)으로 잉태(孕胎)되시고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서 탄생(誕生)하셨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생활하셨고 유혹(誘惑)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완전(完全)하게 예증(例證)해 보이셨다. 그분은 당신의 기적(奇蹟)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權能)을 드러내셨으며, 하나님이 약속(約束)하신 메시야이심을 증명(證明)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자발적(自發的)으로 고난(苦難)을 당하시고 십자가(十字架)(十字架) 위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復活)하시고 승천(昇天)하사 우리를 위해 하늘 성소(聖所)에서 봉사(奉仕)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최종적(最終的)으로 구원(救援)하고 만물(萬物)을 회복(回復)하고자 영광(榮光)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기본 신조, 4.”(교리, 41)

◯ “율법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반면에, 그것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물이 더러운 얼굴을 깨 끗게 하는 수단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필요를 발견한 다음에는 "죄와 더러움"(슥 13:1)을 씻도록 열려 있는 샘으로 가서 "어린양의 피"(계 7:14)로 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갈 바리의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온 세상의 죄짐에 눌려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될 때, 성령께서는……. 그들의 범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소망이 가득 차게 되며,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요 3:16) 우리 구주께 손을 내뻗는다.”(교리, 223)

◯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인간의 죄 값은 충분히 지불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되었다. 법적 견지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회복되었다(롬 5:18). 속죄, 혹은 화목은 희생 제물로 예표된 바와 같이 십자가(十字架)에서 다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회개한 신자는 우리 주님의 이 완성된 사업을 신뢰할 수 있다.*”(교리, 292)

◯ 온유와 겸손은 성공과 승리의 조건들이다.
영광의 면류관은 십자가(十字架) 아래서 머리 숙이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선지, 590)

◯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十字架) 밑에서 통회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소망, 83)

◯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사단을 정복당한 원수로서 바라볼 것이었다.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승리를 얻으실 것이었으며, 그는 이 승리를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소망, 490)

◯ “땅에 묻힌 씨앗은 열매를 가져오고 그리고 또다시 그 열매는 씨앗으로 뿌려진다. 이렇게 하여 수확은 증대된다. 그와 같이 갈바리 십자가(十字架)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맺힐 것이다. 이 희생을 숙고하는 것이 그 희생의 열매로써 영생할 자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소망, 623)

◯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셨으며 그분의 살은 채찍에 맞아 찢어졌고, 그처럼 자주 축복하시기 위하여 펴시던 그분의 손은 나무 막대기에 못 박히셨다. 사랑의 봉사로 피곤할 줄 모르던 그분의 발도 나무 기둥에 못 박히셨고, 그분의 고귀하신 머리는 가시관에 찔리셨다. 그분의 떨리는 입술은 비통의 부르짖음을 발했다. 그분이 참으신 모든 것 곧 그분의 머리와 손과 발에서 흘러내린 핏방울과 그분의 몸을 괴롭힌 고통과, 아버지께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분의 영혼을 가득 채웠던 말할 수 없는 고민은 우리 인류 각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와 같은 죄악의 짐을 지기로 동의하신 것은 다 그대를 위함이다. 그리고 그대를 위하여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낙원의 문을 여신다고 선언한다.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거품이 이는 파도 위를 걸으셨으며 귀신들로 떨게 하시고 질병이 물러가게 하셨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던 그분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十字架) 위에 바치셨다. 이것은 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소망, 755)

◯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는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광대한 우주의 무수한 세계들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 그룹과 영광의 스랍들이 즐겨 경배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고 죄의 치욕과 슬픔을 지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숨겨진 채 마침내 잃어버린 세상의 죄 때문에 갈바리의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당신의 심장이 터지고 생명이 떠나간 사실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며 모든 운명의 결정자께서 인류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것은 영원히 우주의 경이와 존경을 자아낼 것이다.”(쟁투, 651)

◯ “십자가(十字架)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버지와 연합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달려 있다. 십자가(十字架)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十字架)의 발아래에서 죄인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에, 그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十字架)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행적, 209)

