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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이방 땅에서의 선교: 다니엘과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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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9-04 21:55 조회4,9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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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이방 땅에서의 선교: 다니엘과 동료들
9월 1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3분)

도입)
다니엘은 주전 6세기, 극심한 환란의 시대에 태어났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변화무쌍한 시대였다. 다윗 이래 역사를 이어왔던 40명의 이스라엘 왕들은 모두 죽고 화려했던 다윗왕조의 영광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우상을 섬겼고 외부적으로는 세계의 강자 바벨론 제국이 침략해 왔다. 페르시야를 무찌르고 세계의 패권을 쥔 바벨론은 주전 587년, 강력한 군대를 앞세우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전을 불사르고 마지막 왕 시드기아를 사로잡고 수많은 귀족, 대신, 지도자들을 볼모로 잡아 갔다. 이 고통의 현장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이었다. 다행히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왕의 눈에 들어 왕궁에 남게 되었지만 이미 이름도 바벨론 식으로 바뀌고 음식도, 언어도, 생활도 모두 바벨론 이방 종교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제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대한 거룩한 순종도, 거룩한 생활에 대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의 습관도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둘 중의 하나의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하나는 고분고분 바벨론의 우상문화에 순종하여 실낫 같은 목숨을 유지하든지 아니면 과감하게 하나님 신앙을 고집하여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든지.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이게 되었다. 신앙은 끊임없는 선택이요 부단한 자기 결단이라는 것을 아는가? 우리가 아무런 결단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잘되는 때는 없다는 것을 아는가? 신앙은 선택이요 결단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다니엘이 어떤 결단을 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8절을 보십시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뜻을 정하여”이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아셈 알 리보”이다. 이 말은 “마음으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의사에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다. 어기서 “마음”은 “영”이다. 다니엘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그로 하여금 결심하게 한 것이다. 다니엘이 결심한 내용도 중요하다.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왜 다니엘은 왕이 먹던 진미와 포도주가 자기 몸을 더럽힌다고 생각했겠는가? 당시 바벨론 왕에게 진상되었던 음식은 먼저 그들이 섬기는 우상 앞에 바쳐진 후 왕 앞에 나왔다. 왕이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은 이미 우상 앞에 바쳐진 음식이다. 다니엘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점이었다. 다니엘에게 음식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상이 문제였다. 다니엘이 왕의 음식을 먹는 순간 간접적으로 바벨론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바로 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이다. 다니엘은 음식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았던 것이다.

기억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珍味)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연구범위: 단 1-3장, 6장.

중심 사상: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벨론에서 경험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2,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믿음과 사명에 관한 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안식일 오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일이 아주 잘못되어 가는 듯이 보이는 가장 어두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풀려나갈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우리가 최후의 선한 결과를 목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자신들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낯선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네 명의 히브리 청년들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신 일에 관하여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들의 전적인 헌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목적과 능력에 대한 증인들로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풀무불과 사자의 굴과 같은 극심한 시련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리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우상밖에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히브리 청년들이 보여준 신실함의 영원한 결과를 알겠는가?

일요일(9월 7일)
영적인 기초(신 6:6-7)

도입)
자식을 바로 키우려면 먼저 엄마들이 신앙으로 바로 서야 한다. 어머니의 신앙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훈계가 아니라 잔소리가 되기 쉽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가를 알아보라. 우리 엄마요 맨날 잔소리만 한다고요. 아 오늘은 엄마의 잔소리가 없어 좋다.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되면 가정교육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지면 부모 자식 간에 신뢰와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잔소리는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만 단절시킨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교육은 될리 없다. 부모들은 항변한다. 자식의 행동이나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걸 보고 어떻게 잔소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지만 훈계가 지혜롭지 못하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는 결국 아이들의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어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부모가 바른 생활의 본을 보이지 못하면 아이들의 교육은 어렵다. 시원찮은 부모 일수록 아이들 앞에서 말이 많다. 문제아의 엄마는 예외 없이 잔소리가 심했다는 사실이다. 문제아가 된 어느 엄마의 고백 ‘정말 아이들 가르치기 힘들어요. 어제도 큰애와 하루 종일 싸웠어요. 이제 잔소리 하는 것도 지쳤어요’. 부모가 사소한일에 열을 올리면 정작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칠 수 없다.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를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엄마가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신앙에 바로 서서 아이들의 마음에 참 신앙을 심어 줄 때 가능한 것이다.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본주의 교육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세상적인 풍조와 유행을 쫓는 인본주의 교육을 시킬 것인가는 다니엘의 부모의 신앙관을 통해 상고하자.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600여 년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이 청년들의 신실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바벨론에서의 그분의 계획과 선교를 진전시키시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셨다. 그런데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 그 부모들에 의해 주어진 충실한 가정교육에서 기인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유대인 가정들은 자녀들을 가르치는 책임을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가르침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민족을 이끄신 역사를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를 때 어떻게 생명으로 인도되며, 그것들을 무시할 때 어떻게 사망으로 인도되는지를 배웠던 것이다.

