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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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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9-03-27 11:25 조회5,2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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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사랑


총 론


대반격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인 피에르 라플라스(Pierre Laplace)는 행성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그것을 천체역학이라 불렀으며, 나폴레옹 황제에게도 그 책을 한 권 증정하였다. 누군가 미리 나폴레옹에게 말하기를, 그 책에는 전혀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없다고 하였다. 황제는 그 책을 받아들고 이렇게 말했다. “라플라스,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우주의 체계에 관한 이 큰 책을 쓰면서 그것을 지으신 창조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라플라스는 대담하게 말했다. “제가 증명하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필요치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논리와 이성, 그리고 과학이 모든 진리의 기초를 이룬다고 믿었던 소위 ‘근대 사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사상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공식과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과학적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논리와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에 대한 대반격이 근년에 일어났다. 지금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차가운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상을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수학 공식이나 실험관이나 과학의 법칙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반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비롯해서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작용이 그렇듯이 이러한 반발의 어떤 부분은 그 도를 넘어서 교리적 진리를 밀쳐 내거나 무시해 버리는 경향도 있다. 사람들은 가르침이나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경험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

과거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약속을 믿어야 할 강력한 증거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면, 이제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신뢰와 헌신의 모험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 둘 다 나쁜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우리의 삶에 구체적이면서 또한 실제적인 결과를 나타낼 것이라(요 8:32)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진리는 단지 교리의 지식이나 성경절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다. 진리는 영적인 삶과 일상적인 삶에서 만나는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지침을 준다. 우리의 신앙에는 아무도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실제적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결코 올바른 성경적인 가르침의 중요성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이번 기에 우리는 믿음의 양 측면, 즉 교리와 경험을 함께 살펴보기 원한다. 이번 기 교과를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적인 13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매주 교과를 통하여 우리 신앙의 다양한 요소에 관하여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이 매일의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배우기를 원한다. 이번 기가 끝나게 될 때 우리는 이 주제들을 더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우리의 그리스도인 경험에 있어서도 더 풍성함을 맛보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매 과의 공부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관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우리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분이시다. 비록 13개의 다른 주제들을 공부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한 분, 곧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는 한 분(행 17:28)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클리퍼드 골드스틴



4월 4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7분)



기억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연구 범위: 사 53장, 마 22:37-39, 고전 13장, 요일 3장, 4장.



중심 사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그 절정을 이룬 곳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에 반응할 수 있다.



안식일 오후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 개념들을 다루는 이번 기 교과를 '사랑'이라는 주제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 등 그리스도교의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다 사랑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13:2)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약 5세기 전에 헬라의 철학자 소포클레스(Sophocles)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지만, 이 헬라의 현인은 우리 구주에 의해 선포되고 모본으로 보여진 사랑의 깊이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께서 보이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비록 우리가 이 사랑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인간의 얕고 순간적인 사랑, 때때로 이기심과 탐욕이 섞여 있는 그런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을 지니고 계시거나 보여 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 교과에 인용된 예언의 신의 증언들과 재림교 성경주석의 엘렌 G. 화잇 언급 부분은 모두 영문 페이지로 표기됨.



핵심본문: 고전 13:13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동정어린 무아적인 사랑을 비교해 본다.

행하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한다.



교과 개요

I. 필요로 하는 사랑(창 1:26)

A. 창세기 1:26의 기별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우리의 본성이 그들을 통해 반사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서 그분의 사랑의 속성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반사해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B.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어떻게 다른가?



II. 경험하는 사랑(요일 3장)

A.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창조, 안식일의 선물, 구원의 계획, 예언의 신 등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확증해 준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나누어 보라.

B. 영생의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다른 예들은 무엇인가?



III. 반사하는 사랑(마 22:35-40)

A.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무엇인가?



요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되면, 이 사랑은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이다.



