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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 빛 가운데서 행함 :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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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7-21 15:04 조회4,6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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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7분) 안식일

제4과 빛 가운데 행함 : 그분의 계명(誡命)들을 지킴

<기억절(記憶節)>
“우리가 그의 계명(誡命)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깨닫기) :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께 순종하게 됨을 깨닫는다.
(느끼기) :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다.
(행하기) :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에 반응한다.

(요점(要點))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은 그분의 계명이라는 틀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 있고 사랑스런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준다.

일요일(7월 19일)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요일 2:3~5)>

◉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認識)하게 된 것은 사람스스로의 발견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想像)하고 추측(推測)하여 만들어낸 가상적(假想的)인 신(神)도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存在)를 깨닫고 그에게 접근(接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啓示)함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인류에게 문자(文字)가 없던 시기에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다양(多樣)한 형태로 나타 나셔서 자신의 의지(意志)와 계획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문명(文明)이 발전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啓示)들은 문자(文字)로도 남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伝)해주신 모든 말씀들과 계시(啓示)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래서 사람을 구원(救援)하시어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交際)를 나누면서 영원히 살게 하고자 하는 의지(意志)를 가지고 일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교회를 다니면서, 들어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고 늘 피상적(皮相的)이며 신비(神秘)롭기만 하던 성경의 말씀과, 아무리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에 대하여 느끼고 싶어도 세상의 죄인(罪人)을 구(救)하러 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聖經)속에서만 있는 이야기일 뿐 내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 분들에게 빛 가운데서 행하신(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이 무엇인지를 이해(理解)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知識)과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의 차이(差異)는 엄청나다.
지식(知識)그 자체가 구원(救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구원(救援)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식(知識)에 있어서 엄밀(嚴密)한 의미(意味)에서는 이론적(理論的)인 면과 경험적(經驗的)인 면을 함께 포함 시켜야 지식(知識)으로의 정의(定義)를 온전히 해석(解釋)한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상(現像)만 보고 안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아는 것은 본질(本質)까지를 알아야 온전히 아는 것이다.

◉ 예(例)
철부지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아는 것과,
장성(長成)하여 부모님을 아는 것의 차이(差異)를 비유(譬喩)로 들 수가 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3년 반 동안을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당시에 아는 것과, 십자가(十字架)사건이후에 부활(復活)과 승천후(昇天後)에 예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우리는 성경과 교과를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외모(外貌)와 현상(現像)만으로 보았던 요한이 이제는 지식과 체험으로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영지주의(靈知主義)와의 혼동(混同)을 막기 위해 전문적(專門的)인 용어(用語)인 "지식(知識)"이라는 용어보다 "알다"라는 용어를 의도적(意圖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오늘의 본문에는 "이로써 우리는 아노라"하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3절).
(둘째), 그들이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5절).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을 고려할 때(참조 요 5:29),
우리는 이것들을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우리는 지식 그 자체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요한이 이 서신에서와 다른 곳에서 대처하고자 했던 이설로서,
지식(知識)만이 구원(救援)을 가져다준다는 사상(思想)이었다.
'지식(知識)'(그노시스)은 고대 종교에서 중요한 요소였는데,
특히 그리스도 이후 첫 번째 세기 동안 종교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것은 2세기까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완전히 자라나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단으로 발전하였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도덕적인 행동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체험과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공상적 신화를 강조한다.
구원은 주님과의 믿음의 관계(關係)를 통해서 주어지기보다는
이 신비(神秘)한 지식을 통(通)해서 얻는다고 가르친다.

