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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상징들로 묘사된 속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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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11-10 08:04 조회4,4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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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상징들로 묘사된 속죄 - 2
11월 1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1분)

도입)
성경의 역사는 성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소제도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범죄로 인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출 25:8)하시며, 친히 제정하신 제사장의 봉사와 희생제도, 성소의 기구들과 구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속(救贖)의 내용과 과정을 확연히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속죄의 원리가 낱낱이 설명된 구속의 계획의 청사진이며,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한 위대한 교과서이다.

기억절: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시 132:7)

연구범위: 레 16장, 민 18:18, 시 28:2, 132:7, 138:2.

중심 사상: 속죄일에 행해진 성소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해 연구한다.

안식일 오후
구약 시대의 성소는 매일의 봉사를 통하여 그곳으로 옮겨진 백성의 죄와 부정으로부터 일 년에 한 번 정결케 되었다. 매년 행해진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끝내시고 온 우주를 그 원래의 조화로운 상태로 회복하시는 때를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속죄일의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스라엘 성소가 어떻게 하나님의 우주 왕실인 하늘 거처(居處)를 가리키는지도 공부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구약의 제사장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중재 사역이 어떻게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지도 논의할 것이다.


일요일(11월 9일)
성소와 속죄(출 25:8-22)

도입)
성소(聖所)의 역사는 범죄한 인류의 역사와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에서 그 끝을 찾게 되는 긴 줄로 신, 구약성경의 중심을 관통(貫通)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창 3:21)신 사실에서 이미 인간의 구속(救贖)을 위한 희생제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창 3;24)신데서 성소의 동편문을 찾게 되며,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셔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출 25:19~22) 거기에 나타난 임재의 영광인 쉐키나, 곧 화염검의 형체를 본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시비에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창 4:4) 아벨의 제물이야말로 성소의 내용인 제사제도가 그 때 이미 확립돼 있었음과 함께 올바른 제사, 곧 성소제도의 이해와 실천이 인간의 구원에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보여준다. 이렇게 범죄 즉시 시작된 성소제도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 형태만을 바꾸며 아래와 같이 계속되어 나갔다.
원시 성소(아담 이래 노아 때까지)
제단 성소(노아 이래 모세 때까지)
상막 성소(모세 이래 솔로몬 때까지)
성전 성소(솔로몬 이래 예루살렘 멸망까지)
하늘 성소(그리스도의 승천 직후부터 재림 때까지)

1. 다음 구절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과 삶에서 성소가 어떤 역할을 했음을 가르쳐 줍니까?(출 25:8, 22, 29:42-43, 시 28:2, 132:7, 138:2)
답:
이스라엘의 희생 제도는 하나님의 거처인 지상 성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거룩함의 중심이었다. 그 특별한 공간에서 하나님께서는 죄 문제를 처리하셨다. 그분께서는 성소 뜰에 제단을 만들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시고,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의 피를 그 제단에 뿌리게 하셨다(레 17:11). 피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곳 제단에서 그분께로 돌아갈 것이었다.
구원의 계획에서 동물의 생명은 회개한 죄인의 생명을 대신하며,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대신한 그 무고한 동물의 죽음을 가납하실 것이었다.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으며(시 43:4),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가납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셨다. "만일 너희가 지은 죄를 제거하기 원한다면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처리하리라. 나에게 가져오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여호와께 복을 받고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성소를 떠나갔다.(시 24:35, 118:26)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했다. 하늘 성소는 우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이며, 그분께서 우주의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곳이다. 그곳은 또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희생이 바쳐진 제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만일 죄에서 해방되기 원하고, 죄의 용서를 바란다면 '나의 아들'이 너희 죄의 값을 지불한 희생의 제단으로 오라!"

교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 거처인 성소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특히 번제단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십자가를 상징하는 곳이다.

