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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긍휼이 많으신 구주(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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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7-31 08:37 조회5,009회 댓글0건

본문

제 6과 긍휼이 많으신 구주
8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2분)

도입)
한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박사를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라고 말했다.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긍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품어야 할 유일한 마음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그분의 긍휼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원하시는 그분의 긍휼의 마음 때문이었다.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그분을 말하는 것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그분은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그분의 긍휼을 얼마나 많으신지를 누구와 비교하거나 수치적으로 그분의 긍휼을 수량화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긍휼의 그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기억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연구범위: 요 1:14, 3장, 4장, 9:1-7, 엡 4:32, 요일 2:12.

중심 사상: 예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셨다. 우리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때에, 그분의 모본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자유의 여신상’ 맨 아랫부분에는 에마 라자러스(Emma Lazarus)가 지은 ‘새로운 거상(巨像)’이라는 유명한 시가 새겨져 있다. “너의 피곤함과 너의 가난함, 쌓여있는 골칫거리와 자유롭게 숨쉬고자 하는 열망, 그 모든 것을 나에게 다오.” 이 시구(詩句)는 예수님의 사역을 상기시켜 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봉사하셨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 혹은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충만한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贖)하시기 위해 친히 형벌을 받으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때에 지침이 될 만한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일요일(8월 3일)
무리에게 다가가심(마 4:25)

도입)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마 15:32)고 기록돼 있는 말씀에서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이 표현은 긍휼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렉헴'이라고 한다. '렉헴'은 '여인들의 자궁'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그 속에서 양분을 얻어먹으며 물속에 떠있다. 태아가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모습, 이것이 긍휼이다. 새가 먹이를 물어 와서 토해낸 뒤 새끼에게 먹이는 그 모습을 '렉헴'이라고 한다. 특수한 사랑인 것이다. 긍휼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정이 아니라, 의도적인 동일시 작업을 말한다. 이 의도적인 동일시작업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깊이 이해하고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긍휼의 대상으로 원수와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까지(눅6:36)에 자신의 긍휼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긍휼이야말로 신의 성품이며 신의 마음인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긍휼은 자연인은 지킬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베풀 수도 없다. 오직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능한 것이다. 영국의 로이드 존스는 ‘긍휼히 여기는 것은 신자를 테스트(Test) 하는 시험지’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긍휼을 베풀면 신자이고, 그렇지 못하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보고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나는 입으로만 공언하는 신자일 수 있다.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다가선 마음은 바로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신 것이다.

1. 마태복음 4:25과 누가복음 6:17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이 두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었는지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습니까?
답:
예수님 당시에는 지하철이나 기차나 버스가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는 이도 없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그 당시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느리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2. 다음 구절들은 군중이 예수께로 온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까?(막 5:25-29, 요 6:15, 12:9)
답:
군중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매우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원했다. 그들은 영적 양식에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이나 친구 혹은 가족의 병을 치유하기 원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분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약속된 메시야이신지 알고자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분께로 왔다. 한번은 군중이 너무 많아서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서 그들을 가르치셔야만 했다(마 13:2). 군중이 점점 더 늘어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 12:19)라고 말하였다.

교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섞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그들 각자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따라다니는 군중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이미 예수님과 함께 지낸 지가 사흘이 됐다. 4000명이 넘는 군중을 무엇으로 먹일 것인가 걱정이었다. 예수님의 걱정은 이들이 집으로 가다 길에서 기진하여 쓰러질까 염려돼 굶겨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었다는 것, 하나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은혜를 의미한다.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그 긍휼의 극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씀에서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월요일(8월 4일)
개인적인 접촉(요 9:1-7)

도입)
성경에 보면 전도에 두 종류가 있음을 본다. 하나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전도이고 개인을 접촉해서 구원하는 개인전도이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하루에 수천 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행한 전도의 방법이다. 또 하나의 전도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전도가 있다. 예수께서 전도하실 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눈에 믿음 없는 자들로 판명되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요6:36. 요:64 참조). 주님의 관심은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따르는 무리들의 개인적 믿음에 있었다. 그 많은 이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랐으나 믿음은 결여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무리 중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아무 쓸데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산 사귐에서 쫒아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추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 회퍼- 는 말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특별히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가셨다.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에서 누군가를 기다리시다가 물 길러 온 한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여인의 심령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므로 그 여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한 것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한 개인적인 전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에 오신 것도,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을 동리로 보내고 우물에서 누군가를 기다리셨던 것도 다 목적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복음을 전할 대상자를 정해 놓고 계셨던 것이다. 개인전도는 먼저 전도할 대상자를 정하는 일부터가 중요하다. 여러 사람이 아닌 한 개인을 찜하는 것으로 개인전도는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매료되었다. 마가는 그들이 “즐겁게 듣더라”(막 12:37)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교훈에 놀랐”다(막 1:22, 막 11:18). 예수께서는 종종 큰 무리를 위해 말씀하시고 봉사하였으나, 그것은 그분의 사역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1. 요한복음 3장과 4장, 그리고 9:1-9에서 한 가지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은 우리가 행하는 사역에 관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까?
답:
예수님의 사역의 열쇠는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나셨다는 데 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눅 8:1).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오래지 않아서 그분의 기별이 당시에 알려진 온 세상에 퍼졌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했던 유일한 이유는, 주님의 손길이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며, 그분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다른 이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사람들과 섞이시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은 그분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마 9:36)에게 어떻게 위안과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지를 보아왔다. 그들은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오늘날과 같이 스트레스가 많고 피곤한 시대를 살면서 위로와 평안을 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교훈: 예수께서는 큰 무리를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오늘날은 이러한 개인적 접촉이 더욱 절실히 필요 되는 시대이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사람들을 고치셨다(마 9:35). 성경에는 모든 족속, 온 세상, 모든 나라, 모든 방언과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드시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경 속에서 복음 전파의 중요성에 대하여 계속 강조하고 있으나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들에게 대해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겼던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애정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다. 불행하게 요즈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해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 안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없다면 전도의 사명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고,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런 기쁨과 보람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영혼구원의 시작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이 같은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의 에너지가 영혼에 대한 개인적 접촉과 더불어 무리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사람을 만난 모든 이유는 저들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화요일(8월 5일)
용서(마 18:21-22)