◯ “십자가(十字架)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갈 6:14 )다고 부르짖은 것을 우리는 이상히 여길 수 있는가? 또한 십자가(十字架)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것도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갈바리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그 빛을 받아, 흑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빛을 나타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행적, 210)

◯ “십자가(十字架)의 오묘와 영광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으며,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히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 1880, vol. 4, p. 462.”(1보감, 278)

◯ “십자가(十字架) 없이 면류관은 없다. 시련이 없이 어떻게 주님 안에서 강해질 수 있겠는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을 발휘할 환경에 놓여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순교 직전에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훈계하였다. 우리는 많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다. 우리 구주께서는 온갖 방법으로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계속 승리하셨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 1872, vol. 3, p. 67.”(1보감, 480)

◯ “우리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십자가(十字架) 아래서 회개와 믿음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치욕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굴욕을 당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멸시와 조롱과 학대를 받기로 동의하셨다. 그분의 거룩한 영혼 주위에 흑암의 장막이 덮이고, 하나님께 매를 맞고 버림당한 자처럼 부르짖게 한 것은 우리의 범죄였다. 그분은 우리의 슬픔을 지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로 질고를 지셨다.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게 하시고자 그분은 자신을 속죄제로 드리셨다. 인간 속에 있는 고상하고 관대한 것은 무엇이나 십자가(十字架) 위의 그리스도를 명상할 때 주어질 것이다.”(1보감, 515)

◯ “그리스도께서 목수로서 노동을 하고 있을 때 모범적인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분명히 성취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갈릴리 바다의 흰 거품을 날리는 파도 위를 걷고 있을 때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을 때 또는 온 인류를 깨우쳐 새롭고 완전한 생애를 살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十字架) 상에서 인간의 희생 제물로서 돌아가셨을 때에, 당신의 거룩한 사명에 대한 큰 비밀을 숨기는 데 있어서도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신 것이었습니다.”(2기별, 163)

◯ “그대의 영혼을 진실하게 취급하라. 그리고 그대가 죄인임을 볼 때에 십자가(十字架) 밑에 찢긴 심령으로 엎드리라. 예수께서 그대를 더러운 그대로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하늘 천사의 무리에 가담할 수 있게 할 것이며 정결하고 조화된 하늘에 적합하게 할 것이다. 그 곳에는 충돌이나 불화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건강, 행복, 기쁨으로 넘칠 것이다.”(2증언, 81)

◉ <그리스도를 닮는 것>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아를 부인(否認)할 것이요,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계명(誡命)들을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시다. 사랑과 친절과 동정이 많으신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그분을 매일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 (편지 31a, 1894).

화(火) (8월 25일)
<예수님과 하나님의 증거(證據) (요일 5:9~10)>

◉ 교회를 다니지 않는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말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고조할아버지를 보았느냐고 질문을 하자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당신의 고조(高祖)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 친구가 펄쩍 뛰었다.
보이지 않는 고조할아버지가 계신 증거는 곳 자신이 있음이 곧 고조할아버지를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증거는 천연계와 성경(聖經)등이 증거(證據)하고 있지만 이 또한 성령(聖靈)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 여러 증인(證人)을 확보(確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몇 가지 다른 증거를 제시하였다.
⑴ 침례자 요한의 증거(요 1:6~7),
⑵ 예수님 자신의 증거(요 3:32),
⑶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요 4:39),
⑷ 예수님의 사역의 증거(요 5:36),
⑸ 성경의 증거(요 5:39),
⑹ 아버지 하나님의 증거(요 8:18),
⑺ 나사로의 부활을 지켜본 사람들의 증거(요 12:17),
⑻ 성령님의 증거(요 15:26),
⑼ 그리고 사도 요한 자신의 증거(證據)가 있다(요 21:24). 참으로 매우 인상적이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確固)한 증거(證據)위에 세워지기를 원했다.

