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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선교의 기둥이 된 사도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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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8-23 18:39 조회5,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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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8월30일 일몰(日沒) 오후7시4분

제9과 선교(宣敎)의 기둥이 된 사도 베드로

<확대경(擴大鏡)>
◎ 진정한 종은 도저히 용서(容恕)받을 수 없는 실수(失手)나 과오(過誤)를 범(犯)했을 때 용서(容恕)를 받으면 이는 그 용서해준 분에게 평생(平生)의 종(노예(奴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큰 곳에 은혜(恩惠)가 더하다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허락받은 용서(容恕)가 사랑으로 이루어 졌다면 그 돌려받은 생명을 그 용서해준 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사랑에 법칙(法則)이 아닐까요?

일(日) 8월24일
<베드로에게 위임(委任)된 사명 : 집중탐구(集中探究).(마 16:18)>

◎ 마태복음 16:18절의 오해(誤解)의 소지 집중탐구(集中探究)

☆ <로마 케톨릭의 오류(誤謬)를 위키 백과 : 페투르스에서 발췌(拔萃) 해본 것입니다>
페트로스, 베드로 또는 페트루스(? ~ 64년)는 사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였던 사람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아와 형제 관계다.
원래 이름은 시몬(Simon)이라 하며(마태 4,18; 마르 3,16; 루카 5,8; 요한 1,40), 베드로는 예수가 지어 준 이름으로서, 그 뜻은 바위라는 의미의 아람어 케파(kefa)를 고대 그리스어로 소리나는 대로 적은 후, 낱말 뜻을 고대 그리스어 페트로스(Petros; 라틴어 Petrus)로 풀이한 것이다(요한 1, 41).
그리스도의 승천 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며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잠깐 동안 교회를 주재하였으나 네로 황제의 기독교 탄압 아래 거꾸로 된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기 때문에(마르 16,19),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제도를 현재까지 유지해 오고 있다.
그 예로, 현재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베드로의 264번째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성인. 로마 가톨릭에 의해 지정된 축일은 바울로와 같은 날짜인 6월 29일이다.
미술작품에서는 흔히 키가 작고 고수머리에 짧은 수염을 지녔으며, 얼굴에는 주름이 많은 남자로 묘사된다.
<참조 문헌 : 위키 백과 : 페투르스 참조>

☆<기타(其他)의 오류(誤謬 )주장과 설명>
1. 그리스도는 반석(磐石)이고, 반석(磐石)은 베드로라는 주장(主張)이 나옵니다.
과연(果然) 그런가요?
일부(一部)사람들의 주장의 글을 인용(引用)해 보겠습니다.
(골2:2) “하나님의 비밀(秘密)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설명(說明)>
-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고전10:4) 다 같은 신령(神靈)한 음료(飮料)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神靈)한 『반석(磐石)』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시라
(요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모래)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飜譯)하면 베드로)

☞ 베드로{=반석=그리스도}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지어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磐石)위에 내 교회(敎會)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權勢)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이 대목을 주의하여 볼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 인 것을 제자들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는데, 과연(果然)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까요?

아니지요. 여기서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칭(稱)한 것이고 이것이 감추어진 사건(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주장에 대한 반문(反問)을 함께 질문(質問)합니다.
고린도전서10:4의 반석(磐石)은 "그리스도"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반석(磐石)"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의 뜻이 '반석(磐石)'입니다. 맞습니다.

[질문1]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인가요?
그런데,
[질문2]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磐石)"이라고 칭(稱)한 곳이 많습니다.
그러면 성부(聖父) 하나님도 "그리스도"라고 해야 하나요?
[질문3]
시편 18:31 여호와 외(外)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外)에 누가 반석(磐石)이뇨
이 말씀대로라면 베드로도 "하나님"이 되겠군요.
[질문4]
시편 73:26 내 육체(肉體)와 마음은 쇠잔(衰殘)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磐石)이시요 영원(永遠)한 분깃이시라
베드로가 이 분의 마음속으로 들어갔군요.
이때는 베드로가 태어나기도 전인데 어떻게 들어갔을까요? 궁금합니다.