◉ 신약(新約)에서 '알다' 또는 '지식(知識)'은 ?
이론적(理論的) 및 신학적(神學的) 의미(意味)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관계(關係)를 묘사(描寫)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순종(順從), 사랑, 죄(罪)를 멀리하는 것 등 이 모두는 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들이다.
지식에 있어서 이론적(理論的)인 면과 경험적(經驗的)인 면은 함께 가야 한다.
요한은 '알다'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했지만, '지식'이라는 명사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영지주의(靈知主義)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전문적인 용어를 의도적(意圖的)으로 피했던 것이다. (교과 52p)

◉ 요한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를 의식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에 '지식'이라는 명사 대신 '알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 <체험적 지식(體驗的知識)을 통한 순종(順從)의 생애(生涯)>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체험적인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있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다. …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쓰라린 실망을 맛보게 될 자들 중에는 외식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겉으로만 신앙 생애를 해온 자들이 있을 것이다. 저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자아가 엮어져 있다. 저들은 자신의 덕행, 영향력,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설 수 있는 재능 및 진리에 대한 저희 지식이 그리스도의 칭찬을 받게 하는 줄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만하고 있다.”( 재림교 성경주석, 눅 13:25-27)

▶ 신약(新約)에서 지식(知識)(혹은 앎)은 이론적인 것뿐 아니라 체험적인 것도 말한다.
특히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말한 것은 체험적인 앎을 말한 것이다. 지식에는 이론적인 면과 체험적인 면이 동반된다.

월(月) (7월 20일)
<계명(誡命)들을 지킴 (요일 2:3~5)>

◉ 구원(救援)의 원리(原理)와 구원(救援)을 얻은 사람들이 따라야할 삶의 원칙들을 역사적(歷史的)으로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해 놓은 문헌(文獻)이 바로 성경(聖經)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사람을 향(向)한 하나님의 뜻을 전(伝)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역사(歷史)가 흐르고 문명이 변천(變遷)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의지(意志)에 맞추어 변경(變更)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분명(分明)한 말씀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현실적(現實的)인 상황(狀況)에 맞추어 그 뜻을 변질(變質)시켜 사람들을 오도(誤導)하는 일들이 교회역사(敎會歷史)를 통해서 계속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중대(重大)한 두 가지 주제가 있다. 물론 다른 문제들도 산적(散積)해 있지만, 기독교의 존립자체(存立自體)와 직결(直結)되어있는 아주 심각(深刻)한 문제는, (첫째로) 십계명(十誡命)에 명시되어있는 제7일 "안식일(安息日)"을 '주일(主日)'이라는 말로 변경(變更)하여 첫째 날 일요일(日曜日)에 예배(禮拜)하는 습관(習慣)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關係)를 맺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예배(禮拜)"라는 형태(形態)로 표현(表現)되고 유지(維持)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기독교의 구원관(救援觀)에 결정적인 영향(影向)을 끼치고 있는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성서적(聖書的)으로 역사적(歷史的)으로 그 본질이 분명히 밝혀져 있고, 명백(明白)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교권(敎權)에 의해서, 혹은 전통(傳統)과 관습(慣習)에 얽매여서 진리(眞理)를 외면하고 사실을 덮어둔 채, 개혁(改革)하려고 하는 의지(意志)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참된 신앙(信仰)이란 인간(人間)의 지성(知性)을 통하여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추구(追求)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발견된 진리에 대해서는 양심(良心)을 걸고 믿음으로 실천(實踐)하는 의지(意志)가 작용(作用)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러한 지성과 양심에 역사하시어 인간을 올바른 길로, 진리와 영생으로 인도해 주신다.

