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부제: 하나님의[심판론]에 오해(거짓 교리)를 하는 교사와 교인들을 위하여>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부제: 하나님의[심판론]에 오해(거짓 교리)를 하는 교사와 교인들을 위하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금하 작성일12-01-26 22:30 조회4,750회 댓글22건

첨부파일

본문

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
기억절: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예화]"어떤 판사가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건져주었는데
몇년 후에 그 사람이 큰 죄를 범하고 바로 그 판사 앞에 서게 되었으나, 그 사람은
전에 자신을 살려준 것같이 살려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러나 판사는 전에는
살려주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네 죄를 심판하는 사람이다"라고 냉정히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 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이미,already)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둠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둠이다" -DA,22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왜곡시켜 놓았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요3:17)

하나님은 공의와 지대한 위엄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사단은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가 그분의 공의(율법)를 파괴시켰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시켰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품성인 자비와 공의(은해와 심판)는 과연 서로 상충되는 것인가?
주님은 당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자비를 손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은 의로우며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품성은 사단의 품성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한다.

<일요일> 심판의 날

문1) 하나님의'심판 Judgment' 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인류에 대한 최종적 대 심판의 날과 개인적, 민족적인 역사적 심판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심판의 중심 개념은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이며
심판의 적용 원칙은 "심은대로 거둔다"(갈6:7)이다.
심판의 기준은 율법과 복음이며,
심판의 본질과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며 실재적인 역사이다.

심판(헬:크리마,히:미스파트)이란 말은 판단,분별,심문 이란 뜻의 법률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심판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리하여 그 열매대로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문2)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은 어떻게 조화되는 진리인가?
"공의에는 자비라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둘은 나란히 서며, 서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RH, 1881.8.30.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시 85:10)다."-DA762

적용) 영생에 대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구세주에 대한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되고 하나님께 용납된다(롬3:24~26)
복음을 불신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율법에 의하여 죄인으로 판정되며 결국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

교훈) 심판과 구원의 개념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품성을 반영하고,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절대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지 않는 진리이다. 인류의 구속의 계획에는 공의와 자비가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월요일> 에덴에서의 심판과 은혜

문1) 최초에 범죄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복음)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네가 어디 있느냐...주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범죄한 사실을 알아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부부에게 죄를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다."-살아남는 이들,39

"하나님의 '자비'가 죄인에게 애소(哀訴)하는 동안 '공의'는 오랫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이다(시 97:2),"-실물교훈,177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DA,462

[예화]무디 목사님이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만약 당신이
죄를 숨기려고 한다면 그 죄는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주님께서
그 죄를 덮어버리도록 맡긴다면 악마도, 인간도 그 죄를 다시는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훈)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기 전에 구원과
소망의 복음을 먼저 선포하셨다.

<화요일> 홍수

문1) 우리는 노아 홍수를 떠올릴 때마다 어떤 감정이 작용하는가? 심판자에 대한 두려움?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도리어 무서워하고 미워하게 하고자 애를 썼고,"-GC,16

"대쟁투의 초기에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없으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는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죄의 형벌을 면제해 준다면 그분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사단은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인들에게 은혜를 나타내고 계심으로 그분은 공의로우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DA,761

"그들은 사단이 그들에게 원하는 그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는 행동을
취함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폭군(暴君)으로 생각하게 하였다."-DA,36

문2)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믿는가? 이유는?
"노아는 홍수 전에 사람들에게 120년 동안 전도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은혜의 시기를
식별한 자들은 소수였다.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한 사람도 믿는 사람들로 헤아려져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거민들 중에서 여덟 사람만이 그 기별을
받아들였지만, 그 기별은 세상을 유죄 선고했다. 빛은 그들을 믿게 하고자 주어졌다.
그 빛에 대한 그들의 거절은 그들의 멸망을 입증했다."-교회증언7권,36

적용)그대는 어떤 점에 있어서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마지막 조사심판이 진행되는 은혜의 시기에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교훈)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이유는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구원의 기회와 은혜의 빛을 베풀어 주셨다.