1. 신명기 6:6-7을 읽으십시오(참조 신 4:9). 여기서 우리는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어떤 영적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매일 헌신의 시간을 갖는 것은 이러한 원칙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의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 신실하게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일생을 위한 튼튼한 영적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와 같이 하려고 애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이적들과 선하심과 사랑을 되새기는 것은 자녀들에게 뿐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큰 유익을 줄 수 있다. 자녀들이 없는 이들이나 자녀들이 출가한 부모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항상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요긴한 일인가! 어쨌든 우리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교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다.

부가적용)
부모가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 되어야 자녀들이 변화한다. 다니엘은 소년시절에 B.C.605년 바벨론왕 느부가넷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해서 제1차 포로로 왕족과 귀족들을 잡혀 갈 때 그도 바벨론 왕궁에 포로로 잡혀왔다(단1:3-4). 바벨론왕은 그들에게 바벨론 제국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고 와이 지정하여 왕의 진미와 자기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을 먹게 하고 3년을 길러서 하위직 공직에 임용하려 했다(왕앞에 서게 하려 했다). 다니엘은 곧 뜻을 정하여 바벨론 제국의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 즉 우상에게 바쳐진 부정한 음식을 거부하는 신앙의 지조를 천명했다. 어린 다니엘은 정하고 부정한 음식의 레위기의 규례(레 11:2-12, 신12:23-24)를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린 다니엘에게 레위기 말씀을 몸에 배도록 가르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소년 다니엘의 이런 영적 결단과 지조를 어디서 배웠겠는가? 그를 말씀의 사람으로 키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다니엘의 부모였다. 다니엘의 부모는 다니엘이 어릴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암송시켰고(신6:4-9), 기도 훈련을 시켰을 것이다. 아마 다니엘의 부모는 나라가 타락하고 망해가는 가운데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행동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김으로 자식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며 철저한 신앙교육을 시킨 신실한 부모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유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바벨론의 웅장하고 화려한 이방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요즘 말로하면 미국과 같은 대 제국같이 화려한 그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자이다. 자녀 교육은 가장 큰 영적 싸움이다.

월요일(9월 8일)
초기의 시련들(단 1:4)

도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동화정책으로 인한 큰 유혹에 직면하게 되었다. 궁정교육을 시켜주고 궁정음식을 먹게 한 배려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들을 바벨론 인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이었다. 바벨론의 종교정책은 다원주의로 왕을 절대적인 존재, 신중의 신으로 섬기는 체제였다. 정복한 여러 나라의 신들을 인정하지만 바벨론 왕이야 말로 신중의 신으로 섬겨야만 하는 체제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크나 큰 위험이요 시련이었다. 궁정교육과 왕의 음식을 먹도록 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상대화하고 너도 좋고 나도 좋게 살자는 타협과 유혹이었다.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식탁에 참여함으로 인해 왕궁의 풍성함과 호화로움에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한 시련에 놓여 있었다. 믿음이 좋다고 괴로운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좋다고 시련의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존경하는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성숙한 신앙, 복된 인생 속에 반드시 시련의 눈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괴로움에 직면해 있는 동안에는 내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귀를 막고 계신 것처럼 여겨지고 하나님은 고개를 돌린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디기만 할 때 우리의 세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인생은 마른 풀처럼 시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도 이런 날이 있을 때가 있다. 고통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도 힘든 법이다. 시련이 믿는 사람에게는 알아서 피해가면 좋으련만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에게 동일하게 허락하셨다. 시련의 유익 때문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도 이렇게 피해가지 않는 초기의 시련이 있었다. 사단은 끊임없이 세상의 풍성함과 호화로움으로 신자들을 유혹한다. 그 유혹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위기와 시련의 때에 저들은 신앙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신뢰와 감사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시련 속에 감추어진 축복의 주머니를 저들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은 바벨론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유혹과 부정적인 영향력에 직면하게 된 것이 분명하였다.

