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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선교의 기둥이 된 사도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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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8-22 08:21 조회4,6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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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선교의 기둥이 된 사도 베드로
8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분)

도입)
성경에 완벽한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구약에는 야곱이 있고 신약에는 베드로가 있어 행복하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된 베드로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가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었으나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반석과 같은 듬직한 기둥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다. 즉 시몬이 베드로가 되는 데에는 예수님의 끊임없는 용서와 인내하시는 사랑이 있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박해가 시작되자 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나 도망가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비롯하여 무척 겁에 질려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가는데 난데없이 한 사람이 앞길을 가로막고 나타났다. 쳐다보니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네가 도망 나온 로마로 십자가를 다시 지기 위해 간다.”고 말씀하셨다. 그 대답을 듣고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다시 들어갔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기억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연구범위: 시 18:2, 31, 95:1, 마 16:18, 행 5:15, 10:2-5, 28-43, 11:19-26, 갈 2:11-14.

중심 사상: 베드로는 변화함을 받은 후에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배워야 할 교훈들이 있었다.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 우리는 베드로의 놀라운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가 어떻게 불안정한 제자에서 교회의 기둥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배웠다. 베드로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후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떠나 성경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그가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돌이킨 후에 자신의 삶을 오직 하나의 사명, 즉 예수님의 양 무리(우리 안과 우리 밖에 있는 양 무리)를 영적으로 먹이는 일에 바쳤다.
지난주에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위대한 선교사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삶에 역사하신 일들을 살펴보았다. 이번 주에 우리는 그가 사명을 수행한 결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초기교회에서 감당했던 중심적인 역할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경험을 추적할 것이다.
베드로의 성공한 이야기뿐 아니라 실패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을 위한 힘 있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일요일(8월 24일)
베드로에게 위임된 사명: 집중 탐구(마 16:18)

도입)
"너는 베드로라"(petros, 페트로스:돌 <모든 신자들은 돌들이다. 베드로전서 2:5과 에베소서 2:21을 보라>) 하신 후, "내가 이 바위 (petra, 페트라:큰 바위-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귀중한 교회를 허물 많은 한 인간의 지도력에 의탁하셨을 리가 없고, 더욱이 그 지도력에 온전한 계승권을 부여하셨을 리 만무하다. 로마 교황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Vicarius Filii Dei) 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때, 우리는 지상에서 주님을 대신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은 성령님이시지 교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대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확히 대리자(Vicar)가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보내지셨고(요 16:7-5), 성경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딤후 3:16).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인간의 지도력에 맡기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친히 지금도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그분의 무오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곧, 현존하시고 무오하신 성령님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위'와,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고전 3:11)"놓여진 그 기초 외에 어느 누구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으니, 그 기초는 바로 그리스도라" 고전 10:4 -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시라. 에베소서 1:22,23 -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2;20-그리스도 예수께서... 으뜸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구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약 34번에 걸쳐 바위나 이스라엘의 바위로 불리셨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고, 그분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시며, 성령님께서 대리자요,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과,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성경이 유일한 권위임을 가르치고 있다. 참된 교회(THE TRUE CHURCH)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며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교회이다. 참된 신자들은 카톨릭교인(Catholics)이 아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불려졌다.

마태복음 16:18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 중 하나이다. 사람들이 이 구절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독교 역사가 변천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우셨다고 해석하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불러왔으며, 베드로를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반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즉 나 자신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해석한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성경상의 증거는 후자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강력히 뒷받침해 준다.

1.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여기에 말씀하신 반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신 32:4, 시 18:2, 31, 95:1, 고전 10:4, 엡 2:20, 벧전 2:6).
답:
베드로가 어떤 특권을 누렸든지, 그가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그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든지 간에 하나님의 교회는 죄 많은 인간을 기초로 세워진 적이 없다. 예수님 자신이 반석이시며, 그분이 교회의 기초이시다. 베드로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이 기초 즉 반석이신 분위에 놓일 때에만 안전하며, 우리 주님의 말씀과 명령에 믿음으로 굴복하고 순종할 때(참조 마 7:24)에만 평안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미래를 알고 계셨고,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을 알고 계셨으나, 그분께서는 죄인이며 타락한 인간에 불과한 그를 당신의 교회의 초석으로 삼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교훈: 베드로는 초기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가 아니라 반석이신 예수님이시다.