◉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 여러 증거(證據)들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는 가장 강력(强力)하고 확실(確實)한 증거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證據)하신 것이니라.”(요일 5:9)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해 그분과 논쟁을 벌이고자 애썼다. 그는 그분의 허약하고 괴로워하는 상태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기가 그분보다 더 강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들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이 모든 고통과 시험 중에서도 그분을 붙들어 그로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았음을 보았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의 높은 지위와 권위에 대하여 충분한 증거들을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쫓겨났던 것이다.”(초기문집, 155)

수(水) (8월 26일)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문제(問題)(요일 5:7~8)>

○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심>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신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본문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세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그분을 세상에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 연합되신 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복수성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을 두 분이 아닌 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러 구절이 신성과 인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오직 한 분에 관해 말한다. 바울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에게서 나신(인간적 본성) 하나님의 아들(신적 본성)로 묘사하였다(갈 4:4). 따라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신적 본성)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인간적 본성)"(빌 2:6, 7) 되셨다.”(교리, 52)

◉ “하나님은 세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 가르침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여 왔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쉬신 사흘 동안은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언제나 존재하여 왔다고 말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시 90:2 하단).”(핵심, 예수의 생애와 교훈>3. 삼위일체)

◉ 신성(神性)의 각위들은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가?
①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포함한 우주의 머리이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14:28; 고린도전서 11:3을 읽으라.
②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요한복음 3:16; 마가복음 5:2를 읽으라.
③ 성령은 신성의 세 번째 인격체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일하신다. 창세기 1:2를 읽으라.
☞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관련된 문제들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신성의 각위들은 특정한 위치를 가지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죄와 구원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견해를 반포하신다. 아들 하나님은 성육신 되셔서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속죄를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 인간의 대표자로서 서 계신다. 우리의 대표자로서 그는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이해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 20:17을 읽으라. 성령 하나님은 회심과 변화를 통하여 인간 심령에 구원을 적용시키신다. 이 구원은 아들 하나님의 생애와 대속적 죽음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 <신성의 몇 가지 속성들을 열거해 보자.>
① 전능성(全能性)(계 19:6; 욥 11:7).
② 편재성(遍在性)(대하 16:9; 슥 4:10).
③ 전지성(全知性) (딤전 1:17; 욥 24:1; 32:8).
④ 불변성(不變性) (히 6:17).
⑤ 영원성(永遠性) (딤전 1:17; 시 10:16; 단 7:14; 계 11:17).
⑥ 사랑이심 (요일 4:8).
⑦ 자비(慈悲)로우심 (출 34:6).
⑧ 공평(公評)하심 신 32:4; 계 15:3).
⑨ 의(義)로우심 (스 9:15; 느 9:7, 8). ”(핵심, 예수의 생애와 교훈>3. 삼위일체)

◉ <신성(神性)의 삼위(三位)인 성령(聖靈)은 한 인격체(人格體)이신가?
① 그는 다른 인격(人格)이시다­ “다른 보혜사(保惠師)”(요 14:16, 17).
② 그는 다음과 같은 인격적(人格的) 특성(特性)들을 갖고 있다.
ⅰ. 마음, 간청(懇請)하실 수 있다(롬 8:26).
ⅱ. 의지(意志), 그는 선택(選擇)하실 수 있다(고전 12:11).
ⅲ. 슬퍼하실 수 있다(엡 4:30).
ⅳ. 속임을 당하실 수 있다(행 5:3, 4).
ⅴ. 모독(冒瀆)을 당하실 수 있다(히 10:29).
③ 그는 침례(浸禮)문구와 사도의 축도(祝禱)에서 신성(神性)의 다른 위(位)들과 관련되어 있다.
(마 28:20; 고후 13:14).” (핵심, 예수의 생애와 교훈>3. 삼위일체)

◉ “ 구원(救援)의 계획(計劃)과 관련하여 신성(神性)의 각 위(位)들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① 아버지의 사역
ⅰ. 아들을 주셨다(요 3:16).
ⅱ. 악(惡)을 용서(容恕)하신다(미 7:18).
② 아들의 사역
ⅰ. 인간을 죄에서 구원(救援)하신다(마 1:21).
ⅱ. 우리를 위하여 대언(代言)하신다(요일 2:1, 2).
③ 성령(聖靈)의 사역
ⅰ. 선지자(先知者)들을 감동(感動)시키신다(벧후 1:21).
ⅱ.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責望)하신다(요 16:8).
ⅲ. 진리(眞理)가운데로 인도(引導)하신다(요 16:13).
ⅳ. 거듭남을 이루신다(요 3:3-8).

