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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구원에 관한 은유적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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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11-19 08:51 조회4,6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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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구원에 관한 은유적 표현들
11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도입)
이 세상의 역사 속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복음은 ‘세상의 빛’, 곧 ‘생명의 빛’(요 8:12)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그 ‘빛의 아들’ 곧 ‘낮의 아들’(살전 5:5a; 눅 16:8;)라는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빛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역(逆)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두움의 아들’(살전 5:5b)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갈릴리 사람들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눅 1:79 이 밖에 엡 5:8; 요일 2:9; 마 22:13)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언어적 표현과는 다른,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언어적 표현의 특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어표현들은 다른 복음서들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과 결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를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단지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이렇게 ‘세상의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면, 이 세상은 ‘어두움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 많은 인간들의 삶은 ‘어두움 속에서 있는 인생’임이 틀림없다. 그런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구원의 예증과 가르침에는 수많은 은유적 표현들이 나타나있다.

기억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연구범위: 롬 2:1-29, 3:19-26, 고후 5:18-21, 요일 4:7-11.

중심 사상: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신약의 몇 가지 해석 방법들을 정리해 본다.

안식일 오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상징이나 개념은 없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 지불된 속전(贖錢)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을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계시로 본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의 희생으로 보고,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장벽인 죄를 제해 준다고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죄 선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완전한 의미를 어느 하나의 개념 아래로 몰아넣기는 불가능하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을 묘사한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들을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1월 23일)
구속(막 10:45)

도입)
주 예수님의 잉태와 출생은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심이었다(요 1:14).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신성한 본질이 사람의 본질에 더해져 조성되었고, 그 결과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사람을 산출하였다. 그러므로 육체 되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인성과 연결시키시어 그분 자신을 육체 안에서 나타내셨고(딤전 3:16), 우리를 위해 죽고 피를 흘리신 구주가 되셨다(눅 2:11). 타락한 사람들을 구속한 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이다. 사람인 우리에게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참된 사람의 피가 필요하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셨기 때문에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으셨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타락한 사람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사람의 피를 흘리셨다. 주님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에는 영원의 요소가 있으며, 이 요소는 그분의 피의 영원한 효능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주님은 참된 사람의 피가 있으셨고, 하나님으로서 주님은 그분의 피에 영원한 효능을 주는 요소가 있으셨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온갖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라고 말한다. …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라는 표현은 이 피가 하나님의 타락한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하여 참된 사람이 흘린 합당한 피이고, 영원한 효능, 곧 공간적으로 모든 곳에 미치고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효능에 대한 신성한 보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과 연합된 분이 성취하신 이 구속은 영원하다. 만일 십자가에서 성취된 구속이 다만 사람에 의해 성취되었다면, 그 구속은 영원한 효능이 없을 것이고, … 수백만의 믿는 이를 구속할 만한 효능도 없을 것이다. … 사람은 제한적일지라도 하나님은 제한받지 않으신다. … 사람은 일시적일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요소가 있다. 이런 이유로 … 이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라 불린다(히 9:12).

1. 다음 구절들은 ‘구속’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막 10:45, 갈 3:13, 엡 1:7, 벧전 1:18-9)
답:
구속(救贖)이란 속전(贖錢)을 지불함으로 빚이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 개념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신약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온 세상은 죄의 포로가 되었고, 율법은 감시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갈 3:22-23). 죄의 노예 된 인간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죽음뿐이었다(롬 6:6, 23). 그리고 그 빚을 갚는 길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값을 지불하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것이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갈 3:13)에서 구속하셨다. 율법의 저주가 그것을 범한 자들에게 내려졌다(10절). 율법 그 자체는 우리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망 선고에서 우리를 구해낼 수 없다(21절). 율법은 단지 그것을 범한 자의 죽음에 대한 법적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갈 4:4-5)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 2:14). 그래서 구속은 우리의 삶을 성결케 하는 성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갚으시고 죄의 용서를 주셨다(엡 1:7). 구속은 또한 우리에게 칭의(稱義)의 선물을 주었다(롬 3:24).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과하실 수 없으셨고, 친히 속전을 지불하심으로써만 당신의 도덕적 요구에 만족하셨다. 그분은 인류와 온 세상을 위해 생명의 권리를 되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죄의 삯인 사망에서 건져내심으로 영생의 특권을 되찾아 주셨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구원은 두 가지 방면이 있다. 법리적인 구속과 유기적인 구원이다. 법리적인 구속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을 말한다. 이런 구속으로 우리는 사단과 세상에서 나와 보혈로 깨끗해지며 더 이상 율법 아래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유기적인 구원은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6:17)이 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가득 채워져서 결국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법리적은 구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단 번에 이루어졌지만 유기적인 구원은 매일의 생활에서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고백했듯이 우리에게는 날마다 구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영 안에 있는 것을 방해하는 타락한 혼과 타락한 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물질적인 것과 사단적인 것에서 날마다 조금씩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신성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인이 성숙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말한다. 우리는 이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셨고 사람들 안에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시며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조성하시는 역사, 즉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사람의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온 존재를 적시도록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온 존재로 표현해야 한다. 이런 것은 단순히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의지를 드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월요일(11월 24일)
화목(고후 5:18-21)

