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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 예술가로서의 하나님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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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2-03-09 10:15 조회4,917회 댓글2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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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 예술가로서의 하나님


기억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27:4)


하나님의 창조물에는 하나님의 품성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아름다운 꽃에서, 원숭이의 익살스런 모습에서, 어린 아이의 천진한 미소 속에서,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서도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최고의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 품성의 아름다움이 창조되어진 모든 것들에 심겨져 있습니다.



첫째 날(일) 토기장이 하나님


성경에만 있고 다른 어떤 경전에도 없는 진리는 창조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없었는데 스스로 계신 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지신 생명으로 만들므로 그 존재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조로 인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창조되어진 존재를 이어나가는데 에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것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심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인간은 가장 큰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재창조주(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거절함으로 사망 속에 있는 인류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에 대하여 대속하심으로 재창조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때 하나님과 사람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에 대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품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날(월) 건축가 하나님


성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우 다양한 예술적 기교가 담겨져 있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성소의 뜰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를 위해 말씀하신 여러 가지 구체적인 내용들은 건축가로서의 하나님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소는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생각이므로 구원에 대한 인간의 노력이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전적인 계획과 실행으로 인한 구원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아름다움의 다양함이 성소의 구체적인 건조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성소를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보아야 합니다.

성소는 하나님 자신을 증거 합니다.(렘17:12)

성소는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 합니다.



셋째 날(화) 음악가 하나님


음악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찬양과 악기와 율동 등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에서 사용했던 찬양과 악기 연주 등을 위해 다윗을 통해 시편의 아름다운 가사를 허락하셨고 그것을 아름다운 곡으로 연주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사람들의 표현과 그것을 함께 들음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하나님께 이끌리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때에 하나님께 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감격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며 그것이 바로 생명과 연결되는 비결입니다.

“음악은 하늘 궁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일부이므로 우리들의 찬양이 가능한 한 하늘 합창대의 화음에 근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바른 발성 훈련은 게을리해서는 안 될 교육의 일부분이다.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노래하는 것은 기도만큼 중요하다. 마음은 그 노래의 정신을 느껴야 하며 그 정신은 올바로 표현되어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594)


넷째 날(수) 작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성경 말씀이 기록만을 위한 메마른 기록이 아니라 여러 형식의 문학과 가장 차원 높은 미학적 작품으로 제시 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미학적 작품으로서 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가장 높고 깊은 아름다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고 깊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글로서 표현하려면 당연히 그 글도 가장 높고 깊고 아름다운 글이어야만 합니다.

아름다운 글을 통해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생명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요5:39)

그러나 성경의 글에만 집중되어 맞다, 틀리다의 교리적 접금만 한다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보여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할 위험도 있게 됩니다.(요5:40)

그러므로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더 중요합니다.(눅10:26)

아름다운 성경의 글과 문체를 통해 그 글을 주신 가장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글에서 탈피하여 그 글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하나님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도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글을 통해 글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고전2:10, 요16:13-14)



댓글목록

김동남님의 댓글

김동남 작성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늘 목사님께 임하시길....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장로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안식일되세요.

1111님의 댓글

1111 작성일

지도자는 말씀을 성경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올바로 증거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성경과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하여 한쪽 면만 주장하면 그 영향력은 큰 것입니다.

성경과 예언의 신과 본교 교리를 도외시하고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거싯 선생들이 하는 일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왜곡된 말씀을 계속하시면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번에 박금하 장로님이 질문하시 것 왜 답을 안하십니까?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과 예언의 신과 본교 교리를 도외시 한적 없으며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드러내고자 함도 아닙니다.
단정적인 말씀들은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거짓이란 용어는 너무 단정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금하 장로님의 질문에 대해서는 바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로님의 댓글

하나로 작성일

전 목사님 글이 넘 좋은데요.
글을 읽으시기 나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해하기 쉽고 핵심요약이 분명하고 많은 도움과 참고가 됩니다.
저희반원들에게 목사님 말씀 많이 전합니다 ㅎ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하나로님.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여진 글을 어떻게 읽느냐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이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면서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랑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되는거지요.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박용범 목사님 반갑습니다.