[질문5]
시편 78:15 광야(廣野)에서 반석(磐石)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水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반석(磐石)이 쪼개진 적이 있네요. ㅉㅉ 안타깝군요. 그리스도가 쪼개진 적이 있다니…….
물론 위의 반석(磐石)은 실제로 광야(廣野)에 있던 반석(磐石)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편 78:35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磐石)이시요 지존(至尊)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救贖者)이심을 기억(記憶)하였도다
여기는 또 하나님이 반석(磐石)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결국, 성경에 언급(言及)되는 반석(磐石)이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히브리적인 독특(獨特)한 문학적(文學的) 표현(表現)이며,
신약(新約)에서 역시 그리스도가 "영원히 견고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의미(意味)로 쓰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를 "반석(磐石)"이라고 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라고 고백(告白)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告白)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救援)의 반석(磐石)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告白)하는 그의 믿음이 "반석"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고요…….
그 믿음이 곧 "천국의 열쇠"구요…….
어린이들도 이런 찬양을 부릅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믿음이 열쇠입니다. 이 열쇠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받았습니다.

또 봅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는 베드로 전, 후서에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리스도가 되다니요…….
만약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면 펄쩍 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否認)한 것도 가슴 아픈데,
이제는 자기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고 하니 세 번 부인(否認)한 것보다 더 심한 일이 되어 버렸네요…….

◉ 결론적(結論的)으로,
'베드로가 그리스도'라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비유(比喩)로 쓰인 "반석"을 억지(抑止)로 베드로의 이름에다 꿰어 맞춘데 에 오류(誤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이것을 성경에서 무슨 대단히 신비스러운 비밀(秘密)이라도 푸는 것처럼 말합니다. 눈여겨보고 정신 차려서 살펴야 합니다. 유전(遺傳)이나 전통(傳統)에 의해서 따른 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인생으로써의 중요한 신앙(信仰)은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解釋)을 해야 정답이 나옵니다.

☞ 마태복음 16:18절을 올바르게 성경적(聖經的)으로 정리(定理)한다면 이런 뜻입니다.
이 성경 절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반석(磐石)과 모퉁이 돌로 묘사(描寫)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시 18:31)라고 했고, 사도 바울도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고 했으며, 사도 베드로 자신도 예수님을 가리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벧전 2:6)이라고 했다.

◉ 베드로는 초기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가 아니라 반석이신 예수님이시다.
반석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구주(救主)되심을 믿고 입으로 시인(是認:고백)하면 그 누구라도 반석의 능력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베드로와 같은 반석의 이름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월(月) 8월25일
<베드로의 그림자.(행 5:15)>

◎ 사도행전 5:12~16 (베드로의 그림자)
구약시대(舊約時代)에 그림자는 시간(時間)을 가리키는데 사용(使用)하였습니다.
또 그림자는 재앙(災殃)과, 재난(災難)을 피하는 장소(場所)를 말하기도 했고,
우리 인생이 짧고 빠르게 지난다는 것을 비유(比喩)할 때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12~16에서는 그림자가 다른 의미(意味)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병자(病者)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를 접(接)할 때 병든 몸이 나음을 입는 신비(神秘)로운 역사가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아니고 본체에서 파생된 하나의 부산물(副産物)입니다.
그림자는 실체(實體)가 없기에 무게도 없습니다. 우리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실체가 없기에 그림자는 무가치(無價値)한 존재(存在)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그림자가 사람을 치료(治療)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저 나를 위해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날마다 섬겼습니다.
날마다 섬기는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베드로의 그림자가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두고서 그 목표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우리가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열심히 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삶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들이 기적(奇蹟)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그림자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의 삶의 모습(模襲)을 반영된 그림자를 우리는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냄새, 혹은 삶의 그림자가 과연 베드로의 그림자처럼 사람을 살리는 그림자냐! 사람을 죽이는 그림자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빛과 향기를 전하고 있는가?
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살면서 나의 말하는 것, 나의 행동하는 것, 나의 삶이 정말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인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의 후기의 신앙은 어떤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탄압과 핍박에도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화(世俗化)된 신앙(信仰)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분명하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향기와 그림자가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로 만드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신앙을 가진 자만이 그림자를 낼 수 있고 세상과 타협(妥協)하는 자는 절대로 그림자를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바르게 서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위대한 재림성도(再臨聖徒)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베드로는 지난날의 자신의 실패(失敗)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그로인한 예수님을 한시도 망각(妄覺)할 수 없었고 자신의 삶 전체를 철저하게 예수님을 믿고 의지(依支)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베드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충만히 받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신(神)처럼 받들기 시작 하였고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도전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경험이 나의 삶의 경험이 되도록 적용해봅시다.

