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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이방 땅에서의 선교 : 다니엘과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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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9-05 22:55 조회5,4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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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9월13일(안) 일몰(日沒) 오후6시43분

제11과 이방(異邦) 땅에서의 선교(宣敎) : 다니엘과 동료(同僚)들

<확대경(擴大鏡)>
◎ <다니엘> = [신앙의 절개를 지킨 포로(捕虜) 선지자(先知者)]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審判)자' 또는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裁判官)이심”이라는 뜻이다.
다니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王族)출신으로 구약(舊約) 다니엘서의 저자로 대선지자(大先知者)중 한사람이며 바벨론1차 침략 때(B.C.605년)포로(捕虜)로 잡혀 갔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 멸망(滅亡)의 서곡(序曲)인 제1차 바벨론 유수사건 때로부터 바사의 고레스 왕에 의한 제1차포로(捕虜)귀환이 있었던 때까지인 B.C.605-536년경으로. 유다 왕족(王族) 출신으로 1차 바벨론 유수 때 그의 세 친구와 함께 바벨론에 포로(捕虜)로 잡혀갔다(단1:1-7). 3년의 교육기간동안 신앙(信仰)의 절개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재주를 인정받아 바벨론의 관리(官吏)로 임명되었고 (단1:10-21). 느부갓네살 왕의 두 가지 꿈을 해석(解釋)함으로써 높은 관리로 등용(登庸)되었으며. 바벨론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벨사살 때 분벽(粉壁)에 나타난 글씨를 해석(解釋)하였고,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豫言)하였으며.(단5:17-29). 메대의 다리오왕 때 총리대신이 되었고 이를 시기(猜忌)한 관리(官吏)들의 모함(謀陷)으로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권능(權能)으로 구원(救援)을 받았으며. 생애(生涯)의 말년(末年)에 네 짐승의 이상(異像)과 (단7:1-28), 수양과 숫염소의 이상(異像) (단9:20-27)등 여러 가지 이상(異像)을 보았다. 다니엘은 전쟁포로라는 어려운 상황(狀況)속에서도 하나님만을 경외(敬畏)함으로써 후대(後代)사람들로 부터 의인(義人)또는 지혜(智慧)로운 사람으로 평가(評價)를 받는 인물이다. (겔 14:14;28:3).

다니엘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상(偶像)에 바쳐진 왕의 진미(珍味)를 거부(拒否)한 점으로 볼 때 신실한 신앙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절제력(節制力)이 뛰어나고 인내심(忍耐心)이 강했으며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왕의 진미를 거부한 점으로 볼 때 결단력(決斷力)과 담대(膽大)함을 소유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니엘을 시기(猜忌)한 관리(官吏)들이 그를 고소(告訴)할 흠(欠)을 찾지 못한 점으로 보거나 하루 세 번 기도(祈禱)하기를 쉬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신앙적(信仰的)으로나 인간적(人間的)으로 매우 성실(誠實)한 사람이며. 겸손한 인간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로 인해 신적(神的) 이상(異像)을 본 예언자적(豫言者的) 정치가(政治家)이기도 하다. 다니엘은 꺾이지 않는 신앙적 절개와 부단한 기도생활과 성실하고 청빈(淸貧)한 삶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명성과 이방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상(異像)과 계시(啓示)를 기록함으로써 인간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었다.

다니엘은 노예(奴隸)나 다름없는 전쟁포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바벨론과 메대 바사 양 제국(帝國)에 걸쳐 총리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신앙 절개와 열정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볼 수 있다. 다니엘은 왕이 조서(詔書)를 내려 금지(禁止)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이는 우리의 나태(懶怠)한 기도생활과 신앙생활에 큰 경종(警鐘)과 더불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요 하나님의 명령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니엘의 입지전적(立志傳的)의 삶은 자신의 무능(無能)과 나태(懶怠)를 은폐(隱蔽)한 채 환경(環境)만을 탓하며 무기력(無氣力)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대들에게 강한 도전을 주며 성실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복을 제시(提示)함으로써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생활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日 9월7일
<영적(靈的)인 기초(基礎) (신 6:6-7)>
여기 교육을 잘못하여 패가망신(敗家亡身)하여 역사(歷史)에 길이길이 남도록 기록된 실패한 자식농사(子息農事)를 지은 “유명(有名)한 아버지의 문제(問題)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는 거울삼지 않으시겠습니까?