서중한 인사이동을 보았더니 도봉교회에서 평택 안중 교회로 발령을 받으셨더군요.
이곳에 교과를 열심히 올려 주시는 것처럼 목회에 열심하셔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능력있는 충성스런 주의 종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전에 제가 질문드렸던 것에 첨부하여 오늘 제가
레10장의 '다른 불'에 대하여 상고하다가 예언의 신과 함께
지도자들의 경건치 못한 봉사와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광야 시대에도 나답과 아비후를 비롯, 고라와 그 자손들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이 갈라져 몰살 당하는 역사를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영감의 책은 '다른 불'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불”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점화하시고, 이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명하신 신성한 불 대신에
보통의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다. 이 죄로 인하여 불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서
백성이 보는 데서 그들을 사르어 버렸다"-PP359

분명히 성경에보면 여호와께로부터 심판하는 불이 나와 사르었다고 했습니다.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목사님의 이론대로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심판을 집행하시거나
벌 주거나 징계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위의 내용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 유황 불 심판, 계시록의 진노의 일곱 재앙 등,
성경에는 수많은 심판의 사례들을 어떻게 해석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신다면 위의 심판들은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어떻게 일어날 일입니까?

성령의 영감 받은 성경의 기자들과 화잇 선지자의 말씀보다
박목사님의 주장이 더 탁월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는 하나님의 품성이 목사님처럼 한쪽 면 즉,
자비와 인애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공의가 빠진 사랑만 사랑입니까?
오히려 성경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고
말씀하셨고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박목사님 말씀처럼 문자 배경에 영적 진리를 우리가 깨달해야 하는데,
그런 적용 역시 함부로 아무데나 붙이다보면 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오직 성경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쉽게 이해시키기위해 성문화된 것이 문자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반문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말씀의 정신 즉,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문자는 도외시하고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이 문자적으로 제7일이 맞는데 형식적으로 지키지 말고
정신을 살려 함께 지키라고 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성경을 자기 해석 나름대로 주장하고 믿다보니,
유대주의가 생기고 수많은 이설 종파가 난립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박목사님의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에 관한 견해 즉,
사랑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분명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우려가 교단에서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목사님이 편협된 주장을 계속하시게 되면 이 문제를 정식으로 연합회에 건의 하고
여론화 시킬 생각입니다.

지도자는 성경을 성도들에게 올바로 가르쳐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교회 목회자로서 자격 유무에도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열 가지 중에 한 가지 오류가 섞이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저는 재림마을, 미주 카스다 등 재림교회 공식 온라인 싸이트에서
본교 진리를 왜곡시키는 엉뚱한 발언자들과 지금껏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싸웠고
그들의 무분별한 활동을 차단하고 개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모 재림교회 유명한 장로의 해괴한 주장(일요일 휴업령 등 부인)에 대하여는
연합회 이설대책위에 정식 청원을 한 상태입니다.

이젠 모두 정화가 되어 온라인 상에서 이설이 난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의 글쓰기도 정지된 상태입니다.

대게 본교회 장로, 미국 교수, 일부 교인들이 이런 해교 행위를 서슴치 않습니다.
뭐 좀 말씀에 대하여 깨달았다는 논리들을 내세우는데,
우리에게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성경과 예언의 신이 있지 않습니까?
일종의 오메가 운동입니다.
 
이런 오류에 부화뇌동하는 얄팍한 믿음을 가진 감성적인 교인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상하리만큼 왜 진리를 놔두고 한 인간의 어설픈 주장에 현옥되어 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세의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택한자도 미혹하려는 사단의 술수...

글이 길어 졌군요. 답변을 기대합니다.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박금하 장로님.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님께서 일전에 질문하신 내용을 오랜 시간 동안 올리지 못하다가 오늘 질문하신 그곳에
올렸는데 보지 못하신 것 같아서 이곳에 복사하여 올리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시지만 하나님의 품성의 심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행한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이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하여 그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를 살리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친히 오셨습니다.(요3:16-18)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거절하면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절하는 선택이 어떠한 하나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절하게 되고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은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눈물을 머금고 그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을 심판이라고 생각하고요,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대로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집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스스로는 죽지 않기 때문에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본질은 흙입니다.

더 정확히는 먼지(티끌)입니다.(욥38:38)

먼지를 흙덩이가 되게 하셔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없었던 존재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존재도 스스로는 생명이 없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사랑)을 받지 않고는 살 수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하면 즉,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정녕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7)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야만 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반면에 사단은 하나님을 떠나서도 절대로 죽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창3:4)

인간은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되면 창조전의 상태인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창3:1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를 기억하고 창조주를 알게 되고 경배함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절대적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생명과 연결되는 것이므로 세 천사의 기별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는 안식일이 회복되어야 하고, 반면에 사단은 안식일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함으로 안식일이 잊혀 지길 원해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었습니다.

