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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이와 같은 때에: 사도 바울(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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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6-26 23:29 조회7,4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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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이와 같은 때에: 사도 바울
7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도입)
그리스도교 초기의 사도인 바울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본래 지독한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였지만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이 같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분명 많은 차별을 당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왕따였다. 성경속에서도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위치에서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 교리의 중심인물이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자신의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성경의 일부가 된 그의 서신들은 그러한 바울 자신의 고뇌와 외로움, 그러나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잘 표현되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그는 새로운 종교운동, 즉 그리스도교를 지도하는 사도(선교사)가 되었으며, 그 운동이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서 세계 종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서신들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신학적인 정교함과 목회적인 이해를 생생히 드러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사상에 대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10년경 다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다소는 동·서간의 주요 교역로에 위치한 길리기아 지방의 한 도시였으며,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고향이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로마 시민권을 상속받았다. 이 로마 시민권은 1세기 전에 로마의 용병으로 복무한 사람들이 그 대가로 로마인들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2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는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그리스어로 말할 때는 로마식 별명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사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구하였다’라는 뜻이고 다메섹의 회심이후 개명한 바울은 ‘작다’라는 로마식 이름이다. 그는 엄격한 유대교 교육을 받았지만 그리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세계 도시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에 그는 이방인들(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수한 소명에 적합한 인물이 되었다.

기억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롬 15:17).

연구 범위: 행 9:1-9, 22:3-5, 25-29, 롬 7:19-25, 11:1, 빌 3:5.

중심 사상: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널리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 바울의 생애와 사역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의 모본이 된다.

안식일 오후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되어야 한다’라는 개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실행한 핵심적인 지도자였다. 바울의 배경과 성격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은 그로 하여금 만민을 향한 새로운 선교 시대에 적합한 인물이 되게 해 주었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 이 교회는 북미지역을 넘어 외방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첫발을 내디딘 외방 선교는 오늘날 200개국 이상에서 사역을 펼치고 있는 재림교회의 선교에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 교과에 인용된 예언의 신의 증언들과 재림교 성경주석의 엘렌 G. 화잇 언급 부분은 영문 페이지로 표기됨.

일요일(6월 29일)
바울의 배경(행 22:3-5, 25-29)

도입)
바울은 디아스포라 바리새 가문에서 태어났다.(행23:6)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는 것과 로마의 시민이란 자격을 한데 연결시켜 가진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은 유대 제자들 가운데 없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클레이 교수는 헬라와 유대 사이에 교량이 되어 기독교가 전 세계를 향해 전파되기 위해 '두 세계의 사람 바울'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놓으셨다고 했다. 바울의 회심의 경험은 바울 생애에 가장 생명력 있고 거대한 영향이 되었다. 바울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회심과 사도됨은 인간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임을 강조한다.(갈1:15-16) 바울의 회심의 의의로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바울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셨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옛 세계를 특징 지우는 죄(롬6:2)와 율법(롬7:6,갈2:19)과 초등학문(골2:20)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죽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갈2:20) 바울의 배경연구에 관하여 Stwear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심경험은 바울의 생애에 가장 생명력 있고 구성적인 영향이다. 이에 비하여 그 밖의 모든 것 -그의 유대적 가문, 랍비적 훈련, 헬레니즘과의 접촉, 유전과 환경의 모든 요인은 이차적인 것이다.‘고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다는 것이다. 헬라주의적 바울 연구는 종교사학파의 산물이다. 이 경향의 사람들은 바울이 대부분 이방 환경에서 산 사람 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그 영향을 찾으려고 하였다. 당시의 언어는 코이네로 통일되었고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편리한 교통의 조직에서 이루어졌고 권력의 통일과 한 민족의 법을 초월하는 법의 통일을 첨부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 전파에 유리 하였던 조건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문화적 요소들이 바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바울은 다소의 시민이었다. 또한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신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 당시 알려진 세계의 많은 지역에 전파하였다.
바울은 길리기아(Cilicia)의 수도인 다소(Tarsus)에서 출생했다. 그 지역은 로마의 영토로서 오늘날의 터키(Turkey)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염소 털로 짠 천으로 유명했는데, 이 천은 바울의 업(業)이었던 장막 만드는 데(행 18:3)에 널리 사용되었다.