교육(敎育)도 중요(重要)하지만 훈련(訓練)이 더욱 중요(重要)한 것입니다.
교육(敎育)은 “지식(知識)과 기술(技術)따위를 가르치며 인격(人格)을 길러주는 것을 교육이라 합니다.”
훈련(訓練)은 “교육 받은 것을 반복(反復)하여 익(益)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명기 6:1-9)까지의 말씀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知識)이 없으므로 망(亡)하는 도다.”
자녀 교육을 잘못 함으로 즉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방치(放置)한 결과)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사기 17:6, 21:25) 참조

◎ “유명(有名)한 아버지의 문제의 아들”
여기 여덟 사람의 두 명씩 두 명씩 네 짝의 남자들이 있습니다.
즉 훌륭한 아버지들의 문제(問題)아들입니다.
아 론(제사장)의 아들인 = ① 나답과 ② 아비후
엘 리(제사장)의 아들인 = ③ 흡니와 ④ 비느하스
사무엘(제사장)의 아들인 = ⑤ 요엘과 ⑥ 아비야
다 윗(제사장 겸 왕(王))의 아들인 = ⑦ 암논과 ⑧ 압살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각자가 여러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지만 저들은 한마디로 “유명한 아버지의 문제아들”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모두 유명(有名)한 지도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이들의 문제와 그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나답과 아비후
1.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에 대한 기록은
(레위기 10:1 / 민수기 3:2-4 / 민 26:61)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 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은 성소(聖所)에서 분향(焚香)하다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영감의 글인 <빛을 전한 사람들(부조와 선지자 상)상권364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유년 시절에 자제(自制)하는 즉 절제(節制)하는 습관에 대하여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론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한 기질과 정의(正義)에 대한 확고부동(確固不動)함의 결핍이 그로 하여금 그의 자녀들은 그들의 성향(性向)대로 하도록 방임(放任)되었다.
자기 아들들에 대한 아론의 잘못된 관용(寬容)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증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지도자인 아론에게 대(代)를 이어 그 자리를 차지할 두 아들의 죽음의 책임(責任)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레위기 10장9절-11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아론은 아들들에게 가르치기야 했겠지만 귀가 따갑도록 읊었겠지만 마음에 새겨지도록 교육시키지 못한 결과가 부모로서는 일생에 보지 말아야할 자식(子息)의 죽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흡니”와 “비느하스”>로
2. 제사장 엘리의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 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 상 1:3 / 2:12-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祭司長)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의 후계자(後繼者)로 이스라엘의 지도자(指導者)가 된 두 아들을 전쟁에 보내 놓고 소식(消息)을 기다리던 98세의 고령(高齡)엘리 제사장은 숨이 턱까지 차서 헐레벌떡 달려온 전령(傳令)의 비참한 보고를 전해 듣습니다. 전령의 말은 이렇습니다.
①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 하였습니다. →
② 우리 백성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
③ 제사장님 당신의 두 아들(흡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
④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겼습니다. →
숨이 차서 달려온 전령의 보고가 점점 비참(悲慘)해져서 “엘리”제사장의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버틸 수가 있었는데, 두 아들이 죽었다는 것도 참을 수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십계명이든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문제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일차 전쟁에서 4,000명이 죽자 크게 놀라서 이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는 특별한 도움을 얻고자 하여 세상적인 생각으로 비상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생각에는 요단을 건널 때나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에 앞서 행진 하던 하나님의 언약궤(言約櫃) 가져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선 이번의 전쟁에선 30,000명이 더 죽고 그토록 힘이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言約櫃)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 상 4장 4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 4: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들이 거기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는 만군의 주님의 언약궤를 메고 왔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올 때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왔다.”