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구속주 하나님(교과토의 자료, 부가설명)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3과 구속주 하나님(교과토의 자료, 부가설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현대언 작성일12-01-13 07:32 조회5,276회 댓글23건

첨부파일

본문

< 2012년 제1기 3과 교사모임 >

1. 안교교과: 30%이상 말하지 말라, 경청, 격려 중요!
  
*제목: 구속주 하나님

*기억절: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2. 도입질문: 마음을 열기 위한 질문

1)토의질문:
그대가 받은 사랑 중에(하나님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를 나누어 봅시다. (부모님, 형제, 친구, 교인, 선생님 등)

2)교사정리: 감사합니다.


3. 교과요약

1)질문:  
오늘 3과는 구속주 하나님과 그 사랑에 대해 살펴봅니다.  
각 교과의 요일별 내용을 통해 알아봅시다.


2) 교사정리:

①일요일(십자가):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구원에 대한 상징적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무엇이 생각납니까?

(답:
죄인은 사랑하나 죄는 미워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 교사가 최소한 이 두 가지는 정리하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일요일 교과 내용의 핵심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


*부가설명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오게 되는지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게 된 이유는
열 번째 장자 재앙 때문이며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유월절 양의 희생의 결과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과
유월절 양의 희생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고의 기적은 장자재앙을 피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이었다.

우리가 이적이란 주로 병고침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고의 이적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하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이며  
그 희생으로 사단의 세력에서 
죽음의 영향력에서 그리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랑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악되고 강퍅힌 마음이 
변화를 입어 새롭게 되는 경험 
이것이 가장 큰 이적이며 기적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한 
최고의 기적이며 능력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표적과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늦은비를 기다리면서
어떠한 표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그분께 찾아와서 특별한 기적과 표적을 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들에 대한 답으로 
항상 요나의 표적만 말씀하셨다. 

요나의 표적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참 표적에 핵심인 십자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고의 기적인
십자가 여기에
집중하는 주의 백성이 되자!!


②월요일(구약의 복음):
구속의 계획을 최초로 선포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후인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또한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치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구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에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수없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에 담겨있는 복음(구속)에 대해
알고 있는 사건들이나 제도,
예언들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답:
유월절, 제사제도, 이사야 53장,
다니엘 9장 메시야에 대한 예언,
성소제도, 기생라합의 구원-빨간줄 등)


*부가설명

구약에는
감추어진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의 한 이야기를 통해
감추어진 복음을 살펴보자

다윗이 들에서 양들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어
기름을 붓게 하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다음 날부터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울이 죽기까지
사울 왕을 섬기는 사람으로 있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는 그 날 여인들의 노래 소리에
사울 왕을 시기의 마음과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노래 소리를 통해
사울은 다윗이 장차 왕이
될 가능성을 보았고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니면서
사울을 섬겨야 했고,
적군을 피해다니기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피곤하고 고통스러웠다.

한번은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너무나 지치고 시장해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삼상 21장).

그때 제사장은 다윗을 보고 떨며 영접하면서,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삼상21:1)”
고 묻자,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삼상 21:2)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삼상 21:3)
하고 부탁을 하였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삼상21:4)
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떡’은
고운 가루로 떡 열두 덩이를
만들어 가지고 성막의 떡상에
진설해 놓은 것인데,
그 떡은 일 주일 동안
진설해 놓았다가
매 안식일에 새로운 떡으로 갈고,

전에 있던 떡을 물려 내어
제사장들이 먹게 되는 것이다.

그 떡은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는데,
다윗에게 그 떡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정결한 자는
제사장만이 먹는 떡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본 교회 주석 참조)

다윗이,
“우리가 참으로 삼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삼상 21:5)
하자, 제사장이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 거룩한 떡을 먹고 다윗은
힘을 얻어 가야 할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사울에 쫓기고 있는
다윗은 아히멜렉에서 사실을
말하지 않으므로 놉 땅의 제사장들이
다 죽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다윗과 같다.
다윗은 장차 왕이 될 사람이었지만,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울을 피하며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 또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왕이 될 사람들이지만,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즉 사단이 다스리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고난과 멸시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다 지친 다윗은
제사장이 준 떡을 먹고 새 힘을 얻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다윗이 당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복잡하고 피곤한 일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이 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주님과 교제를 나눌 때,
지치고 피곤했던 마음이 새 힘을 얻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윗에게 떡을 준 것으로 말미암아
아히멜렉 제사장과 온 집은
사울에게 희생을 당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찢기심으로 인해
생명의 떡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을 당하셨고,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을 얻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셨다.

이처럼 구약에는
많은 감추어진 복음이 있다.


③화요일(이사야서의 구원):  
이사야 53장은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 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서
어떤 내용이 그대의 마음에 와 닿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아픔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고난에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다.
이 사랑을 잊지 말고
증거하는 우리 안교반이 됩시다.)


④수요일(복음과 십자가):
메시야의 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는
대부분 이것을 중심으로 사건을
기록하며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답: 십자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곳이며,
죄를 끝내는 장소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표현된 곳이다.
그리고 사단의 속성이 온전히 들어난 장소이다!)


⑤목(십자가에서의 절규):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규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답: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은
사랑하는 아들을 심판하여 죽일 만큼 미워함,
영원부터 하나였던 아들과
분리될 만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시다 등)


4. 교과토의

1) 토의질문(월):
창 22장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다시 묵상하십시오.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게 됩니까?

(답:
하늘 아버지가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이 쉬울까?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시는 것이 쉬울까?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은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가
약속의 아들 이삭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의 목숨대신
자신의 목숨을 달라고 했다면
더 쉽게 받쳤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최고의 고통은 아들을 받치는 것이었다.