수요일> 정죄와 은혜

문1) 하나님의 사랑의 공식은 죄에 대하여 은혜가 어떻게 반비례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고(寶庫)가 교회와 세상 사람들의 앞에 열려졌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은 얼마나 놀랍고도 심오한 사랑인가! 율법의 엄중함만을 깨닫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큰 손실을 입고 있는가!"-복음교역자,157

"우리가 십자가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할 때
우리는 공평과 공의가 섞인 자비와 친절과 용서를 발견한다."-AA,333

[예화]독일 라벤스부룩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나치의 살인적인 만행을 겪은 누군가가 쓴 글이다.
“오 주님,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고통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그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이 같은 고난으로부터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한 자들이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날, 우리가 맺은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문2) 하나님의 은혜도 제한이 있는가?
"각 시대마다 사람들에게 저희 시대의 빛과 특권, 즉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은혜의 기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은혜에는 제한이 있다. 자비는 여러 해 동안 간청하지만 멸시와 거절을 당한다. 그러나 자비가 마지막 탄원을 할 때가 온다. 마음이 매우 굳어져서 성령의 감화에 응답하기를 그친다. 그 때에 상냥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음성이 죄인에게 더 이상 간청하지 않으며 책망과 경고도 그친다."-DA,587

적용) 그대의 노력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계속 거절하는 영혼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사자들에게 권하노니, 결코 실망치 말며 아무리 완악한
죄인이라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로 간주하지 말라. 외모로 보기에는
아무 가망이 없이 보이는 자라도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믿는 자들이 있다."-복음교역자,267

교훈)십자가의 은혜는 어떤 죄인이든지 누릴 수 있다. 다만 정죄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복음을 거절한 까닦이다.

<목요일> 심판할 때

문1) 삼중 기별이 왜 '영원한 복음'인가?
"심판이 가까왔다는 선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를 영원한 복음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전도하고 그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이 복음 기별에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나타내고 있다."-실물,226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과 하나님의 율법의 영원성에 관한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것들이 요한계시록 14장에 제시된 진리임을 발견하였다. 그 장(章)의 기별은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지상의 거민들을 준비시키게 될 삼중으로 된 경고의 기별이다.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는 기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봉사를 가르쳐 준다."-GC,435

"최후의 큰 날, 곧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이 내리게 될 때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거치는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보복하는 산처럼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의로운 자에게 생명이 되는 그분의 얼굴의 영광이 악한 자에게는 소멸시키는 불이 될 것이다.
사랑을 거절하고 은혜를 멸시한 까닭에 죄인이 멸망을 당할 것이다."-DA,660

[예화]"결코 심판의 날을 잊지 마라. 어리석은 자들은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이 더디며 이 땅에는 우연만 있고 공의가 없다고 생각하나 심판은 반드시 오며 비록 하루나 이틀 한 세기나 두 세기가 늦게 올지 모르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것처럼 분명히 심판이 있다"(토마스 칼라일)

적용) 예언의 기별을 어떻게 복음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방법을 논해 보라.

교훈)은혜가 없다면 아무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최후의 기별에도 은혜를 기초로 한 심판의 경고가 담겨 있다.

(결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신다. 이 대속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다.십자가는 죄에 대한 진노(공의)와 죄인에 대한 자비(은혜)가 섞인 하나님의 품성을 동시에 보여 준다.

(묵상)"죄가 발견되는 곳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 되신다. 그의 권능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죄를 소멸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죄를 버리지 않으면 그들은 죄와 동일시된다. 그러면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또한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DA,107



댓글목록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부 제=================================================================
***하나님의 [심판론]에 오해(거짓 교리)를 하는 교사와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과연 형벌을 주시거나 진노하지 않는 분이신가?
그런 모습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과 배치되는가?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 심판론에 대한 진리를 오해시키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하나님의 품성과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제4기 교과를 연구하면서 우리를 햇깔리게 하는 심판에 대한 문제를 숙지해 볼 것이다.
끝까지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반론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댓글을 환영하면서...

----&gt;&gt;&gt;
“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특별히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Sin, I” SDA Bible Dictionary, rev. ed., p. 10)을 말한다.”(기본교리, 89. 시조사, 2007년)

엘렌 G. 화잇은 죄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쟁투, 492)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단순하며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공의의 속성을 지니신 분이다. 하나님은 죄가 발생하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돌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경고하셨고, 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도록 지시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출 19:21, 22, 개정)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24)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애써 부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시행하시는 데는 매우 적극적이지만, 공의를 집행하시는 데는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결코 공의를 집행하지 않으시며, 고통이나 형벌은 사단 혹은 어떤 자연법칙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데는 기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설명한다.