부가적용)
베드로라는 말은 '페트로스'로서 움직일 수 있는 반석을 말하는 남성 명사이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마 16:18절의 '반석'(페트라)은 여성 명사로서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을 말한다(마 7:24,벧전2:4등 참고). 베드로 자신도 반석이 예수님이라고 했다. 개신교 목사들의 경우도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아니다. 사단이라는 것은 사단이 베드로를 통해 역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가룟 출신 유다에게 사단이 팔 생각을 넣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요13:2.27). 사단은 곧잘 사람을 통해 시험한다. 아담을 넘어트리려고 하와를 이용한 것도.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베드로는 이방인과 음식을 같이 먹다가 할례자들이 뭐라고 할까봐 자리를 피한 것을 외식자라고 바울사도가 책망한 것이 있다(갈2:11-). 이렇게 인간은 누구든지 변하고 인간을 두려워하여 변질되기도 하므로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될 수도 없고 교회의 주인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며(행20:28),머리가 되신다(엡1:22). 베드로의 피가 아니고, 베드로가 머리가 되는게 아니다. 베드로가 교황도 아니다. 베드로는 사도일 뿐이다. 교회의 황제는 인간이 아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7).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 졌느니라(2:13). 기독교가 이교 신앙과 융합되어 A.D. 315년경에 국교로 부상하기 전까지는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결코 이교도적인 배교에 가담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길은 좁았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타협하거나, 그들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순교의 길을 택함으로써 지옥문들이 참된 신자들을 대항하여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내 백성아, 그녀로부터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예하지 말며, 그녀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고 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더럽히거나 속이는 일에 관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월요일(8월 25일)
베드로의 그림자(행 5:15)

도입)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가 없었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겠는가? 자기 속에 가능성이 1%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습니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오게 되었는가? 나도 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나도 노력만 하면 무엇이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노력하여 이룰 수 있는 정점이 어디까지 인가? 나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나오는 설교를 들어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는 자신의 능력을 고양시키는 쪽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예수 믿고 나서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전부 세상적인 것들이다. 아무리 겉으로 포장하여 주를 위한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 가짜와 진짜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켰을 때에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은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나의 권능과 나의 경건으로 일어난 것처럼 왜 나를 주목하느냐고 자기를 부인한 것이다.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온전히 낫게 하였다고 하였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한다.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이런 자들이 의의 일꾼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일꾼들은 자신의 외모를 자랑한다. 때로는 자신이 가장 연약하고 부족한 것으로도 나타낸다.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국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는 것인데 그 행위대로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종을 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자기는 뒷전으로 나가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나를 왜 몰라주느냐고 나오면 이것은 다 엉터리요 거짓된 종들이다. 베드로의 슬픈 그림자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잡혀 여러 번 실수하고 넘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자마자 베드로는 약 120명 되는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이름이 사도들 중 제일 먼저 언급되며,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택하는 일도 그가 주도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지난주에 보았듯이 베드로가 오순절 후에 군중을 향해 능력 있게 외칠 때까지는 그의 완전히 변화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행 2:14-41).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에 역사하신 결과로 3천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 다음으로 베드로에 관한 기사가 기록된 곳은 그가 오랜 친구인 사도 요한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는 장면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한 기록이 이곳에 처음 나온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쳐준 일이었다(행 3:6-8).

1. 사도행전 3:6, 12-13, 4:10을 각각 비교해 보십시오. 베드로의 말 속에는 어떤 공통적인 주제가 흐르고 있습니까?
답: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일을 이루어보려다가 실패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밤에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림으로 물 속에 빠져 들어가던 경험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때에 그분을 배신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던 자신을 부드럽게 꾸짖으시던 주님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분명히 교훈을 얻고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게 되었다.

2. 사도행전 5:15, 10:25을 읽으십시오. 이 두 기사에서 베드로는 어떤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뿐 아니라 이와 같은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그들에게 덮이기를 원하였다. 이제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능력을 충만히 입게 되었으나, 한편 가장 위태로운 영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교훈: 베드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충만히 받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받들기 시작했다.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도전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부가적용)
치유나 영적 싸움과 같은 것은 성경에 정확히 나와 있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다. 귀신을 내쫓는 것이 바로 영적 싸움인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일들을 그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 있는 대로의 교회이다. 교회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던 이유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인 줄로 생각하여 그것을 자랑하고, 안 받은 사람을 누르려 하고 예언과 같은 것이 검증이 없이 마구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시험은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이 될 것 같아 서로 섬기게 하셨고 자신들을 낮추게 하셨고 겸손을 가르치셨다. 그런 초대교회의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처럼 생각하여 그를 마치 초대 교황으로 만들고 계급을 만들어 낸 것도 모두 인간을 높이려는 인간의 발상에 불과하다. 성경에 베드로의 가장 많은 허물이 드러나고 적나라하게 나타난 것은 그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허약한 인간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능력이 나타났을 때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인간을 높이고 인간이 높아지려는 모든 시도는 그 출발이 사단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화요일(8월 26일)
초기교회의 조직(행 11:19-26)