이처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더 쉽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는 아들을 보내셨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교사정리:
감사합니다. 아들을 보내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말고
이 사랑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우리 안교반이 됩시다.


2)토의질문(화,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따금씩 주고받는
미약한 애정과 같지 않습니다.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고 생각합니까?

(답:
한결 같은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아무리 우리가 그리스도를 미워해도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무아적인 사랑, 실패하지 않는 사랑 등)


*교사정리:
감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차고 넘쳐서
이러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 안교반이 됩시다.


3) 토의질문(목):
성경의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면서도
죄는 심히 미워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할 때
둘 중에 하나만 고르려고 합니다.

또는 하나를 강조하다
다른 하나를 간과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죄를 미워하시는 주된 이유가 됩니까?

(답:
하나님의 사랑과 죄는 정 반대의 속성을 가졌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반대가 죄인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무아적 사랑과
반대적 개념으로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이 죄가 하늘의 행복을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고 시기 질투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죄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5. 결론:
구약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상징과 비유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 대한 진노를 들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구원을 받아드리게 될 때
죄의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언제나 새로운 삶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안교반이 됩시다.  

댓글목록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교과토의는 한장으로 프린트 해서
볼 수 있도록 정리를 했습니다.
단 한장으로 만들다 보니
교과토의 안에는 부가설명을 제외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신호님의 댓글

이신호 작성일

대언하는 능이 목사님과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홧팅!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댓글의 댓글 작성일

목사님의 격려로 열심히  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좋은 해석을 하시네요. 그런데 출애굽의 열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 않나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모든 인류는 다 그분의 자녀입니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지요. 그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것이라면 어린양 즉 십자가의 희생과 대치되는 모순이 되는겁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자체이니까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러 모리아산을 향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받으시는분이 아닌분입을 아브라함은 알고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시지도 않으시며 또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실수가 없는분이지요.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은 하나님이 시험하거나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욥에서 나타난것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자며 사단의 고소에 의한 것이지요.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품성을 정말로 믿느냐는 사단의 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도전을 받으실 수밖에 없으시고,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품성을 알고있었습니다. 받을실수 없는분이고, 시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인데 뭔가 피치못할 이유가 있으실 것이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돕기위해 순종하는 장면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22장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그는 종들에게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또 7절과 8절에 이런 대화를합니다. 7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절'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번제할 어린양을 친히 준비하신다고 확신에차서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을 가진사람이 다윗이지요 그는 참혹한 죄를 저지른후에 하나님이 어떤분인지를 깨닫고 돌아섭니다. 그증거가 시편25편1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그는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자신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믿음없는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아브라함과 중한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다윗이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즉 십자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결심은 자신을 위한것입니다. 우리가 죽게되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은 견딜수없으셔서 자신이 죽기로 선택하신 것이지요, 그런 사랑을 깨달은 그들이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분이 어찌 무서운 심판을 하실수 있으며 어찌 시험하실수 있으며 어찌 아들을 달라고 히갰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품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품성대로 해석할때 그분의 의도대로 뜻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로마서 5:6'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우리가 어떤 상태(출애굽의 애굽백성들도)속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모든 책임을 지십니다. 좋은 해설 감사드리고요, 하나님의 품성을 기초로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댓글의 댓글 작성일

긴 답변 주신 것
감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랑도 받으십니다.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9)

왜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시는지 ...
너무 한쪽을 강조하다보니 오해가 생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 했습니다(행20:35).
즉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죠

하늘은 이러한 사랑의 원리로 창조되었고
진정한 행복은 이러한 사랑이
상호간에 이루어질 때 일어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주시고
우리는 그 사랑에 반응하여 그분께 우리의 사랑을 드립니다.
이것을 ‘사랑의 대 순환’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늘의 생명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면 사랑의 대 순환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죠!!

‘사랑의 대순환’의 핵심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행복하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즉 주기 위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보다
그분께 받은 사랑에 감사해서 그분을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분은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대의 소망 1장에는
이러한 ‘사랑의 대 순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하나님에게서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주기 위하여 받으셨다.

이것은 하늘 궁정에서도 그러하고
모든 피조물을 위한 그분의 봉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생명이 만물에게로 흘러나간다.
또한 아들을 통하여 그것은 찬양과 기쁨의 봉사로
사랑의 조수처럼 만물의 대 근원이신 분께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혜(慈惠)의 순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며
크신 시여자(施與者)의 품성, 곧 생명의 법칙을 드러낸다."(소망 21)

행 17:25절에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은 사도바울인 아테네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즉 세상의 신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비교한 것이지요

이 세상 신의 중심은 사단입니다.
루스벨은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인
섬기는 사랑, 주는 사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섬김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대항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신의 정신은
주는 사랑이 아닌 받는 사랑 즉 이기적 사랑이며
섬기는 사랑이 아닌 섬김 받는 사랑으로
가득찬 신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 세상 신과 분명한 차이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참 하나님은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
섬김 받는 것이 아닌 섬기는 사랑을 하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사단은 섬김 받는 것에 초점이 있지만
하나님은 섬김을 받지만 여기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죠!!

사도바울은 세상신과 하나님과의
차이를 선명히 표현하기 위해
그 마음의 중심이
받는 하나님인가?, 주시는 하나님인가?로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조명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재앙에 대한 표현입니다.

재앙에 대한 거부적인 느낌 이해합니다.
재앙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계시록에는 수많은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재앙의 의미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장자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 내리니"(출 11:1)

분명 하나님께서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재앙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품성의 관점에서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앙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노아홍수를 살펴보죠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죄악이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러한 상태를 두어서는
구속의 경륜을 성취할 수 없는
상태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즉 강제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원대로 들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재앙입니다.