영혼불멸의 교리가 성경적이지 않는 이유는 영혼불멸교리는 창조주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 없는 교리가 되어 버립니다.

스스로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면, 창조주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과 사람은 절대적 관계가 아닌 상대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상대적 관계가 형성되면 기복신앙이 되어버리고, 행위중심의 신앙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우리 대신 대속하는 십자가의 행위는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사람과 하나님이 절대적 관계가 아니라면 사람의 선택에 대하여 사람이 그 책임을 져야 맞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제가 한 면만 보는 것은 아니구요,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에 전혀 반대로 이야기 하신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로님 보시기에 한 면만 강조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장로님도 한 면만 강조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지도하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구요, 다만 현재 깨달은 것에 대해서 나누고자 할 뿐입니다.

논쟁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서로의 빛과 단계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최고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생각이 있을 때 서로의 생각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장로님께서 너무 흑,백 논리로서만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게 느껴지네요.
그건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장로님께서 말씀을 사랑하시고 예언의 신을 사랑하셔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님의 열정과 열심을 여러 사람들로 부터 들었었습니다.

제가 올리는 교과해설이 여러 사람들이 올리는 해설의 종류 중 한 종류인데 이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복사한 글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참고하시고 답할 수 있는 것은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오랫만 입니다.
답글이 너무 늦어졌네요..
여러 가지 이유로 늦어졌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두 가지 주셨는데요, 장로님의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제가 위에 쓴 글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백성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감게 하여 믿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울의 자살과 하나님께서 죽이셨다는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장로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또한 사단이 한일과 하나님께서 하신일이 둘 다 성경에 기록되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13장입니다.

사랑과 하나님을 바꾸어 읽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으므로 서로 바꾸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동일하신 분이시고 동일하신 품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8-39, 43-44)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에 다르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힌트가 마19:8에서 보여 집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결혼한 부부가 언제나 행복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지만 서로간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겪을 때 혹시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오히려 이혼하며 사는 것 같이 살면서 괴로움만 당하는 한 편을 위해서 하나님의 본래 생각은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지만 사람의 완악함을 인하여 모세를 통해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할 수 있다는 말씀을 남용한다면 본래 하나님께서 가지신 하나님의 생각을 저버리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의도지만 사람들의 완악함을 인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 된 본성의 공의에 맞추어 하나님의 생각은 상대방이 한 개의 이를 뺐어도 용서하고 참으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상대방이 가만히 있는 내 이를 한개 뺐다면 상대방의 두개 내지 세 개를 빼어야 공의롭고 공정하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정 빼고 싶다면 너가 당한 것처럼 단 한개만 빼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절대적이란 상대방에 따라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랑을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은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과 더 멀어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랑을
주셔야만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사랑과 같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욱 넘치게 부어주신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책임과 사랑이 별개가 아닙니다.

책임감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책임이 있는 사랑입니다.

이박사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이박사님의 말씀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건 장로님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 판단을 객관적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판단하시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누구도 판단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님의 강의가 삼육대학원에서 계절학기로 이번에 개설된다고 들었습니다.
장로님도 한번 참석하셔서 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생각하시는 재림교회의 정통 가르침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화잇의 글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사단은 그가 하늘에서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마치 가혹하고 포악한 분으로 여기게 하여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의 반역에 휘말려 들어가서 범죄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부당한 속박이 인류를 타락케 하였다고 주장하였다."(쟁투, 500)
"대 쟁투가 시자가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고 그분의 율법에 대하여 반역을 선동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이일은 성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기만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반역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36)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멸망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겔33:11) 성령께서는 은혜의 시기가 마칠 때까지 사람들에게 생명의 선물을 받으라고 탄원하신다. 성령의 이러한 탄원을 거절한 자들만이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우주의 파멸을 일으키는 화근이 되므로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지 않은 자들은 결국 그 죄가 멸절될 때에 함께 멸망 하게 될 것이다."(실물, 123)

장로님과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논쟁은 자신의 논리만을 더 확고히 하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이 생각하시는 것만 말씀해 주시면 서로 좋은 대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행복한 하루가 되시고 기쁨 충만한 삶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댓글의 댓글 작성일