도입)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힌 성도들이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주임을 깨달은 그들은 목숨을 바쳐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교에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본질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선교를 위한 공동체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증거 해야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도 적극적인 선교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도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참된 교회라면 반드시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에 매진해야 한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고, 교육시키고, 훈련시켜야 하고, 선교를 위한 물질과 마음과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부족해도 선교의 열정이 식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선교는 교회의 심장이요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단계에서 새로운 신자들은 그들의 소유와 물건을 공유했고, 예배하기 위해 매일 모였으며, 상호간의 친교를 즐겼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 2:47). 모든 일은 사도들의 지도 아래 잘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교회가 자라감에 따라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어야 할 필요를 분명히 느끼게 된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교회의 관리와 선교적 사명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있어야 할 것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행 6:2)고 판단하였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회중이 형성됨에 따라 적절한 교회 조직을 갖는 일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신자들이 그들의 새로운 믿음 안에서 적절한 훈련을 받고 양육을 받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께서 사도들과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본을 따라서)두 명씩 짝을 지어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1.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빌립이 사마리아에 새로운 신자들의 그룹을 형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행 8:14). 또 안디옥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행 11:19-26). 그렇게 대처하는 일은 왜 중요하였습니까?
답:
사도행전 전체에서,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 특히 이방인들 사이에서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는 모습을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거짓 교리에 휩쓸려 이교 사상으로 미끄러지기가 쉽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신자들은 신앙의 갓난아기로서 예수님 앞에 나아왔으므로 말씀의 ‘젖’을 먹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딱딱한 교리를 배우는 데에까지 자라도록 지도해 줄 필요가 있었다.

교훈: 베드로와 초기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하기 위해 그곳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부가적용)
선교는 주께서 교회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명하신 명령이요, 그들에게 부과된 최대의 과업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으로, 교회 존재의 목적이며 사명이다. 또한 교회의 사명은 선교의 사명과 세계를 위한 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선교가 교회 전체의 사역이기 때문에 교회와 선교가 다른 두 요소나 구조로 존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선교적이든지, 또는 온전한 교회가 아니든지 양단간에 하나일 수밖에 없는 긴장을 품고 나가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선교적인 분이며, 성경도 선교적 계시인데 하나님의 교회이며, 성경의 계시 위에 근거한 교회가 비선교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초기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하기 위해 그곳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은 바로 저들의 궁극적인 사명은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었다.

수요일(8월 27일)
더 넓은 비전(행 1:8)

도입)
사람의 가치와 존귀함은 변화될 수 있다는데 있다.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변화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삶이다. 인간이 아름답게 살지 못함은 변화되지 못하고, 변화를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변화를 상실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상실이며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하느냐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과 중요한 관계 속에 살아간 사람을 본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생애는 변화의 삶의 연장선에 서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의 제자에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는 순교자로 변화되었다. 이 변화는 내적 변화와 함께 나타난 외적인 변화였다. 그의 행동이 변화되었고, 그의 삶의 차원이 전혀 다르게 변화했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을 먹도록 하신 이 모든 다양한 경험은 그의 삶을 더 넓은 생각과 더 넓은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우리가 가진 가능성은 삶의 여러 경험들을 통해 베드로처럼 더 크고 넓은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순절 후에 베드로의 생애는 변화되었고, 그는 교회의 튼튼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더 배워야 할 것들이 있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처럼 자신의 복음 전도 사명이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사도행전 1:8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선교적 사명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아야만 했습니까?
답:
사도행전 10:1-14에서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서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유대인인 그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 10:14)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제 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이 환상 중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라고 요구하지 않으시듯이, 베드로에게도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의 환상은 하나의 비유였다. 처음에 베드로는 그 의미에 관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17절). 그러나 곧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으면서 그 의미는 명확해졌다.

2. 사도행전 10:28-43을 읽으십시오. 그 환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전에 깨닫지 못했던 무엇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까?
답:
오늘날 우리는 복음이 온 세상을 위한 기별이라고 분명히 알지만, 베드로와 같이 유대인의 배경에서 온 사람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 선입견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교훈: 베드로는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우리도 문화적 편견을 뛰어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부가적용)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위대한 사명을 주시기 원하시는가?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다 해외선교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을 넓혀 온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는 항상 온 세상을 자신의 사고와 활동의 무대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그런 비전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라.” 온 땅을 활동무대로 주셨다. 우리의 사고 지평이 더 넓어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가 할 일은 온 세상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우리는 좁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 세상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서 ‘온 천하’란 단순히 지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모든 영역을 말한다. '만민'으로 번역한 단어는 'pase te crisei'입니다. 영어로는 'every creature' 혹은 'all creation'이다. 직역하면 모든 피조물이다. 'crisei'란 단어는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포함한다. 복음이 필요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필요하다. 종교를 넘어 정치·경제·문화의 영역에도 복음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 모두 온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목요일(8월 28일)
은혜 안에서 자라감(갈 2:11-14)