이 세상이 죄가 가득차서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게 되었죠

즉 창조주 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어두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노아 홍수의 재앙은
하나님의 회개시키고자 하는
은혜를 완강히 거절한 자들에게
그 원대로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홍수의 언어는
창조 전 상태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빛이 사라지고
갈라진 물이 다시 합쳐지고
들어난 땅이 물속에 잠기게 되죠
모든 생명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심판은 누가 내린 겁니까?
하나님입니다!!

출애굽의 재앙을 살펴보죠!
먼저 부조와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당신의 능력을 놀랍게 나타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내기까지
왕이 결코 그 요구에 굴복지 않을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각 재앙이 내리기 전에 모세는
그 재앙의 성질과 결과를
바로에게 설명해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그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하도록 했다.

재앙 하나하나가 거절당할 때마다
한층 더 혹심한 재앙이 따르게 되어서
마침내 왕의 교만한 마음은 낮아져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을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부조 263)

이 글을 기초로
첫 번째 재앙을 설명하겠습니다.

물이 피로 변한 재앙이죠!
이 재앙은 사단이 한 것입니까?

사단이 한 거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 재앙을 통해
참 하나님임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치신 10재앙은 다 애굽인들이
신실히 믿는 신들에 대한 징벌이었습니다.

즉 애굽인들이 믿는 신은 거짓이고
참 신은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것이죠!

이 과정을 통해 애굽인들도
거짓 신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믿게
되기를 바라셨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 과정을 통해
참 하나님을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가장 중요한 신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물은 모든 풍요의 상징이었고
애굽을 풍요롭게 만드는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나일강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물을 치심으로
피가 되게 하셨죠.
아마 이 피가 적조현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견해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일강은
그들에게 풍요를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일강이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 풍요를 주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재앙의 의미입니다!
여기에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더 나아가 가나안 백성을 위한
마지막 은혜의 선포입니다!!

거기서 멸망당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는 것이죠!

여기에 반응한 여자가
기생 라합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거짓 신들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믿기를 바랬습니다!!

이것이 재앙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님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저도 장문으로 쎴습니다!!

감사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다시 정구성 님의 질문을 보니
십자가과 심판에 대한 부분에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누가 사망을 내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이 사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그 죄 값을
대신 책임지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속성이
모든 것을 책임지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에게
임할 재앙이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께
임하게 된 것입니다!

장자재앙 역시 동일합니다!
1-9재앙을 통해
참 하나님을 충분히 들어냈습니다.

1-9재앙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스스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나 10재앙은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들 스스로
구별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거짓 신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사실을 유월절 양의 희생을
통해 증명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재앙을 피하는 방법을
애굽 사람들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1-9재앙의 과정을
통해 참 하나님을 믿게 된
애굽 사람들도 구원받기 위해
어린양을 죽이고
문설주에 피를 발랐습니다!

이들이 구원 받았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미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출애굽 시키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출애굽 시키길 원하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장자는 그 가족의 대표를
말합니다!

장자재앙이란
결국 장자 한사람만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음을
표상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죄에 대한 심판을
사단이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죄에 대한 심판에
사단 뿐만 타락한 천사들까지 포함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12절에
이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사단과 타락한 천사들)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 12:12)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11)

물론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단이 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도
사단의 공격에 의한 것이죠!

그러나 모든 심판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사단이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마지막 불의 심판에 대한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심판이나 재앙부분이 나올 때
누가 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심판이든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으로
이해 해야 된다는 것이죠!!

감사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좋은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끝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받기를
거절하는 죄인을 향한 마자믹 사랑의 표현입니다.

죄를 짓는 삶은 이기적인 삶이고
이러한 삶은 지속적인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불행을 끝내시는 방법으로
존재를 없애게 하시는 것이죠!

더 이상 불행한 삶이 되지 않도록...

죄인에게 영원한 삶을 준다는 것은
영원한 불행을 준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 자체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랑, 이타적 사랑으로
상호간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이 영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선택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죠!!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진지하게 읽고 답변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생각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기만 할뿐 받을수없는 분인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아니라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질은 흙,또는 먼지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으려면 생명이신 하나님과 붙어있어야만 하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은 하나님과 헤어지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순간 그는 죽은자가 되었고 그의 허리에서 태어난 인류는 죽은자인 것이지요. 하나님은 생명을 주셔야만 하는 분이고 우리는 생명을 여기서보면 흙으로만든 사람의 형태만있고  아직 생명이 없는 그것을 사람이라 칭하십니다. 즉 생명이 없는 상태 바꿔말하면 죽은상태도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 생명없는 흙덩이 사람에게 생명을 넣어주시므로 비로소 생명있는 생령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순간 생명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에게 어떯게 생명이신 하나님이 받을 수 있습니까? 좋은 예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제사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자세히보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것이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이유는 가인은 없는자 즉,죽은자인데 어떻게 그의 제물을 받을수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때에 우리 모두는 이미죽은자입니다.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드릴것이 없습니다. 죽은자는 그의 행위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실 수있는것은 아벨의 제물은 그가 하나님께 드린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것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여 생명 주신것을 받아들였기때문에 그는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얻은 생명있는자로 보신것이지요. 이렇듯 우리는 어떤것도 하나님께 드릴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생명으로서 피조된 존재들애게 받으실 수가 없는것이지요.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많이 주시고 사단은 하나님보다 더 경배받기를 원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지요.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사단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단과의 차이를 우열 혹은 더하고 덜하다고 평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것이 천사장인 루스벨이 사단이 된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자기는 얼마든지 동등 할 수있는데 그분의 능력과 지식이 자기보다 더하다는 생각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게된 이유인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홍수를 일으킨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글자대로 해석하면 우리를 죽이는 율법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의 율법사들인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성경을 글자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곡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쓰여진 것인데 완악한 인간의 품성으로 읽고 받아들이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따라 해석하지 못함을 돌이키라는 말씀이시지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즉 많은 이들이 성경을 열심히는 보는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아야하는데 그래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운분으로 인식하므로 생명에 다가서지 못함을 한탄하시는 말씀이지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알지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었인지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은 엉망이 됩니다. 어떤때는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시는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었다가, 어떤때는 진노하시고, 어떤때는 벌주시기도 하는 그런 변덕스런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사랑이시라고 하면서도 무슨 좋지못한 일이 생기면 동골이 서는해지는 것이지요, 그런 하나님이라면 선뜻 무방비 상태로 다가설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덧입고 그분앞에 나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얻음이 무색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나는 죄인이나 그대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믿을뿐입니다. 시간이 없어 이만 줄입니다. 건필하세요. 마지막으로 성경인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혹시 궁금한것있으시면 매주 목요일 밤8시에 삼육대학교 대학원 강의실 202호로 오세요. 연락처는 010-3504-1551입니다. 참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의 삶을 끝내시는게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느누구도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게 하나님다운 품성입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어느 부분에서는 저와 생각이 일치하나 한편으로는 많이 다르군요^^
물론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는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수가 없으시죠!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에서 있게 된 존재가 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이 제사는 주시는 하나님 즉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아벨은 믿은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벨의 제사는 어린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주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죠!