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있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 곁에 있으니 이는 아무런 힘도 없게 되어 그 백성도 그 지도자들도 보호받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법궤자체도 빼앗긴바 되고 만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 2:29)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나에게 바치라고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멸시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하나님을 모독하고 많은 백성을 죽게 한 패전(敗戰)의 원인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사사인 최고의지도자 엘리의 가정교육 실패에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제사장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꾸중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사무엘상 2장29절에 “네 아들을 나보다(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무엘서 상권 3장13절에는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禁)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아버지인 엘리의 죄는 이미 모든 사람이 잘 아는 죄이며 자식(子息)을 잘못 교육하여 돌이킬 수없는 죄로서 제사(祭祀)로도 속(贖)함을 얻을 수 없는 죄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는 제사장직분과 최고의 재판권을 가진 사사로서 온 백성을 다스리도록 임명을 받았으나 가족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자녀들의 악한 습관과 정욕을 시정 하는데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녀교육은 잘 알고는 있었으나 자기의 아이들의 잘못에 대해 체벌하지도 않고 어떤 요구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피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백성 앞에서 막강(莫强)한 권위를 가진 엘리제사장에 관해서 영감의 글인 <빛을 전한 사람들 하권 174쪽)에는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 아버지는 자녀들의 종이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빛을 전한 사람들>에는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 엘리의 가정교육의 실패(失敗)와 그 결과로 백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여러 가지로 길게 언급하고 있지만 여기에 몇 말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엘리는 처음에 온화한 방법으로 악(惡)을 제어하도록 시도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만일그것으로 되지 않을 때에는 가장 단호한 방법으로 행악자(行惡者)들을 진압해야 하였다.
2. 그 다정한 아버지 엘리는 그의 아들들의 유년 시절에 그들의 과오와 죄를 묵과하고 장차 그들이 자라나면 악(惡)한 성벽을 버릴 것이라고 혼자 속으로 믿었다.
3. 젊은이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허락하는 것보다 가족들에게 더 큰 저주가 없다.
4. 엘리는 그의 지위 때문에 그의 감화는 보통사람들의 감화보다 더욱 널리 퍼졌다.
그의 가정생활을 온 이스라엘이 모방하였다.
5. 신앙생활을 한다고 공언하는 부모의 자녀들이 악습에 방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는 수치를 당한다. 경건하다고 열을 올리는 것보다 그들의 행동이 더 큰 소리로 말한다.
6. 어떤 환경에서든지 부모의 불충실은 큰 죄가 된다.
그러나 그 죄가 하나님의 백성의 선생으로 임명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때에 그것은 십 배나 더 커진다. 자기 가족들을 다스리는 일에 실패하게 되면 그들의 그릇된 모본이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엘리는 자녀교육에 실패한 죄보다 더 큰 죄는 전혀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아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아들들이 계속해서 범죄 할 때에 공정히 다루었다면 제사장직을 박탈하고 중징계를 했어야 하는데 그냥 둬서 이런 큰 재앙을 불러오게 한 것이다.