1. 다니엘 1:4을 읽으십시오. 그들의 믿음이 공격을 받게 된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그 공격은 얼마나 위협적인 것이었습니까?
답:
우리가 읽고 보는 것은 우리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 청년들은 분명히 지금껏 배워온 것과는 반대되는 가치와 신념에 젖어 있는 문학을 생전 처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벨론 문학에서 점성술과 거짓 신들, 그리고 다양하게 묘사된 신화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에 투쟁이 일어나고 영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참조 빌 4:8). 그리고 또한 현대 과학이 정신과 육체의 긴밀한 연결성을 말해주듯이, 그것은 육체의 투쟁이기도 했다.

2. 다니엘 1:8을 읽으십시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12-14절)은 왜 왕의 진미(珍味)를 먹지 않기로 하였습니까?
답:
여기서 핵심 단어는 ‘더럽히다’인데, 히브리어에서도 ‘불결하게 하다,’ ‘더럽히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 청년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건강상의 이유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3.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할 수도 있었습니까?
답:
이 네 명의 청년들은 바벨론에 도착한 처음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칙에 굳게 서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더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될 그들의 삶에 하나의 모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들의 신실함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힘 있게 증거되었다.

교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칙에 굳게 서기로 결심함으로써 비록 이방 땅에서라도 하나님의 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부가적용)
바벨론 사회에서 동화(assimilation)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다니엘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지킬 수 있었는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이 민족적인 유산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위대한 삶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 큰 교훈과 감명을 받게 된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과 그 믿음에 기초한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비상한 각오와 결단을 내리게 된다. 첫째로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8절)했다. 여기에 기록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문제는 율법에 규정된 지극히 적은 부분에 관련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이 문제는 결국 신앙생활 전반에 걸친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의 사상과 우상 숭배로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조상 때로부터 지켜 내려오는 히브리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고수하고 '뿌리'를 잃지 않겠다는 다니엘의 굳은 결심과 결단을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모범적인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깨끗이 보존하며 세속적인 가치관과 유행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다니엘과 같은 구별되고 성별된 삶을 위한 뜻을 정하고 결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옳은 것과 진리를 행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하고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하다. 둘째로 다니엘은 뜻을 정했을 뿐 아니라 그 뜻을 행동으로 옮겼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자기의 뜻을 담대히 말했다. 그는 용기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가 필요하다.

화요일(9월 9일)
타협하지 않음(사 56:1-8)

도입)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의 실천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적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uncompromising).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different) 것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영적으로 구별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careful) 타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조용히, 소위 중립적으로(neutral)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왕에게 대면해서 그들의 믿는 바와 그들의 소망을 말하였다. 둘째는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계산하지 않고, 또 조건을 달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우리는 무슨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할 때 하나님과 협상하곤 한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들의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절대 절명의 위험한 상황에서 계산하지 않고, 조건을 달지 않고, 도리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8)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과 고레스 왕에게 영향을 미치심으로 바벨론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뿐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으로 묘사되었다.

1. 다음 구절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입니까?(사 56:1-8).
답:

2. 다니엘 1:6-7에서 바벨론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답:
유대인들에게 이름의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그들에게는 심사숙고하여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관습이 있었다.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 하나냐(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미사엘(누가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우신다)의 이름은, 그 부모들이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느부갓네살의 환관장 아스부나스는 이 네 명의 유대 청년들에게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새로운 바벨론 이름을 주었다. 이 이름들의 뜻은 대체로 바벨론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네 청년들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계제(階梯)였으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들은 바벨론 궁정과 정부에서 높은 지위로 옮겨갈 수 있었다.
준비하는 기간이 끝나자 아스부나스는 네 청년을 왕 앞으로 모셨다.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본 후 아무도 이들과 견줄 자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단 1:19).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20절).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 네 명의 신실한 청년들을 통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포로가 되어 세계 최강의 나라로 끌려왔어도 그들은 중요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증인으로서 왕 앞에 섰던 것이다.

교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결코 타협함이 없이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시고 바벨론의 왕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다.