◎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요점(要點)>
신성(神性)의 세 존재(存在)자들은 본질(本質)과 성품(性稟)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러나 아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 자원하여 복종되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계신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요 3:16), 그는 영원히 주셨다. 우리의 거룩한 구주의 복종은 영원할 것이다(고전 15:24-28). 우리의 유한한 마음으로 무한하신 분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신성에 관한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 있으므로 그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며 하나님 왕국 안에 우리 자리를 마련하여 놓으셨음을 알 수 있다.”(핵심, 예수의 생애와 교훈>3. 삼위일체)

◉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犧牲)>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어 그의 살은 매 맞아 찢어졌고 그처럼 자주 축복하시려고 펼치시던 손은 나무 막대기에 못 박히셨으며 사랑의 봉사로 피곤할 줄 모르던 발도 나무에 못 박혔고 고귀하신 머리는 가시관으로 찔리셨으며 그의 떨리는 입술은 비통의 부르짖음을 발하였다. 그분의 머리와 손과 발에서 흘러내린 핏방울, 그의 몸을 괴롭힌 고민, 아버지께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운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참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 자녀 각 사람을 위해 이와 같은 죄악의 짐을 지기로 동의한 것을 의미한다.”(재림교 성경주석(영), 막 15:33-37)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세분 개체로 계시는 것과 그 세분 개체가 다 스스로 계신분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신학 용어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하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셋이기 때문에 복수(複數)인데 세분이 다 같이 한 이름 여호와이기 때문에 “이름”은 단수(單數)로 썼다. 이런 것이 바로 영감과 계시의 모미이다. 성경은 분명히 삼위일체를 계시한다.
◉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구절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강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삼위일체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목(木) (8월 27일)
<예수님을 믿는 것의 결과(結果)(요일 5:11~12)>

◉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믿으며, 어느 종교(宗敎)에서는 윤회사상(輪廻思想))으로 사람으로 태어났다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느 동물(動物)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다시 다른 동물로 태어나고 즉 윤회(輪回)를 믿는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즉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윤회(輪回)가 아니라 직선(直線)으로 시작에서 끝없이 가는 즉 영멸(永滅)의 종교(宗敎)가 아니라, 영생(永生)으로의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장되는 축복의 결과(結果)는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보상(報償)이다.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唯一)한 영생(永生)의 길이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 사도 요한은 분명히 영적(靈的)인 생명, 좀 더 구체적으로, 영생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迎接)하고 그분을 믿는 자에게 접근(接近)이 허용되는 것이다. (요 1:12 참조)
죄를 통하여 인간은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分離)시켰고, 그로인하여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롬 5:12, 18; 6:23 참조) 영생의 소망이 회복(回復)되었고, 또한 아담이 죄를 범하여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참조; 요 10:10; 11:25; 14:6)
(본교 성경주석(한)10권 486p)
○ "그리스도 안에는 본래적이며 빌려오지 않고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시대의 소망 530p)

◉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하늘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은 인성(人性)으로 이 땅과 접촉(接觸)하고, 신성(神性)으로는 하늘과 접촉(接觸)한다.
예수님은 이세상과 하늘을 연결(連結)시키는 사다리이다. (요 1:51 참조) (부조와 선지자 184p)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과 죽음으로, "새롭고 산길"이 우리를 위하여 성별(聖別)되었다. (히 10:20).
구원(救援)의 다른 방도(方道)는 없다. (행 4:12: 딤전 2:5)
◉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求)해야 하지만,
응답(應答)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임을 강조(强調)한다.
(요한복음 15:16; 16:23에는 예수 앞에 제출(提出)된 탄원(歎願)들에 하나님이 응답한다고 되어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10권 679p)

◉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그분이 누구이시며 왜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론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실제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발견되는 영생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그분의 참된 인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혹은 그분의 인성으로부터 신성을 분리하려 했던 요한의 반대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분을 성경적 의미대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을 가지지 못했다. 비록 그들이 영생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비록 그들이 영생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탁월한 지식과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주장은 사실일 수 없다.