박목사님
왜 위의 질문의 대답은 안하시고 본인의 자의적인 엉뚱한 논리만 전개하십니까?
예상했던대로 답을 하실 수 없을 겁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심판 집행에 대하여 맞다고 하면 체면과 존심이 상하게 되는 일이니까요.
또,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 집행에 대하여 반론을 펴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것을 과감히 인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의 주장과 글은 성경에도, 예언의 신과 재림교회 신조에도 없는 내용이고
일부 내용은 이미 다 아는 사실들입니다.
목사님이 본인의 잘못된 주장을 바꿀 생각이 없으시다면, 공론화를 거치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인용하신 에언의 신, 전 후 내용을 올리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부분적인 내용을 선취해서 자신의 주장을 호도하고 변론하려고 하는데,
그 내용의 배경을 보면 어떤 뜻으로 그 내용이 나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독해력에 문제가 없으시다면 다시 읽어 보시고 인용하신 말씀의 본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킨 그 동일한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반역을 선동한다. 사단은 일찍이 천사들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침을 인류에게 계속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정신은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 사단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제약을 깨뜨리고자 노력하고 법을 범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해 주고자 애쓰고 있다. 죄를 책망하는 일은 여전히 증오와 반항을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경고의 기별이 사람의 양심을 각성시킬 때 사단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의롭게 여기게 하고 그들의 죄악적 행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고치는 대신에 오히려 책망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만들어낸 것인 양 그에게 분노를 나타낸다. 이것이 의인 아벨의 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죄를 책망하는 자들에 대하여 나타낸 정신이다.

사단은 그가 하늘에서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마치 가혹하고 포학한 분으로 여기게 하여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의 반역에 휘말려 들어가서 범죄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부당한 속박이 인류를 타락케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품성을 선포하신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 34:6, 7)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하늘에서 추방시킴으로 당신의 공의를 드러내시고 당신의 보좌의 영광을 보존하셨다. 그러나 인류가 이 반역 정신에 감염되어 죄를 범하였을 때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주어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증거를 보이셨다. "-대쟁투500

위의 내용은 그리스도와 율법에 대한 사단의 적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율법의 기능 즉, 죄를 책망하는 것을 가혹한 것으로 여기게 하여
범죄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의 이런 부당한 속박이 인류를 타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폭학하고 가혹한 분으로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오히려
죄를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사단은 곡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목사님의 지금까지의 주장이 도리어 위의 사단의 주장과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의 내용의 말미에 하나님은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제해 주지 않는다고 결론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품성을 곡해시키는 사단에게 공의를 드러내셔서 하늘에서 추방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수법이 예언의 신의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한 일부분만
캡쳐해서 본론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그런 수법을 쓰셨습니다. 매우 유감입니다.

아무튼 이것을 아십시요.
사단이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고 추종하는 일부 천사들 때문에 우쭐해져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박목사님도 늦지 않앗으니 성경과 예언의 신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영현님의 댓글

영현 작성일

사랑과 공의는 손 바닥과 손등관계 즉 일체로 보는데 목사님의 글을 보면 너무 사랑에만 편중하는 것 같읍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요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다 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만 목사님의 견해는 어떻하신지요?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영현장로님..

반갑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가지신 절대적 사랑으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인구원론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동원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끝까지 거절하면 하나님은 자기 유익을 구치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대로 그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사람의 선택이 죽음이기에 그 죽음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가슴은 타는 듯한 아픔이 있지만 그 사람의 선택을 인내함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과 공의는 서로 반대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사랑과 공의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단9:16)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목사님 용기 잃지마시고
힘내세요
목사님의 해석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빛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이 목사님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늘 고마움을 느끼며
교과해설을 봅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박목사님
이곳에서 토론하는 문제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얘기 하려고 합니다.
전화 좀 주십시요.

010-2070-0114
02-491-8754
070-7651-6200

배옥남님의 댓글

배옥남 작성일

목사님 교과 너무 기다렸어요
이렇게 돌아오셔서 반갑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셨나봐요
다행입니다.
좋은글 많이 주세요^^

eqws님의 댓글

eqws 작성일

눈을 감고 귀를막은 백성들은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자기들의 신념때문에 예수를 향해 온갖 도전을 한
유대인들이 결코 옳지 않았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진실의 빛을 밝히시는 목사님의
그 수고와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목사님은 이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일을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마시고
끝까지 전진하실 수 있길 기도하겠습니다.

1111님의 댓글

1111 작성일

참으로 이상한 교인들입니다.
뭐가 진실이며 진리인지 분별을 못하고...