“단 한 계명을 범했거나 가장 작은 세목 하나를 범해도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부 측 입장에서는 그 죄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재판관이시요, 공의의 보수자시다. 그것이 그의 보좌의 기초이다.”(원고 145, 1897)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죄인을 멸망시키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성격의 것으로 오늘날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낮은 정의와 공의의 표준으로 추론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입법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율법을 만드시고 또 집행하신다. 형벌이 없는 법률은 힘이 없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해방시켜 줄 능력을 갖고 계신 동안 그들이 불로써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일을 보지 않게 해 달라는 탄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유익과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범법자를 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획대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이 그의 동료 인간 앞에서 행사할 권한이 없는 무한한 공의를 행하실 수 있다. 노아가 자기를 괴롭힌 조롱자들이나 조소자들 중 한 사람을 익사케 했다면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대한 세계를 물에 빠뜨리셨다. 롯은 그의 사위들에게 형벌을 과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격한 공의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12MR, 207-209; 10MR, 265(1876).”(사건, 240, 241)

C. S. 루이스는 &lt;인도주의 형벌론&gt;(The Humanitarian Theory of Punishment)에서 “응보의 개념은 형벌과 공의의 개념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인 것이다. 어떤 판결이 의로운가 불의한가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는가 하지 못하는가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에는 적극적이시지만, 형벌에는 소극적이거나 혹은 아예 형벌을 내리는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시며, 그의 용서와 사면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처벌이나 형벌이 없는 용서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잇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공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원고 145, 1897)
이 정의는 하나님께서는 죄로부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욥 34:10)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시 5:4)

뿐만 아니라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 11:5)신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합 1:13)신다고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 6:15)고 하였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에서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2-3)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4장의 셋째 천사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계 14:10)에 대해 경고한다.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계 14:10)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죄를 멀리 하시며, 미워하시고, 참아 보지 못하시는가? 이러한 하나님은 잘못된 분이신가? 아니면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잘못 나타낸 것인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롬 3:5)고 반문한다.

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가? 에밀 브루너는 “죄는 도전, 교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은 독립적이라는 주장, …자율적인 이성, 도덕, 그리고 문화의 구성체”라고 정의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왜 나쁜가?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하면 스스로 자립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독려하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끝없이 의존하기를 바라시는가?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존과 존재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두 번이나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 16:22; 27:16)이라고 불렀다. 다윗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라고 하였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닿아 있다. 죄는 이 원천으로부터 흘러나가는 생명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가 발생할 때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 돌격하는 것이다.

“죄악을 품는 곳에는 어디든지 신속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형벌이 따를 것이다.”(부조, 585)

“예레미야 3장을 읽어 보라. 이 장은 현대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의 죄를 용납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죄도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로 기울어지는 선천적, 후천적 성향을 증오하신다.”(편지 34, 1899)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것은 무서운 죄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죄악에 관한 경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반드시 온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들이 어찌하여 저희가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또 어찌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어야 한다.”(쟁투, 449)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약 2:10)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하여 불충성하지 않고는 열 계명 가운데 단 하나도 범할 수 없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가장 작은 이탈 행위일지라도 무시하거나 고의적인 범죄를 하는 것은 죄이며 모든 죄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한다.”(1기별, 218)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은혜의 시기와 시련기 동안에 우리를 위하여 온 우주를 감동시킬 수 있는 놀라운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의 은혜의 기간이 끝난 이후에 우리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발견된다면 그 사랑은 복수의 사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다. 불순종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1기별, 313)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보좌처럼 불변한다는 설득력 있고 지속적인 논증이 되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의 고민과 모욕과 조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퍼부어진 욕설들, 또 십자가의 공포와 수치는 하나님의 공의가 죄를 범할 때는 그 일이 아주 철저히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또 무섭게 보여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보증인이신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율법을 범한 죄인을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도들과 죄인들과 우주 앞에 무궁토록 서 있을 논증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리는 모든 죄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계산서에 기록된다. 그리고 공의의 칼을 잡으시는 날,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해졌던 그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을 내려칠 것이다.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격렬하고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원고 58, 1897).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것은 홍수로 옛 세상이 멸망한 역사로도 증명이 되었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소돔성 거민들을 멸망시킨 기록으로도 입증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셨을 때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뇌 속에서 입증된 것만큼 그렇게 크게 증명된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이 죄로 가득찬 세상에 가장 큰 고통의 장소가 된 것은 죄의 결과, 곧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이었다. 어떤 슬픔도, 어떤 고뇌도 하나님의 아들이 견디신 것을 측량해 볼 수 있는 것은 없다.”(화잇주석, 마 26:36-46)

“만약 우리의 품성에 흠이 있으면, 사랑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놓으신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의가 입구에 서서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순결과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그 문을 열어서 각자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다 들어가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평화와 행복과 하늘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화잇주석, 롬 3:24-26)

오래 전에 아리스토테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정의란 본질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바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라고 말하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신 30:19)라고 권고하신다. 그리고 최후에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죄가 처리되고, 범죄자가 받는 형벌은 어떤 결과나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의지이다.