부가적용)
바벨론은 매우 세련된 사회였다. 그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명령받고 있던 히브리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바벨론 문화 사이에서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강한 우상숭배와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믿는 자의 믿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더욱 확실히 했다. 에스키모가 늑대를 잡는 방법을 들은 적이 있다. 에스키모들은 늑대를 잡기 위하여 매우 날카로운 칼에 동물의 피를 묻혀서 얼리고 또 피를 묻혀 얼려서 그들이 사는 이굴루 옆에 꽂아 놓으면 늑대들이 밤에 와서 그 ‘피 아이스 케익’을 핥고 또 핥고 또 핥아서 피를 녹여 먹는 동안 혀는 무감각해지고 나중에는 자기의 혀가 칼에 베어서 자기 피를 먹는지도 모르고 계속 맛있게 먹다가 결국 피를 많이 흘려서 죽게 된다고 한다. 에스키모 인들의 할 일은 아침에 일어나서 죽은 늑대를 거둬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의 인본주의적 사상을 핥으며 바벨론 안에 난무한 세속의 가치관인 물질 만능주의, 폭력, 게 임, 오락, 술, 담배, 성 권력 지향 등을 계속 핥으며 그 속에 묻힐 수 있었다. 교육은 중립적이라는 허구 속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정신이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영적인 죽음의 피를 흘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오히려 저들보다 나은 지력과 예지를 통해 저들을 인도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수요일(9월 10일)
꿈의 해석자(단 2:1-13)

도입)
당시의 바벨론은 신점 행위가 매우 발달해 있었다. 천문학의 기원이 되는 점성술도 바벨론 시대에 유래하며 각종 점술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던 곳도 바벨론이었다. 궁중에는 '바루'라고 하는 제사장이 점술에 의존하여 왕에게 조언을 하였으며 일반 백성들 역시 예언보다는 가시적인 점술에 크고 작은 일들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점술에 능한 사람이 당시에는 현자로 불려졌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미신으로 간주되는 오늘날의 점술과는 달리 바벨론의 점술은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공적인 합법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은 그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의 궁정에서 최고위 관직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궁정에서의 권력이 그러하듯이, 그들에게도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 2:1-13을 읽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1. 박사들은 어떤 식으로 왕을 속이려 했으며, 왕은 그들의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었습니까?
답:

2. 박사들은 어떤 말로 왕의 요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냈으며,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입증해 주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니엘에게 꿈과 이상을 해석하는 은사를 주셨지만(단 1:17), 다니엘은 그것을 자기의 능력인양 행세하지 않았다. 그는 세 친구들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기를 청하였는데(단 2:18), 이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그들도 다른 박사들과 술사들처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3. 다니엘이 드린 감사 기도(단 2:20-23)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희망과 위안을 발견하게 됩니까?
답:
우리 대부분은 그 나머지 이야기를 안다(모를 경우에 2장 전체를 읽어보라). 세계 최강대국의 군주가 외국에서 사로잡혀 온 포로에게 엎드려 절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46-48절). 왕은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았지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생명을 건지셨다. 그분께서는 이방 왕으로 하여금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이끄셨다. 또한 그분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더욱 권세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심으로 더 큰 전도자가 되게 하셨다.

교훈: 다니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꿈을 해석할 수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였다.

부가적용)
느부갓네살 왕이 재위 2년에 꿈을 꾸었는데 본인도 그 꿈의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바벨론에서 유명한 모든 박수와 술객들을 다 모아 꿈의 내용과 해석을 요구했지만 아무도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을 꾼 장본인도 그 내용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 내용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갈대아의 술사들이 왕더러 "그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 해몽해 보이겠다"고 간청한다(2:4). 그러 왕은 저들의 허구와 거짓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바벨론 왕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이 바벨론의 박사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된 것에 주지할 필요가 있다.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다니엘이 해냈다. 왕이 꾼 꿈의 내용과 더불어 그 해석까지 거침없이 해내는 다니엘에게 느부갓네살이 그 앞에 절하고 예물과 향품을 바쳤다. 이 장면에서는 다니엘이 바벨론 왕보다 더 권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다니엘을 높이기보다는 이 사건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회로 삼는다. 바벨론 왕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이를 본 유대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2:46-47). 이것이 이 이야기가 주는 힘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규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나가 그렇게 믿고 다니엘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다니엘 역시 자신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다니엘은 해내고 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다니엘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으며 그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에게 구원의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요일(9월 11일)
생사가 달린 두 가지 시험(단 3:16-18)

도입)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할 수 없거나 어떤 일들을 잘해달라고 부탁한다. 맡긴다는 말은 즉 상대방의 실력과 능력 그리고 신용성 등을 믿고서 일을 의뢰하는 것이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거나 간섭하지 않으시면 우리들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서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와 뜻대로 이루어 가시도록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은 나의 문제와 같은 일부분의 것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 마음, 판단, 즉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은 문제 해결의 때도, 문제 해결의 모양이나 모습도,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부분도 모두 하나님께 의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맡겼다는 것에는 믿음과 신뢰가 담겨져 있다. 나를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신앙을 볼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크게 두 가지 신앙을 가졌다. 즉 하나는 자신들이 풀무 불에 들어가도 하나님께서 능히 건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또한 다른 하나는 비록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아서 자신들이 풀무 불에 타 죽을지라도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겠다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겼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의 더 큰 시험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로 하여금 참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히브리 세 청년들이 직면했던 다니엘 3장의 믿음의 시험을 가능한 한 여러 번 읽어보라.