도입)
화목의 이치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숨겨 있다. 레위기 17:11의 말씀대로, 사람의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피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표현하셨다(마 26:28). 또 히브리서 9:22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십자가이었다. 곧 그것은 속죄의 십자가요 화목의 십자가이었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원수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화목의 대상은 만물이며, 그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창 3:17),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 세계는 지금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고(롬 8:20-22),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비인격적 생물의 세계나 물질세계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화목하다'는 원어(아포카탈랏소)가 '원상회복시키다'는 뜻을 가지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죄의 결과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의 결과는 온 우주에 미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5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1. 고린도후서 5:18-21은 화목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화목(和睦)이란 과거에 원수였던 사람들이나 단체가 서로 간에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며, 대개 중재자나 협상자를 필요로 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관례를 사용하였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신과 화목시키기 위해 첫발을 내디디셨다. 이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에라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분을 통하여 화목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8).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19절).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 큰 간격이 생겨 중재자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셋째, 화목의 대상은 '우리'와 '세상'이다. 여기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18절)고 할 때 사용된 동사는 과거형으로서, 그 행위가 완료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신자들이 지금 당장 화목의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19절)고 했는데, 문맥상으로 세상과의 화목은 아직 진행 중에 있음을 암시한다.
넷째, 진행되고 있는 화목은 두 가지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의 화목인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19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불가능하게 한 장벽은 죄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분의 진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 죄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흘러오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화목이란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화목의 두 번째 부분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18절) 즉 우리에게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19절)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20절) 이 일을 위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심과 같이 …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20절)

교훈: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 지은 인류와 화목하시고, 또한 화목케 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다.

부가적용)
화목의 일차적 대상은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고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의 사이를 분리시켰고 사람과 하나님을 원수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화목케 되었다. 화목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정과 선택의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1:4, 5에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했다.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완전한 십자가 사역의 효과가 우리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간주된다. 이것을 법적인 의(義)라고 말한다. 믿는 자는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고 완전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다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 영화는 나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위의 노력으로 보태어져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되는 것이며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것이다.

화요일(11월 25일)
칭의(롬 3:19-24)

도입)
성경 중의 가장 위대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있는 주제이다.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에 사단은 그것에 참된 이해를 방해하고자 최대의 노력을 가하여 왔다. 사람들과 하나님의 원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리가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의 권세가 깨어짐을 알기 때문이다(R.H 1889.9.2). 우리의 대적자가 특별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생애에서 경험을 갖는 것으로부터 방해이다. 저들이 그것을 받지 않게 되면 저들의 영적인 생애에서 필요로 되는 참된 근본이 결여됨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것은 비물질적이며 각인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화가 활동적이며 살아 있는 것으로 진실되며 완전한 것이 되어야 함이다. 성화와 마찬가지로 칭의를 포옹하도록 하여야 한다. 복종과 용서에 죄의 구원과 용서가 따라 붙고 용서를 만들어 내는 믿음과 능력이 품성의 변화를 이룬다. 사단이 기뻐하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신학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켜 교회를 나누고 어느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또 한 부분을 낮추어 부분적인 것에 불공평을 초래케 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제시하는 바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주님은 지식이 경험적인 것이 될 때에, 그곳에서 유익함을 얻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것에서 변증적인 것으로 취하셨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백성으로써 큰 은혜를 누려 왔다. 화잇 선지께서는 이 주제를 단순하면서도 명백하게 알려주셨다. 열심 있는 학생이라면 불공평한 견해로 기만되거나 요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롬 5: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한다. 우리의 첫 번 인류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과 인간성이 죄악으로 치우쳤다. 그래서 다윗도 시 51:5에 내가 죄악 중에서 잉태하였으며 죄 중에서 나를 낳았다고 하였다. 사람은 죄 없는 상태를 잃었을 뿐 아니라 그의 본성도 타락되어졌다. 사람의 인성으로는 죄악의 유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원칙과 법이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지어 해가 지날수록 본성적으로 자연적으로 자라난다. 하나님께서 변화를 역사하게 하지 않으면 이기심, 불결, 시기, 증오, 탐욕, 나쁜 기질들이 생애를 주장하게 된다. 죄와 이기심을 위한 하나의 치유책이 있다. 그것은 예수의 피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주님이 내재하시는 임재이다.