그러나 이 제사에는 동시에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왜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것 처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죽지 않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죽기를 결정한 자에게 하나님은 슬픔마음으로
그 길을 허락하시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행위가 끝까지 구원을 거절하고
끝까지 불행하고자 하는 죄인에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힘드신가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의 진노가 다르죠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진노하지 않습니다.
죄에게 진노하시죠!!

이 죄가 우리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저는 전혀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10재앙을 사단이 내리는 재앙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잘못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재앙은 모세를 통해 직접 내려졌습니다.

[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출7:17)

근데 이 재앙이 사단이 내렸다하면
모세는 뭐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

행동은 모세가 하고
사단이 재앙을 만든겁니까?

모세와 사단이 협력한 건가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선명한 해석을 해주서면 좋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말입니다....
이 심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묵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불의 재앙이 사단이 내렸다고는
절대 해석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여하튼 좋은 나눔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바른 진리가 서로에게 찾아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그래요 공통점이 생기는군요. 그런데 하나님의 품성중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피조물인 우리가 한 모든 잘못된 선택과 행위에 대해 책임지시는 품성이 있습니다. 그게 창조주의 필연적인 품성이지요. 그래서 아담이 죽게되자 당신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것입니다. 아담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당신이 책임지신것이지요, 이렇듯 사단이 한 모든 잘못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이 그랬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사단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와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고 한적은 없고요 단지 우리가 이미 죽은자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드릴 수가 없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에,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얻음으로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반응을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것처럼 표현 하시지요. 그리고 경배또한 낮은 우리가 높은 그분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밑에서 종의모습으로 피조물인 제자들의 발을씻기기 위해 무릎꿇으신 그것은 종이 주인에게 경배하는 모습인 것이고, 그런 하나님께 감동되어 그 하나님께 똑같이 대하고 싶어서 행하게되는것 즉 하나님의 경배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하나님은 경배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은 사람들의 상태를 기뻐하시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자 하는 그런의미로의 경배가 아닙니다. 소동과 고모라도, 노아의 홍수도, 욥의 재앙도, 애굽의 재앙을 비롯해 성경에는 수많은 재앙을 하나님께서 하신것으로 표현되어있는데 그 모든것이 사단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행위를 모두 뒤집어쓰시는 표현 인것이지요, 이것이 창조주의 놀라운 사랑,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님이 말씀하신 진노에대해서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사람의 진노와 하나님의 진노는 전혀다르지요. 그런 한가지 하나님은 죄에 진노한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 대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진노의 본질이 다른것입니다. 사람의 진노는 화를내는것인데 하나님의 진노는 생명없는자에게 생명을 주고싶은데 받지않고 죽음을 택할때 어쩔수 없는 안타까움에 스스로에게 하시는 진노인 것입니다. 정말로 생명을 주고싶어 최선을 다함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거절함으로 생명을 얻지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볼때 하나님의 가슴은 불못이 되고 그분의 안색은 벌겋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모습이라면 마치 매우 화난모습처럼 여겨지지않을까요? 그런 하나님 저는 그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늘 사랑하시고 내가 죄속에 있을때 더욱 은혜를 베푸시는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바라볼때에 기뻐하시고 내가 슬퍼하면 나보다 더 슬퍼지시는 그런 하나님 나를 지으신 그하나님이 정말로 좋습니다. 함께 토의하며 서로 보태주며 함께나눌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것입니다. 늘 좋은 해석으로 길를 밝히시는 님의 그 아름다운 마음에 하나님은 기뻐 미소짓고 계십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책임지시는 사랑의 핵심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책임지시는 사랑이라는
관점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사단이 했다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 언어, 책임지시는 사랑의 언어가 아니면
삼하 24장 1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다윗을 범죄케 한 분이 하나님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죠

사실은
대상 21:1절의 동일한 기록대로
사단이 한 일이죠!!

그러나 이러한 주권적 언어가
노아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도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노아홍수를 먼저 살펴봅시다.

“폭풍우의 기세는 더욱 거세어져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던
사람들의 통곡하는 소리가
폭풍우의 무서운 소리와 뒤범벅이 되었다.

나무, 건물들, 바위, 흙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사람들과 짐승들의 공포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사나운 폭풍우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단도 자기의 생명을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살아남은 이들 67)

여기에 보면 사단도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에 대해
자신의 생명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내린 것이 아니지요!!