=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조우함=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

“그리스도의 목표는 공의와 자비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의와 사랑이 각기 독립된 위엄을 보존하게 하셨지만 서로 연합되게 하셨다. 그의 자비는 유약한 것이 아니었고, 죄를 벌하는 두려운 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의는 그 드높은 거룩함을 단 한 점도 손상시킴이 없이 용서가 가능케 되었다. 공의와 자비는 넓다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기 반대편을 마주보고 서 있다. 우리의 구속주께서 신성에다 인성을 입으시고 인간을 위하여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품성을 이루셨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다 십자가를 심으시고 그것을 두 길 곧 사랑과 공의를 끌어당겨 서로 만나게 하는 물건이 되게 하셨으며, 그 깊은 수렁을 건너서 사랑과 공의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공의가 그 높은 보좌에서 일어나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십자가에 가까이 이르렀다. 거기에서 공의는 불의와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담당하신 분,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을 보았다. 공의는 완전히 만족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머리를 숙이고 “족하다”고 말한다(원고 94, 1899).”(화잇주석, 약 2:13)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시야는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증오심을 바라보는 한편 우리는 또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진리요, 빛이요, 사랑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논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사인즈 1895. 3. 7).

“주님께서는 인류의 머리로서 자비와 공의를 화목시킨 의를 드러낸 거룩한 정부의 원리 가운데 있는 교훈들을 인간에게 가르치셨다. 자비와 공의를 화목시키는 일에 있어서 죄와의 어떤 타협도 없었으며 공의의 어떤 주장도 무시되지 않았다. 자비와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서 각기 제정된 위치가 있는데 자비는 그 자체의 온화하고 관대한 기질
을 소멸함이 없이, 또는 그 자체의 동정적인 특성을 상실함이 없이 회개
하지 않는 완고한 죄인을 벌하는 데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의는 그 자체의 성실성을 범하지 않고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는 일에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1기별, 260, 261)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 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의 의가 평화의 적이 된다는 것을 밝혀 보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시 85:10)다.”(소망, 762)

대쟁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증되면서 하나님의 승리로 마친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4).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진리와 오류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이제 분명해졌다. 반역의 결과, 곧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한 결과가 모든 지적 존재자의 눈앞에 분명해졌다. 하나님의 통치와 반대되는 사단의 법칙이 실천된 결과가 무엇임이 온 우주에 공개되었다. 사단 자신의 사업이 그를 정죄했다.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는 완전히 옹호되었다. 대쟁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취하신 처사가 오로지 당신의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일임이 드러난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시 145:10). 죄의 역사는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의 행복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충성된 자와 반역한 자들을 막론하고 온 우주는 대쟁투에 속한 모든 사실을 바라보면서 한 마음으로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고 선언한다.”(쟁투, 670)

3. 형벌 대속 교리
현대 교회의 성장 모델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로버트 슐러(R. Schuller) 목사가 교회성장학을 강의하러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이렇게 권고했다.
“죄에 대하여 많이 설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십시오.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하여 많이 말하십시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설교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복음에 배치되는 주장이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가 있으며, 형벌이 없는데 어떻게 은혜가 존재할 수 있는가? 반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대신 사람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 십상이다.
교회는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강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설교해야 한다. 회중들은 죄의 심각성을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죄의 상처들이 드러나고, 자신의 환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십자가를 찾게 되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갈구하게 된다.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인간의 타락한 본질과 죄의 참상을 깨달을 때에 추구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진노
사랑의 하나님께서 악을 ‘형벌’하시거나 ‘심판’하시는가? 그렇다. 성경은 전편에 걸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수백 번 언급하고 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민 11:1)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민 11:3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신 고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민 32:13)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대상 13:10)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22:31)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나 1:2)
구약에만 이런 표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6)

참으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죄, 책임, 그리고 죄책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곧 그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이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의 진노인데 사실 이것은 악에 대한 그의 거룩한 대응이다(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128, 129). R. V. G. Tasker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 두 가지 속성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공리이다. 또한 과거 대부분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 두 측면에 동시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많을 그리스도인들을 당혹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과연 진노하시는가? 이에 대해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의 신성한 반발”이며,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의 강인한 반대”라고 정의하였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의 분노는 절대적으로 순결하며, 인간의 분노를 악한 것이 되게 하는 그런 요소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의 분노는 발작적인 폭발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불쾌한 감정과 보복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악에 대한 정죄 속에서만 표현되는, 하나님의 계속적이며 확고한 적대(antagonism)이다. 하나님은 사적인 원한이나 앙갚음 같은 것을 전혀 가지지 않으신 분이시다. 실로 하나님은 그 적대자에 대해 감소되지 않은 사랑을 동시에 유지하신다.”고 하였다.