일요일(3월 29일) 삶의 본질인 사랑(마 22:37-39)



우리는 살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한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곧 죽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을 필요로 하며,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 하는 만큼 또한 사랑을 나눌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분은 창조주이시다.(참조 창 1:26, 요 3:16)



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삶에 있어서 사랑은 얼마나 중요합니까?(마 22:37-39, 고전 13:1-3, 요일 3:14)

마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답: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그분의 사랑의 속성을 닮아야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사랑보다 앞선다. 참된 사랑은 “거룩한 원칙이며 항구적인 능력이다. 성별되지 않은 마음은 이 사랑을 일으키거나 산출할 수 없다.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속에만 이 사랑이 나타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거룩한 은혜로 새롭게 된 마음속에서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다.”(사도행적, 551)

영국의 저명한 작가인 루이스(C. S. Lewis)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별하기 위해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지만, 우리가 동료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필요로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인 사랑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에 굶주리신 분이 아니시며, 다만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해 계신다.”(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1998년, 121).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참으로 그분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께 대하여 사랑과 충성심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순종하거나, 혹은 불신하고 불순종할 수 있었다. … 왜냐하면 오직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서만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사랑의 원칙(요일 4:8)을 충분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 표현, 곧 온 영과 혼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었다(마 22:36-40).”(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120)



<부가설명> 예수께서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셨다(요5:24). 그런데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고 해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는 자는 그 존재가 사랑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회복된 사람의 형상이며,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사랑을 나타낼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여자를 만드셨다.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서이다. 대상이 없으면 사랑은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수(複數)로 계신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증거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넘치는 사랑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우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를 지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심으로 사랑이 무궁히 실현되는 우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베풀 대상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다.



교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인 사랑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신 그것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월요일(3월 30일) 구약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렘 31:3)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신약에만 나타나 있고,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와 진노의 하나님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깊이 연구해 보면, 하나님은 그런 이중인격을 지닌 분이 아니심을 알 수 있다. 신약에 묘사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시대의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약 1:17). 그분은 진노의 하나님 혹은 공의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서서히 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다음의 말씀은 구약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항상 적용된 말씀이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노라.(렘 31:3)



1.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었다는 중요한 증거들을 다음 목록에서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구약에서 그분의 사랑이 나타났던 또 다른 분명한 증거들을 추가해 보십시오.

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창1:26-31, 2:21-25)

2)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신 사랑(창3:15, 22:8, 사53장)

3)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사랑(출31:12-17)

4) 선지자를 통해 계속적으로 은사를 허락하신 사랑(암3:7)

5)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출34:7, 시51:1-15)

6)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신32:10, 시37:28, 사43:1-2)

7)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자세한 예언을 주심(미5:2, 단9:25-27, 사7:14)

8) 역사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 사랑(창6장, 다니엘서 등)



비록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구약에는 분명히 전쟁과 피흘림에 관한 이야기와 진술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백성을 당신께로 이끄시고, 심지어 그들이 반복해서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에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신 언약의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헤세드와 아가페

“'헤세드'(chesed, 사랑 혹은 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영어로 적절하게 번역하기에 가장 어려운 히브리어다. 그 단어는 히브리 구약에 245회 나타난다. … '헤세드'는 첫째로 개인들 간의 관계를, 둘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헤세드'의 예들은 많다. 일반적으로 헤세드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과 그분의 태도, 그분의 교제들, 그분의 관계들을 적용했을 때와, 어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람과 그들의 태도, 그들의 교제들, 그들의 관계들을 적용했을 때를 묘사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 오히려 구약 기자들은 신약 기자들이 '아가페'(agape,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를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이 '헤세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시편 36)



<부가설명>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을 보면서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이라고 속단하는 경향이 있어왔고 또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그런 이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존재에게 나타난다(롬1:18). 그렇게 하면 어떤 존재도 영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안타까운 심정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에게 나타나서 그 짓을 못하게 하셔야 모두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짓을 하는 존재도 속히 그 짓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함께 영생의 영광을 누릴 것인데,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불가불 소멸시킨다. 당사자나 다른 이성적 존재들에게 다 같이 엄청난 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영원한 평화와 안전과 행복을 위한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전쟁은 어느 쪽이든지 철저히 항복해야 완전한 평화를 이루게 된다. 어정쩡한 휴전은 끝없는 불안만 조성한다. 하나님은 이런 상태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평화를 이루신다. 그러기 위하여 끝까지 돌이킴이 없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존재를 진멸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진멸하라는 말씀의 진의(眞意)이다. 오해하지 않으면 그 모든 말씀 안에 있는 사랑을 볼 것이다.