◉ 인간을 미혹(迷惑)하여 세상을 파멸(破滅)로 몰고 가는 사단의 전략(戰略)과 핵심(核心)은
첫째로 경배(敬拜)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피조물(被造物)을 숭배(崇拜)하게 하고, 자기를 숭배하게 하고, 사단을 숭배하게 한다. 둘째로 경배(敬拜)의 시간을 변경(變更)하는 것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창조의 기념일을 비롯하여 다음과 같은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안식일을 변경한다는 것은 바로 사단의 걸 작품(傑作品)인 것이다.
인류(人類)의 행복(幸福)을 위한 안식일이며, (막 2:27-28, 창 2:3)
성별(聖別)의 표(表)가 되며, (겔 31:13, 16), (출 31:12-14, 16)
구속(救贖)의 표(表)가 되고, (신 5:15, 겔20:20)
만물(萬物)의 주권자(主權者)는 하나님이심을 상기(想起)시켜주기 위(爲)하며(출 20:11, 시 111:4)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을 경배(敬拜) 하도록 하기위하며, (출 20:8, 사 66:23, 출31:17)
우상숭배(偶像崇拜)에서 보호(保護)하기위하여, (레 26:1-2)
※ 가). 언약관계(言約關係)의 표징(表徵)으로, (출 31:16-17)
나). 충성(忠誠)의 시금석(試金石)으로, (출 16:23-30) (계 14:12)
다). 시간(時間)속의 성소(聖所)로, (사 58:12-14)
라). 하늘 안식(安息)을 맛보는 것으로, (히 4:1- 히 4:9-11)의 안식일을 변경(變更)한 사단의 작품임을 성경에서 증명(證明)하고 있다. 다니엘서 7장 25절에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은 자(하나님)를 대적(對敵)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하나님)자의 성도(聖徒)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시간(時間)인 안식일(安息日))와 법(法)(십계명(十誡命)을 변개(變改)코자 할 것이며……."

◉ 한번 냉철(冷徹)하게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 내가 따르고 있는 신앙은 어디에 근거(根據)를 두고 있는 것인가?
소위 정통교회(正統敎會)라고 하는 그 유명(有名)하고 큰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나의 신앙을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尊敬)하는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이 나의 신앙과 신조(信條)를 지배(支配)하고 있는가? 아니면 차마 뗄 수없는 친구나 친지들과의 관계(關係)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있는가?
혹은 사업을 유지(維持)하기위하거나 직장관계(職場關係)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인위적(人爲的)인 방편(方便)으로 교회에 적(蹟)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말씀이 나의 모든 신앙과 믿음을 지도(指導)하며 이끌고 있는가?
물론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답변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은 그 신앙의 근거를 성경에 두지 않고, 교회나 사람과의 관계에 매여 있다.
본인의 현재의 신앙생활이 성경의 원리나 원칙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도 성경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침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사람은 아는 대로 실행(實行)하며 산다.
일요일(日曜日)을 성경상의 안식일(安息日)로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토요일인 안식일(安息日)을 죽어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이단(異端)들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서슴없이 거침없이 낮불켜가며 일요일이 안식일이라고 고집하며 살고 있다. 이를 일컬어서 세상에는 두 답답이가 산다고 말하고 싶다.

일요일(日曜日)을 안식일(安息日)로 알고 지키는 사람들이,
안식일(安息日)(토요일)에 예배(禮拜)드리며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게 여기고,
반대로 안식일(토요일)에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를 가며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두 답답이가 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원리와 방법은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물론 성경 전체의 흐름에 조화되는 올바른 해석을 전재로 할 때에 그렇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證據)하는 책이다.(요 5:39)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의 삶과 가르침의 본질을 찾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진리(眞理)"라고 부른다. (요 14:6)
진리라고 하는 것은 감성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이해(理解)되는 것이다.
건전한 신앙에는 우선 지적(知的)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성경에는 지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도어야 할 부분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그자체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였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원리와 절차와 방법이 있는 것이므로 무조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원리를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중도에 신앙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적(知的)인 동의가 없이 감성적인 신앙으로 출발하거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신앙에는 감성적인 느낌이나 감동,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나 지적인 확신이 없이 감성적인 요소들만 가지고 신앙의 집을 만들어 놓으면 그 집은 아주 쉽게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 계명(誡命)들을 지키는 것은 요한과 예수님께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요한의 글에서 그러한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여기에 사랑과 순종이 연결되어 있다. 본문에서 '그'(Him)라는 용어는 다소 애매하게 사용되어서 성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가리킬 수 있는데, 아마도 요한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일서 2:4에는 같은 진리가 부정적인 용어로 서술되었는데,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주장들을 지적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자는 누구나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매우 강한 어조로 견책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지 사실들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 지식이다. 상대방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비록 밤낮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그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요한의 말대로 그는 거짓말쟁이이다.

◉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다.