1. 사도행전 22:3-5, 25-29, 로마서 11:1, 빌립보서 3:5은 바울의 배경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구절들은 그가 당대에 그처럼 훌륭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출생 시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는 것은 굉장히 귀하게 여겨졌다. 바울 당시에 로마 시민권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500 드라크마를 내야만 했는데, 그것은 보통 노동자의 2년 품삯에 해당했다.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되면 확실한 권리가 보장되었는데, 그 권리들 중에는 재판 없이 죽도록 채찍질 당하지 않을 권리(참조 행 22:23-29), 투표권, 계약권, 합법적 결혼의 권리, 그리고 면세권(免稅權)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매우 경건한 유대인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행 22:3). 바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며, 바리새인으로 양육을 받았다. 그는 당대의 유력한 유대인 교사 중 하나인 저명한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우리는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의 편지서에서 그가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 1:14)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자들을 처벌하는 일이 이러한 가르침을 받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열망이 넘치는 유대인이요,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곧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교훈: 바울은 많은 특권을 가진 로마 시민이면서 성경을 잘 아는 열성적인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부가적용)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영광의 빛 가운데서, 기독교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보게 되었다. 이 계시의 빛 가운데서 그는 장래의 생의 코스(Course)를 보게 되었고, 이 같은 결과 얻어진 강한 확신이 바울의 그리스도에의 전향이 주도력이 된 것이다. 이로써 바울은 의의 종교에서 죄인의 종교로, 거짓된 모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던 것에서 참된 예배로,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것에서 참된 예배로,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데서부터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스도 받듦의 사역에로 전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다메섹 도중의 경험을 유대로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에 이르는 선교의 사역의 시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방인의 전도자로 모태적부터 택정하셨고(갈1:5), 다메섹 도상에서 구체적으로 부르셨고(행 (;4, 22:7, 26:14), 아나니아의 예언을 통해 바울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으며(행 9:15, 22:15, 26:16~18) 3년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이방인에게 보내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행 22:21), 바울에게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확실한 소명의식을 주었고, 그의 생애와 복음사업에서의 권위를 주었다. 그의 사명과 메시지는 주로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의 복음은 예수가 율법아래 나서 살았다는 것이며, 유대인의 전통적 영향의 어떤 흔적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고 불트만(Bultmann)은 말한다. 이후, 바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침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을 얻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는 선교의 사명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훈련이 필요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돌아온 후, 어려움을 당해 도망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름동안 머무르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두 중심인물인 주의 제자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 교제를 나누며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예수님의 사실에 대해 듣고 배웠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주님으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행 22:21) 바울은 고향 다소로 내려가 10여 년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훈련을 쌓고, 전도자로서의 실력을 길렀다. 여기에서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를 만큼의 삼층천의 세계에까지 이끌려 올라갔던 신비적 신앙 경험을 가지기도 했다. 비로서, 바나바가 이렇게 준비된 바울에게 다소로 찾아옴으로서 바울은 안디옥으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바나바와 함께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일 년 남짓 이 곳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하면서 세계선교 여행을 계획, 준비하던 바나바와 바울은 드디어 안디옥 교회를 중심한 교인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월요일(6월 30일)
바울의 회심과 소명(행 9:1-9)