우리에게 선지자가 없고, 말씀이 없는가?
선지자들의 기별을 멸시하고 자기 마음에 맞는 이설과 색다른 기별을 쫒다가
예수님도 거절한 유대인들의 전철을 밝고 있으니.....

솔직히 위의 목사님의 글은 단순한 진리를 너무 복잡하게 늘어놓은 말잔치에 불과합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이설과 오류는 자기 변론이기 때문에 설명이 너무 장황합니다.

그냥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안에 공의와 자비가 섞여 있다.
십자가는 공의와 자비가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를 거절하면 심판에 이르고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
죄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는데, 심판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둘째 사망의 형벌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셨고 세상끝에 최종적으로 죄인에게 내려진다.

구원이나 심판을 주관하시고 집행하시는 절대 주권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트릴 권세가 있는 것처럼
죄인을 심판하고 죄인을 죽일 권세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그분의 속성에 아무런 모호함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나 천사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고 죽이느냐 하고 항변 할 자격과 이유가 없다.
왜?  토기 그릇처럼 인간은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역사가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성경에 답이 다 있는데 왜 구지 엉뚱한 말장난에 휘둘리는가?
바울이 말세에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거짓 선생들을 많이 쫒는다고 경고하였는데...

글을 복잡 미묘하게 풀어 쓰는 사람들 조심하세요.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달맞이꽃님의 댓글

달맞이꽃 작성일

객관적인 눈으로 글을 읽다보면
말씀해 주시는 목사님이나 그 글을 좋게 읽고 있는 신자들은 무지 무식하고 믿음없는 사람이 된거 같은 취급을 당하는듯 하네요.
두분 말씀에 뜻 잘 알겟지만 좀더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본다면 목사님께서
글을 올리신 의도와 목적이 보여서 은혜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홧팅입니다.
늘 감사를 드리며 매주 열심히 읽고 있으며 많은 도움 받습니다.
힘내세요~~목사님

이정규님의 댓글

이정규 작성일

목사님의 해설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던 신앙 생활이 점차 기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일이 참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은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면서도 왠지 불안했었는데
이제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는 목사님께 감사합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형벌을 직접 집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시는
박용권 목사님 꼭 숙고해야 할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형벌하는 일을 하시는 것은 비상한 일이다=

"하나님의 형벌이 당신의 백성들을 압박하고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사람들이 범죄하는 데 대담해지게 한다. 그러나 오래 지체된다고 해서 분명하고 두려운 그 형벌이 결코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드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사 28:21).

우리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형벌하는 일을 하시는 것은 비상한 일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여호와께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출 34:6)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 34:7)으신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은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출 34:6, 7; 나 1:3). 의 가운데서 행하시는 무서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짓밟힌 율법의 권위를 옹호하실 것이다.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내릴 심한 형벌의 정도는 주님께서 공의를 집행하시기까지 오래 참으신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그분께서 헤아려 보시는 죄의 분량이 차기까지 형벌하지 않고 버려두시는 그 백성들은 마지막으로 자비가 섞이지 않은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중보 사업을 성소에서 마치실 때,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는 자들에게 이미 경고한, 자비가 섞이지 않은 진노가 내릴 것이다(계 14:9, 10 참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려 하셨을 때 애굽에 내린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구원 직전에 이 세상에 내릴 더욱 무섭고 큰 규모의 형벌과 성질상 유사한 것이었다." 각시대의 대쟁투 627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안녕하십니까? 본 게시물의 게시자에 대한 격려, 질문, 답변과 관계 없는 비방성 답글은 삭제하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조광형님의 댓글

조광형 작성일

목사님 감사 합니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없고 어두움만 있는 나와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잘못에 크기에 따라 벌을 주시고 큰 잘못을 하면 하나님 께서 하나님에 자녀들 보는 앞에서 불로 나를 죽인다면 전 너무나 힘들고 무섭고 눈치를보면서 힘든삶을 살아가고 있겠죠 목사님 하나님에 사랑이 언제나 하나님의 품성대로 나를 사랑 하신다고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목사님 감사 합니다

박인수님의 댓글

박인수 작성일

* 개역한글성경 요한일서 4장 16~18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본문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성경으로 적어 보았습니다