교훈: 성경 전체를 주의 깊이 연구해 보면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화요일(3월 31일) 신약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요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 그분은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분은 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흠 없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시는가? 다른 방법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왜 죄의 문제를 완전히 다루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답할 입장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지혜로써 인간이 죄의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계획을 고안하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완전한 율법에 대해 반역한 자들을 묵과하실 수 없으셨으며,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들이 구원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멸망해 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실 수만은 없으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을 묵인하실 수 없는 그분의 완전한 순결이다. 한편 그분의 사랑은 죄인을 감싸 안으시는 풍성한 자비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부정과 불경으로부터 분리되게 하며, 그분의 사랑은 부정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그들과 하나 되게 한다. … 하나님의 진노는 죄가 지속되는 동안으로 한정되지만,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다.”(도널드, G. 블로쉬,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 지혜, 성결, 사랑, 1995년, 140-143)



1.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다음의 신약 구절들 외에 또 다른 목록을 추가할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심(요 3:16)

2) 하나님의 아들께서 스스로를 내어주심(빌 2:5-8)

3)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요 14:15-18, 행 2:1-4)

4) 영적인 은사를 허락하심(고전 12:1-11, 엡 4:11-13)

5) 확실한 구원을 베풀어 주심(요일 3:1-3)

6) 사랑 안에 거하는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심(벧후 3:13)

7) 영생에 이르는 길이 제시됨(요 14:6, 행 4:12)

8) 부활의 소망도 제시되어 있다.(요 11:25, 살전 4:16-17)

9)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계 21, 22장)



2.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답: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롬 5:8)



십자가의 사랑을 자랑함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부르짖은 것을 우리는 이상히 여길 수 있는가? 또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것도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갈바리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그 빛을 받아, 흑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빛을 나타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사도행적, 210)



<부가설명> 중세의 사랑의 기별을 전한 베르나르는 찬송 시에서 “주 예수 넓은 사랑을 그 누가 알리요,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겠네.”(찬미 441장)라고 노래하였다.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경험이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자아를 주님의 십자가와 용서하시는 은혜에 굴복시킬 때 주님의 사랑을 가슴 가득히 받을 수 있고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창조로부터 구원의 섭리를 깊이 깨닫도록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로 이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났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면, 요한처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고백하게 될 때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으로 찬양하게 될 것이다.



교훈: 신약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거룩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수요일(4월 1일) 사랑에 대한 반응(신 6:5-6)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극으로 자기 사랑, 맹목적 야망, 증오, 경쟁심, 부패, 전쟁 등을 꼽을 수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어둠의 권세가 만들어 놓은 법칙의 인도를 받고 있는 한 사랑은 꽃필 수 없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사람들을 비판하는 동안에는, 그들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회심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사랑의 원칙이 우리 삶을 지배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끊임없이 자라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회심이란 자아를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숙고하면서 어떤 근본적인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까? 이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에 변경되었습니까?(신 6:5-6, 마 22:37-40)

신6:5,6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답: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느 시대에나 똑같이 적용된다. 하나님의 명령은 변경되지 않았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되었다면 우리가 남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분의 사랑이 묻어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교제하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엄청난 축복이 될 것이다. 대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무조건 포용하라.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해 보라.



2. 사랑은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 어떻게 스며있어야 합니까?(마 5:44, 25:31-46, 벧전 1:22)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답: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교인들이 만일 자아숭배의 정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채웠던 정신, 곧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품는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통해 끊임없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사랑의 줄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40)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으로 변해감

“우리는 천성적으로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교훈을 배우게 될 때에, 우리는 주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고 이후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된다.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모본과,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음으로써 타인의 감정에 참여하신 비할 데 없으신 그 사랑은 진심으로 그를 좇는 모든 사람들의 성품에 반드시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저들은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써 피곤한 자의 발걸음을 평탄케 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복음교역자, 507)



