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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들(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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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7-17 09:16 조회4,933회 댓글0건

본문

제 4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들
7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6분)

도입)
세계의 역사연호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B.C.(기원전, Before Christ)와 A.D.(기원후, Anno Domini)를 쓰고 있다. 예수는 인류의 역사에도, 개인 개인에게도 B.C와 A.D.가 되신다. 생명과 사망, 소망과 절망, 빛과 어두움, 사랑과 증오의 분수령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시다. 왜 이렇게 예수의 죽음이 인류역사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는가? 인류역사상 어떤 위인의 죽음도 역사의 중심이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요, 인류의 구세주라고 하는 성경의 계시를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소리 없는 웅변이기 때문이다. 역사(History)는 그의 이야기(His Story) 즉,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는 곳은 어디에서나 기적이 일어나고, 그는 인류사에 최대의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영향을 주신분이시다. 그를 통해서 노예해방, 남녀평등 등, 어린이 존중, 인간의 존엄성, 인정 등 자유와 사랑과 평화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와 역사 자체에 있어서 중심적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다. 사실상, 성경은 우리가 현재 그를 깨닫고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든 이들은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그 질문에 답해야 함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다. 당신은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1) 로웰(James Rossell Lowell):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 에 대한 소망을 주었다.
2)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그리스도는 오늘날 세상에 가장 큰 영향
3) 쿠슁(Caleb Cushing) : 높은 곳에 도달하게 한다.
4) 로메인즈(George Romanes) : 역사상 다른 어떤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
5) 라토렛(Kenneth Scott Latourette) :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킴.
6) 그린(John Richard Green) : 영국인들의 기질을 온통 변화시킨다.
7) 벨록(Hiliare Belloc) : 영국에 놀라운 영향을 주었다.
8) 쵸우트(깨련 Choate) : 헌법은 신약에 들어 있다.
9) 헤켈(Ernst Haeckel) : 고상하게 하는 영향력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기억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연구범위: 마 23장, 막 9:12, 눅 24:7, 요 1:1-14, 29, 히 2:9.

중심 사상: 역사상 예수님보다 더 큰 영향력을 세상에 나타내셨던 분은 없다. 우리 각자의 미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물으신 예수님의 중대한 이 질문으로 귀결된다.

안식일 오후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셨다는 분명한 사실에는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이셨으며,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분은 단지 위대한 스승이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셨는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했다면 그는 이미 도덕적으로 위대한 스승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분명히 미친 사람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지옥의 악마일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C. S. 루이스, 단순한 기독교, 맥밀란 출판사, 1960년, 52).
우리 재림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과연 참으로 그분의 말씀과 사역이었는가 하는 논쟁으로 어리석게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우리 재림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를 믿는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믿을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일요일(7월 20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 1 (막 9:12)

도입)
천하의 종교가 여호와 신앙의 일색이고, 모든 사람의 운명이 그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는 사회에서 내가 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나오는 사실을 둘러싸고, 주장자나 청중은 다 같이 생사를 거는 긴장상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정신이 든 사람이 아니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으리라는 억측까지 나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에 비친 빛이요, 미움 가운데 들어온 사랑이요, 무지를 치료하는 지혜이시다. 그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고, 죽은 자에게 부활의 생명을 심고, 굽은 것을 곧게 하고, 방탕하고 술 취한 자에게 각성을 주고, 악령을 몰아내고, 발광과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고, 잠자는 자를 깨우고, 하나님 없는 마음에 기도와 신앙을 심는 정상과 건강의 척도요, 표준이다. 만일 그리스도 사건이 정신이상에서 생긴 것이라면 인류의 정신사(精神史)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 전체는 정신병 환자와 정신병의 기초 위에 건설된 것이라는 말이 타당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기독교역사는 세계역사이다. 서력기원(B.C)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록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하고 이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하면 그야말로 이 세상이 정신병동이 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해 논쟁했고, 그분에 관해 노래했으며, 그분에 관해 글을 썼다. 사람들은 그분에 관해 설교했고, 다른 이들은 그분을 저주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분을 위해 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에 관해 무지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알지 못한다.