도입)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困苦)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사 10:16절 하반절). 에 '근심하다', 이는 갈등이 생기고 후회하는 심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본문의 '근심하다'는 히브리어로' '(카짜르)인데 몹시 마음 아파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주 하나님께서 매우 마음 아파하셨다는 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덮어두고 지나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지만 반면에 죄인이 죄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진노를 한없이 품지 않으신다(예레미야3:12).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주님이시다. 죄는 미워하여도 사람은 사랑하신다. 다 끝난 일이고 이미 강 건너 간일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주님 밖에 없다 라는 절박한 심령으로 파고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말씀하신 주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할 말을 잃고 주저앉지 않았다. 모든 게 끝이다 라는 생각으로 절망에 몸을 떨지 않았다. 오직 주님밖에 없다 라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주님의 긍휼은 심판보다 크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연약하고 강퍅하기에 몹쓸 짓을 수없이 많이 저질러도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의 긍휼의 풍성함 때문이다. 마지막 환난 때에 성도들이 그래도 견딜 만 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주님께서 그 강도의 세기를 감하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24:22).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의 동기는 긍휼에 있었다. 복음서 기자들이 그분의 긍휼에 대해 얼마나 자주 언급했는지 주목해 보라. 때때로 그분은 강하게 죄를 지적하시고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셨으나, 언제나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긍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은 용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종 용서를 가르치시고 또한 보여주셨다.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있어서 용서가 그렇게 힘 있게 강조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 다음 성경절들은 용서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마 18:21-22, 눅 23:34, 요 8:1-11, 엡 4:32, 요일 2:12).
답:
예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큰 빚을 탕감 받는 것에 비유하셨다. 당신이 만약 누군가에게 10억원을 빚지고 있는데 그 빚이 탕감되었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이 탕감된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갚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용서받은 자는 남을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께서는 거듭 강조하셨다.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 감사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마 18:21-34). 이것은 마리아와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이다(눅 7:36-50).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라는 구절이 나온다.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용서가 왜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하고, 남을 용서하는 일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의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를 상하게 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게 된다면 세상의 정치 및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 보라.

교훈: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몸소 용서의 모본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남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자.

부가적용)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용서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며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남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수요일(8월 6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요 1:14)

도입)
우리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복음 1:22-23)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결코 사람들의 비판이나 칭찬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아니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 생애의 크나큰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예수님의 긍휼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분은 죄인들에게 까지 항구적인 긍휼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의 깊은 감정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애가 인간들의 존경에 의하여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에 의하여 인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의 사랑에 의존하지 않으신 무조건적인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을 자유롭게 사랑하실 수 있으셨다. 여인의 자궁 속에 자라나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의 긍휼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며 그보다 더 큰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품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1. 요한복음 1:14에는 어떤 놀라운 개념이 제시되어 있습니까? 이 개념은 하나님의 품성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자신의 답을 적으면서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답:
1700년대와 1800년대의 과학 혁명으로부터 하나의 개념이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신론(理神論)인데, 이 이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고 가르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마치 시계처럼, 태엽을 감은 후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법칙들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18살까지 길러준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 됐다. 아들아, 너는 이제 독립이다. 나를 찾지 말고 너 스스로 잘 살아라. 행운을 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셨고,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4에 묘사된 하나님이시다.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스케노오(skenoo)이다. 요한복음 1:14에서 스케노오는 ‘천막을 치다’ 혹은 ‘텐트 안에 살다’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펴셨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 사시고 일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관계를 맺으셨다.
마태는, 처녀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을 것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그는 그 이름을 예수님과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마태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속물로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이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교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육신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시다.

부가적용)
사단의 진짜 전쟁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을 해칠 힘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한다. 사단은 하나님 백성이 불순종과 무관심으로 하나님을 실망시키도록 부추기는 광적인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만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 보이신 긍휼과 주신 사랑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만 냉정하셨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등에 감당 못할 짐을 얹어 놓고 자기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긍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의 환상과 허울뿐인 선의의 정체를 들춰내셨고 자비를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서만 그의 자비를 거두어 가셨을 뿐이다.