도입)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 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갈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엡 3:7-9) 바울의 이 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골 1:25)(딤후 1:9-11) 초대 교회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한 증언이다. 성서의 자료들은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불렀으면서 평생을 이방인 선교에 바친 사울 또는 바울이라고 불리는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지도력을 주축으로 복음에 대한 증언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 지역들 속으로 확대되어 갔다. 사람의 이름을 아람어로는 사울(Saul)로 유대인에게 알려졌고 이방인에게는 바울(Paul), 라틴어 파울루스(Παυλυs)로 사용되었다. 그는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Tarsus)출생으로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행22장). 길리기아(Cilicia)는 당시 시리아 지방에 있었는데 이곳의 중심 도시 다소는 광범한 상거래와 대학과 많은 주민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스토아 철학으로 이름난 문화 도시인 이곳에서 바울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유대인 가정출신으로 희랍적 교양 교육을 받고 헬라 문화의 계승자이면서 유대적 전통과 율법에 능한 바리새파의 유대인이었다(갈1:14).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권의 출신으로서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또한 로마 시민권자로서 라틴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청년기에 예루살렘에 유학한 바울은 위대한 랍비 힐렐(Hillel)의 손자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에서 교육받았으며(행22:3) 유대교의 열광적인 호교주의자가 되었다(갈1:14). 이 열심 때문에 그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고 스데반의 죽음의 증인으로 등장한다(갈1:13,14) 그는 신, 구약 중간시대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개종 후 구약과 모든 유대 신앙전통을 철저히 기독론적, 십자가의 복음 중심적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바울은 본래부터 사도 바울이 아니라, 초기 교회의 원수인 다소 사람 사울이었다. 그런데 그가 겪은 경험은 그의 삶을 변화시켰고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1. 사도행전 9:1-9에서 바울의 회심의 경험을 읽으십시오. 그를 그처럼 놀랍게 변화시킨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얼마나 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토록 잘못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까요?
답:
바울은 자신을 예수께 굴복시키기 전에 어떤 심오한 신앙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은 자신을 주님께 바쳤다. 그는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6, 새 제임스왕역)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지독한 원수가 이제는 하나님의 겸손한 종이 되었다.
바울은 회심 후에 사도들 가운데 ‘기둥’과 같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만났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가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임무임을 인정하였다(갈 2:7-9).

2. 사도행전 13:47과 이사야 49:5-6을 읽으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어떤 역할(눅 2:30-32)을 맡게 되었습니까?
답: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특별한 기별자였으나 또한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나누었다. 한편 베드로와 같은 다른 사도들은 대체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에도 사용하셨다. 사실상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최초의 사도였다(참조 행 10장).

교훈: 바울은 먼 지역까지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경험함으로 이방인들을 위해 어디든지 달려가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부가적용)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의 하나가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삶의 특징 6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원리가 듬뿍 담겨 있다. 사도 바울의 삶의 특징 6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의 삶 중심에 '자기'는 없고 '주님'이 있었다.
성공하는 사람을 보면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십자가를 딱 지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고생도 하긴 하지만 결국 축복도 받고 그의 이름도 빛나게 된다. 십자가를 딱 질 줄 알아야 인생에 허우적거림이 없고 행복과 보람이 있다. '사람관계'는 부드럽게 해야 하지만 '인생경영'은 딱 부러지게 해야 한다.
2. 그는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주바라기'였다.
사도 바울도 무수한 문제를 만났지만 문제 자체에 몰두하며 살지 않았다. 살면서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기 시작하면 해답도 찾지 못하고 마음이 나약해진다.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는 하늘을 바라보며 묵묵히 땀을 흘려야 한다.
3. 그는 교제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바나바, 실라, 디모데, 누가 등 그에게는 항상 동역자가 있었다. 성숙이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교제가 없으면 인격성숙도 없다. 교회생활을 하면 섭섭한 면들이 생기지만 그것은 성숙을 위한 진통이다.
4. 그는 계산이 없는 사람이었다.
눈앞의 계산에 집착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시험도 들게 된다. 그는 눈앞의 계산이 아닌 인생 전체의 계산, 큰 계산을 할 줄 알았다.
5. 그는 거룩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도는 이런 말을 듣고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확실히 달라!"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6.. 그는 위기 속에서 빛나는 사람이었다.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한다는 것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사람이 가장 귀한 믿음의 증거자이다.

화요일(7월 1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바울(롬 7:24)