<셋째 : 요엘과 아비야>
3. 제사장 사무엘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 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 상 8:1-3)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의 종교 및 정치(政治)지도자(指導者)인 사무엘의 두 아들의 교육 실패의 원인이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아들의 상태를 사무엘 상(上) 8:3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고만 기록 되어있습니다.
사무엘은 나뿐 환경에서 크게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가운데 한 사람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방종을 방치해둔 두 아들의 아버지가 선생님인 가정에서 함께 살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는 엘리의 두 아들을 보며 배우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멀리 있지만 한나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으로 주위 환경의 모든 불순물을 녹이며 정금(正金)같은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온 나라에 소문난 불량자라 그런 집에 아들을 맡겨놓고 심히 걱정스러웠지만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비록 아들을 올바로 교육하지 못한 선생이지만 나쁜 교훈을 제자에게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 말씀에 청종케 함으로 그 아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리의 가정교육의 실패가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무엘에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레위인의 규례로는 25세가 되어야 성소를 위한 특별한 봉사를 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사무엘은 예외(例外)였습니다. 아직 아이인데도 성소직무(聖所職務)에 성별(聖別) 된 증거로 세마포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지도자로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時代)이래 사무엘의 통치 시대처럼 그렇게 큰 지혜로 성공적인 정치를 하던 때가 없었다.” 사사, 선지자, 제사장이란 삼중 직분을 하나님께 받고 사심 없이 충성스럽게 통치한 결과 나라가 크게 번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늙어서 정치를 두 아들에게 분담하였는데 두 아들은 아버지의 교훈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버지의 순결하고 무아적인 생애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한 굵은 선을 긋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시대(神政時代)에서 왕정시대(王政時代)로 옮겨가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 훌륭하고 유명한 아버지의 두 아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을 잘못하는 지도자가 되어 역사를 바꿔놓은 사람이 되게 한 부모로써의 책임을 언급한 표현이 있습니다.

영감의 책 <빛을 전한 사람들 하권200쪽>에
“엘리에게 주어진 경고는 사무엘의 마음에 마땅히 감화를 끼쳐야 할 만큼 감화를 끼치지 못하였다. 사무엘은 어느 정도 아들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방임(放任)하였으므로 그 결과가 그들의 품성과 생활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기 엄격하고 원칙에 강한 지도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빛을 전한 사람들 하권200쪽>에 말씀에
“백성 중에 있는 많은 사악(邪惡)한 사건들은 사무엘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만일 그의 아들들의 악(惡)한 행위를 알았더라면 사무엘은 지체(遲滯)없이 그들을 해임(解任)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가 어느 정도 방임(放任)한 결과가 엄청난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또한 경건(敬虔)하고 엄격(嚴格)한 아버지에게 자녀들의 행위(行爲)가 숨겨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끔은 어머니까지도 자식의 잘못을 엄격(嚴格)한 아버지에게 숨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바깥일에 충실하다가 집안 사정 특히 자녀의 형편에 귀가 어둡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이루어놓은 일보다 더 큰 폐(廢)를 끼치는 유명한 아버지 중 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넷째 : “암논”과 “압살롬”>
4. 다윗 왕의 아들 “암논”과 “압살롬” 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 하 13:1-39)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여로보암>은 성경에 대조적(對照的)으로 그 이름이 거명되는 특별한 두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善)한 왕을 일컬을 때는“다윗처럼 선한 왕”이라고 하며
악(惡)한 왕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처럼 악한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왕은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문제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암논”과 “압살롬”인데 그들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익히 잘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 사무엘 하(下) 13장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동생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戀愛)하므로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병든 체 하여 문병을 온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을 시켜 자기에게 과자를 구워주면 낫겠다고 속인 후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괴악한 일”을 행하고는 그녀를 미워하여 쫓아냄으로 더 큰 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다말은 성경에서 처량하게 살았다고 표현된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2년 후 압살롬이 암논을 비롯하여 모든 왕자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도록 다윗 왕에게 간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은 후 술을 즐기는 암논을 죽이고 드디어 역모(逆謀)를 꾀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이 두 아들 사건 서두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 후에 입니까? 바로 다윗이 우리아에게 행한 범죄와 뒤이어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 후에 다윗의 판단력(判斷力)에 문제가 생긴듯합니다.