본래 칭의(justification)란 범죄자로 기소된 사람이 법정에서 무죄로 인정되어 풀려나는 것을 말하는 법적 용어이다. 이 개념도 또한 신약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에 대한 순종을 대조시킨 것은 칭의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롬 3:19-24)
답: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법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이 범죄자로 기소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소송에서 인간은 고소자의 말대로 죄가 드러났으며, 그리하여 모두 율법의 정죄 아래 놓이게 되었다.(롬 2장)
둘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 바울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22절)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용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이 칭의(稱義)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다(22, 29절).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그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받기 때문이다(24절). 그러므로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해결책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칭의 밖에 없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영접함으로써 이 구원의 선물을 받는다.(갈 3:2-3, 롬 6:4)
넷째,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과 칭의라는 두 개념이 서로 연결된 것을 본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법적인 근거를 제공해 준다(롬 4:3-6).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고후 5:21),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성취될 수 있었다.

교훈: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짐을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실 수 있게 되었다. 칭의의 선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자.

부가적용)
마 11:28에 주님이 놀라운 초청의 말씀을 발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는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 가며 영적인 쉼을 앗아가는 죄악의 중한 짐에 대하여 특별히 말씀하고 있다. 실제로 죄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양심을 억누르며 죄악과 불행을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 고통을 가하게 한다. 어떠한 치료의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임상적인 치료학적인 방법도 죄의 복합적인 문제를 제거할 수는 없다. 우리가 단 하나의 치유하는 효과적인 치료가 발견되는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이다. 칭의 없이는 평화와 쉼이 없다. 사람이 부정직하고 죽음에 이르는 죄인일 때에 칭의는 그를 의인으로 바르게 하여 주며 구원의 가치가 있게 한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 스스로가 칭의와 의를 바라는 경향을 가져 왔다. 인간적 방법, 인간적인 힘으로 모든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갖는 고통과 죄, 염려, 영적인 질병만을 가져오며 모든 역사를 통하여 인간적 생애를 형성하여 왔다. 바울도 의를 얻는 두 가지 방법을 말하고 있었던바 빌 3:9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위의 말씀에서 사람의 방법으로 된 내 자신의 의가 있는 법이다. 첫 번 살인자 가인의 때로부터 인간성을 잘못 되어졌고 불가능한 길로 걸어갔다. 아무도 스스로 죄의 문제에서 돌팔구를 찾지 못한다. 가인은 너무도 자고해서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인식과 그의 믿음을 입증하려던 양을 밀쳐 버렸다. 그곳에는 그의 복종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는 다른 것을 의지하였던바 그곳에는 자기 의를 제외한 어떠한 수단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을 수가 없었다. 가인 이전에도 아담 자신은 죄로 인하여 스스로는 무화과나무 앞으로부터 치마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죽을 짐승의 가죽으로 대처하여서 참된 희생을 나타내었고 그를 위한 효과적인 덮어주는 옷을 준비하신 것이다. 단 하나의 효과적인 칭의의 방법은 하나님의 것인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일이다. 롬 3:20-23에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위의 말씀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아무리 완전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죄를 위하여 외관적 노력과 훌륭한 선행들이 뒷받침되어 구속할 수 없다. 진리는 사 64:6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우리의 것이 최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이기심과 죄로 인하여 오염되어 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더러운 누더기 옷들인 것뿐이다. 예수 안에 있는 마음에 의해서 받아진 하나님의 의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다. 하나님과 예수만이 그 값을 지불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여만 하며 우리의 영적인 벌거벗음을 인식하여야 하며 우리 인간적 노력들의 무능성에 대하여 인식하여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의로워질 수 있는 권능이 없다. 오직 주 만이 우리의 의이다(렘 23:6).