도입)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 만큼 바울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게 되고 또한 그는 특별한 인물로 우리들에게 부각된다. 영적으로 탁월한 바울이야말로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껴진다. 바울의 일거수 일투족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삶의 질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딤후 4:13절을 보면 바울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인 것을 보게 된다. '겉옷'(파일로네스)은 두꺼운 옷으로 추위와 비를 막기 위해 입는다. 계절적으로 겨울이 가까웠고, 또한 지금 바울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감옥이다. 간수가 제공한 죄수복으로는 몸을 보온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그 어느 누가 그를 면회 와서 영치금을 넣어 주는 일도 없다. 수중에 방한복 한 벌 사 입을 돈이 있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떨어진다. 찬 기운이 밤잠을 방해한다. 따뜻한 방이 따뜻한 옷이 간절하다. 추위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바울은 궁여지책으로 디모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경제적인 부담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는 범위에서 도움을 구한다. 일전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두꺼운 자기 외투 좀 가지고 오라고 부탁한다. 그 때는 두툼한 겉옷이 활동에 번거로운 짐이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은 그 옷이라도 가져다 입어야 할 아쉬운 처지이다. 궁색하고 초라한 바울의 형편을 이해하시겠는가? 나이가 들면 무릎도 자주 시리고 겨울 내내 내복을 두껍게 껴입어야 지낼 만하지 않는가? 믿음의 용장 바울도 추위에 따뜻한 옷이 필요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추운 게 싫어 어찌하든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싶다는 욕구를 그도 역시 지니고 있었다. 또한 책은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이것은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을 의미한다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어떤 신학자는 구약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바울이 '특별히'(especially)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매우 가치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자유가 박탈 된 바울이지만 영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잊지 않았다. 비록 육신은 묶여 있어도 영혼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살찌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몸은 추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두꺼운 외투가 필요하고, 영은 현재의 고난을 딛고 우뚝 서기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바울은 놓치지 않았다.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지만 여전히 영혼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한다. 영적인 성장을 위한 몸부림은 끊임없이 나타나야 한다. 영적 거인인 바울이 살기 위해서는 은혜의 말씀이 공급되어야 한다. 감옥 안에서 고독을 씹으며 그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말씀의 능력이 필요하다. 성경이라는 책이 일종의 부적(符籍) 같은 것은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양피지에 쓰여진 성경책을 부탁한 것은 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자 하는 신앙심의 발로이다.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자신의 영적 성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주의 말씀이 아니면 난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울은 특출난 사람이다. 영적 거인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자신의 삶을 오직 믿음으로 위대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아픔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중심은 주님을 향했다. 우리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을 겪으면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은 바른 인생관을 갖고 바른 인생을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교만하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고,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도 잘 알고 사는 사람들을 저는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신으로 알고 섬기겠다고 하는데도 그는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시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로,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능력 있는 지도자로 알고 있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를 어떤 초인간적인 존재나 완전한 성인(聖人) 혹은 믿음의 전사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누구나 죄 아래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때때로 열심이 지나쳤으며, 매우 공격적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종종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가 실라(Silas)와 함께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는 로마 시민인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다(행 16:35-40). 후에 바울이 아그립바 왕궁에 있을 때,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가이사께 호소한다고 하였다(행 25:11-12). 만약 바울이 참고 견디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그 후에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행 26:32).

1. 다음 구절들에서 우리는 바울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행 15:37-39, 롬 7:19-25, 고전 9:27, 고후 12:7).
답:
이처럼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거장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용기가 된다. 그도 때로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울도 우리처럼 자신의 생애에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그의 서신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과 결함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를 가르치는 능력 있는 교사가 될 수 있었다.

2. 로마서 7:24은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까?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과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교훈: 바울도 우리처럼 실수하고 넘어지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큰 용기를 얻는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은 환상이나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도의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울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자랑할 만하고 자신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사도직의 정당한 수행을 위해 기꺼이 포기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놀라운 계시들보다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
러운 경험을 덧붙이는 것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간 환상과 계시가 아닌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데려간 육체의 가시에 대한 고백이었다(고후 12:7).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가시’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된 막대기나 말뚝으로 이것은 어떤 물건을 땅에 붙잡아 매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은 의기양양하게 위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바울을 땅으로 끌어내려서 ‘가시’로 그를 땅에 묶어 놓으셨다. 이것은 마치 욥의 경험을 보는 것 같다. 이 가시는 바울로 하여금 최고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해 주었다. 바울은 이 가시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했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
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고 자신의 가시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고 있었다. ‘머물게 함이라’는 말은 ‘장막을 치다’는 의미로 쉐키나가 성막에 거했던 것처럼 바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쉐키나처럼 자리 잡는다는 회화적 묘사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거하는 처소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바울의 연약함을 필요로 하심을 암시하고 있다.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을 복종시켜야 했다. 참으로 누구보다 큰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가? 그렇다면 바울처럼 낮아져라.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가? 그렇다면 바울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 이때 그리스도의 임재를 비로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대를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수요일(7월 2일)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고전 2:2)