책임지시는 사랑이기에
무아적인 사랑이기에
이타적인 사랑이기에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사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홍수라는 것을 사단이 내렸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홍수라는 심판을
내리실 수 밖에 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시고
사단이 홍수를 내렸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언의 신과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불의 심판을 살펴보죠
이 불의 심판은 마지막 삼림 때
심판을 표상화 한 것입니다.

마지막 삼림때의 불의 심판이
사단이 내린 것이 아니듯
이 심판 역시 사단이 내린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도시들과 비옥한 평야에
유황과 불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셨다.

궁궐과 신전, 값진 주택, 정원과 포도원,
그리고 전날 밤에 하늘의 사자들을
모욕하던 방탕하고 쾌락에 빠진 군중들
이 모든 것들이 불에 타 없어졌다.

대화재의 연기는 큰 가마의 연기처럼 올라갔다.
그리고 싯딤의 아름다운 골짜기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각 시대를 통하여 증거하기 위하여 황폐된 곳,
곧 다시 건축하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평원의 도시들을 삼킨 화염은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경고의 빛을 비추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범죄자를 오래 참으시나,
그 반면에 사람들이 그 이상
죄의 길로 가서는 안 되는 한계선이 있다는
무섭고도 엄숙한 교훈을 배운다.

그 한계선에 이를 때에는
긍휼을 베푸는 일은 끝나고 심판하시는 일이 시작된다.“
(부조 164,165)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나오는 한계선은
하나님이 끝까지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은혜를 완전히 거절한 상태
여기가 그 한계선이며
이 한계선을 넘어가면
마음이 완악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심판이 시작되죠!!
왜냐하면 더 이상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완악한 죄인이 계속 산다는 것은
더 큰 불행을 본인과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원대로
그 생명을 끝내는 것입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인간의 품성으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품성을 계시하지 않으면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발견할 수 없는 것
동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품성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을 사단이 한 거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인거 같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네요!!

님께서 위에 글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소동과 고모라도, 노아의 홍수도, 욥의 재앙도,
애굽의 재앙을 비롯해 성경에는
수많은 재앙을 하나님께서 하신것으로 표현되어있는데
그 모든것이 사단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행위를 모두 뒤집어쓰시는 표현 인것이지요"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권적 언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는
책임지시는 사랑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안했는데 사단이 다 한 것이다
모든 심판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노아홍수는 하나님께서 그 운행하시는 보호의 손길을
거두셔서 결국 창조전 상태로 돌아가는 심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단이 내렸다고 하기에는
예언의 신의 표현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더 밝은 빛을 사모하니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천성교회에서 부목으로 섬기는
현대언입니다!!

좋은 답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더 행복해지는
우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두번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견

&lt;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gt;

하나님의 진노의 대한 표현은
흥미 있기 읽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볼 때
그리고 예언의 신 전체를
찾아보시면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 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증오하시고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그분의 심정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며
관계를 깨뜨리고
강제적이며
파괴적이고
사랑을 통해 누려야할
모든 행복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존재해서 안되며
죄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죠!

선악과 하나 먹은 이 작은 죄가
다음 대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하게 했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아담 - 가인 족보의 7대손
라멕은 일부다처제와
많은 살인을 자랑스럽게
찬양하는 무서운 시대로 바뀝니다.

노아때 이르러서는
더 이상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해서
홍수의 심판을 내려
그 시대를 끝낼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선악과 하나 먹은 죄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십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1:18)
 
이 성경절에서 초점은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 자체가 아닌 죄 자체에 있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에 있음을 설명하는
예언의 신 구절입니다.

“우리는 소돔에 있었던 바로 그 죄악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와서
그 성을 완전히 파멸시켰던
바로 그 죄악들이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본다.“(본교 성경 주석 4권, 1161)

“하나님의 진노의 날
그 죄가 죄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1보감 49)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죄가 인류의 행복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 속에는
인류를 항햔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삼림때 있을
이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소멸하시는 불로 나타납니다.

즉 이 불은 인간을 소멸시키는 불의 아니라
죄를 소멸시키는 불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거절하고
반대로 죄를 끝까지 선택할 때
죄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죄인도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생명없는자에게
생명을 주고싶은데 받지않고
죽음을 택할때 어쩔수 없는
안타까움에 스스로에게 하시는
진노인 것입니다.

정말로 생명을 주고싶어
최선을 다함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거절함으로 생명을 얻지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가슴은 불못이 되고
그분의 안색은 벌겋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모습이라면 마치
매우 화난모습처럼 여겨지지않을까요?“

제가 이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더 정확하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게
구원을 주고 싶은데 받지 않고
끝까지 죽음을 택할 때
가슴 아픔 마음 ...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시고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에 대한 것이죠!

그래서 님의 그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견해가 다르나
또 더 밝은 빛이 하나님이 주셔서
서로에게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마지막으로
노아홍수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품성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답글에도 말씀드렸지만
노아 홍수는 하나님이 내린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 속에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의 마음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노아 당시 죄악이 관영해지자
마지막으로 노아를 통해서
120년동안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한명도 멸망시키지 않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아리였죠

그러나 그 음성은 철저히 거부 당하셨습니다.

심판의 원리가 강제가 아닌
죄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짓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를 거부하는 그들에게
그 원대로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거두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는 창조전 상태로 돌아가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창조주를 거절했기에
그 원대로 하나님은 창조전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질 정도로 가슴아팠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이러한 지경으로 만든
죄가 그렇게 미웠습니다.
한편으로 그동안 보호하셨던 손길을 거두신다는
그분의 마음을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상상으로 헤아릴수 없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눈믈을 머그머시면서
마침내 그 힘을 거두셨습니다.

죄인들이 홍수 속에서 죽어갈 때에
사랑의 하나님은 가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 죄인을 이렇게 만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입니다.