◉ <믿음과 행함의 관계>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하다. 그대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 그처럼 철저하게 사랑을 강조한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고 말한다.”(부조와 선지자, 153)

▶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증거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같다.

◉ 십계명, 열 가지 약속(約束)(요 14:15) ―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 십계명은 열 가지 약속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키라”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의 총체와 본질이 들어 있고 모든 아담의 아들과 딸들의 구원의 조건들이 요약되어 있다(원고 41, 1896).

화(火) (7월 21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요일 2:6~8)>

◉ 1982년에 출판사 예찬사에서 "촬스 M. 쉘돈"이 지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서적이 나온 것이 있다. 그 내용을 대충 요약해보면
가난 때문에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자식마저 잃고 일자리도 없이 좌절과 슬픔에 잠긴 인쇄공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쇄공으로부터 전개되는 맥스웰 목사님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실제 생활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된다.

어느 날 설교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남루한 옷 차람의 남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님의 사택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목사님은 귀찮다는 듯이 그 도움을 요청한 실직자를 돌려보내고 설교준비를 멋지게 준비하여 주일 설교에 벧전 2장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본문으로 하고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지으며 멋지게 설교를 마치자 교회의 맨 뒤쪽에서 허름한 옷 차람을 한 사람이 목사님의 설교단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와 회중을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말한 뒤에 쓰러졌다. 당황한 교인들이 황급히 사택으로 옮겼으나 그 사람은 이내 죽었다. 이후 장래를 치루는 과정에서 그 목사님은 그 죽어가기 직전에 한 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말이 귀전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 목사님의 뇌리에 머물러서 그에 마지막 말을 교훈삼아 매사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질문으로 목회를 하다 보니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성도들도 변화를 받아서 그 교회에 대 변화와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 후 인쇄공이 요절(夭折)하는 비극적인 사건(事件)앞에서 맥스웰 목사님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란 질문(質問)을 던지면서 삶의 매순간을 책임지기로 각오한다. 다음 주 예배일에 교인들에게 같은 질문으로 도전(挑戰)을 준다. 이에 감동된 교인 수십 명이 앞으로 1년간 그렇게 살기로 작정을 한다. 이런 실제적인 헌신의 삶이 연못에 던져진 조약돌이 한 알의 파문을 일으키듯 사랑의 파문을 일으켜 교회가 크게 부흥(復興)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 교회나 우리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내 생각 내 방법대로 하다보니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질문으로 우리들의 신앙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나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십자가(十字架)의 사건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내가 죽고 상대가 살아야 한다는 섬김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의 삶이 우리의 모본자(模本者)로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를 때 놀라운 역사가 임할 것이다.

◉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서의 절정이지만, 그분의 가르침과 생애에 관한 정보도 충분히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혹은 대속자로만 생각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혹은 모본자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구주와 모본자로 다 받아들였다. 요한일서 1:7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보혈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2:2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 제물로 나타난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이시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는 다른 측면이 부각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름>
“그리스도께서 생애(生涯)하시던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 즉 그분이 밟으신 곳을 걸어보고 그분이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던 호숫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눈이 때때로 머무르던 들과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은 큰 특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하여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에 갈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병상 곁에서나 빈곤한 오두막집에서나 사람이 많이 모인 대도시의 뒷골목 길에서나 인간의 마음에 위안이 필요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지상에 계실 때에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므로 우리는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 행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640)

◉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며 대속자이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모본자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수(水) (7월 22일)
<새 계명(誡命) (요일 2:7~8)>

◉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용도(用度)에 맞게 사용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칼(刀)도 종류가 많다. 의사들의 수술용(手術用)칼이나 주방의 요리용 칼도 있고 전쟁용(戰爭用) 칼도 있다.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용 하느냐에 따라서 그 효율(效率)성과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칼이 강도(强盜)의 손에 들려지면 인명피해(人命被害)가 발생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위험(危險)으로 부터 방지(防止)하는 계명을 주시므로 그 울타리 안에서 생활 할 때 행복과 평안이 되도록 울타리 되는 계명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의 보호(保護)되는 울타리의 설치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치도 않는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나 거치는 것이 아니요 인간들에게 꼭 필요 되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保護)기능(機能)인 울타리역할을 하는 계명(誡命)을, 담장(감옥(監獄))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의 자유를 억제(抑制)하는 역할로 인식(認識)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에서 역행(逆行)을 하였다.