화(火) 8월26일
<초기(初期)교회(敎會)의 조직(組織).(행 11:19-26)>
◎ 사도행전(使徒行傳)의 증거(證據)
초대교회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료(史料)는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의 본론은 초대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다락방’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행 1:13).
그리고 로마 ‘셋집’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행 28:30).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昇天)하신 후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한 집의 “다락”에 모였습니다(행 1:13). 이곳에 모인 사람의 수는 약 12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유언적(遺言的) 선교명령을 붙들고 합심하여 기도에 전념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 충만(充滿)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초대교회의 탄생(誕生)이라고 말합니다.
초기 성도(聖徒)들은 날마다 성전(聖殿)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복음전파(福音傳播)와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사도(使徒)들은 성전에서도 복음을 증거(證據)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悔改)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證據)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공동체(共同體)의 거점은 행 1:13절에 언급된 다락방을 중심(中心)한 가정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초대 교회는 그 시작(始作)에서부터 가정교회 형태(形態)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迫害)가 심(深)해졌고, 성도들의 모임 장소는 완전히 가정으로 옮겨졌습니다.
행 8:1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逼迫)이 났다”고 했습니다.
행 8:3절에서 사울이 “교회를 잔멸(殘滅)할 때 각 집마다 다니며 남녀를 끌어다가 옥(獄)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잔멸(殘滅)하는 것”과 “각 집마다 다닌 것”이 연결되어 있고, “남녀를 끌어간 것”과 “옥(獄)에 가둔 것”이 연결(連結)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란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가정교회들을 지칭(指稱)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 12:12절에 보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마리아의 집이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장소요, 기도처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의 집이 핍박의 시기에 은밀한 예배처소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여러 가정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천사(天使)의 도움으로 감옥(監獄)에서 나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한 후, 자신의 해방(解放)에 관하여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 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행 12:17)는 사실이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야고보와 형제들에게”란 다른 가정교회들이 집회장소와 예배처소로 제공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은 제 3의 가정교회를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여러 개의 가정교회에서 행하여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가는 이방선교에서 가정교회의 형성을 팔레스타인의 가정교회보다도 더 분명하게 증거(證據)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루디아의 집입니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를 통해 복음을 영접한 루디아는 자기 식구들과 함께 침례(浸禮)를 받았습니다(행 16:15). 이후에 루디아의 집은 가정교회가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은 사도(使徒)들이 빌립보에서 선교(宣敎)하는 동안 거점(據點)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監獄)에서 나온 후에 “루디아에게 가서 형제들을 보고 위로하였다”(행 16:40)는 말에서 분명하게 입증(立證)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夫婦)는 사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가정교회를 세웠습니다(고전 16:19). 그런데 그들은 여기에서 아볼로와 같이 학문(學文)이 뛰어났던 인물을 깊은 신앙(信仰)으로 양육(養育)하여 제자를 삼는 쾌거(快擧)를 이루었습니다(행 18:26).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들이 서로 합하여 전체적인 지역교회를 이루었고, 지역교회는 가정교회들의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가정교회의 근간에는 가족교회가 있었습니다. 가족교회는 초기 기독교에서 최소단위의 교회였습니다.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시기(時期)였던 것입니다.