도입)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이해하시는 분이라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렸는지 아셨다. 비록 그것은 믿음 없고 연약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연약함 그대로를 받으셨다. 물론 그의 생각에 파고 든 사단을 꾸짖으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당신의 은혜로 안으셨다. 서양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Dont 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 water." 해석을 하자면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지는 마라”는 말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제기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리면 안된다는 말이다. 물론 베드로는 잘못을 했다. 하지만 그 잘못 때문에 베드로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잘못보다 베드로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잘못 때문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갈라서는 것, 베드로가 정죄되고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자 승리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셨다. 사람은 정죄가 아닌 긍휼을 보여줄 때 변화가 된다. 교회 안에도,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우리 연약한 사람들은 잘못을 행한다. 그 잘못 때문에 사람까지 던져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잘못보다 사람이 귀하고 성도가 귀하고 가족이 귀하고 교회가 귀하다. 정죄보다 긍휼을 베풀 때 사람이 변화되며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베드로의 실수와 부끄러움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정죄하지 않고 참으시는 이유와 같다. 비록 좋은 씨를 우리 안에 뿌렸지만 우리의 악함으로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을 보시고 함께 자라나는 악함을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참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지속적인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사명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오해와 불화가 생겨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베드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하나님의 많은 복을 한 몸에 받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았지만, 베드로는 (심지어 오순절 후에도) 여전히 자라나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그의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

1. 갈라디아서 2:11-14을 읽으십시오. 베드로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답:
바울은 베드로가 위선자처럼 행동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였다.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에 관한 환상을 보고 고넬료와의 경험을 가진 후에 이방인들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행 11:2). 베드로가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자 비난하던 자들도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그런데 이제는 바울이 분개하였는데, 그 까닭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위해 그처럼 많은 일을 한 후에 그의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유대인 신자들의 압력에 굴하여 자신의 확신에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기를 꺼려하였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 신자들을 불쾌하게 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비록 다른 곳에서는 담대한 형제들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기도 했지만(고전 8:9-14),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서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분명히 이방인과 교제하는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에게 전도한다는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훈: 베드로가 유대인 신자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교제를 꺼린 사실은 그가 아직도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할 부분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부가적용)
나무는 그 자체 안에 종자의 움틈과 기본적인 수액을 가지고 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성장의 원리와도 같다. 중생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씨가 그의 마음에 심어졌으며(벧전1:23, 요일 3:9) 그 씨는 자체 안에 이미 성장하는 생명의 원리를 갖고 있다. 주입된 생명의 원리는 주님께서 물이라고 표현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요4:14)이다. 나무가 그 자체 안에 씨종자가 있어 자라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성향은 자라나는 것이다. 나무는 자체 안에 생명의 원리만을 가지고 자랄 수가 없다. 창조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야 한다(사 44:3,4; 호 14:5) 하나님께서 식물에게 물을 부어주셔야만 자라나고 유지될 것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자족한 삶을 누릴 수가 없다. 그가 본래적으로 성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대로 놓아두면 죽고 만다. 그것은 아무리 ‘새로운 피조물’이라도 그는 단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역시 인간이며 그 또한 성장하고 자라야 할 인간에 불과했다. 성경에 많은 실수를 여과 없이 기록된 이유는 그 또한 신자로서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변화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후 4:16) 성장과정은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린 후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막4:26,27). 실제적인 성장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다. 이는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다. 디모데전서 4:16에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 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란에게 나타나게 하라”라고 했다. 영적인 성장이 이웃에게 분명한 증거로 나타나야 한다. 인간의 연약한 실수는 베드로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방증이며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요일 (8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베드로를 취급하신 구주의 방법은 그와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베드로가 그의 주님을 부인하였을지라도 예수께서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그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에 과오를 범한 자를 인내와 동정과 용서하는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였다. 자신의 약점과 실패를 기억하고 그에게 돌보도록 위탁된 양떼를 그리스도께서 그를 다루셨던 것처럼 친절하게 다루어야 하였다”(사도행적, 516).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실패와 타락과 회복 후에, 긴 세월 동안의 봉사 후에, 그리스도와 맺은 긴밀한 관계 후에, 원칙을 철저히 실행한 후에, 그리고 모든 교훈과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은사와 지식과 큰 영향력을 행사한 후에도, 그가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든지 혹은 존경을 받기 위해서든지 간에, 복음의 원칙을 은폐하고 속였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가 흔들리고 이중적 입장을 취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은혜만이 우리의 발이 실족치 않도록 지켜줄 수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108-110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영적 교만은 누구에게나 위험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영혼구원이나 섬기는 일 등 교회의 활동에 있어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조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종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십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전과 이후에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경험을 가졌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신실한 종이 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 베드로는 격랑(激浪)의 시대에 교회를 굳건히 세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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