부가적용)
성막에 들어서면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놋으로 만든 번제단이다. 번제단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이 제단은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단이기 때문에 번제단이라 하고,(레4:7,10) 놋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놋단이라고도 불리운다.(출39:39, 왕상 8:64, 대하 1:5~6) 이 번제단은 하나님께 속죄와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곳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개역할을 하는 장소이며, 이 제단위에 드려지는 예물은 예표론적으로 볼 때 인류를 위해 향기로운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흠 없고 온전한 속죄양으로서 고통을 침묵으로 감래하시고(사53:7), 십자가 제단에서 생명을 바침으로써 (마27:45~50) 모든 인류의 죄와 고통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 번제라는 말은 “나아가다, 올라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단”은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뜻은 “동물을 죽여서 올라간다”라고 말할 수 있다. 본래 사람이 범죄 하기 전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지만 범죄 한 이후로는 그 자격이 상실되어 우리 대신에 다른 것을 죽게 함으로 우리의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고 만나 주시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번제단이다. 구약에서는 짐승을 대신하여 죽여 태워서 드렸고 신약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말하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이 번제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월요일(11월 10일)
제사장의 사역과 속죄(민 18:1-8)

도입)
히브리어로 코헨인인 사사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중보자였다. 공식적으로 제사장 직이 마련되기 이전부터, 제사장적인 기능이 존재해 있었던 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보여 지고 있다. 족장시대에는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같은 가족, 또는 지파(부족)의 대표자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했다. 출애굽 무렵에는, 자연적 권능에 기초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 자가 히브리인 사이에 증가하고, 특히 이 제도가 애굽 사람의 제사장직에 자극되어 확립된 듯하다. 레위인이 제사장직을 담당하게 된 후에도, 그들 이외의 사람이 제사장이 된 예도 있다. 하나님은 또한, 필요에 따라 정규의 제사장 이외의 사람이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 것을 인정하셨다(삿6:18,24,26,13:16). 시내산에서는, 히브리 민족을 위한 성소 봉사에 관한 율법이 전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을 보이는 자로서, 그 시대의 가장 문화적인 국민에 의한 순수한 예배 형식이 행해졌는데, 그것에는 제단에 쓰이는 제사장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제사장 직은 그 일족의 세습으로 한정되었다. 아론의 자손은 특별한 율법적 지장이 없는 한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서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으로 특별히 구분하여 부른 예도 있고, 또는 레위 사람 제사장으로 부른 예도 있다. 후에 사독의 아들인 레위인 제사장이라고 한 것같이, 그 속한 가계의 이름을 말한 일도 있다. 이같이 레위인과 제사장과의 구별은 명백하여, 성막이나 성전의 제단에 봉사하는 자,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는 자는, 모두 아론의 가계에 속한 자가 아니면 안되었다.
제사장의 의무(직무)는 주로 세 가지였다.
1) 여호와 앞에 있는 성소와 제단에 봉사하는 일
2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
3)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우림과 둠빔을 통해)
이 밖에도 소송을 취급하고, 전쟁시에는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는 일, 또는 문둥병자를 식별하는 일 등을 임무로 했다. 제사장은 특별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혼도 같은 레위 사람의 처녀, 또는 이혼하지 않은 과부로서, 한 가지로 전통 레위 가계의 사람들이 아니어서는 안되었다.

1.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 필요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민 18:1-8)
답:
제사장들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재자로 서는 일이었다. 제사장은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대표하여 백성 앞에 섰다(신 33:10). 제사장의 또 다른 사역은 하나님의 인도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민 27:21). 제사장들은 또한 성소에서 재판관의 역할을 하였다. 그 나라의 최고 법정은 중앙 성소에 위치하고 있었다(신 17:8-13, 21:5). 그들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 책임이 있었다(신 10:8, 21:5). 한편 제사장들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섰다. 그들은 백성을 함께 이끌어 여호와의 임재 속으로 들어갔다.(출 28:9-12, 29)
중재자로서의 제사장의 역할은 특히 매일의 봉사에 분명히 나타났다. 그들은 번제단의 거룩한 불이 꺼지지 않게 할 책임이 있었다(레 6:10-13). 또한 재를 버리고 새로운 나무를 가져오는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아침과 저녁에 상번제를 드렸다(민 28:3-8). 대제사장은 매일의 봉사 시에 성소로 들어가 등대를 보살피고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다(출 30:7-8).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희생 제물을 가져올 때마다 제사장들은 그 죄인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그를 위해 속죄하였다.(레 1:5-9, 4:25-26, 34-35)
제사장의 중재자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명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메울 길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둘째 그것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다. 즉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셋째, 제사장 직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으며, 죄와 부정에서 정결케 될 기회를 주었다. 제사장은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 은총과 자비를 구할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물론 이 모든 제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고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교훈: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 모든 중재자의 역할은 참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하였다.