암논의 가슴속에 이글거리는 불순한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꾸며낸 행위와 압살롬의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복수심(復讐心)을 직시(直視)할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 아버지로서의 지도자(指導者)가 영안(靈眼)을 상실함으로 근친상간(近親相姦)에 형제살생(兄弟殺生)에 부자반목(夫子反目)에 동족상쟁(同族相爭)의 비운(悲運)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칭송(稱頌) 받는 자이며 라고 (사무엘 하 14:25)에 기록 하고 있으며, (사무엘 하15장13)절에는 이스라엘의 인심을 다 돌려놓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인재(人才)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을 반역자(叛逆者)가 되게 하여 결국은 죽게 한 것입니다.
끝으로 다윗의 두 아들 사건에서 부언(附言)해둘 한 가지는 교활(狡猾)한 친구가 이 엄청난 배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암논의 사촌이며 간교(奸巧)한 친구인 요나답의 계교(計巧)가 욕망(慾望)의 충족에 적중하긴 했지만 큰 불행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자기 아버지 다윗의 친구 <요나단>으로서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그 아들인 암논은 간교한 친구 <요나답> 때문에 자신도 죽고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전쟁을 유발하게 된 것입니다.
한글의 글자로 볼 때 <요나단>과 <요나답>은 비슷한 것처럼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는 구별하기가 힘듦으로 어릴 때부터 부모들은 자녀들의 친구 선택에 유의하고 투자도 할 필ㄹ요가 있음을 부언(附言)합니다. 예수님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늘 왕자가 된 우리는 모두 유명한 부모들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되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아론이나 엘리나 사무엘이나 다윗의 두 아들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 따라 잘 키워서 그 들도 하늘 왕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회복하라 1-8 참조)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를 통해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누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참으로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그런 자녀를 주셔서 삶에 보람을 같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들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주고 싶은 존재들입니다.
열 부모가 자녀들 잘되기를 바라며 오로지 새벽부터 밤늦도록 죽을지 살지 모르며 고생하고 노력하고 헌신하며 자녀들 뒷바라지하기에 이제는 이번의 뒷바라지가 마지막이라고 할 때는 이미 부모님들의 인생은 백발이 다되어서 초라한 몰 꼴로 전락되어있고 쇠약한 몸에 약봉지를 매달고 근근이 생면부지를 하면서 살게 되지요? 그러나 장성한 자녀들은 그도 그들의 자녀에 노예가 되어서 똑같은 전처를 밟게 되는 것이지요.

☞ 보통 사람들은 자녀에게 많은 유산(遺産)을 물려 주기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편법(編法)과 탈법(脫法)을 다 동원하여 재산을 물려주기를 반복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당대의 훌륭하다하는 유명한 아버지들이 자기 자식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참으로 가슴 아픈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도토리는 도토리나무에 달립니다.
그러나 도토리 속에는 도토리나무가 들어있습니다.
지혜와 지식과 축복과 행복과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나무에 달려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생명의 근원이 축복의 궁전이 있습니다. 그 궁전(宮殿)인 하늘(Palace 팔리스)가 준비되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생애의 모든 것이 우선(優先)이 되는 삶을 살고 자녀에게 가르치고 훈련하여 실행토록 다짐합시다.

月 9월8일
<초기(初期)의 시련(試鍊)들 (단 1:4)>
◎ 우리말 속담에 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교육(敎育)과 이념(理念)과 습관(習慣)등은 어릴수록 참으로 그 인생의 엄청난 품성의 꼴을 지어질 수 있다는 것이 다니엘서를 통하여 교훈해주는 것입니다. 특히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죄악(罪惡)의 모든 것이 다 먹는 것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善惡果)로 시작해서 강(江)이나 바다의 낚시질에서의 물고기도 먹이로 잡혀올라오며, 야생 동물들의 포획(捕獲)도 먹이로 사냥을 하지 않습니까?
먹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 재림교인들의 자녀들이 이제는 교회에서도 심지어 예배시간에도 과자나 음료나 먹을 것을 조금의 부담감 없이 먹이고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많이 변하여 가고 있다는 것 이전에 그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렇게 절제교육이 안 되는 상태에서 앞으로의 훌륭한 자녀로 꼴 지을 수 있는 가르침의 방해자라는 것을 이번기회에 자각(自覺)했으면 합니다.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궁전(宮殿)안에 살고는 있었지만 그 환경으로 말하자면 아주 도덕(道德)관념(觀念)이 희박(稀薄)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궁전의 악(惡)에서 떠나 모든 것이 그들을 적대시(敵對視)하는 때이었지만 하나님께 진실함을 지키며 살았다.
이 용감(勇敢)한 젊은이들이 바벨론 왕국에서 처음으로 당면(當面)한 시험을 앞에 놓고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들어보자.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宦官長)에게 구(求)하니”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밀(秘密)을 보이실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젊은이 들은 어떤 위급(危急)한 사태(事態)하(下)에서도 언제나 승리하였다.
① 세력이 막강한 황제(皇帝)의 궁전(宮殿)에서 음식(飮食)으로 인한 시험 (단 1장8절)
② 풀무불속에서 (단 3장)
③ 사자굴속에서 (단 6:6-27)
우리는 항상 사람에게 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을 기억(記憶)하자, 왕의 식탁(食卓)에 오르는 고기로 말하면 우상(偶像)에게 먼저 바쳤던 것이었으며 (출 34:15; 고전 10:20), 그 고기는 정결치 않은 것으로 피가 남아있는 채로 잡았다. (레 3:17, 7:26)