거룩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공통적인 것은, 이 둘이 죄와는 병존할 수 없다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폭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대적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 성경은 몇 가지 은유들을 사용한다.

무서워님의 댓글

무서워 작성일

이 무서운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까? 드디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 단 한명도 없게 되었구려 박금하씨도 포함해서.....  혹시 장감리 교인이신지?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하나님을 너무 무서운분으로 묘사하시네요, 그리고 내 견해와 다르다고 거짓교사, 거짓교리를 가르친다고 하는것은 어이없는 독선 아닙니까? 성경을 잘 보셨으면 합니다. 왜 이런말씀 있지요? 성경에 무엇이라 쓰였으며 너희가 어떻게 읽느냐? 그당시 무서운 하나님을 가르치던 율법사와 바리세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박금하씨 이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보세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정구성씨,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 하나님이 어떤 속성과 품성을 가지고 계시는지 깊이 연구해 보십시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알아 보십시요.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도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요?
오히려 죄가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 죄의 저주와 진노와 멸망의 심판에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공의도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임을 잊지 마십시요.
지금 여기 교사중에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으신 분들이 있어서 교단적으로 말이 좀 있습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정구성씨, 교과 공부는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연구하여 진리의 토대 위에 믿음을 세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 위주로 쓰자면 얼마든지 회자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설교 시간에 필요한 것이니다. 여기는 성경 연구 마당입니다. 그리고 자의적인 해석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교수하는 것이 교사들의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교사는 재림교회가 표방하고 믿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도구요 메신저에 불과한 것입니다. 얼뚱한 논리를 끌어 들여와 혼동을 야기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되는 것이고, 오직 진리만을 레슨 받아야 하는 것이 교인들의 권리이자 하나님의 뜻이지요.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진리가 뭐지요?
진리가 옳다 그르다를 분별하는것입니까?

은혜가 빠진 교과공부가 진리입니까?
교과공부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알기위함이지 성경공부하기위함이 아니지요.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박금하씨가 말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죄라는게 뭐지요?
죄가 인격체입니까? 죄가 의식이 있습니까? 죄가 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라는것은 어떤 개체로서 존재하는것이 아닙니다.
죄가 무엇인지부터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금하씨가 하나님입니까?
심판관입니까?
누가 문제가있다고 단언합니까?

지금 여기 교사중에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으신 분들이 있어서 교단적으로 말이 좀 있다는데
그 교단이 누구를 말하는거지요?

그리고 박금하씨가 그 교단을 대표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박금하씨가 교단입니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함부로 말씀하는거 아니지요.

드리고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교사의 해석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것처럼 말하시는데 성경은 둘째치고
기본교리부터 읽어보세요
재림교회의 기본교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위에 댓글을 단 분 '무서워'님에게 어떻게 이런식으로 말하시는지?

"님이 위의 성경 말씀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것은 실명도 제대로 공개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뭔가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못하시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그 '무서워'라는분이 죄인이라고 단정하시네요?
님은 의인이구요?

이곳에 글을 올리신 것은 공적인 행위입니다.
그럼 글 한자 한자가 공인으로서 올려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글을 올리고 싶어도 공적인 책임감등을 생각해서 글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화두가 되는 정치인식의 발언은 삼가하셧으면 합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하기전에 품격부터 올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도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요?'라고 하셨는데요
솔직히 저는 무섭지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글을 읽으면서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우리 재림교인 중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하고요.

제가 걱정하는건 이런 글로인해
첫신앙을 하는 분들이 하나님이 무서워서 교회를 떠날것 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정구성씨! 이번 주 교과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님이 교과 내용을 아직도 간파를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은혜와 심판, 공의와 자비는 쌍둥이 형제라니까요?
공의가 임하는 곳에 자비도 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온 우주의 유익과 악인들의 유익을 위해 내리신다고 했습니다(대쟁투 542)

그리고 유독 심판에 대한 용어에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 우리 교회 테릉교회 찬양대 반을 제가 교과 지도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고 모두 수긍하였습니다.

재림교회 기본교리 27 "천년기와 죄악의 종말" 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단과 죄악을 어떻게 형벌하시는지 말입니다.

[사단과 죄인들이 멸명함]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선고가 내리자 즉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계 20:9)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소멸한다. 성 바깥의 지구의 표면은 녹아지는 것처럼 보이고,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벧후 3:7)을 위하여 하나의 큰 불못이 된다. 주님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멸하시는 "비상"(사 28:21)한 일을 하시는 "여호와의 보수할 날"(사 34:8)이 이르렀다. 요한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고 말했다. 마귀와 그의 동료들도 같은 운명을 당한다(계 20:10)."