부가적용)
그리스도는 제사장 직분에 있어서 자신이 제사장이셨으며 동시에 제물 되신 이중적 기능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버려야 할 상황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고 말씀하셨다.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제물로 드리실 때 요구된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 출신이어야만 했으며 올바른 가계 관계 이외에 신체적 건강에 대한 법과 규정에 따라 결함이 없는 자이어야 했다. 또 훈련시키고 임명하는 것, 생계와 주거지에 대한 것까지 복잡한 법률로 제한하고 규정되어 있었듯이 제사장이 되려면 그 사람은 모든 점에서 제사장 직분을 위해 성별되어야 했다. 대속죄일에서 제사장의 중재적(중보적) 사역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데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표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 반면 제사장은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의 말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중재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참여한 가운데 제사장은 모든 백성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제사 드린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제사를 드릴 때 강조되는 점은 제물이 아닌 제사장이다. 그는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의로운 상태이어야 했다. 또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씻어야 했고 깨끗한 새 옷을 입어야 했으며 그 자신의 죄를 위해서 제물을 드렸다. 이렇게 안과 밖, 몸과 영혼을 모두 정결케 한 뒤에 그는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계시니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의 개인적 준비와 정경함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주님의 임무 그 자체이다. 이 사명은 중재 사역의 핵심인 것이다.

화요일(11월 11일)
속죄일-1(레 16:16-17, 21, 30, 33-34)

도입)
오경의 중심에 레위기가 나타나며, 속죄일을 소개하는 레위기 16장은 레위기의 중심에 위치한다. 레위기 16장의 이와 같은 문학적 위치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속죄일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7월 10일(양력으로는 10월 초순)은 속죄일로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년 중 가장 거룩한 날로 간주되었다(레 16:29). 속죄일의 주요 목적은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회막의 부정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다.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인간 믿음의 필요성을 속죄일의 의식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는 그림은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속죄일의 의식(儀式)은 죄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예증해 주었다. 그것은 또한 매일의 봉사를 통해 경험한 구원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 날에 성소와 지성소를 포함한 성막 전체가 정결케 되어야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레 16:16). 이 죄들은 회개한 죄인이 가져온 희생 제물을 통하여 성막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 옮겨진 것이다. 속죄일 동안에 성막은 원래의 정결함과 거룩함으로 회복되었다. 일 년에 하루, 그 날에 죄로부터 자유로운 한 공간이 생겼다.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동안의 죄를 도말 받고 신선한 출발을 위한 기회를 제공받았다. 그것은 이 땅에서 뿐 아니라 하늘에서 맞을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였다.(참조 단 8:14)

1. 레위기 16:16-17, 21, 30, 33-34을 읽어 보면 그 강조점이 특별히 어디에 있습니까? 매일의 제사 때와는 달리, 속죄일에는 누구의 죄가 다루어졌습니까?(레 1:1-4)
답:
이 구절들은 정결케 하는 일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이는 '모든' 백성을 위한 '모든' 죄가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룬 집단적 행위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한 해 동안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대답이었다. 그것은 또한 마지막 때에 죄가 어떻게 소멸될 것인지를 상징해 주었다.(히 9:28)

2. 속죄일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레 23:26-31)
답:
속죄일은 온 민족이 연관된 단체적 사건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릴 기회였다.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은 자들은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었다(레 23:29). 무섭게 들릴지 모르나, 이는 구원의 사역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백성들은 항상 여호와와 더불어 신실히 동행하도록 권면을 받았다.