수요일(11월 26일)
속죄의 희생(롬 3:25-26)

도입)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 이 말은 신약 중, 세 곳에 나와 있다(롬 3:25,요일 2:2,4:10).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데, 사람은 [아담]이래,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여져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목적으로써, 희생제물을 드리는 등의 일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화목제물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사람의 죄사함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또한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속죄와 화해의 제물 삼으시기를 계획하시고, 그 계획대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다. 따라서 독생자 예수는 성육신하시어, 이 지상에 보내지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죄의 속량, 즉 죄를 속량하시는 자리에 서게 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는 대목이다(롬 3:25). 즉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제공해 주신 화목제물이심을 믿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다. 학생은, 교사가 계획하고, 제공한 문제에 따라 답안을 써야하듯, 인간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제공하신 구속, 화해의 방법에 따르고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화목제물로 역된 헬라어 원어는, 명사인 [힐라스테-리온](롬 3:25)과, [힐라스모스](요일 2:2,4:10)인데, 새번역에 있어서 롬 3:25에서는 [속죄의 제물]로, 요일 2:2및 4:10에 있어서는 [화해의 제물]로 역하고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모두[제물]로 역하고 있다. [힐라스테-리온]의 해석에 있어서는 크게 나누어 세가지가 있다. (1)은 [화목의 제물]이라는 역으로서(개역),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제물이 되셨다는 해석이다. (2)는 [속죄의 제물]이라는 역으로서(새번역),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의 희생제물로서 드려졌다는 것이다. (3)은 [속죄소의 덮개](→히 9:5)라는 역어인데, 이 말은 히브리어 명사[카포-레스 [名] tr,PoK'(kaporeth)]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이렇게 역한 것이라고 한다(출 25:17-21,레 16:14). 실제로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카포-레스]가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역되어 있다. 비교적 많은 학자들이, 이 제3의 역과 해석을 취하고 있다(J. Knox:The Epistle to the Romans, The Tyndale Press, 1980 기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히브리어 [카포-레스]는, 지성소 중에 놓여져 있는 언약궤의 덮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이고, 특별한 축일인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들어가 어린양을 도살하여, 일곱 번 그 피를 언약궤의 덮개에 부었다. 그것에 의해, 백성에게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노하심은 제거되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회복되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의 노를 풀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힐라스테-리온]으로서, 계획하여 제공하셨던 것이고,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대로(히9:1-15),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죄의 사유와 하나님과의 화해는 한번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룬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롬 3:25-26)
답:
바울이 '화목제물'이라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다. 이 희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핵심적인 일이다.
첫째, 이 희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이다(롬 3:25).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
둘째, 이것은 대속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흠이 없으셨으나,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롬 8:3, 고후 5:21, 벧전 2:21-24). 그분께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소개하면서, 세상이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롬 1-3장).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났다(롬 1:18). 그런데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설득하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미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임과 동시에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가 드러난 곳이기도 하다.
넷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법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행 20:28, 골 1:20, 계 5:9).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고(롬 5:9),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다.(롬 3:26)

교훈: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가능하게 되었다.