노아홍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거절한 그들의 선택을
그 원대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홍수의 심판을 생각할 때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연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을 완전히 거절한
상태에서 더 산다는 것은 절대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죄의 삶은 불행한 삶이고
이러한 삶이 지속될수록 불행한 삶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는
죄인을 향한 가슴 아픈 마음도 있지만
그 심판 속에 죄인의 불행을 끝내시는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도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님은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겠지만
제가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참 심판에 대한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권적 표현으로 할때는
"하나님께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신다" 는 말입니다.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면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이 오는 것이죠

이것을 주권적 표현이 아닌 실제적 표현으로 사용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벗어났다" 는 것입니다.

즉 그들 스스로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렸습니다.

자꾸 말이 길어지네요

읽으시느냐고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작성일

현대언 목사님의 교과해설과 댓글들을 읽다가 제 이름이 갑자기 거명되어서 당황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습니다.
 
궁금하신 것 같은 문제에 대해서 저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오해를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아홍수문제와 소돔성의 문제는 사단이 한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의 호소가 더이상 무익하게 되었을 때 그 선택을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인정함을 인한 결과입니다.

물로 덮여진 상태의 지구의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궁창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물을 갈라서 분리하신 것은 창조주로서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노아홍수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모든 사람들이 부정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합법적인 행위(궁창을 확보하는 행위)를 더 이상 강제하실 수가 없으셔서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하게 되었고 그결과는 현목사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궁창을 만들기 전의 상태 즉 물이 합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선택에 대한 결과지만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이유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인한 능동적 표현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부분도 동일한 설명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행한 심판이 아니구요,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호소가 소용없음이 확정될 때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대로 인정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태여 죽이기 위해 하신 심판의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이 하나님을 거절함으로 인한 인정함의 때가 심판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선택의 결과에 대한 것을 하나님은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노아홍수와 소돔의 문제에 있어서 저는 현대언 목사님의 견해와 같고요, 정구성 집사님의 생각도 현목사님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데 표현상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는 듯하게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이 우리의 품성속에서의 이해에서는 화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성내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의 이해는 주지 못해 안타까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정집사님이 쓰신 글 중에 저에 관련된 부분은 삭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분의 토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목사님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견해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서 좋습니다.^^

정구성 집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에 대해서 동일한 견해를 가진 것 같으나
노아홍수가 사단이 내린 것이다 라는 관점에서는 견해를 수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제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리가 내는 '진노'나 '화'와는 전혀 다르나
그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성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화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의분을 하셨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
가슴 아픈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의분을 내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예언의 신 몇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1)예수님의 의분 - 죄에 대한 의분

①첫 번째 성전 정결에서 나타낸 의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이 모든 광경을 보셨다.
그분은 부정한 거래를 보셨다.

그분은 피 흘림이 없이는
그들의 죄를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자들의 슬픔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성전의 바깥뜰이
거룩하지 못한 장터로 변한 것을 보셨다.

신성한 구내는 일종의 거대한 환전소가 되어 버렸다.
....

그리스도께서는 성전 뜰의 계단에 서서
준엄한 눈초리로 당신 앞에 있는 장면을 바라보신다.
...
그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에게서 감추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할 것인지를 보신다.

그분께서 이 광경을 보실 때
당신의 용모에 의분과 권위와 권세가 표현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분께로 이끌린다.
부정한 거래를 하고 있던 자들의 눈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집중된다.

그들은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그들은 이 사람이 그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읽고
그들의 은밀한 동기를 알아내는 것을 느낀다.

어떤 자들은 마치 그들의 악한 행위가
얼굴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준엄한 눈초리가
환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숨기려고 애쓴다.

소란이 그친다.
거래하고 흥정하던 소리가 멈추었다.

침묵은 고통스럽다.
경외감이 회중을 압도한다.

마치 그들이 행한 일에 답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송사를 당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 그들은
인성의 두루마기를 통하여
신성이 번쩍이는 것을 본다.

하늘의 주재되시는 분께서
마지막 날의 재판장처럼 서 계신다.

지금은 그날에 그를 두를 영광으로
둘리어 있지는 않지만 그 때와 같은 능력으로
심령을 감찰하고 계신다.

그분은 샅샅이 관찰하면서 무리들을 훑어보신다.
그분의 모습은 당당한 위엄으로
그들 위에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며
하늘의 빛이 그분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그분의 명확하고 울려 퍼지는 음성,
곧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범하고 있는 율법을
시내산 위에서 선포하신 바로 그 음성이
성전의 아치를 통하여 메아리친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께서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구내 입구에 모아 둔 노끈으로 된
채찍을 들고 장사하는 무리에게
성전 구내에서 떠나가라고 명하신다.

그분은 전에 결코 나타내지 않았던 열정과
준열함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신다.

주화는 대리석으로 된 보도 위에
떨어져서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예수께서는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가지고
그들을 때리시지는 않지만
그분의 손에 들린 단순한 채찍은
마치 화염검과 같이 무서워 보인다.

공포가 무리를 휩쓴다.
그들은 그분의 신성의 표시를 느낀다.

공포의 비명이 수백 명의 핏기 잃은
입술에서 새어 나온다. 제자들까지도 떤다.

그들은 예수님의 평상시의 태도와는
너무도 다른 언행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시 69:9)라는 말씀이
그분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기억한다.
....

공포에 질린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들의 마음을 통찰하시는
예리한 눈초리를 피하여 성전 뜰에서 도망갔다.

그들은 도망가면서 성전으로 가는 다른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매우 측은하게 바라보고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불쌍히 여기셨다.“(소망 157-161)


②두 번째 성전 정결에서 나타낸 의분

“예수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성성이 더럽혀진 성전의 뜰을 훑어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분에게로 쏠렸다.
제사장과 관원, 바리새인과 이방인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저희 앞에
하늘 왕의 존엄으로 서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빛났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결코 나타내신 일이 없는
그런 존엄과 영광을 입으셨다.