정구성씨!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기본교리 28 신조는 다 알아야 합니다.

한가지 질문 할까요?
광야에서 고라와 나단이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죽었습니다.
소돔성에 하늘에서 유황 불이 내려와 진멸되었습니다
노아 때 비가 내리지 않던 시대에 40주야 비가 쏟아져 홍수로 땅의 생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자연 현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초 자연적인 신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까?

정구성씨 위의 기본교리 27번을 읽고 저하고 다시 얘기하시지요.
영 안통하는군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정구성씨 저에게 전화 좀 주십시요
여기서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알려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그럼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010-2070-0114, 070-7651-6200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정구성이라는 분께
정구성님, 님의 말투부터가 아주 기본이 안 되어 있습니다.
박금하님은 장로님이십니다.
님이 박금하님을 깍아 내릴 요량으로
'씨'자를 붙이며 상대를 비하시키는데
님이 성도이기전 사람으로서의 예의부터 지키시기 바랍니다.
박금하님이 님에게 같은 "씨"를 붙였다고 항변하지 마시고
님이 먼저 시비를 걸 목적으로 글을 쓰셨군요

재림 교회 안에 거짓된 교리와 이설이 슬그머니 들어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바르게 묘사하지 못하고
엄위와 공의가 빠져 버린 인자와 자비만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과 의미를 잘 못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엄위와 공의가 빠져 버린 것짓된 사랑으로
오늘날 죄 짓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격려하고 있음도 유념하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그리고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도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의 기본를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그리고 정구성님, 위 박금하 장로님이 인용하신 선지자의 말씀 중
아래 말씀을 다시 한 번 숙지하세요
박금하 장로님의 윗 글들은 지극히 원론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리고 재림교회의 기본 교리에 대해
정확히, 명확히 대변한 글로 사료됩니다.
--------------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죄인을 멸망시키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성격의 것으로 오늘날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낮은 정의와 공의의 표준으로 추론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입법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율법을 만드시고 또 집행하신다. 형벌이 없는 법률은 힘이 없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해방시켜 줄 능력을 갖고 계신 동안 그들이 불로써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일을 보지 않게 해 달라는 탄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유익과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범법자를 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획대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이 그의 동료 인간 앞에서 행사할 권한이 없는 무한한 공의를 행하실 수 있다. 노아가 자기를 괴롭힌 조롱자들이나 조소자들 중 한 사람을 익사케 했다면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대한 세계를 물에 빠뜨리셨다. 롯은 그의 사위들에게 형벌을 과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격한 공의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12MR, 207-209; 10MR, 265(1876).”(사건, 240, 241)

제진전님의 댓글

제진전 작성일

명백하고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성경의 기록들과 선지자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철학적인 말놀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못 제시하는 현실에
심한 우려를 표명합니다.

죄인들을 더욱 죄인되게하고
죄인들이 죄 짓는 일에 더욱 담대하게 만드는
거짓된 '복음'이 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성경 역사 속에 반복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교묘한 속임수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어우러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공의와 엄위를 빼 버린 자비와 인자함만을
강조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거짓 복음으로 사료됩니다.

지금 재림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깊이 잠에 빠져 있으며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세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시기 적절한 바른 복음을 제시하는
박금하 장로님의 글을 적극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박금하씨나 새지평씨나 참 답답합니다.
장로에게 씨자를 붙인게 불경입니까?
기막힌 발상입니다.

장로는 님자를 붙여야 합니까?
참 한심합니다.
장로가 뭔데요?
벼슬입니까? 맡은바 직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시비를 걸기위해 들어온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마치 이단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것이라고 한 것이고.
그것을 마녀사냥하듯이 몰고가려는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교단을 자신이 대변하는 듯한 그런 표현들....
나도 그 이상한 교리들을 펼치는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그러면 나도 교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해도 될까요?

누차 말하지만 이곳은 공적인 장소 입니다.
자신의 논리의 확신떼문에 남들을 매도하지 마세요.