부가적용)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이같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해마다 의식을 거듭해서도 달성치 못했던 백성의 속죄를,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로써, 영원히 달성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셨다. [힐라스모스](요일 2:2,4:10)는 [화해한다, 노를 푼다, 호의를 갖게 한다] 등의 뜻을 가진 헬라어 명사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악을 행해왔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심의 본성으로 인해, 그러한 악(죄)을 그대로만 버려둘 수가 없으시다. 그리스도는 그 대리적인 죽으심에 의해,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의 화해를 막는 바의 모든 간격(하나님측에 있어서의)을 제거하셨다(엡 5:2,히 10:14,고전 5:7,요 10:29,36,벧전 1:19,계 1:5,5:6,8). 문제는, 인류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느냐의 여부인 것이다(골 1:22,고후 5:19-21). 사람들 중에는, [화해]는, 성 잘 내는 이교의 신들을 제물로써 무마시키는 것과 관계해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무마(유화, 진정)를 필요로 하는 등의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할 리가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해](화목의 사상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서를 정독할 때, 하나님은 감정적으로 노하시지는 않으나, 모든 악에 대해서는 일관된 진노를 보이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롬 1:18). 한편, 죄를 범한 자에 대한 구원의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위하신 것은 하나님이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I요 4:10,19).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지 않으면, 죄를 범한 자의 입장은 없다. 죄를 사하고, 죄를 범한 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가 지불하는 댓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안된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I요 4:10, 3:16).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고, 은사이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일 뿐 아니고(요 3:16), 그 증명과 보증일 뿐만도 아니라(롬 5:8,8:32), 사랑의 본체 그것이다](J.R.W. Scott:The Epistles of John, The Tydale Press, 1980). 그리고 자기의 죄를 흘리신 것에 의해(I요 1:7),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일하심)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아담에서 최후의 인간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세계의 모든 인종, 민족, 국어, 국적의 사람들을 포함한다. [우리들의 죄뿐]이라는 폐쇄된 그노시스적 특권계급에 한정되는 일 없이,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이신 것이다. 물론,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불경건한 자들을 그대로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죄인도 그에게로 와서 그를 영접할 때, 그것은 유효한 것이다(롬 3:25,I요 2:2, 4:10).

목요일(11월 27일)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요일 4:7-11)

도입)
기독교신앙의 핵심을 든다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이 두 중심은 두개의 주춧돌이요, 두개의 기둥이다. 십자가 사건을 미화하거나 교리화하면 그 실상이 사라지고, 부활을 합리화하면 신화화한 것만큼 무의미해진다. 성서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십자가를 향한 이야기임으로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 생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범한 죄와 그 대가로 얻게 될 죽음의 세력을 몸소 받아 스스로 버림받는 고난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신 받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이를 시인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구적인 보증인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사 53:5~6)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넘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을 실행시킨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었다(요일 4:8). 그분의 거룩한 사랑은 구속 사역의 모든 국면마다 새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시고(14:31)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13:1),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시러 이 세상에 오셨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약 2:5), 예수님을 사랑하며(요 14:21), 서로를 사랑한다(요일 3:1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믿음으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일 5:3).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와 죽음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이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요일 4:7-11)
답: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은 대쟁투의 맥락에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사단은 하늘 존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분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시고 희생적인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그분의 이기적인 본성이 자아부정의 모습 속에 감추어져 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이 모든 의심을 영원히 제거해 주었다. 창조주께서 미천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자원하셨다는 사실은 하늘의 지적 존재들조차도 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희생은, 그분께서 참으로 무아적인 사랑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품성에 관한 오해를 일소(一掃)해 주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어두운 그림자를 펼쳐 놓는다. 그러나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대한 영원한 보증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56)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구적인 보증이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는 가끔 신앙이란 무엇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신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다”는 말은 “내가 사랑한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이는 믿지 않는 데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란 패배가 아니요, 궁극적으로 승리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통과 비참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사랑하여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사항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첫째 마음을 다해야 한다. 마음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나 서기관들은 마음은 없이 겉으로만 보이는 일에만 치중해서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둘째, 뜻과 의지를 다해야 하다.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일에 뜻을 정했고,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다. 이 세상에서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도, 겁낼 것도 없다.

금요일 (11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화목이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고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범죄자를 정당하게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령으로부터 죄인의 심령에 흘러내리는 자비와 사랑과 의의 통로가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6)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내려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몸소 담당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도피성이 되셨다. 비록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범죄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안전한 도피성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비록 죽을 운명에 처하였으나 생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74년 2월 24일자)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증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은 우리로 하여금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나가도록 어떻게 힘을 줍니까?

2.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죄를 묵인하지 않으시고 그것에 대해 진노하십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예증들을 사용하였다. '구속'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켰음을 보여준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회복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늘 법정에서 무죄로 선언된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하노라!"고 외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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