그분 곁에 제일 가까이 섰던 제자들은
군중이 허락하는 한 멀리 물러섰다.

몇몇 제자들을 제외하고
구주께서는 홀로 서 계셨다.

모든 소리가 그쳤다.
깊은 침묵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마치 큰 폭풍우처럼 백성들을
뒤흔드는 능력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의 음성은 나팔 소리처럼
온 성전을 울렸다.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불쾌함은
마치 삼키는 불처럼 보였다.

그분은 권위를 가지고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요 2:16)고 명령하셨다.“
(소망 591)


2) 회심하게 되면 죄에 대한 의분이 생김

“에베소인들이 회개하고 개종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의 습관과 행습을 고쳤다.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고
즉각 반응하였고 마술의 모든 비밀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그들은 와서 자백하였고
그들의 행적을 나타내 보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지금까지 마술에 열중하고
그 마법을 행하도록 사단이 고안한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책을 크게 존경한 데 대하여
거룩한 의분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은 악마를 섬기는 일에서
돌아서기로 결심하고 고가의 책들을
가져다가 불살라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을 나타내었다” (청년 276)

“그와 같이 사랑과 자비의 아름다운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조화되게 사는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의분을 느낄 것이다”(품성과 인격 517)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은혜가 마음을 지배할 때
그는 마음 가운데 의분을 느낄 것이다”(청년 278)


3)인간의 분노와 죄에 대한 의분은 다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정당한 분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수치를 받으시고
그분의 사업이 누명을 쓰는 것을 볼 때에
또는 무죄한 자가 억압당하는 것을 볼 때에는
의분이 심령을 격동시킨다.
민감한 윤리감에서 나온
이런 분노는 죄가 아니다.”(시대의 소망, 310).

“돌판을 깨뜨린 것은
이스라엘이 아주 최근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죄에 대한 의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에서 우러난 것이지,
자기애(自己愛)나 상처받은 야심 때문에
일어난 분노가 아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 26)라고
언급하는데 모세의 분노가 이러한 것이었다. “
(목사 101).


4) 인간의 분노를 의분으로 착각하지 말 것

“모세는 큰 과오를 범했다.
모세는 분노한 감정으로 말했고,
그의 말은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셨기 때문에
발한 거룩한 의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 격정의 표출이었다.

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고 말했다.
이 비난은 잘못이 아닌 사실이었으나
사실일지라도 분노하거나
조급하게 말하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명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반역을 책하실 때에
그 말은 모세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웠고
백성들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기별을 전하는 데 있어서
그를 붙들어 주셨었다.

그러나 모세가 백성들을 비난하기 위하여
스스로 분노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을 뿐이었다“ (부조417)

많이 길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분이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만큼 사랑하시나
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실만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 분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분노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분노이며 의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에 대한 의분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노독들은 의분을 가졌습니다.

죄에 끌려 다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때문에
가슴 아파했고
동시에 백성을 타락시키는 죄를 보며
분노했습니다!!

거듭난 영혼의 특징 중 하나가
죄에 대한 민감성이며 증오성입니다.

이것은 성화를 깊이 경험할 수록
더 예민해 집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진노이며
하나님의 의분입니다.

그분의 죄에 대한 의분이
그분의 인내심과 자제력을 잃게 하거나
의분에 넘쳐서 자신을 제어 못하는
그러한 분노와는 분명 다릅니다!

그분의 이러한 의분 역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타내시는 표현임은 100% 동감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여전히 많이 배워야 하고
그분의 사랑의 품성을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소돔과 고모라나 노아의 홍수가
사단이 행한것이라고 한것이 아닌데요....
오해 하신것 같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말하자면
죄는 어떠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죄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은 죽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죄란 죽음이란 뜻이지요.

즉 하나님을 떠나면 생명과 이어짐이 끊어지는 것이고
그 상태에 있는 갓을 죄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그 죄를 해결하십니다.
죄를 해결한다함은
죽은자를 살리시는 것이며
살린다 함은 하나님을 떠난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죄를 미워하실수가 있지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위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이세상 어떤 것을 향해서도
미워하거나 증오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것이 창조주이며, 스스로 있는자인 여호와답지 않을까요?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은
자기가 어떤분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가 말씀드린것은
님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들에 대해 견해가 달르거나
표현방식이 다른것 같아서 글을 올린것입니다.

저로인해 마음을 상하셧다면 사과드립니다.
늘 양들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님의 글을 읽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참 위의 의견중에서 박목사님에 관한글은
본인의 요청으로 삭제하였습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의 표현의 차이 인정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
참 감사한 일이죠!!

제가 오해한 것은
님의 글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동과 고모라도, 노아의 홍수도, 욥의 재앙도,
애굽의 재앙을 비롯해 성경에는
수많은 재앙을 하나님께서 하신것으로 표현되어있는데
그 모든것이 사단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행위를 모두 뒤집어쓰시는 표현 인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이 잘못된 것 같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보니
그러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부분은 잘못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정리하자면
소돔과 고모라, 노아 홍수,
애굽의 재앙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욥의 재앙은 사단이 한 것이죠!

이러한 부분을 책임지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든지
죄짓나 안짓나 날마다 검사처럼 보시는 하나님이라든지...
등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에 관련된
이러한 해석들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품성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잘 표현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님께서는 이부분에 대해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할 수 없다!!’
라는 말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죄를 생명의 관점에서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러한 해석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는 정신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죄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죄를 바라보는 성서적 입장도 있지만
율법 관점에서 죄를 바라보는 성서적 입장도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엘렌 화잇은 이 죄의 정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
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쟁투 493)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행복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을
대항하여 이 행복을 깨뜨리려는 죄를
아무런 감정 없이 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한 의분을 가지십니다!!
이 죄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십니다!