◎ 물질적(物質的)인 측면(側面)에서
초기 사도들과 성도들은 자신들이 곧 성전에서 추방당할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집회를 위하여 성전과 집을 동시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루살렘 밖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하였습니다. 회당이 기독교인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당에서도 추방(追放)당하고 말았습니다. 따로 공식적인 예배처소를 마련할 수 없었던 초기 기독교는 어디에나 가정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2세기에 들어서도 집회를 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기보다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회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물질을 모으거나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타 사회 또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조금 복잡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안전한 은신처를 찾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게 핍박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은신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가 심각한 핍박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가정교회 형태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모든 가정이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교회는 무너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정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교회로 구성된 기독교는 무너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에 가정교회는 이웃에 대하여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은 가정교회에 호의적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자연스럽게 타종교인, 이웃들을 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또한 초기 기독교가 가정교회로 출발함으로써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 질이 다른 체계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회당을, 이방인은 신전을 중심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신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건물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것은 유대교와 이방종교에 대해 초기 기독교의 차별화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신전 중심일 때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방식으로 물질과 공간에서 자유를 얻음으로써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비가시적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가시적인 것에 구속받지 않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 새로운 신자(信者)들이 생길 때 지도자(指導者)들을 파견(派遣)하여 그들을 격려(激勵)하고 말씀에 굳게 서도록 가르치며 교회를 조직(組織)하고 복음사업(福音事業)을 잘 할 수 있도록 체계(體系)를 갖추어주었다.

◉ 교회가 성장할 때에는 필연적(必然的)으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 한다.
교회의 발전에 원동력(原動力)은 선교적 사명(使命)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이를 더욱 효과적(效果的)으로 하기위해서는 관리(管理)를 위한 조직적(組織的)인 체제(體制)를 갖춰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관리와 선교적 사명(宣敎的使命)사이에 적절(適切)한 균형(均衡)이 반듯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베드로와 초기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역(地域)에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養育)하고 훈련(訓練)하기 위해 그곳에 선교사들을 파송(派送)하였다.

수(水) 8월27일
<더 넓은 비전.(행 1:8)>
◉ 우리말에 견문(見聞)을 넓이라는 말이 있고,
큰 그릇이 작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베드로는 자신의 전도 사명이 유대인들에게만 한정(限定)되어 있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전반부(前半部)는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주로 사역을 하였고 사도행전의 후반부(後半部)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異邦人)들을 위하여 사역한 것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 사랑의 공동체
가정교회 형태에서는 성도들의 사랑의 유기성이 뛰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43-47절, 4:32-37절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순전한 기쁨으로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찬송과 기도가 넘쳤습니다. 이러한 인격적인 사랑의 유기성은 외부의 극심한 박해와 이단의 공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사랑의 유기성이 뛰어난 초대 교회는 열정과 힘이 넘쳐났습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통합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 열린 공동체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개방성입니다. 가정교회는 남녀, 신분, 교육수준,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고대에 중압감을 주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높은 자와 낮은 자, 학식 자와 무학자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가정교회는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장벽들이 깨어지고 모든 기독교인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평등하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사실상 가정교회의 이와 같은 개방성과 평등성의 실현은 당시의 가부장적이며 계급주의적인 사회에 대한 큰 도전이었습니다.

◎ 선교 공동체
이렇게 결속성과 개방성을 지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정교회가 선교역사를 활발하게 만든 요인은 각 계층 사람들에게 말보다도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규모의 공동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며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교회의 생명력은 다른 종교들과 철학들을 이기고 모든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가정교회 성도들의 삶은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역동성과 생명력이 살아 있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제도화되고 교권화 되었을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었고 선교는 죽어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평신도 복음운동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사도들과 소수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탄생되었습니다. 가정교회는 처음부터 평신도 복음운동이었습니다. 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도의 수가 많아지고 가정 교회들이 확산되면서 사도들이 그 사역을 다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사도들에 의하여 양육된 다른 평신도들이 말씀사역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개척이 평신도 빌립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아프리카 최초의 신자가 된 에티오피아 내시도 빌립의 전도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행 8장). 뿐만 아니라 초기 가정교회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난 이후를 감당할 교회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 가정교회의 사랑의 유기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신앙과 사랑의 관계, 그리고 형제와의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강조한다든지, 형제와의 관계만 강조하지 말고, 이 십자가(十字架)의 균형이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강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세력을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유지하면 된다는 경향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몸집이 커질수록 성도들의 인격적인 교제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초대 가정교회들이 가졌던 성도들 간의 사랑의 유기성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몸을 이루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섬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적인 성도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늘날 과연 어떻게 가정교회의 이상을 회복할 것이며, 과연 어떻게 가정교회의 모습을 재현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본받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듯이 철저한 헌신과 자기희생 없이는 가정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복음(福音)은 유대의 지경(地境)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했다.
그러나 심지어 사도(使徒)들의 마음도 선입견(先入見)에 가려져 있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外貌)를 취(取)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의(義)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라는 간증을 하고 있다.