* 쉬운성경 요한일서 4장 16~18절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사랑을 알 수 있고,
그 사랑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
위의 올려놓으신 그들을 읽어보면서, 떠오르는 성경절과 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서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입니다
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글을 읽어보시면, 박목사님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이야기 하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관건은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 분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렵게 만들어,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성을 올바르게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달맞이꽃님의 댓글

달맞이꽃 작성일

저도 박인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속 시원히 다 하셨네요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목사님 글에 은혜를 받고 있다는 말씀 부언하고 싶어요.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작성일

너무나 많은 답글들을 주셨습니다.
이런 일로 인해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아니한만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자주 오지 못해 일일이 답을 달 수가 없습니다.
많이 말하기 보다는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하는 시간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자(漢字)속에도 성경의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사망(死亡)이란 한자에는 두 가지의 다른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死)는 “죽는다”는 뜻이고 망(亡)은 뜻이 여러 가지 인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망하다”라는 의미와 “달아나다”, “도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예, 도망(逃亡))
따라서 死亡은 죽어서 완전히 없어져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며 죽어서 생명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서 멸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死는 이 세상 사람들이 살다가 이 세상에서 죽는 “첫째사망”이요, 亡은 둘째부활 다음에 올 심판 후에 이루어질 “둘째사망”(계20:14), 곧 멸망(요3:16)인 것입니다.

둘째부활에 참여한 악인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달아나서 생명과의 영원한 분리를 이루어 마침내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직접 악인을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결국 생명을 버리고 사망쪽으로 달아나기 때문에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는다(死)고 해서 모두 망(亡)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사(死)한다 할지라도 망(亡)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재림시에 생명의 부활로 다시 부활합니다.(살전4:13-16)

그러므로 믿음으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死하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는 악인은 100%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이 놀라운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밥 잘 먹고 운동 잘하고 스스로 열심히 건강을 관리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생명이 자기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임을 깨닫고 마침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고 싶으셔서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단순히 죽는다(死)고 해서 잘 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라는 말씀처럼 죽음(死)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죽지만 모든 사람이 亡 즉 멸망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누구는 이러저러해서 죽었는데 하나님이 일벌백계로 죽이신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 아벨 등 순교자들은 모두 死했지만 亡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死의 순간은 결정적인 生의 순간이며 영원한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死)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생명 속에 있는 사람은 죽을수 있지만 결코 망(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死)의 순간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결정의 순간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누구나 느껴야만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死의 순간이야말로 生을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운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며 살아왔던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死의 순간이 찾아왔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그 악인들의 亡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십자가의 두 강도는 生을 떠나서 亡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중 한 강도는 亡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死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死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못 박고 있는 로마 군인을 사랑하시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품성, 곧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았고 그 결과 그 사랑, 곧 생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 강도는 마침내 死 속에서 生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강도는 루스벨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품성보다는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만을 구함으로써 생명을 거부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生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며 마침내 둘째사망의 亡을 선택해버린 것입니다. 그는 死 속에서도 亡을 선택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시거나 죽이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라고 의문을 품으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접 죽이시는 분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亡을 이미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악인들이 亡을 이미 선택하고 생명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아직도 하나님께 돌아와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는 결정적인 시점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거부한 악인들을 죽이라는 것을 우리 죄인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처벌 내지는 처형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경향이 너무나 농후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죽음을 허락하실 때나 죽이도록 명하실 때 혹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죽(死)이실 때에 죽(亡)이시기 위하여 당신의 은혜로 그 악인에게 주시던 생명을 거두시어 死를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악인들에게 은혜로 생명을 주시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악인 자신들이 生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정적인 死의 순간이 악인에게 찾아왔을 때에 그들이 마침내 당신께서 그동안 주시고 계셨던 生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亡을 버리고 生을 선택하게 하여 당신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인들의 死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악인들을 구원시기 위한 마지막 은혜로서 死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하나님께 너무나 위험한 순간입니다. 만약 악인들이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生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生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면서 亡을 선택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인의 死를 마침내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도 너무나 눈물겨운 고통과 긴장되는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生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死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은 악인들에게는 최후의 은혜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악인들의 死를 허락하시는 것은 결코 그 악인들을 亡하게 하시는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그 은혜로 주시던 생명을 그 악인의 발악적인 대적과 생명을 향한 거부 때문에 더 이상 生을 강제로 주실 수가 없게 되어버리신 것입니다.