님의 표현처럼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이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할 수 없다‘
라고 한 말의 의미를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자의 특징 중 하나가 죄를 미워하는 것이며
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될 때
항상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일하게 되며
친절과 긍휼과 동정을 보이고
완전한 증오심으로 죄 자체는 미워하되
죄인을 위한 깊은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복음전도 369)

성화의 과정에서
죄를 미워하는 감정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데
하나님은 이러한 감정이 없으시는데
우리에게 어떻게 그러한 감정을 주실 수 있는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그 감정을 십자가를 경험한 우리에게
넣어주십니다!

죄를 짓는 삶
죄를 가까이 하는 삶에서
멀어지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율법을 따라 순종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저의 표현으로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박목사님에 대한 언급은
삭제했습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제 생각을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의 표현이 부족한면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소동과 고모라도, 노아의 홍수도, 욥의 재앙도,
애굽의 재앙을 비롯해 성경에는
수많은 재앙을 하나님께서 하신것으로 표현되어있는데
그 모든것이 사단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행위를 모두 뒤집어쓰시는 표현 인것이지요"

라고 한 이글은 님의 말씀대로 오해받을 수 밖에없는 표현이군요.
사실 이 글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아담이 사단의 종이된 후로 우리는 죄의 속성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이세상을 자기것임을 주장하는 사단의 지배아래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때
이 세상을 위해 만드신 질서와 생명의 기운등이
강제하실수없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유의지를 인정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어쩔 수없이 거두게 되어 일어난 사건이므로

결국 그 사건들은 사단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란 뜻으로 말씀 드린것인데
제 설명이 너무 미흡했던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하나님은 미워할 수없는 분이라는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속에 나타난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품성을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은 성경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을 합니다.
그들은 죄 혹은 죄인들을 질책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모두 생명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품성을 깨닫기를 원하며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 집사 스테반, 사도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죄에 대하여 논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품성을 전하려는 목적때문에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죽음에서는 하나님처럼
모든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이 드러났기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숭고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깨달으면 죄를 미워한다기 보다는
죄를 싫어하게 된다는 표현이 더욱 본질적이지 않을까요?
죄를 좋아하는 본성을 갖고 태어난 우리가 본성을 거역하고 죄를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일어나는 기적이지요.
그것을 맛본 사람들은 그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임을 알기에
생명(사랑)을 접한자로서 그 생명의 본질대로
모든이들에게 생명을 전하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전도이고 자기를 죽이는자들을 용서함이요,
자기를 죽이는자들을 변호하며 하나님께
저들이 하는 행위가 무었인지 알지 못하는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라고 알고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품성이기 때문이지요.

님과 대담의 시간을 통해 많은것을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리며 이 안식일 생명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감사합니다.

“소동과 고모라도, 노아의 홍수도, 욥의 재앙도,
애굽의 재앙을 비롯해 성경에는
수많은 재앙을 하나님께서 하신것으로 표현되어있는데
그 모든것이 사단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행위를 모두 뒤집어쓰시는 표현 인것이지요"

이 표현에 대한 설명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이해는 못했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
라는 말에 대해서 약간 편견이 있는 듯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한 시대의 소망에도
나와있고 예언의 신에 아주 많이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를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님이 이러한 표현을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종들은 죄를 책망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님의 글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은 성경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을 합니다.
그들은 죄 혹은 죄인들을 질책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모두 생명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품성을 깨닫기를 원하며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
집사 스테반, 사도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죄에 대하여 논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품성을 전하려는
목적때문에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죽음에서는 하나님처럼
모든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이
드러났기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숭고한 것이지요“

이 글에 동의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죄를 책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 전체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지은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 종들을 통해 죄를 책망하십니다.

죄를 책망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가슴 아픈 사랑과
슬픔의 눈물로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다음과 같이 죄를 책망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3:7)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사도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을 보고
책망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1)

물론 이 책망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책망이라는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지
책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릴까봐
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죄의 책망을 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슬픔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할 거룩한 능력이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은
죄를 책망합니다!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오해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에 나타난
언어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어를 그대로 쓰고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여기에 보시면 성경은
분명 책망의 기능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책망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그런데 책망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책망하시지만
그 책망이 어떤 마음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진리를 바르게 세우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책망이 무서웠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후에
그분의 책망은 오히려
저를 향한 깊은 사랑임을 느낍니다.

책망은 그때에는 쓰나
후에는 달콤합니다!!

표현의 문제 일 수 있겠으나
가능한한 성서적 표현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이해하는데
초점을 두어야지
그 언어를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현대언님의 댓글

현대언 작성일

죄를 지적하는 책망이
어떤 것인지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같아
다시 글을 씁니다!!^^;

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일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죄를 알아야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아야 그리스도가
필요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은
죄 가운데 사는 죄인들에게
가슴 아픈 호소를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고 말입니다.

“내 백성이 바벨론에서 나오라”(계18:4)

책망은 호통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입니다!!!

무론 책망을 빙자하여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아는 사람은 비판하지 못합니다.

비판은 정죄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망은 구원의 수단입니다!

행2장의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너희가 메시야를 죽였다’고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지적했습니다.

이 지적은 정죄하고자 심판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너희가 죽인 그 사랑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그분은 너희를 미워하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잘못을 깨닫은
그날 하루 3000명이 회심하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은
이 사랑을 가지고
죄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정죄가 아닌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스데반이 왜 죽음에 이르렀을까요?
스데반의 설교가 그들의 죄를 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1-54)

이 표현이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 말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정말 구원하기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의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한 지적은 그들의 마음을 찔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스데반은
인간적인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기를 원한 것이죠!

이것이 죄를 미워하나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