◉ 베드로가 유대인들만 선민(選民)으로 한정(限定)된 것만으로 생각했던 것과 같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도 현재(現在) 세속적(世俗的)인 부절제(不節制)의 비(非)그리스도인들이나, 타교파(他敎派)교인들에게 삶의 질(質)을 폄하(貶下)하거나 묵살(黙殺)치 말고 자신의 편견(偏見)을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寶血)로 제거(除去)하고, 사도행전 1:8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성령이 임하면 권능(權能)을 받고 → 유대인에서 → 사마리아인(이방인(異邦人))에게로 →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傳播)하여야 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경계(境界)를 넘어 이방인(異邦人)에게도 복음을 전파(傳播)하라는 지시(指示)를 받았다. 우리도 문화적(文化的) 편견(偏見)을 뛰어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목(木) 8월28일
<은혜(恩惠)안에서 자라감. (갈 2:11-14)>
◎ 자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자라지 않는 다는 것은 죽은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자라는 생물에는 정지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받은바 은혜(恩惠)를 잊지 않을 때 즉 기억(記憶)할 때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처럼 기억 할 때 온전한 예배(禮拜)를 드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며 무엇을 기억 하는 것일까요? 그에 기초(基礎)는 안식일(安息日)인 것입니다.
① 하나님께서 천지(天地)만물(萬物)을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여 창조의 기념일로 기억 하는 것이요
② 혼잡한 세속(世俗)에서 거룩한 성도(聖徒)로 삼아주심을 기억 하는 것이요
③ 죄로부터 구원(救援)해주신 구속(救贖)의 표(表)를 기억 하는 것이요
④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행복의 표를 기억하는 것이요
⑤ 하나님과 나사이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의 백성임을 표징으로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 등이다.

◎ 베드로서신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그 근본적 정체성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eklektoi)이 된 것은 특별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말할 수 없이 큰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특권적 부르심은 벧전 3:10에서는 복을 유업(遺業)으로 받게 하고자 부르심을 입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것을 세상 속에서의 새로운 현실로 가진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삶의 양식, 곧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고 도리어 복을 비는 자세를 가지고 살도록 부름 받고 있다(벧전 3:9). 이것이 그들을 부르신 거룩한 자를 따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들이 되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이며(벧전 1:15),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힘써 그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는 권면을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 구원(救援)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베드로서신은 이미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수신자(受信者)들의 이전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전에는’과 ‘이제는’의 비교를 통해 대비시키고 있다(벧전 1:14, 2:10, 2:25). 또는 ‘지나간 때’와 ‘육체의 남은 때’의 대비를 사용하기도 한다(벧전 4:2-3). 그리고 베드로후서에서도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말함으로써(벧후 1:3) 구원에 속한 것들이 이미 성도들에게 은사로 주어져 있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이 구원을 주신 분은 “모든 은혜(恩惠)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벧전 5:10)이다. 이 구원은 특별히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어진 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받으심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조차도 누리지 못한 그 은혜를 베드로의 수신자들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 종말 시대의 구원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밝히기 위함이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비록 예수를 육신적으로 보지는 못하였어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다(벧전 1:8).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근거로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한다.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는 은이나 금 같은 것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값진 구속을 우리에게 허락하는 통로가 된다. 이사야 53장을 바탕으로 벧전 2:22-25에서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가지는 함의는 대속적 효과의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을 위한 모범(2:21)의 면에서도 두드러지게 강조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불가분리적인 연관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모든 특권적인 위치 가운데 나아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한 긍휼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썩지 않는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들이 되게 만들어 주셨다(벧전 1:3-4). 거듭남을 부활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시작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목적지이기도 하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는 부활의 생명 속에 들어가고 또한 부활의 생명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와 같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그 구원은 미래적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을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벧전 1:5)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벧전 1:7, 13 등)를 기다려야 하고, 또한 그 과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시험의 상황들 속에서 인내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벧전 1:13). 그 과정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권면처럼 그 모든 삶의 행실 속에서 구별된 자의 삶이 드러나야만 할 삶으로의 부름이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한 삶이다. 그 속에는 계속적인 자라감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필요한데,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eis sōtērian)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말한다. 구원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삶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향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자라감이 필요하며, 베드로후서에서는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은사로 주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더욱 힘써” 행할 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벧후 1:5, 1:10). 때로는 구원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벧전 4:18에서는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이미 ‘의인’으로 칭하여진 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면”(4:16)이라는 말에서와 같이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그 구원의 마지막까지 이르는 데에는 끊임없이 살아 있는 자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서신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안주하게 만들지 않고 역동적으로 순종하며 살아 행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비록 고난이 따르는 세상 가운데서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영광스러운 부름을 주신 하나님과 또 그가 장차 나타내려 하시는 미래의 영광을 생각할 때는 우리의 ‘선한 행함’의 길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과의 하나 됨과 친밀함을 더욱 깊게 만드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성도는 “그[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벧전 4:13) 곧 재림의 때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 때는 다르게 표현하여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벧전 4:17)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런 표현은 구약의 언어적 표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렘 25:29, 겔 9:5-6, 암 3:2, 슥 13:9, 말 3:1-5 등), 현재의 고난을 성도를 정결케 하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과 연결이 된다. 고난은 결국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영광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현재 불순종하며 ‘사람의 정욕을 따라’ 또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영광의 시간이 두려운 심판의 시간이 될 것이다.