교훈: 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가 도말되는 중요한 기회로서, 하나님께서 최후에 어떻게 죄를 소멸하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였다.

부가적용)
“속죄하다”라는 히브리어(키페르)는 현대어로는 “몸값을 지불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몸값”(ransom)은 주로 테러리스트들에게 인질로 잡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치르는 값을 의미한다. “몸값”의 현대적 용법은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행위임에 반하여, 구약의 속죄 또는 몸값을 치르는 행위는 대단히 자비롭고 인도적인 행위였다. 구약에서 “속죄하다” 또는 “몸값을 치른다”는 것은 죄지은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대가를 돈 또는 다른 사람, 심지어 동물이 대신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속죄 또는 몸값은 돈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대신 받는 고통이 될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동물이 사람 대신 치르는 형벌이 될 수도 있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자신이 저지른 불의로 인해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번제물로 몸값을 치르게 함으로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반면,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아니면 단순히 제사를 드림으로)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진리를 가르친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는 것은 제사자가 자신과 제물을 동일시 함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 번제물이 죽음을 당하고 제단 위에서 불사름을 당했다는 것은 제사자 자신이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물을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 나타난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몸이 장사되었음을 고백하듯이,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부할을 본받아 의에 대하여 살겠다고 고백하듯이(롬 6:1-11), 고대 이스라엘인은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가는 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였으며, 또한 자신이 안수한 제물이 죽어 그 전체가 불에 타서 연기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때 자신을 속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 것을 고백하였다. 그렇기에 번제의 제물이 타서 연기로 올라갈 때 인간의 죄로 인하여 진노하셨던 하나님은 그 진로를 가라 않히신다.

수요일(11월 12일)
속죄일-2(레 16:20-22)

도입)
대속죄일에 제사를 드릴 때는 수염소 두 마리와 수양 한 마리를 제물로 잡았다. 여기서 두 마리의 수염소는 속죄제 제물로, 한 마리의 수양은 번제 제물로 드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속죄제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한 마리인데 비해 대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 제물은 두 마리였다. 속죄제 제물로 잡은 두 마리 염소 가운데 한 마리는 속죄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머리에 안수하여 산 채로 광야로 내어 보내었다. 여기서 광야로 내보내진 짐승이 바로 아사셀 염소이다. 대속죄일에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 염소는 바로 사단을 상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단을 상징한다는 것에 이의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1. 레위기 16:20-22에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 관한 내용을 읽으십시오. 속죄일에 사용된 다른 염소와 비교해 볼 때, 이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최후는 어떠했습니까?
답:
아사셀을 위한 염소(히, 아자젤)는 속죄의 수단이 아니라 죄와 부정을 광야로 옮기는 도구였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죄와 부정이 이 동물에게 전가되는 일은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속죄의 사역을 끝마친 후에 있었다. 둘째, 그 염소는 희생 제물로 바쳐지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속죄를 위한 피를 흘리지 않았다. 셋째, 그 염소가 백성의 죄를 '지고' 갔으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듯이 그것들을 대신 진 것은 아니었다. 이 경우에 '지다'라는 동사는 다른 장소 곧 '광야'(레 16:22)로 옮겼다는 의미이다. 같은 동사가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묘사할 때는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갔다(사 53:12)는 다른 의미가 된다. 그분은 죄를 다른 데로 옮기신 것이 아니고, 당신 자신이 그 책임을 떠안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이것이 바로 속죄이며, 아사셀 염소가 한 것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의식은 '제거하는 의식'인데,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진에 있어서는 안 될 죄와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속죄일 동안에 여호와와 다른 세력 사이에 대결이 있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하나님을 대표했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죄와 부정의 책임이 있는 마귀를 대표했다. 마귀는 죄의 창시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속죄하고 용서하시기 위해 그들의 죄와 부정을 짊어지셨으나, 그분이 악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속죄일은 상징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이 죄와 부정과 악을 이길 것을 선언하였다. 속죄일은 루스벨이 하나님에 대해 제기했던 모든 참소가 영원히 해결되며 루스벨은 죄의 책임을 질 것을 말해 준다. 이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임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소망을 보여주셨다. 이 새 땅에서는 죽음과 고통, 그리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계 21:3-4)

교훈: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모든 죄와 부정의 창시자로서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단을 상징했다.