새 계명(誡命)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친수(親手)로 쓰신 10가지의 계명(誡命)들이다.
이를 요약(要約)하면 1계명에서 4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용이며, 5째 계명부터 10째 계명은 인간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10가지의 계명을 앞글자인 하나님과 뒤에 글자인 인간을 빼면 남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한다.
그 사랑이 돌비(碑)와 문자 속에만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임하시여 친히 제자들에게 섬김의 모본(模本)을 보여 주시면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이 요한이 다시 강조하고 있는 새 계명(誡命)이다.

◉ 새 것 → 거듭남
“니고데모는 유대 나라에서 책임(責任)있는 높은 지위(地位)를 차지하고 있고, 고등교육(高等敎育)을 받았으며 비범(非凡)한 재능(才能)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회(國會)의 영예(榮譽)로운 의원(議員)이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의 교훈(敎訓)에 감동(感動)을 받은 사람으로 부자(富者)요 유식(有識)하고 명예(名譽)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초라한 나사렛 사람에게 마음이 끌렸다. 구주(救主)의 입에서 나온 교훈들은 그에게 큰 감명(感銘)을 주었으며 그는 이 놀라운 진리(眞理)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기를 원하였다.
그가 거듭남으로 그의 육신(肉身)은 그대로 있었지만(모태(母胎)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전에 살았던 삶에서 180도 달리 살았다. 즉 있는 그대로이지만 어떻게 해석(解釋)하고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서 구(舊) 옛것이 되기도 하고 신(新) 새것이 되기도 한다.

◉ 두 가지 언약(言約)과 율법(律法)
○. 옛 언약(言約)
1. 십계명(十誡命)
① 하나님께서 두 돌비에 기록(記錄)하셨는데,
모세가 지상 성소(聖所)의 법궤(法櫃)안에 넣어 두었다. (출 31:18; 32:16; 슥 7:12)
②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므로, 율법의 형식과 문자가 다만 죽이는 역할을 할뿐이다. (고후 3:6)
③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킬 때에 하나님께서 가납(嘉納)하실 만한 의를 이루게 될 줄로 생각했다. (롬 10:4)

2.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십계명 이외에 특별한 의문의 율법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이 의문의 율법에는 일 년 동안 행하는 각종 제사제도와 의식(儀式)들이 들어 있었다.
그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지적해 주었는데, 그분께서 돌아가심으로 다 폐지(廢止)되었다.
(단 9:27; 엡 2:15; 골 2:14)
비록 옛 언약 아래서 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의분의 율법들을 영원하고, 어느 시대에나 변함이 없는 당신의 십계명과 분명히 구별해 주셨다.

○ 새 언약(言約)
1. 십계명(十誡命)
①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해 주신다. (히 8:10)
②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이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고후 3:6; 롬 7:10)
③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능력아래 율법의 교훈대로 생애 하시므로 울법을 크게 하고 존귀케 하셨다.
(사 42:21; 시 40:8)

2. 새 언약에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미리 지적해 주는 의문(儀文)의율법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업을 기억하게 해주는 몇 가지 예식(禮式)들이 있다.

☞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침례식(浸禮式) :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葬事)와 부활(復活)을 기념하는 예식이다.(롬 6:4)
② 겸손예식(세족예식(洗足禮式))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종의 형체를 취하시리만큼 겸손하셨던 일을 기념하는 예식(禮式)이다.
(요 13:14)
③ 성만찬예식(聖晩餐禮式)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눅 22:17-20)
새 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기위하여 이와 같은 예식들을 준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는다는 사실상 외관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데 불과한 것이다.