1.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답: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 위대한 일을 행하셨고,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셨으며, 하나님의 품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도 좋지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그 모든 것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2. 예수님이 누구이셨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분이 왜 죽으셨는지를 아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막 9:12, 눅 24:7, 요 1:29, 롬 5:15-21, 히 2:9).
답:
역사상 놀라운 일들을 행한 위대한 남녀들이 많이 있었다. 나사렛 예수께서 행하신 것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로마의 아주 작은 관할지역에서 출생하신 공인되지 않은 랍비셨다. 그분은 두려움과 실의에 빠진 몇몇 제자들만을 남겨 두신 채 젊은 나이에 처형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으며 그분이 지상에 계신 동안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이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결국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온 세상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분이시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그의 생애는 온 인류가 살아야 할 방법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모든 기도, 축복, 그리고 신권 의식이 그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는 주의 주, 만왕의 왕, 창조주, 구주, 그리고 온 땅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헬라어) 및 메시야(히브리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는 아버지의 장자이며(히 1:6), 그는 육으로는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다(요 1:14; 3:16). 그는 여호와이시며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계셨다. 아버지와 의논 아래, 예수께서는 이 지구와 그 위의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요 1:3, 14). 그는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셔서, 죄 없는 생애를 사셨으며, 그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마 2:1). 그는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셨으며, 온 인류의 궁극적인 부활을 분명히 증거 하셨다. 예수의 속죄와 부활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 자들을 예수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월요일(7월 21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 2 (막 10:42-44)

도입)
만일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이라고 했다면, 그는 분명 사기한(詐欺漢)이다. 남에게는 세상의 빛처럼, 소금처럼,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자기는 사상 최대의 사기로 먹칠해 있다면, 위선자 중의 위선자 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의 화신이요, 거짓의 제사장(막 14:60-64, 요한 19:17)이다. 나사렛 예수가 미친 사람이란 말은 전 인류의 양식(良識)과 양심(良心)과 진실(眞實)과 경험(經驗)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말 자체가 사상 최대의 악질의 거짓말이다. 일찍이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William Lecky는 그의 저서 "History of European Morals from Augusts to Charlemagn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는 18세기 동안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상황, 모든 기질적 차이를 초월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뜨거운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영감을 불어넣었고, 최고 패턴의 덕이 있을 뿐이 아니라, 그 덕을 행하게 하는 활력소가 되어왔다. 예수의 단 3년간의 생애가 인류의 신생과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함에 끼친 영향은 전 인류의 도덕가들의 노력과 전 인류의 철학자들의 탐구를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성취했다." 예수가 종교 사기꾼이었다면 인류의 거룩한 것은 모두가 다 사기 사건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 타당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님이 그처럼 특별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분은 대단한 홍보 마케팅 팀을 보유하지도 않으셨고, 이 세상의 재물이나 돈을 많이 소유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정치적 세력을 가지신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적 권력의 언저리에 머무셨다.
예수님은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상한 자들을 회복하시며, 종교적 위선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정치적 권력을 원했던 자들에게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1. 인류 역사상 예수님이 그토록 특별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요 1:1-14)
답:
우리는 이 유명한 말씀을 자주 읽기 때문에 진정 그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를 잊어버린다. 요한복음 1장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 구절들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현대 과학은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엄청난 우연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순전히 우연 때문에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과학은 우리가 이 지구 표면에 우연히 형성되어진 화학물질의 합성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어떤 의미나 목적도 제시하지 않으며, 삶과 죽음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갖게 된 소망과는 얼마나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가?

교훈: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자.