베드로서신 속에서 고난은 정욕을 따라 살던 옛 삶의 모습들을 정화해가는 과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근심으로 보이기도 했던 고난이(벧전 1:6) 우리가 누리게 될 그 영광의 상태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 가는 과정임을 알 때는 오히려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이다(벧전 4:13).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벧전 1:17)이신 하나님께서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벧전 5:10). 이런 목적을 바라보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 베드로의 권면이다(벧전 4:19).

◎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베드로서신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믿는 자들을 위한 대속의 효과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천적(實踐的) 삶의 모범적(模範的) 본(本)으로서의 역할(役割)도 가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그 발자취를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강조(强調)되고 있다(벧전 2:21).

◎ 세상(世上)을 향(向)한 선(善)한 증거(證據)를 위(爲)해
베드로서신은 비방(誹謗)하는 자들의 현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베드로는 그들을 가리켜 “너희를 악행(惡行)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라 칭하는데(벧전 2:12),
그들의 비방(誹謗)은 전혀 근거(根據)가 없고 부당(不當)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 비방이 부당한 것이지만, 성도들은 그 비방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부름 받은 대로 선한 행실을 실천(實踐)하게 되면, 그런 비방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벧전 3:16).

베드로서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한 면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대상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회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 면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계속적으로 반역 가운데 머물러 있다. 특별히 이방인의 세상은 그 악한 행실로 대표된다. 그 안에는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비롯하여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연락, 무법한(athemitos = 의식적으로 더러운) 우상숭배 등의 악행들이 가득하며, 정당한 권위를 훼방하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다(벧전 1:18, 2:1, 4:3, 벧후 2:10). 그들이 성도들을 비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의 ‘극한 방탕’에 동조하지 않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벧전 4:4).

이처럼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행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교회를 비방하는 일에 대단히 민첩하다. 늘 그런 비방을 찾아낼 비판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이것이 더욱 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행실에 힘을 써야 할 이유이다. 불필요한 비방거리들을 주지 않고, 오히려 부당한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비방하는 자신들의 참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위에서 우리는 베드로서신의 분명한 한 특징을 잘 볼 수 있었다. 행실로 표출되는 구원의 삶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위하여서와 또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증거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외모(外貌)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벧전 1:17)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다.’(참고, 고전 1:2 등)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3인칭 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자아 포함적 고백적 화행을 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말의 행위가 가지는 발화수반력(發話隨班力) 이하 화수력)은 우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하나의 합치된 변화를 낳는다. 다시 말해 그 효력이 그 부름에 합당한 삶과 자세의 변화를 수반하는 데 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발음연습하기 위해 불러보는 것이나 연극 속의 대사로 불러보는 것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생략된 법칙: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효력을 가진다.
경우: 말씀에 의해 ‘그때 세상’이 만들어지고 심판되었다.
결론: 따라서 ‘이제 세상’도 그 동일한 말씀에 의해 좌우된다.