목요일(8월 7일)
비유로 말씀하심(눅 15:8-10)

도입)
예수께서는 이제 백성들을 일깨우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다. 비유는 복잡한 해명 없이도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실 때에 이야기들을 활용하셨다. 이로써 듣는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즉각적으로 사로잡았으며, 진리는 그들의 마음에 잊혀 질 수 없도록 깊이 새겨졌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0-13).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가르쳤을 때 그가 가르치는 것을 알기 원했던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유를 사용함으로 자기를 정죄하고자 하는 원수들에게 진리를 가리었다. 대체적으로 그의 이야기들은 천연계 가운데서 취한 것이었다. 청중들은 이러한 것들에 매우 친근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는지를 아셨다. 그분의 말씀은 그러한 차원에서 주어졌다. 예수께서는 심오한 철학적․신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말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천연계와 집안의 단순한 물건들을 당신의 가르침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동전(눅 15:8-10), 씨 뿌리는 농부(막 4:26-29), 누룩과 가루(마 13:33), 양(마 18:12-14), 무화과나무(막 13:28-32) 등 그 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1. 위에 열거된 비유들 중 몇 개만 선택하여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각각의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예증들이 매우 훌륭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예수께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 거니신다면 동일한 기별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어떤 예증들을 사용하셨을까요?
답:
이 비유들을 읽을 때에 아주 특별한 사실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예증의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2. 예수님의 비유들은 그분의 기별과 같이 시대를 초월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러한 특별한 예증들을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무엇과 같은지를 묘사하기 위해 몇 가지 짧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마 13:31), ‘누룩’(33절), ‘밭에 감추인 보화’(44절),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45절), ‘그물’(47절),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내어오는 집주인’(52절), ‘포도원 품꾼을 얻기 위해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마 20:1),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마 22:2)과 같다고 하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쉬운 말과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이 사실은 긍휼이 많으신 그분의 품성을 잘 나타내 준다.

부가적용)
비유로 하신 교훈은 사람들의 질문을 유발시켰다. 그리스도의 방법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한번은 예수께서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란 말씀을 하셨다(요 8:43).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선행조건은 하나님께 대한 의탁과 헌신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예수께서 비유를 이용하여 진리를 가치치신 것은 누구의 것보다도 특별하고도 효과적인 특수한 교수법이었다. 비유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을 만큼`(마13:34) 예수께서는 비유를 많이 이용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많은 비유들로 가르치셨는가? 우선 일반적인 비유의 잇점들을 살펴보면 첫째, 듣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이다. 둘째 비유로 가르치면 기억하기 쉽다. 셋째 비유는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도 이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 첫째로 그의 메시지를 그의 제자들과 외인들에게 나타나고 또 예증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비유는 예수의 메시지의 가장 효과 있는 예화였다. 때때로 외인들도 예수께서 그의 비유에서 예시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알았다. 막12:12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르쳐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이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셨다. 당시 `우물 안 개구리의 진리`, `우물 안 개구리의 제한된 신앙` 속에 살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도래한 하나님의 신세계의 진리를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서 비유로 전파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첫째 이유와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막4:10-12에 따르면 예수의 비유는 그의 가르침을 외인들로부터 숨기는 것이었다. 예수의 메시지 안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있었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심으로서 그에게서 결점을 찾고 그에게서 선동의 죄목을 찾아 고발하려던 사람들은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막4:30-32) 또는 누룩(마13:33)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전혀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그의 원수들은 그를 고발하기 어렵게 되었다.(마14:55-59참조) 때때로 그들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비유를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므로 비유는 외인들에게는 그의 메시지를 가리워 주었다. 즉 그의 비유는 그의 메시지를 계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가 어렵게 가르쳐져서 백성들이 이해하지 못할 진리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어린이에게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드러내신 예수님의 긍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요일(8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시대의 소망, 제86장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818-828).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개인 지도는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지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훈련하실 때에도 개인적인 접촉과 교제를 통하여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오직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두고도 당신의 가장 귀한 교훈을 베푸시는 일이 아주 많았다. 예수께서는 당시 존경받던 랍비와 감람산에서 심야 토론을 하실 때나, 수가의 우물가에서 만난 천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진리의 감화를 위해 열려 있음을 보시고 입을 열어 값진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라 끊임없이 몰려온 사람들도 그리스도께는 무분별한 군중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 직접 대화하듯 말씀하시고 각 사람의 진심에 호소하셨다. 예수님은 청중의 얼굴을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신 그 진리가 그들의 심령에 감응을 일으켜서 얼굴빛이 밝아지고 감동의 빛이 떠오름을 보시게 되면 공명하는 즐거움으로 깊은 감동을 받곤 하셨다”(교육, 23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개인적 접촉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누구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한 감화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까? 우리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를 개인적 차원에서 더 잘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긍휼이 많으신 구주 예수께서는 죄를 미워하셨으나 죄인은 사랑하셨다. 그분께서 일대일 혹은 집단으로 사람들과 접촉하시면서 그들을 섬기신 방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한 모본이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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