<부가설명> 인간 사이의 사랑에도 반응이 있을 때 사랑이 더욱 풍성하여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일방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맛본 사람을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적 표현으로 계명을 지킨다고 하고 순종한다고도 한다. 이것은 순전히 사랑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다. 이것을 무슨 자신이 행하는 선행 차원으로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난센스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이지 인간의 공로나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길어내는 희열이 만들어주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사랑의 가슴에 더욱 용솟음치게 된다. 이것이 사랑과 사랑의 대면이요 반응이다. 이런 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교훈: 우리가 참으로 회심한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목요일(4월 2일) 체현(體現)된 사랑(눅 17:12-19)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역할 모델이시다. 만일 우리의 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의 구주만을 바라보면 된다. 그분에게서 우리는 완전한 모본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계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성공을 시기하여 끊임없이 그분을 괴롭혔으며 마침내 그분을 제거하기로 결의했었다. 그분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분 자신의 가족들도 거의 그분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분의 제자들은 서로 다투기에 바빴으며, 주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실 때에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분을 버리고 도망한 그들을 주님은 사랑하셨단 말인가?

게다가 그분께서는 특별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자들, 곧 여인들, 나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 사마리아에서 온 이들, 로마 군병들, 세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께서 행하신 몇 가지 구체적인 사랑의 실례들을 주목해 보라.(눅 17:12-19, 요 13:1-17, 요 19:25-27)

눅17:12-19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요13:1-17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1.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제자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고후 5:14, 빌 2:2).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빌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답: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는 자들로 함께 울고, 웃는 자들로 함께 웃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슴에 품어야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후 5:14)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영어 번역에는 약간 모호하게 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사랑뿐 아니라,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포함한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신학적으로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대한 능력을 극히 적은 부분이라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랑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다소라도 우리의 평강에 관계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분이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 가운데서 어떠한 장면이라도 그것이 너무 암담하여 그분께서 보실 수 없는 것이 없으며,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그분께서 푸시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그분의 자녀 중의 가장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히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그것을 못 본 체하시거나 거기에 즉각적인 관심을 가지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 하나님과 각 영혼과의 관계는 마치 이 지구상에 그 한 사람 외에는 하나님께서 돌보실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주실 다른 아무 대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고 완전하다.”(절제생활, 104)



<부가설명> 사랑이 어떤 것인가? 연애하는 사람은 서로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이나 형제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애국, 애족, 이렇게 열거하면 사랑의 범위는 무척 넓어진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고전 13장의 정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서 깨달은 바는 성경의 사랑의 가장 기본은 사람을 살려주려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요일4:9). 그러므로 나타나는 현상이 무서워 보이고 매질을 하는 행위였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살릴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진노도하시고, 고난도 당하게 하셨으며, 포로가 되게도 하셨다. 그것이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고 어떻게 하든지 그 백성을 영원한 복음의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마침내 그 사랑이 예수의 십자가의 무섭고 잔인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도 남을 살리려는 정신으로 매사에 임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도이다.



교훈: 우리의 완전한 역할 모델이신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금요일(4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정로의 계단, 제1장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9-16), 시대의 소망, 제78장 ‘갈바리’(741-757), 제79장 ‘다 이루었다.’(758-7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그렇게도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재림교인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대쟁투를 이해하는 것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 하나님은 궁극적 해결을 향해 이끌고 가신다. 이 세상에서는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다. 십자가로 이루신 것은 마지막 날에 완전히 우리 모두에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사람들은 대답을 확실히 얻을 것이다.



2. 학대하는 부모나 연쇄 살인범, 혹은 완전히 이기적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전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 그들이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우는 것이 사랑이다. 감정적인 사랑이 힘들지만 사랑의 기본정신 곧 살리려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3.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습니까?

* 반응하지 않는 사람도 그에게 생명을 전하는 마음으로 접촉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하셨다.



4. 우리 사회에서 멸시당하고 버림받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는 그러한 이들을 위해 어떤 사역을 펼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그러한 사역을 펼칠 때 나는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 동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복음 예수의 구원의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한다. 물질적 도움이나 몸으로 하는 봉사도 궁극적으로 그들을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라면 참 사랑이 아니다.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구체적인 인식을 얻은 것 같으며 그것을 실천하기를 원한다.



요약: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속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의 기초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구약에도 계시되었으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일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이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반응을 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한다면 우리의 삶은 조물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다른 이들을 위한 무아적인 사랑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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