부가적용)
“아사셀을 위하여”(la ‘Aza’zel) 뽑힌 염소가 누구를 가리키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사셀”의 본뜻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도망가다”(escape)는 뜻의 영어 축약형인 “스케입”(scape)과 “염소”(goat)를 합성하여, “쫓겨 가는 염소”(scapegoat)의 뜻으로 번역한 흠정역(KJV)은 물론 어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근거 없이 “속죄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 일반 사전의 뜻은 더욱 더 잘못된 것이다. 사단을 상징하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속죄의 염소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보자.
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의 의식을 통하여 백성과 성소를 정결하게하고, “속죄하기를 마친 후”(레 16:20), 속죄의식과는 전혀 관계 없이 등장하고 있다.
나. 대속죄일의 모든 속죄 의식을 마친 대제사장이, 아사셀을 위한 “산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레 16:21)었는데, 성소제도에서 안수하는 것은 죄책(罪責)을 전가(轉嫁)시키는 기본 의미를 지녔다. 그것이 만약 속죄제물이라면, 죄가 전가된 후 대속의 죽음을 죽어 피를 흘려야만 속죄가 된다(레 17:11; 히 9:22). 그러나 이 염소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산 염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 죽임을 당한 것은, “여호와를 위하여” 먼저 뽑힌 그리스도를 표상한 염소인데, “아사셀을 위하여”라는 표현 자체가 “여호와를 위하여”와 상반된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다. 또한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죄는 없”(히 4:15)으나 대속의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반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끝까지 죄를 지니고 끌려간다는 점에서, 죄의 장본인인 사단을 적절히 표상하고 있다(시 94:23, 7:16).
라. 대속죄일 행사가 끝나는 순간 죄책(罪責)이 부과된 직후, 타의(他意)에 의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의 광야로 끌려나가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운명은(레 16:22)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전혀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황폐하게 된 땅 위에 악한 천사들과 함께 천년을 보내게 될 사단의 예정된 운명에 적절히 어울린다(계 20:1~3).
마.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죄를 전가시킨 후 사람을 시켜, “광야로 보낼지니”(레 16:21)라 명령되었다. 그런데, 이 곳의 “보낼지니”는 “쫓아보내”거나(expel) “제거하”(put away)는 등 강력한 표현으로 관계를 끊고 헤어지는 경우에도 쓰였다(신 21:14, 22:19, 22; 렘 3:8).13 죄의 장본인인 사단은 영원히 내어 쫓겨 우주에서 제거될 것이다.
바. 대속죄일의 의미와 의식에 익숙한 고대 유대인들이나 초대 그리스도인 학자들도 “아사셀”을 사단적인 존재로 이해했다.14 그리고, 감리교(Abingdon Bible Commentary),15 장로교(S. M. Zwemer),16 루터교(E. W. Hengstenberg),17 성공회(J. R. Howden)18 등 여러 교파의 학자들도19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심할 것은 성소제도에 익숙지 아니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사단의 역할을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20 결국 죽게 될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죽이는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그것을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혼동할 여지를 없애기 위한 사려 깊으신 하나님의 의중으로 사료(思料)된다.

목요일(11월 13일)
속죄: 그것은 무엇인가?(레 4:31)