만약 그토록 발악적으로 생을 거부하는 그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生을 주신다는 것은 강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시는 것은 공의로우시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 때문에 결국 그 악인에게 주시고 계셨던 生을 눈물을 머그머시며 거두어 들이셔서 그 악인의 死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死하게 하시는 것이 결코 그 악인의 亡을 바라시고 주시는 형벌은 아닙니다.

그리고 생명을 거부한 악인이 마침내 하나님의 生으로부터 점점 멀리 분리되어 가면서 死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때에 주님은 그 악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동안 주님께서는 그 악인을 위하여 기도하실 것입니다.

시험에 빠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던 것처럼, 死를 맛보며 죽어가고 있는 그 악인이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生을 선택하여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시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生을 거부하고 亡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던 그 고통 중의 악인이 다시 生의 귀중함과 감사를 느끼고 구원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그 악인과 하나님께 최후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죽어가는 악인의 구원을 위하여 주실 수있고 사용하실 수 있는 최후의 카드가 바로 死인 것입니다. 死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주실 수 있는 최후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死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악인에게 베푸실 수 있는 최후, 최대의 은혜이며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는 남아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죽이기 위하여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하여 죽음을 허락하시고 죽이라고 명하시는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는 다시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겔18:2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33:11]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악인이 어떻게 죽어가던 간에 하나님께서 그 악인에게 최후의 호소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십니다.

그리하여 그 악인이 최후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악인의 죽음(死)의 순간은 그 에게 가장 아름다우며 중요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생명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시는 순간은 결코 그 악인이 멸망하기를 바라시면서 허락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인을 구원하시어 다시 첫째부활에 참여케 하셔셔 영원히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자기 백성들의 손에 붙이게 되면 결국 원수와 전쟁을 하여 승리하여 정복하고 죽이기까지 한다는 뜻으로 구약성경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의 진정한 영적의미는 내 마음 속의 악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의 사랑으로 극복하고 승리하여 결국 원수를 용서하는 경지에 들어가는 영적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원수들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악함으로 마지못해 허락하신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둘째는 악인들이 죽음을 직면할 순간 가장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출34:6-7에 대한 부분은 글로 보면 모순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하면 은혜가 충만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악과 과실과 죄를 창조전에 이미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창세전에 이미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미 용서했는데 형벌을 받는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품성을 믿지 못함으로 용서를 거부한 사람의 선택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그것 자체가 망(亡)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망(亡)의 상태에 있기를 작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창조주가 되심을 알려주시고 이미 자신의 피로 용서하셨음을 알게 하시지만 그 사람은 끝끝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죽음이 확정되는 상황입니다.

더 이상의 기회가 필요 없고 더 이상의 성령하나님의 음성이 필요 없게 되는 시점에 하나님은 그의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제거한 채 율법대로 형벌 받을 자로서 말씀하시고 그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면죄하지 않음으로 죽게 되는 것처럼 표현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죄를 용서하신 분이 결단코 면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일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사울이 자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욥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형벌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

이런 신앙관이 그가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하나님의 벌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삼고 신앙했습니다.(욥3:25)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6:4)

“이는 곧 나를 멸하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욥6:9-1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욥7:20-21)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욥9:17-18)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욥9:34)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인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생략하구요, 욥을 위로하러 온 세명의 친구들 역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번뇌케 하는 대화가 지속됩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죄를 지으면 형벌과 고통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욥과 친구들의 생각은 그 근원이 어디서 온 것 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닌 능력자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아닌 능력자로서의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은 당시 모든 우상에 대한 생각이고 그런 생각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태도에 따라 그 능력이 복으로 올수도 있고 벌로서도 올수 있다는 생각에 지배당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한 부분 만의 오해가 그들의 신앙을 결정했고 그들의 생각 속에는 답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속에 신앙하는 욥과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그들의 궁금증과 오해에 대해서 하나 하나 답을 주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전에 욥과 친구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욥38-41장)

창조하신 여호와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달리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자 드디어 욥은 회개 합니다.(욥42:5-6)

그가 들은 하나님과 보게 된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따라 다른 신앙을 하였고 열심의 신앙이었지만 다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음을 깨달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욥의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회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알지 못함으로 결과적으로는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발견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토론을 원치 않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실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생각할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도 많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도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 찬양님의 댓글

주 찬양 작성일

목사님의 성경해석은
정말 탁월하십니다.

많은 분들의 교과 해석을 보고있지만
목사님의 해석을 보고있자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물론 다른 분들의 교과 해설도 훌륭하십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해
성경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건필 하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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