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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그분의 능력 있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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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6-05 09:20 조회4,2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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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그분의 능력 있는 부활
6월 14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5분)

도입)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Girbert West)라는 사람은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변화였다고 한다. 그가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밖에 없네" 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바울, 그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다. 그를 만나는 그리스도인마다 그는 피하고 싶은 자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신앙, 사상, 가치관,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모두 배설물로 여겼다. 그뿐 아니라 그 삶에 급진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종교도 달라졌다. 소속도, 가문도 바뀌었다. 이름도 바뀌었다. 말과 행동도 바뀌었다. 인생관이 바뀌었다. 완전히 달라졌다. 이 모든 경험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채로 그대로 계신 분이셨다면, 그분의 죽음이 아무리 훌륭하였다 할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하여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세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거의 부활은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첫 무덤을 깨뜨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하는 것인데 과학을 운운하는 현대에는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대면을 통해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를 보았노라"고 증언할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부활을 분명히 믿었다. 그 다음으로 미래의 부활은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는 성경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살과 뼈까지도 그리스도의 변화하심 같이 우리도 변화되며 영원한 복락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부활이 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현재에도 활동하고 계신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해골 골짜기와 같아서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은 다 죽은 영이다. 우리의 영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햇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기도의 호흡과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진리의 생명수를 항상 마셔야 한다. 오늘 우리의 영혼의 새로운 삶의 부활을 경험하고 살아야 한다.

기억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계 1:18).

연구범위: 마 27:62-66, 눅 24:36-39, 행 3:14-16, 고전 15장, 빌3:7-10.

안식일 오후
부활절이 다가오자 선생님은 아이들을 학교 주변의 숲 속으로 내보냈다. 각자의 손에 작은 상자를 들려주며 그 안에 생명을 상징하는 뭔가를 담아 오라고 숙제를 내주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돌아오자 선생님은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보았다. 첫 번째 상자에는 나비가 들어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나비가 날아 나왔다. 다른 상자에는 나뭇잎이, 또 다른 상자에는 나뭇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한 상자를 열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한 아이가 소리쳤다. “어? 얘는 바보다! 숙제도 안 했네.”
그 때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필립이 말했다. “이건 내 상자야.”
그 아이는 필립을 놀리듯이 다시 소리쳤다. “그래 필립, 넌 숙제를 망친거야!”
필립은 힘 있게 대답했다. “아니야. 그분의 무덤도 비어있었다고!”
그날 필립은 숙제를 가장 잘 한 아이로 뽑혀 칭찬을 들었다. 오래지 않아서 필립은 앓고 있던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에 온 급우들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기리기 위해 빈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왔다.
참으로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 무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소망을 발견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어떤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일요일(6월 8일)
부활의 이야기 - 1 (마 27:62-66)

도입)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박 속에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해방의 소식이 들리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왜정 36년의 길고 긴 압박 속에서 벗어난 자유와 기쁨으로 혹시라도 이 소식을 몰라 고통당하는 백성들이 있을까봐 해방의 소식은 순간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순간에 우리의 자유를 박탈한 그들은 반대로 결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까지도 죄에 결박당해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해방의 소식을 알려서 그들도 죄와 저주와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알려주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예수는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천지간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건인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롬6:23).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죽으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셨던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부활하셨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증거이니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순간에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을 불의의 병기로 삼아 죽인 마귀는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불법자로 또 다시 확인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2000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지구상에 태어날 모든 인간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해결했다고 믿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영생을 얻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우리가 해방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사건으로 꼽을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는 성육신, 십자가, 재림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부활은 이 모든 것들 중의 으뜸이며, 심지어 지난주에 공부한 십자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면 나머지 것들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반드시 부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활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 교리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 중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만이 부활의 교리를 믿는데, 그 중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부활의 교리를 그 핵심에 두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그 중심인물이 실제로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믿는 신앙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사복음서는 믿어지지 않는 사건을 다루면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할 만한 꾸밈없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부활의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높여주는 데 어떤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마 27:50-5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7:54-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7:57-61 (비교, 막 15:42-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7:62-6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에 제시된 사건들은 다 공개적인 것들이었다. 마태복음의 기록연대를 추정해 볼 때(주후 70년 이전으로 추정됨) 사건의 목격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으므로 이 보고를 확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 기록이 거짓이라면 종교 당국자들 중 그러한 주장을 그냥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분명히 그날 성전 봉사자들 중 목격자들이 있었을 것임), 주변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많은 성읍 사람들에게 보였고, 로마 백부장과 군병들도 목격했으며, 무덤은 인봉되었고 특별 수비병이 세워졌다.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었으며, 어떤 특별한 부탁이나 방어 목적으로 꾸며낸 일이 아니었다.