도입)
속죄는 기독교신앙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이를 이루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또한 모든 성도들은 속죄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방법이요, 인간들을 그에게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준비와 관계된 것이다. 따라서 루이스 벌콥 교수가 말한 것처럼 속죄의 교리는 ‘신학의 정수’가 되며 성경의 다른 위대한 교리들을 열어주기도 하고 연결시키기도 하는 열쇠의 구실을 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의 닻’, 어떤 자는 ‘희망의 피난처’라고 부르지만 모든 보수적인 사상가들은 이 속죄의 교리를 ‘복음의 핵심’ 또는 ‘기독교의 근본원리’로 인정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에서 '속죄하다'라는 동사는 어떤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까?(레 4:31, 16:18-19, 30, 17:11)
답:
레위기에서 제사장들은 중재자로서 속죄의 의식을 거행하지만, 그들이 죄를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식이 거행된 후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푸신다(레 4:26). 속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분은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는 분이시다(신 32:43, 참조 시 65:3, 79:9). 속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죄인에게 흘러가게 하신다.
레위기에서 '속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카파르)는 씻어 정결케 한다는 개념을 지닌다. 성소를 위해, 제단을 위해, 번제단의 뿔을 위해 속죄함으로써 그것들이 성소를 더럽힌 죄와 부정으로부터 깨끗하여지는 것이다. 즉 속죄를 통하여 그것들이 원래의 상태인 정결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이 동사를 회개한 죄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죄와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된다는 개념은 동일하다.
정결케 되는 일이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속죄에는 속전(贖錢)의 개념도 내포되어 있다.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희생 제물의 피(혹은 생명)의 대가(레 17:11)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죄인을 대신하여 바쳐짐으로 그 사람의 생명이 속량되었다.(참조 마 20:28, 딤전 2:6)
레위기에 사용된 '속죄하다'라는 동사는 다양한 의식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속죄가 단 하나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즉 속죄는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진행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속죄는 매일의 봉사(레 5:10)로부터 매년의 봉사(레 16:34)에 이르기까지 일 년 내내 성소에서 행해지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속죄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모든 활동으로서, 희생을 바치는 일, 제사장의 중보, 속죄일 동안에 행해진 죄와 부정의 최종적인 제거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속죄 사역을 상징한다.

교훈: 속죄는 대속의 피를 통해 죄와 부정에서 정결케 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위해 행하신 모든 봉사를 통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부가적용)
사람들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많은 헌금을 드려도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죄 사함을 위하여 주님이 제시하신 길은 오직 한 길이다.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오직 한 길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인간의 죄를 사하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도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 사실에 대하여 강조한다. 야곱의 꿈에서는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가 보였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 꿈을 풀이해 주셨다. 모세 시대에 광야에 들린 놋뱀을 통해서도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심을 말씀하셨고, 요14:6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밝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는 행4:12에서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죄사함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지니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그 대속적 성격에 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사 그들에게 자유를 사주셨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으며 이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처리 받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죄의 크기를 따진다. 살인죄와 욕을 한 죄가 같다고 보지는 않는다. 죄라고 다 같은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이런 작은 죄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가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려면 죄의 경중과 상관없이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속죄? 그것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금요일(11월 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단은 죄의 창시자였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원인이 된 모든 죄의 선동자였으므로 공의는 사단이 최종적 벌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사람의 구속과 우주를 죄에서 정결케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하늘 성소에서 죄를 제거하고 마지막 형벌을 받게 될 사단에게 이 모든 죄를 돌리므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모형적 봉사에 있어서도 연중 봉사는 성소의 정결과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 위에 죄를 고백함으로 끝이 났다.”(부조와 선지자, 358)
"히브리어에서 피와 생명은 그 의미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밀접한 연결 때문에 피는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피는 생명을 대표하기 때문에(창 9:4, 신 12:23), 피가 생명을 속(贖)할 수 있다. 피조물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피는 그 생명을 위해 속죄한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위해 희생된다. 제단에 흘려진 대속적 피는 속죄를 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무고한 희생 제물이 죄 지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 바쳐졌기 때문이다."(마크 F. 루커, 뉴 아메리칸 주석: 레위기, 2000년, 3A권, 23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지상 성소에서의 속죄 과정을 복습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멸하지 않으시면서 죄를 소멸하시는 사역과 비교해 보십시오.

2. 왜 무고한 희생 제물이 죄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무고한 희생 제물이 죄인을 위해 죽는다는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그리고 그 죽음은 죄의 무서움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매일의 의식의 절정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희생 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정결케 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심판의 과정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완성될 것을 약속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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