도입)
바울의 영향력은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현대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틴이 386년 여름에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체 내면의 깊은 갈등 속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을 때, 롬 13:13-14절 말씀을 읽고는 의심의 그림자는 씻겨 내려갔다. 1513년 루터는 시편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 31:1절의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을 결국 롬 1:17절 말씀의 빛 속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의 의는 공의의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바 바로 그 의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1738년 존 웨슬리는 런던의 한 모임에서 로마서 강해를 듣던 중 구원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웨슬리 형제의 복음 전파와 부흥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울 신학 중, 하나님의 최초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계속적인 성령의 내적인 사역일 것이다(참고. 갈 4:19). 칼 바르트의 1918년 로마서 주석 초판도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스코틀랜드의 변호사이자 목사였던 Thomas Taylor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교회개혁과 복음전도의 부흥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적 발전이 진행된 나라에서는 바울이 교회 개혁과 복음전도의 부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발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례들이나 사제가 집례했느냐의 여부에 의해 구원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응답하는 것이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더 이상 주교의 말에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부여하는 사제들의 카스트제도가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주주의의 기원을 본다. 즉 Taylor는 바울이 기독교의 모임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인종적, 종교적, 성적, 사회적 편견들 또는 차별이 모든 새 창조에서 사라질 그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보라. 브루스, 1992:502-507). ‘바울과 테글라 행전’(the Acts of Paul and Thecla, 1:7)에 보면, 디도는 오네시보로에게 바울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바울은 신장이 작은 사람이고 머리숱이 별로 없었고, 다리는 휘어져 있었고, 건강은 안 좋았고, 눈썹은 서로 붙어 있었고, 코는 약간 구부러져 있었지만 은혜로 가득 차 있었는데, 때로 사람으로 보이다가 천사로도 보였다”(고전 2:3; 고후 10:10; 참고, Hone, 1820:100). 이런 대략적인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 인상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2세기 중엽의 전승에 기초한 문학적인 묘사일 뿐이다. 이런 바울의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사상적 측면이다.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명에서 번쩍였던 몇 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울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의 이유였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고백하였다. 이 구절들은 바울의 신앙에 있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주제였는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그의 편지서를 통해 여러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롬 5:10, 6:18, 7:24-25, 8:15-17, 갈 2:16, 엡 1:7, 딤전 2:6, 벧전 1:18-19).
답: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관한 여러 실례들을 언급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하나의 예를 가지고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교훈: 바울은 일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파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오로지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부가적용)
이방의 사도로 부름 받았던 사도바울,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하루하루의 끝맺음을 잘 했다. 평안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온갖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보낸 일에 대해 충성했고, 진실했으며 매사에 끝맺음을 잘했던 사람이다. 딤전1:13, 갈1:13-14, 빌3:5-9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신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식만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로 맹세하고 있다. 이는 사도바울의 끝맺음을 말해주고 있다. 과거 집안의 가문이나 학벌, 인생의 자랑,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옛 사람과 그 행동을 벗어버리는데 있어서 끝맺음을 확실하게 했던 사람이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옛 사람을 끝맺음한 장소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사망의 상징이 되었듯이,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의 옛 사람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스스로 그 십자가 밑에 묻혔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옛 사람에 대한 사망의 값을 지불하는 장소가 되었다. 옛 사람과 옛 생각,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에 갖다 묻었다. 그 결과 십자가는 새 사람의 출발점이 되었다. 십자가는 또한 온갖 죄악의 사람이 없어지는 종착역이다. 이곳에 도달하기만 하면 옛 생활에 대한 끝맺음과 새 삶의 출발이 순탄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고 십자가에서 다시 산 것이다. 이곳이 또한 사도 바울의 삶이었다. 십자가만이 나의 죄악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끝맺음을 잘 해줄 수가 있다(갈2:20). 사도바울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힘으로 옛 사람을 죽이고,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 오직 십자가의 도만을 증거 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이다.