1. 다니엘 3:16-18을 읽으십시오. 그들이 한 말의 중요한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 원칙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것입니까?(참조 마 10:28).
답:
다니엘 3:28-30을 읽고, 왕이 자기가 본 광경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보라. 왕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았지만, 아무튼 이 세 청년의 믿음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이방 세계에 힘 있게 증거되게 되었다.
이제 새 제국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믿음의 시험인 사자굴의 다니엘 이야기(단 6장)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2. 이 새로운 왕이 이미 다니엘의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3.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였습니까? 그 증언은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습니까? 이 증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이 없이도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답:
만일 이 히브리 청년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타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 두 사건에서 그들이 ‘변명’하기란 얼마나 쉬웠을지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였고 그 결과로 참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널리 전파할 수 있었다.

교훈: 사느냐 죽느냐하는 기로에서 하나님께 충실하기로 선택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 참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널리 전파되었다.

도입)
느부갓넷살은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하면서 세 친구를 조롱한다.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그런 조롱을 받고 산다. 그러나 빈정대는 왕의 질문, 조롱하는 왕의 물음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세 친구들은 대답한다.. 기가 막힌 대답이다. 우리는 세상의 공격이나 빈정거림이나 야유에 대답하느라, 때로는 하나님을 변명해주느라 바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호하고 변증해주는 것이 필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시다. 어떤 신이 너희를 구해 내랴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을 논증하거나 변명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불 속에서도 왕의 손에서도 구해내시리라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있어야 한다. 이 친구들처럼 우리도 세상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나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시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미국 방문 시 그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을 쓴 이유를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요한복음 3장 16절,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어도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길 수 없다는 고백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결단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세상은 무서워한다. 이 세상에서 죽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인들은 무서워했다. 역사적으로 종교사적으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지만 로마를 뒤집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죽어야 사는 사람들이다. 죽어야 부활하기 때문이다.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기 때문이다. 내 배우자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싸운다거나,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공부가 뒤쳐질 때 배가 아파서 어쩔 수 모르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어떤 일에도 절대 양보 안하고, 이익이 걸리면 끝까지 해보는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 절대로 양보 없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은 무시한다. 그런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줄 틈이 없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이 무어라고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이나 있나요 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절대로 용서 못하고 꽁꽁 쌓아두고 그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세상은 감동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사랑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죽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 모두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죽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가정이 살고 내가 산다. 내가 죽어야 복음이 널리 전해진다.

금요일(9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제39장 ‘바벨론의 궁정에서’(479-490), 제40장 ‘느부갓네살의 꿈’(491-502), 제41장 ‘극렬히 타는 풀무’(503-51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다니엘을 부르셔서 당신을 증거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당신의 증인으로 부르신다. 일상생활의 큰 일에서 뿐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나라의 원칙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어떤 큰 일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날마다 하나님께 충성을 나타낼 기회를 잃는다. 날마다 그들은 생애의 작은 의무들을 성심성의를 다하여 수행하는 일에 실패한다. 그들은 큰 재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큰 사업을 기다리면서 이와 같은 열망에 자족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시간은 흘러가버린다”(선지자와 왕, 487-488).
“그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이 낙성식에 초청을 받았던 여러 나라의 대표자로 말미암아 각 나라에 전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충성을 통하여 온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셨다”(선지자와 왕, 51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경험은 시험의 때에 타협함이 없이 원칙 위에 굳게 설 수 있는 어떤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까?

2. 사자굴에서 무사히 구출받은 다니엘의 이야기와 끝내 목 베임을 당한 침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비교할 때, 이들의 서로 다른 결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다니엘서는 믿음의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으나 참된 원칙을 수호하고 그들의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선택한 네 명의 청년들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신실함은 바벨론의 통치자들과 백성뿐 아니라 주변 국가의 백성에게도 극적인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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