부가적용)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셔야 하였는가? 말씀은 의사소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의사소통인 말씀(헬라어,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셨으며, 여전히 그러하신 것으로 선포되어 있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셨을 때, 그의 권능을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전적으로 인간이셨다. 그는 약함을 겪으셨으며, 배에서 잠에 빠지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셨으며,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결코 창조주가 되시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가 선포하신 대로 자신이 창조주임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주시기 위해 그가 행한 기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또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만약 그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셨다면 그는 진리일 수가 없고, 따라서 길도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13:19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태초(in the beginning)”를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4 및 마가복음 10:6에서는,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창조 초기에, 수십억 년이 지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젊은 우주, 6일 창조론자이시다! 예수님은 노아를 과거에 살았던 실재적 인물로서 묘사하시면서 노아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마 24:37-39, 눅 17:26-27). 예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간 것과, 대홍수가 와서 세상을 다 쓸어버린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단절된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말씀으로 풀어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의 주인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화요일(7월 22일)
죄인들과 세리들과 섞이신 예수님(마 11:19)

도입)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시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를 발견하게 된 베들레헴 동리 밖 목동들에게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눅 2:9)면서 전해진 그날 밤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눅 2: 10-14) 이렇게 전해진 메시지는 하늘에서 땅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내리 전해진 메시지였다. 일컫자면, 수직적으로 전해진 메시지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의 영광의 빛이 가장 낮은 곳까지 전해지는 소식이었다.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존재로 떨어지다시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신 모습을 전하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동방에서 출발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날 그들의 말은 무엇이었는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려 왔습니다.”(마 2:2) 이렇게 박사들이 실토한 메시지는 가장 먼 곳에서부터 주님 계시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모아오는 메시지였다. 일컫자면, 수평적으로 전해진 메시지이다. 동방 사람들이 예수 아기를 찾아온 사실은 주님 계신 중심부의 영광의 빛이 세계의 극변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주님의 탄생의 신비가 전 인류에게 알려진 소식이었다. 소리 없이 오신 분이셨지만 온 세상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여 주는 메시지였다.

예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어울리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섞이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분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섞이셨다는 사실이다.

1. 다음 구절들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섞이셨습니까?(마 11:19, 막 2:15-16, 눅 15:1-2). 오늘날 사회에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답: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그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자들과 섞이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시고, 그분께서 무엇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지를 보여주셨다. 우리 인간들은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자주 간과해버리는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2. 마태복음 21:28-32은 예수께서 왜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섞이셨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답: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마음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외관상 무가치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외관상 매우 의롭고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꿰뚫어 보셨다. 우리는 서로를 속일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분만큼은 결코 속일 수 없다.

교훈: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속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모든 자들을 감싸 안으셨다.

부가적용)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즉, 수직적인 그분의 모습이 우리 앞에 동시에 죄인들의 수준에 당신 자신을 맞추시고 수평적인 모습의 인간과 수평적인 교제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에서 오신 그분이 가장 낮은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죄인을 하나님께 맺어주시는 가교의 역할을 하시는 그분을 보게 된다. 사랑은 말이 없다. 우리와 '같이 되었다'라는 것은 우리와 같이 먹고, 같이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긍휼히 여긴다는 뜻만이 아니다. 공감대를 이루며 같이 산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에게 큰 선물을 주신 것도 아니고 나사로처럼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아니고 죽을병을 고쳐주신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태의 집에서 같이 잡수셨다. 여기서 깊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된다'라는 문제이다. 마태는 예수님께 특별히 받은 것이 없었다. 단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셔서 같이 잡수신 것만으로 아주 만족하였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것이 마태가 받은 은혜이다. 저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내가 저와 함께 한다는 뜻이며, 저가 내 집에 오셨다는 것은 나도 그분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뜻인 것이다. 세리 마태는 로마 식민지하에 있으면서 로마인에게 세금을 걷어 바치는 사람이기에 반민족주의자요 탈취자요 폭행자로 대표적인 죄인이었다. 이런 세속주의자의 타락적인 인간의 대표인 마태에게 놀라운 것은 그가 골방에서 회개 기도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부른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리가 누군지 알고 부르셨다. 그 현장에서 그를 부르셨다. 그 모습 그대로 불러서 제자로 삼았다. 그리고 같이 잡수셨다. 즉 세리와 같이 되셨다. 이제 예수님은 비난 속에 사시게 되었고 죄인들의 친구라는 좋지 못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죄인을 의인 되게 하기 위하여 의인이 죄인 되신 그분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귀한 사랑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수요일(7월 23일)
종교적 위선자들을 폭로하심(마 23:13-14)