◉ <죄인(罪人)의 유일(唯一)한 구주(救主)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으련만 치유를 받아야 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신 자비를 거부한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지를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에게 의뢰해야만 한다. 죄로 병들고 가련하며 실망한 영혼들이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라.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52)

◉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는 문제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갈라놓을 만큼 중대한 문제이다.
영생(永生)과 영멸(永滅)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迎接)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직결(直結)되어 있다.

◉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수고의 값을 치르더라도 그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다만 그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 '(요 17:3). 이것은 바로 세상을 위하여 개방되어 있는 생명의 샘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96-297)

<초점(焦點)>
1.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 이신지를 바르게 알고 굳게 믿는 믿음만이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구원(救援)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영접하여 믿을 때 영생(永生)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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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 고질 병(痼 疾病)과 고칠 병(病)

가끔씩 웃음 & 유머치료 교실에 오시는 80대 할머니가 계시는데
언제나 환한 얼굴로 싱글벙글 이시다.
부럽기도 하고 또 그 비결(秘訣)이 궁금해서 말을 붙였다.
“할머니 요즘 건강하시죠? ‘
그러자 할머니 씩씩하게 대답하신다.
”응. 아주 아주 건강(健康)해……. 말기 위암(胃癌) 빼고는 다 좋아. “
그 대답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백만 볼트 전기로 감전되는 듯 한 전율(戰慄)을 느꼈다.
할머니는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서 집도 있고, 남편도 있고 자식(子息)들도 5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암이 몸에 들어와서 예정(豫定)된 시간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즐겁고 행복(幸福)하느냐는 것이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알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를 만나면서 삶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마음의 평안(平安)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행복은 끝없이 몰아치는 상황(狀況)을 긍정적으로 해석(解釋)하는 능력에 달려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암(癌)에 걸렸을지라도 고질병(痼疾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암치유율은 38%에 그치지만,
점하나 붙여서 고칠 병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암의 치유 율은 70%까지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다.
똑같은 암이지만 죽을병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암(癌)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는 분들도 많다
암(癌)을 죽음으로 연결하느냐, 암을 삶으로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긍정적인 태도에 달려 있다.

미국의 17대 대통령인 앤드류 존슨은 이러한 긍정의 힘을 발휘했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세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학교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열 살에 양복점을 들어가 성실하게 일했고 돈을 벌고 결혼한 후에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에 존슨은 정치(政治)에 뛰어들어 주지사, 상원의원이 된 후에 16대 미 대통령인 링컨을 보좌하는 부통령이 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미국 17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지만
상대편으로 부터 맹렬(猛烈)한 비판(批判)을 당한다.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자 존슨은 언제나 침착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이 한마디에 상황을 역전(逆轉)시켜버린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행복은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틀이다. 긍정적인 생각 없이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을 원한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態度)를 취하지 않고서는, 밝음을 선택(選擇)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해지거나 웃을 수 없다는 것이다.
“힘들다”라는 말이 있다. 힘이 들어 죽겠다고 해석(解釋)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이 들어온다. 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힘이 몸 안에 들어오니 당연히 몸이 잠시 피곤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짜증난다. 라는 말도 짜증이 나간다고 해석할 수 있는 행복프로가 된다.
”세상 어디에도 행복은 없지만, 누구의 가슴에도 행복은 있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마음의 행복을 끄집어내는데 는 긍정적인 해석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좋게 생각하자. 그것이 사실은 자신을 즐겁게 바라보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유머의 힘이다.
그리고 웃자. 하하하…….
그리고 용기(勇氣)와 힘을 냅시다.
나에게는 평안(平安)과 능력(能力)과 천국(天國)의 소망(所望)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곧 오십니다. 마라나타 !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으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主人)이시라는 사실을 내가 소유(所有)하고 기억(記憶)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 기-ㄴ 문장 끝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좋으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기원(祈願)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안식일(安息日) 되세요. ^^>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李 奉 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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