◎ “70년 포로 기간의 시초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강철처럼 원칙에 굳게 서고, 이기심으로 부패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 그리스도인 애국자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저희가 포로(捕虜)된 나라에서도 이방 민족들에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이르러 오는 축복을 나누어 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킬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어야 하였다. 그들은 결코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하지 말아야 하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신앙과 명성을 고상하게 보존해야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하였다. 순경(順境)에서도 역경(逆境)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선지, 479)

火 9월9일
<타협(妥協)하지 않음 (사 56:1-8)>
◎ 우리말에 “적당히”라는 말이 있으며, “좋은 것이 좋지 않으냐”라는 말이 있다.
일컬어 중용(中庸)이라고 하는 뜻이다.
그러나 신앙(信仰)에는 절대로 사용하거나 적용(適用)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 이유인즉 와이셔츠 단추를 맨 밑에 한 개를 잘못 잠그면 위로 계속해서 잘못 잠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먹는 대로 세포(細胞)가 자라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당뇨환자가 왜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하며 아토피 환자나 암(癌)환자를 비롯해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왜 식이요법이니 금식(禁食)이니 하면서 병(病)이 우중(愚衆)할 때에야 음식을 가려 먹습니까? 건강할때부터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지금의 잘못된 식습관(食習慣)관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기도(祈禱),말씀상고(詳考),예배(禮拜)의 자세(仔細)등등)을 올바로 바꿉시다.
하나님과의 신앙은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는 것처럼 우리는 분명히 의식주(衣食住)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포로(捕虜)의 신분(身分)으로 얼마든지 환경(環境)과 처지를 변명하면 적당히 합리화 하면서 부패(腐敗)하고 사치스런 궁정에서 그들을 둘러싼 여러 가지의 유혹에서 그 음식을 먹는 체하고 그 술을 마시는 체하는 것이라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리화 시킬 수도 있었지만, 다니엘과 그 동무들은 저희 부모들로부터 엄격히 절제하는 습관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1. <음식(飮食)으로 부터의 타협(妥協)거절(拒絶)>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宦官長)에게 구(求)하니”

2. <경배(敬拜)의 대상으로 부터의 타협(妥協)거절(拒絶)>
(단 3:16-18)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 이다
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3.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부터 타협(妥協)거절(拒絶)>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부패하고 사치스러운 궁정 안에는 그들을 둘러싼 유혹들이 매우 강했으나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였다. 어떠한 권세나 어떠한 감화로도 저희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을 연구함으로 배운 원칙에서 그들을 동요시킬 수는 없었다.
다니엘이 하려고만 했더라면 그 환경으로 보아서 엄격한 절제의 습관에서 떠날 수 있는 그럴 듯한 핑계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처럼 왕의 은총에 의존해 있고 그 권세에 예속된 자들에게는 왕의 음식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으며, 만일 하나님의 가르침을 고수한다면 왕의 노를 사서 그의 지위와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왕의 총애를 받게 되고 자신의 뛰어난 지력을 활용해서 세속적 번영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선지, 481-482)

水 9월10일
<꿈의 해석자(解釋者) (단 2:1-13)>
◎ 모든 사건(事件)에는 원인(原因)과 경과(經過)와 결과(結果)가 있게 마련이다.
다니엘 시대에만 성경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일어나고,
지금은 그 때와 같은 놀라운 역사(役事)가 못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똑 같은 줄 믿습니다.