도입)
떠도는 유머 중에 이런 유머가 있다. 여자는 얼굴을 가꾸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그래서 나이별로 화장하는 차이를 이렇게 말한단다. 10 대는 주로 치장을 한단다. 그러다가 20대가 되면 화장을 시작한다. 하지만 30 대가 되면 화장이 두꺼워진다. 점점 배우들이 무대에서 진하게 화장하는 분장에 가까워진다. 결국 40 대가 하는 화장을 변장이라고 한단다. 50대 화장은 위장, 60대 화장은 포장, 70대 화장은 환장, 80이 넘어서 하는 화장을 끝장이라고 한단다. 여자의 화장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저 우스운 유머이지만 이 속에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우리 자신을 영적인 화장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적 겉치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종교적 위선자들이라고 폭로하셨다. 이것은 무죄가 아니다. 유죄인 것이다. 주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모두 다 회개가 필요한 죄인들이라고 경고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이스라엘은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같았다.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 가장 악한 죄인들까지도 부드럽게 대하신 그분의 친절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향하여 매우 강한 경고의 기별을 발하셨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어떤 면에서 그분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나타내셨다. 물론 그분이 구약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역을 하도록 영감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놀랄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백 년 동안 당신의 백성에게 돌이키도록 호소하셨다. 그분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신다.

1.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께서는 지도자들의 어떤 면을 책망하셨습니까? 그 책망은 얼마나 신랄한 것이었습니까? 그 책망 가운데 가장 신랄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예수께서 그들의 행위를 질책하신 말씀을 주의 깊이 읽어보면 놀라울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분께서 지적하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로 위선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위선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영혼은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신실하고 경건한 것처럼 행동하였다.

교훈: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말씀으로 책망하신 까닭은 그들이 위선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가련한 모습을 감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부가적용)
예배는 신자의 생활에 있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의 능력은 말라버리고 말 것이 분명하다. 예배시간에 참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영적 능력이 말라서 점점 나약해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예배를 드리는 자도 이러한 능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산상설교의 다음 부분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예배의 형태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기만적인 태도를 과거에 여러 번 책망하셨을 뿐 아니라 특히 그들의 이중적인 가치 기준과 율법적인 전통을 개탄하셨다. 거짓 예배를 드린 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마 15:7-9) 하셨다. 스펄전 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개울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연극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교하였다. 위선자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명예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외양은 마치 미려한 양장본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들처럼, 내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외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쏟는 사람이다. “하루살이는 걸러서 먹고 낙타는 삼킨다”는 중동의 속담처럼, 위선자의 특성은 큰일을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구애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 위선자의 특징은, 남에 대해서는 신랄할 만큼 비판적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리 만큼 관대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금욕적 생활과 경건한 외모로 신앙의 빛 좋은 허울을 쓰고 있어도 결코 속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속에서 발아하는 위선의 싹을 애초부터 뽑아버리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위선적인 신앙이야말로 복음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거짓된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목요일(7월 24일)
위선자들을 향한 사랑(롬 5:8)