재림교인님의 댓글

재림교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제가 보기엔 정구성님이 위의 어느 교사님의 대변인처럼 보입니다.
정구성님이 교과를 해설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나친 편견에 사로잡히신 분 같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시각도 부족하시고요.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정구성님,
이런 공적인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보통... '님'자를 붙이는 것이 기본적 예의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씨'는 비하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 호칭에 관계 없이
님의 말투나 태도가 상당히 격분한 듯이 보여집니다.
왜 그리 격분하고 분노하시는지요?
박금하 장로님의 글이 일반적인 재림교회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님의 생각과 다르다고 왜 분노하시지요?
참 이상하십니다.
님이 누구의 대변자이십니까?
님의 생각과 다른 글이라면 그냥 참고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박장로님은 성경과 예언의 신에 명백히 언급된
재림교회의 기본적 입장과 다른 글에 우려를 표명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너무 흥분하시지 말고
차분하게 그리고 신사답게 처신하십시오.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위의 글들을 보니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 됩니다.
댓글을 다는 분들이 이상하게 제에게 촛점을 맞추어 박금하씨를 옹호하는군요,

또, 논리가 박금하씨와 똑같습니다.

셋째, 다 가명을 썼더군요.
실명로그인을 안한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표현(?)
그것도 댓글을 단 제글에 타깃을 맞추어서

혹시 설마하니
댓글을 단 세분
박금하씨 자신은 아니겠지요?

이런 웃기는 말장난 그만합시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정구성님 혹시 제일 위 덧글 닉네임 '무서워'가 혹시 님 같은데..... 아닙니까?
언사가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질문에 답해 보십시요 동문서답 그만 하시고요.

광야에서 고라와 나단이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죽었습니다.
소돔성에 하늘에서 유황 불이 내려와 진멸되었습니다
노아 때 비가 내리지 않던 시대에 40주야 비가 쏟아져 홍수로 땅의 생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자연 현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초 자연적인 신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까?

오직 성경으로 답을 해 보십시요.

어떤 답을 하실지 사뭇 기다려 집니다.
혹, 잘 모르시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십시요.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정구성님
정말 성격과 성미가 고약하시군요
제가 박금하 님이라고요?
ㅎㅎㅎㅎ
정말 참 이상하시네요
만약 제가 박금하님이라면
이곳 관리자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게끔
이 글들을 올릴 때마다 반드시 기입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박금하님은 서울에 사시고
저는 지방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박금하님인가요?
참 의심도 할 것을 하셔야지요

그리고 그런 정도의 의심을 하실 분이라면
님이 그런 행위를 과거에도 현재에든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박금하 님을 그런 정도의 아류로 보셨다면 정말 잘 못 보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박금하님은
과거 이곳에 안교연구를 올리실 때
가장 많은 분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이 왜 이렇게 평범하고 지극히 원론적인
재림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시는 박금하 장로님의 글에
분노하시고 격분해하시는지
님 스스로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지금 한참 잘 못 나가고 계십니다.

김보영님의 댓글

김보영 작성일

여기저기 휘졌고 다니며 성경공부를 할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박금하 장로님(?)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몇가지 우문을 드리겠습니다.
혹 유치하다 생각마시고 댓글 다신분들 처럼 감정섞인 단어없이 진정한 답글 주시기바랍니다.
①그동안 제가 공부한 바로는 죄는 사단으로부터 왔다고 배웠는데(틀렸다면 바르게 알려 주시길) 그러면 사단은 어디서 죄를 받았을까요?(사단에게서 스스로 자생?)
본문의 한 소절에
“만약 우리의 품성에 흠이 있으면, 사랑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놓으신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의가 입구에 서서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순결과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그 문을 열어서 각자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다 들어가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평화와 행복과 하늘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화잇주석, 롬 3:24-26)“
인용글 밑줄친 부분의 의미로 볼때 사단이 추방되기 전에도 하늘이 악한상태?
불만과 반역의 사탄이 쫒겨난 후론 평화를 되 찾았다고 설명하신다면 사탄은 쫒겨난후에도 수시로 드나들었지 않습니까?(욥기)

②아래와 같이 인용하신 본문에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
밑줄친 부분과 이미(벌써) 심판 받았다고 교과 저자가 인용한 성경(요3,18) 해석에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까지 포함된다는 교과저자의 해석에 보충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③그리고 인용문을 옮겨오진 않았습니다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은 생명인가요? 아니면 문자그대로 세상 축복(공자의 오복)인가요? 또 구약의 복과 신약(오늘날)의 복이 다른가요?

질문이 황당하거나 답변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시면 안하셔도 됩니다만 가급적이면 진솔한 답을 기다리겠습니다.(메일로 주셔도 됩니다. <a href=mailto:kby41@korea.com>kby41@korea.com</a>)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댓글의 댓글 작성일

김보영님
저는 성경에 관하여 질문하고 토의하는 것 좋아 합니다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빠서 내일 꼭 답을 드리겠습니다.^^

김보영님의 댓글

김보영 작성일

밑줄친 부분이 빠졌군요.
①"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
②"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입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김보영님께
김보영님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경 연구에 열심이 특심하시니 좋은 모본이 되시는군요.