베드로서신 속에는 베드로의 유언적 절박감이 배어 있다. 특히 자신의 두 서신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벧후 3:1) 베드로후서 속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4-15). 정말 우리는 베드로가 내다보았던 그 ‘필요한 때’를 맞고 있다. 세상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면서 세상에 동화되어 갈 위험 앞에 놓여진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길에로의 부름의 메시지가 꼭 필요한 때를 맞고 있다.

◎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 2:11-14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베드로는 여전히 민족적(民族的) 문화적(文化的) 편견(偏見)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살필 수가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의 진정한 상태를 더 깨달았어야 했다.

※ 그리스도인들일지라도 같은 사명(使命)을 위해 함께 일할 때에는 오해(誤解)와 불화(不和)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초대교회에서 여실히 증거(證據)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缺點)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사용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베드로가 유대인 신자들의 비난(非難)을 두려워하여 이방인(異邦人)과의 교제(交際)를 꺼린 사실은 그가 아직도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할 부분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을 참고하자.

◉ <베드로를 통해서 배울 교훈(敎訓)>
◎ 자신을 과신(過信)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存在)로 생각하는 우월감(優越感)을 가졌을 때가 많았음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말 중에 [나] 라고 하는 말이 문제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자세는 영적으로 볼 때 가장 사탄이 이용하기 쉬운 자리에 자신을 노出시키는 행위(行爲)가 되는 것이다.
바래새인들의 자세(姿勢)에서도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받아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기도(祈禱)에도 나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아니합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드러내기를 좋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많이 받은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은혜를 잊어 가는 것이다.
가상 임신(姙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니면서도 꼭 같은 증상(症狀)을 동반(同伴)한다는 것이다.
오늘 가상(假像) 충성(忠誠)자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자 같은데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성도(聖徒)인 것이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때는 실제로 다른 제자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었을 때 였다. 시험(試驗)이란 대체로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나도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조심하고 경성(警省)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 속에는 자신을 믿고 있을 때가 항상 넘어짐의 시기(時期)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시험(試驗)은 환경(環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환경(環境)은 이러한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法廷)이 아닌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가야바의 법정(法廷)은 사형(死刑)을 집행하는 곳이 아니다.
재판(裁判)은 결국 빌라도의 법정에서 최후의 판결(判決)이 나게 되어 있다.
즉 베드로는 이미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부인(否認)했던 것이다.
또 칼을 든 군인(軍人)이 베드로를 붙잡고 위협(威脅)을 했더라면 베드로가 본능적(本能的)으로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질문한 사람은 계집아이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맹세(盟誓)하고 심지어 저주(詛呪)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베드로는 이미 마음으로 주님을 모른 체하기로 생각하고 그 가야바의 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 후 그가 변화(變化)를 받아 공회(公會) 앞에 서서 내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 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결단(決斷)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한 것을 비교(比較)하여 보면 얼마나 큰 차이(差異)가 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베드로는 헤롯에게 체포(逮捕)되어 다음날 사형(死刑)에 처해 질지도 모르는 그 밤에 옥중(獄中)에서 수족(手足)이 결박(結縛)되고 보초(步哨)들이 지키는 가운데서도 깊이 잠들어서 천사(天使)가 옆구리를 칠 때 비로써 깨어났던 그 담대(膽大)성과 비교(比較)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 할 때에 환경(環境)은 문제가 아니었다.
성경에 많은 신앙(信仰)인들이 넘어지는 것은 환경(環境) 때문이 아니었고 신앙(信仰)이 없었기 때문이며 신앙승리의 모든 요소(要素)도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승리(勝利)케 한 것이다.

<초점(焦點)>
1. 하나님께서는 모순 많고 연약(軟弱)하고 흠(欠)이 많은 어느 인간(人間)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應)하는 자를 하나님의 사도(使徒)로 사용(使用)하신다.

2. 아무리 죄가 크고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회개(悔改)하고 그분을 의지(依支)하고 신뢰(信賴)하는 만큼 축복(祝福)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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