도입)
클라인스가 쓴 유명한 책이 있다. 'Imposture phenomenon' 이라고 하는 책이다. 임파스쳐는 사기꾼이라는 뜻이다. 남의 이름, 남의 지식, 남의 명예를 도용했다는 것이다. 사칭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면이 되는 것이다. 무릇 "가면형상(假面現象)" - 이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어느 사이에 우리는 자기 존재와 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기업의 중역 가운데 70%가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하는 척, 아는 것 없으면서 대단히 아는 것처럼, 알고 보면 이렇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으면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남의 것, 남의 돈, 남의 지식 가지고 내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다. 가면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람은 Hypocrite라고 말한다. 이렇게 거짓된 내가 있는 한 진실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는 한 누구를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 니고데모 역시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리새인’하면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바리새인은 곧 위선자라는 편견이 있다. 물론 바리새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분이었다. 모든 바리새인들을 다 위선자, 외식주의자, 율법주의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신실한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1. 로마서 5:8의 기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악한 죄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습니까? 그 죄인들 중에는 어제 우리가 살펴본 위선자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매우 힘든 상황들을 통과하시면서도 그분의 사명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그분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사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온 세상의 죄의 무게가 그분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셨다(참조 눅 23:34, 42-43, 요 19:26).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 얼마나 힘 있는 교훈이 되는가? 이 말씀은 또한 어제 우리가 마태복음 23장을 통해 살펴본 종교 지도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2. 마태복음 23:37은 이 장의 나머지 부분과 어떻게 다릅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자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중요한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까? 여기서 발견한 원칙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관하여 전하는 우리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답:
선교사의 일은 쉽지 않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분께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별을 거절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악한 죄인에게까지도 사랑과 돌봄과 긍휼을 나타내셨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해 노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그들에게 동정과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말 듣기를 거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간주하는 계층의 사람들뿐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위선자들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부가적용)
외식이라는 말은 ‘두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뜻이다. 남에게는 바르게 살라고 하면서 스스로는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15:8). ‘피해자’(이범선 저)라는 소설에 보면 요한의 아버지 최 장로는 고아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다. 요한도 고아들과 똑같이 자랐기에 고아에 대해 어떤 편견도 없었다. 그래서 같은 고아원의 명숙을 사랑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아버지께 허락을 청한다. 그러나 고아를 며느리 삼을 수 없다는 한 마디에 명숙은 자취를 감추고 20년 후 술집 마담으로 나타나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알맹이를 잃은 껍데기만의 기독교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오늘 이 소설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또 하나의 최장로가 아닐까? 우리의 교회가 껍데기만의 교회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은 망각한 채 비본질적인 것(교리 교파 제도 권위 건물 성도 수 등)에만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된다. 진정 우리 모두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야 하겠다. 전통 제도 습관 등 부수적인 것은 모두 내려놓고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비록 위선 속에 살았던 자들도 사랑하셨다. 저들에게 책망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강한 책망은 강한 사랑을 동반하는 것이다. 때로는 강한 채찍이 필요한 영혼들에게 드신 예수님의 책망은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금요일(7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시대의 소망, 제67장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음(610-620)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교훈을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 현명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기엔 너무 의로우며,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존귀함을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구주께서는 하늘의 기별을 받고자 하는 다른 무리들을 찾기 위하여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 예수께서는 무식한 어부와 장터에 앉은 세리와 사마리아 여인과 당신의 말씀을 기쁘게 듣는 백성들 가운데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발견하였다. 복음 사업에 쓰이는 도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빛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런 영혼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을 세상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이다”(시대의 소망, 279).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가 일을 한다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가르치신 방법을 따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서민들의 마음과 접촉하고자 노력하셨다. 주님의 방법은 분명하고 단순하여 이해하기가 아주 쉬웠다. 주님께서는 예화를 들 때에 청중들에게 가장 친밀한 사물을 이용하셨다. 주님께서는 천연계의 사물로 예화를 들어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므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셨다”(복음전도, 5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만약 예수님이 위대한 종교적 스승이실 뿐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예수님의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에게 삶의 방식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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