분별 없이 아무 가르침이나 솔깃하는 맹신적인 교인들이 많은데, 진리를 캐기 위해 동분서주 하시는 모습에 하나님이 크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럼 질문에 답변 드립니다.

====&gt;&gt;&gt;

문①그동안 제가 공부한 바로는 죄는 사단으로부터 왔다고 배웠는데(틀렸다면 바르게 알려 주시길) 그러면 사단은 어디서 죄를 받았을까요?(사단에게서 스스로 자생?)
본문의 한 소절에
“만약 우리의 품성에 흠이 있으면, 사랑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놓으신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의가 입구에 서서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순결과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그 문을 열어서 각자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다 들어가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평화와 행복과 하늘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화잇주석, 롬 3:24-26)“
인용글 밑줄친 부분의 의미로 볼때 사단이 추방되기 전에도 하늘이 악한상태?
불만과 반역의 사탄이 쫒겨난 후론 평화를 되 찾았다고 설명하신다면 사탄은 쫒겨난후에도 수시로 드나들었지 않습니까?(욥기)

&lt;답변1&gt;죄의 원인과 존재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죄는 오묘이고 설명할 수 있으면 죄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죄의 시작과 그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수수께끼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악의 소위(所爲)와 그 무서운 결과로 생기는 불행과 파멸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의심한다. 여기에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불신과 의심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고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 죄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코 계시하지 않으신 것까지 알아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의심하고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기질에 의하여 행동하는 자들은 그것을 구실로 성경의 말씀을 거절해 버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유전과 그릇된 해석이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정부의 성격과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는 원칙 등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까닭에 악에 관한 큰 문제에 대하여 만족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죄의 시작과 죄의 최종적인 처분, 악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무엇보다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온 것에 대하여 전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 하나님의 정부에는 반역을 일으킬 조건이 될 만한 아무런 결함이 없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강제적으로 거두어 버린 일이 없다는 것 등이다. 죄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죄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죄는 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대쟁투492

&lt;답변2&gt;반역한 사단은 이내 하늘에서 쫒겨났습니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사단이 하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후에도 그를 즉시 멸망시키지 아니하셨다...하나님께서는 사단을 하늘에서 추방시킴으로 당신의 공의를 드러내시고 당신의 보좌의 영광을 보존하셨다."-대쟁투498,499

&lt;답변3&gt; 사단은 하늘에서 쫒겨난 이후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하늘에 전달했으나, 갈바리 사건을 계기로 차단되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사단은 자기의 가면이 벗겨진 것을 알았다. 그의 통치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하늘 온 우주 앞에 공개되었다. 그는 살인자임이 판명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는 더 이상 하늘 존재들의 동정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의 사업은 제한을 받았다.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지 간에 그는 더 이상 하늘 궁정에서 내려오는 천사들을 기다렸다가 그들 앞에 죄로 인해 검고 불결해진 옷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고소할 수 없다. 사단과 하늘 세계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마지막 동정의 고리가 끊어졌다."-시대의 소망761

문②아래와 같이 인용하신 본문에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
밑줄친 부분과 이미(벌써) 심판 받았다고 교과 저자가 인용한 성경(요3,18) 해석에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까지 포함된다는 교과저자의 해석에 보충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lt;답변&gt;"예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드리신 그 기도는 온 세계를 포함한다. 그것은 이 세상이 시작한 때로부터 끝날 때까지 이 땅에 살았거나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을 포함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가 놓여 있다. 용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제공되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으며 영생을 유업으로 얻을 수 있다."-시대의 소망744

문③그리고 인용문을 옮겨오진 않았습니다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은 생명인가요? 아니면 문자그대로 세상 축복(공자의 오복)인가요? 또 구약의 복과 신약(오늘날)의 복이 다른가요?

&lt;답변&gt; 궁국적으로 성경의 복은 세속적인 기준이 아니었으나 유교적 오복과 구약 시대의 복(신28장)의 개념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유린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면 더 타락하고 배도했습니다. 축복이 오히려 저주와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어 가시고 시련을 주셨습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되어 시대가 변천하고 흐르면서 축복의 개념과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복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시켜 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셨습니다. 팔복이 바로 천국의 근본적 복의 원형입니다. 하늘의 복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물질적 개념을 한차원 뛰어 넘어 구원과 영생과 연관되었음을 신약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천국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하늘 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 중에 거의 80%이상을 재물과 돈에 관련된 비유로 교훈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선포하신 복은 영생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재물과 냥쭝은 하늘나라를 확장하고 이웃을 섬기고 베풀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위탁물로 청기기인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라나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