◎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무당(巫堂)과 점(占)치는 집 과 작명(作名)소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지금 내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믿기 이전에 삶을 생각해보면 전자(前字)의 무당(巫堂)들이나 작명가(作名家)들이나, 점(占)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나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오죽이나 답답하고 너무나 어려운 나머지 돈도 없는 사람들이나 직업을 잃은 그야말로 한 푼이 새로운 사람들의 돈을 뜯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말이다. 정말로 돈 많고 잘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이해를 해주고 싶다. 그러나 길을 가다 보면 노상(路上)에서 초라하게 이름을 감정(鑑定)받고 손바닥을 내밀고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보면서 희망과 소망을 찾기 위한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역이용(逆利用)하여 돈을 뜯어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그 들이 참으로 치사(恥事)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예언(豫言)한 말들이 과연 맞습니까? (경험자 여러분?) 맞을 수도 없을뿐더러 엉터리들이 아닙니까?

◎ 여기 다니엘서 2장의 “박수”와 점쟁이들과 술객들의 이야기가 이렀습니다.
(단 2:4) “꿈꾼 것을 이야기 하면” 그 꿈을 해석하여 준다고 하는 말의 말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행동을 살펴봅시다.
(단 2:16-23)
① 왕(王)에게 구하기를 기한(期限)을 주시면 (단2:16) →
이는 자신을 부인(否認)하고 전적(全的)으로 하나님께 의존(依存)한다는 뜻이며
②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와서 동무들에게 고(告)하고 (단 2:17) →
합심(合心)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아뢰자는 뜻이며
③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밀(隱密)한일에 대하여 (단 218) 적적으로 믿고 →
그분의 영역(領域)을 인정하는 오직 절대적인 주관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며
④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단 2:20)
⑤ 때와 기한의 주관자를 알고 있으며 (단 2:21)
⑥ 왕을 폐(廢)하기도 하시며 세우기도 하시는 분을 똑바로 알고 (단 2:21)
⑦ 지혜와 능력을 즉 알게 하시는 분을 확실히 믿었다(단 2:22-23)

☞ 이러한 사람이라면 진짜 살아계시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다니엘에게 꿈의 해석(解釋)을 알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 이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꿈을 해석 할 수 있었으며 , 그의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간구(懇求)함으로 그 분의 무한(無限)하신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木 9월11일
<생사(生死)가 달린 두 가지 시험(試驗) (단 3:16-18)>
◎ 남자들이라면 거의가 겪게 되는 군대(軍隊)생활에서 안식일(安息日)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영창(감옥(監獄))을 갈 각오로 시종일관(始終一貫)갖은 핍박이나 고생을 감수한 사람은 어려운 한 고비만 넘기면 안식일(安息日)준수가 거의가 해결된 것을 우리는 들었고 보아왔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것을 마음 아프게 접하게 된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가 없다.
신앙(信仰)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한 예로 전 세계를 크게 두 종교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① 기독교(基督敎)와
② 회교(이슬람교)로
기독교는 생활가운데에 종교가 있고 이슬람종교인들은 종교생활 가운데에 자신들의 생활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회교)은 신앙이 곧 생사(生死)를 결정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 질(質)이 순도(純度)가 아주 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교인들이시여 이제는 생활가운데의 일부분의 신앙인이 아니라 신앙가운데 생활로 완전히 바꿉시다. 아멘

<초점(焦點)>
1. 신앙(信仰)과 교육(敎育)은 나이가 어릴수록 중요(重要)하고 절대적(絶對的)이라는 것을 다니엘과 세친구들을 통해서 교훈(敎訓)했다.

2. 참된 원칙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이를 수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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