목요일(7월 3일)
소망의 주제들(딤전 6:11)

도입)
사람에게서 소망을 제해버린다면,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항상 무엇을 기대하면서…..희망과 소망을 구별해서 쓰고 싶다. 희망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에 있다. 흔히 우리가 가진 희망에는 자신으로 부터출발해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자신의 욕망으로 출발한다. 그래서 좋은 차, 집, 직장 그리고 자녀들의 좋은 학교진학 이런 것들에 대한 희망이다. 그래서 현상적인 세계를 기초로 하여 앞으로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또 그런 기대를 희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기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 소망의 대상을 말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사도 바울의 소망의 대상에 대해 고전 13:12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져서, 새로운 생명과 에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가 산소망을 가지고 거듭나게 되었다’(벧전1:3)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났을 뿐 아니라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나간 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허무한데 굴복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할 것을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이다. 이런 소망이 우리에게 보이게 되었는데, 허무한 데에서 보이지 않는 영광을 소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자기가 갖게 싶은 것에 대한 희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라는 것이다.

어제 교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바울의 생애와 가르침의 핵심적인 주제였음을 배웠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중요하게 여겼던 주제들 가운데 몇 가지를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그 주제들 중 하나는 경건한 삶 혹은 성화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구원이 값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스스로 획득하거나 어떤 대가로 받을 수 없는 하나의 선물인 것이다(롬 5:15, 6:23, 엡 2:8). 그러나 구원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같이 마음대로 행하도록 허가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반응하여 예수께서 우리에게 살라고 요구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딤전 6:11)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게 하려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며 천국행 티켓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완전히 받아들여진바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능하신 사랑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시기 때문이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고후 5:14).

1. 바울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무지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살전 4:13). 사후 상태에 관한 진리를 아는 것은 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답:
바울이 강조했던 주제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망을 이기셨다. 그분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당신의 신실한 자녀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영생의 선물을 주실 것이다. 이들은 온 삶을 통하여 그분께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나타내었던 자들이다(참조 엡 4:20-32).

교훈: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셨으므로, 그분의 약속을 믿는 신자들은 그분께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가적용)
창조된 세상에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보이는 것을 바라며 살지만, 또 보이는 것 가운데 소유하기를 희망하며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그 소망이 선 위치가 창조된 세상 가운데 서 있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창조된 세상에서 일어날 것이 아닌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 소망을 말했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창조된 세상에 이루어 가실 것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별을 짓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두움같이 같이 혼합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창조된 세상에서 이루어 질 것을 소망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나가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소망이 근거가 된다. 소망이 우리의 의지로 표현되면 결국 허무에 굴복되는 것이므로,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꼭 붙드는 것이 아니다. 꼭 붙잡는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붙잡히는 것을 말하고, 그 삶이 정해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기다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적인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삶이 복음을 바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복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소식이기에 현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예수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현상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기에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소망을 말하기에 소망의 말을 간직하며 소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허무를 이기는 삶이랄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소망의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창조이전에 있던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 되어갈 삶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금요일(7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제12장 ‘박해자에서 제자로’(112-122).

“그릇된 신념은 바울로 하여금 친절하고 온유하며 동정심이 깊은 인물이 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종교적 열성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반대하기 위해 굉장히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남녀들을 옥에 잡아넣기 위하여 온 지방을 두루 헤매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4-215).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모든 영예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훌륭한 히브리 교육을 받았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그의 모든 배움도 그로 하여금 가장 높은 표준에 도달하게는 못하였다. 그러한 과학과 문학의 탐구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아는 지식이 현재와 영원한 시대를 통해 가장 유익한 것임을 깨달았다”(엘렌 G. 화잇, 애드벤트 리뷰 앤드 세베쓰 헤럴드, 1899년 7월 18일자).
“성경을 연구할 때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하나의 크고 중심 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관한 것이다. 다른 모든 진리는 이 주제와의 관계를 통해서 상응하는 감화와 능력을 갖게 된다. 십자가의 빛 가운데서만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고상한 성질을 깨닫게 된다. 죄로 인해 마비된 영혼은 우리 구원의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서만 생명을 받게 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8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개인의 신념이 그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요약: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연약한 인간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바울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새로운 선교지에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특별한 배경과 은사를 십분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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