◉ 요한은 계명(誡命)들을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요일 2:3~4)을 강조한 다음,
7절과 8절에서 "새 계명"을 소개한다. "새 계명"이란 무엇인가?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가룟 유다와 같은 제자까지도 차별 없이 사랑하셨으며, 자신을 희생하시는 무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셨다.

◉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에게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시면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요한이 다시 강조하고 있는 새 계명이었다.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날 저녁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고 말씀하셨다. 그 예식의 기별은 명백하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것은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은 우월감이나 편파 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준다. 우리의 생활 방식은 동료 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반영할 것이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인해 기뻐한다.”(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283)

목(木) (7월 23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 (요일 2:9~11)>

◉ 정원(庭園)을 망가트리는 것은 손질을 하지 않고 방치(放置)하는 것이고 ,
배우자(配偶者)와의 파멸(破滅)은 무관심(無關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좋아하는 그 사람이 입는 옷과 언어(言語)까지도 스타일과 색깔도 같이 하여 입고 다니며 좋아하는 사람의 취미도 같은 것을 따라서 좋아 한다.
즉 사랑하게 되면 그가 좋아 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한다.
반면에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아무리 좋은 말이나 행동을 해도 그 말이나 행동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있는 대로 보지 않고 있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말하곤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기 때문이다.

성경 요한의 서신에서 말하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라는 말은 즉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소홀(疎忽)히 여긴다는 의미이다.
화분의 식물도 물을 주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예쁘다는 말을 하며 늘 닦아주는 화초와,
저주(詛呪)하며 욕(辱)하며 방치(放置)하는 화분(花盆)의 성장(成長)은 확연히 비교되는 결과로 임상 시험에 나타나 있다는 결론이다.

◉ 요한일서 2:5에는 사랑이 무엇인지 간결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나타낼 수 있다.
새 계명에서 다시 언급된 사랑(6~9절)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이 분명한데, 이는 오늘의 본문(9~11)에서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구절도 역시 "~한다 말하는 자"(참조, 4, 6, 9절)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9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다. 10절에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긍정적인 표현이 나온다. 11절에는 다시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눈이 이미 멀어버렸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거나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문제는 그의 주관심사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에게 당장 대두되고 있는 다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 형제를 미워한다는 표현은 매우 강렬한 진술이며, 우리 자신의 행동에 적용하기가 꺼려지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냥 화가 났다든가 기분이 상했다고 표현하기 원하지만 성경에는 종종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는 미워한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다음 구절에서 그러한 표현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합니까?(마 6:24, 24:9~10, 눅 14:26, 요 3:20)
성경에서 미워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함으로 다른 사람을 소홀히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은 반드시 혐오한다는 의미만은 아닌 것이다.

◉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고,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미워한다는 표현은 증오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 <십자가(十字架)의 빛을 통해 새 계명(誡命)을 이해(理解)함>
“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일컬었는가?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나타내실 충만하신 사랑을 아직 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분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받아 들여야 하였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분의 자기희생의 빛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갈 바리 십자가에서 비쳐오는 빛 가운데서 그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읽어야 하였다.”(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40)

▶ 요한은 교우간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했다. 형제를 차별하는 자는 진리의 빛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 성경에서 종종 '미워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함으로 다른 사람을 경홀히 여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한다.”(참조 요 3:20)는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 계명들을 지키는 것,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여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특히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도전을 받고, 참된 경배와 창조주께 대한 순종의 문제가 우리 앞에 닥쳐오고 있다. 성경에는 가장 힘든 환경에서도 신실하게 살았던 요셉,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의 모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고의 모본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르기로 결심해야겠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함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진리의 이론을 믿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은 협잡꾼이 아니요, 성경의 신앙은 공교하게 만든 우화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 요한은 순종을 통하여 구원을 획득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순종이 사랑과 믿음의 열매라고 가르쳤다.”(사도행적, 563)

<초점(焦點)>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점(差異點)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율법(律法)과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들이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징(表徵)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사(每事)를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라는 질문으로 임할 때 성공할 것이다.
새 계명(誡命)은 오래전부터 있던 계명(誡命)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실제적으로 몸으로 사랑을 실천(實踐)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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