교훈: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이며, 부활과 관련된 공개적인 사건들은 그 사건이 결코 꾸며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증명해 준다.

부가적용)
바울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복음 안에 부활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복음에서 부활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부활을 거부하는 것은 곧 복음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기원과 교리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 거기에 뿌리를 두고 기독교는 시작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모이는 것도 이 부활의 사실을 근거로 하고, 이 내용을 믿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부활사건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의 영생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영원히 죽지 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모여서 기독교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 그것은 부활 사건, 역사적인 부활 사건, 그것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이 기독교이다. 바울에게 부활교리는 그의 복음 증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월요일(6월 9일)
부활의 이야기 - 2 (눅 24:36-39)

도입)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 자신과 연결시키고 있다. 죄사함을 얻고 이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살아가는 영역의 변화를 의미한다. 출애굽 사건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홍해는 애굽과 가나안을 분리하고 있는데, 이를 건넌다는 것은 종, 노예로서의 삶은 죽고 자유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됨을 말해준다. 즉 바로의 통치권은 소멸(롬7:1,2)이 되고, 홍해를 능력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서 인류의 죽음과 소멸을 의미하며, 그 분의 부활은 새 인류의 시작을 선포한다.

어제의 교과에서 우리는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과 그분의 부활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꾸밈없는 사건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았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맥락에서 몇 구절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1. 다음 구절들에서 발견되는 핵심 기별은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핵심요소는 무엇입니까?(마 28장, 막 16장, 눅 24:10-44).
답:
비록 요한복음이 위의 참고절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사복음서는 각각 부활에 관해 상당히 세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2. 부활은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까?
답: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고전 15:17)고 말한 사도 바울의 신앙에 동의해 왔다. 그리스도교의 다른 모든 교리는 부활의 선언에 의존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중요성은 탄생한 그 아기가 하나님이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만약 죽으신 그분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의 수난일(Good Friday)은 또 하나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에 불과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신실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떡을 떼지 않으셨다면 교회에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앨런 리처드슨, 기독교 신학사전, ‘그리스도의 부활,’ 웨스트민스터 출판사, 1969년, 290).

교훈: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신앙의 기초는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의 모든 예식은 무의미한 의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가적용)
이 세상의 죽을 존재들의 질서는 장차 미래 부활의 세계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씨앗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땅에 묻힌 씨와 그 후의 풍성한 추수 열매들 사이에는 분명한 ‘불연속성’이 존재하지만, 또한 그와 동시에 ‘연속성’도 존재한다. 성도들은 지금 썩을 몸을 소유하고 있지만, 미래 부활의 세계에서는 썩지 않을 존재로 다시 살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심고’, ‘살아나는’ 추수의 예를 가지고 예증한다. 심는 것이 없으면 다시 사는 것도 없다(고전 15:36절). 따라서 육신의 몸과 신령한 몸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 더러운 행위를 하면 그는 부활의 세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지 못한다(고전 15:32-34절, 고후5:10). 어쨌든 몸을 심어 다른 종류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몸의 존재’는 바뀔 수가 없다. 영혼구원이라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다. 사실 신자들이 마지막 구원을 받을 때 영혼만 구원받아 천국에 육신이 없는 영혼만 들어가는 것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몸이 없는 영혼이란 있을 수 없다. 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 사이에 어떤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따라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58절)

화요일(6월 10일)
초기교회 부흥의 원동력(행 3:14-16)

도입)
두려움으로 문을 굳게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평강이 있을 찌어다’ (요20:19)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친히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확신을 주셨다.(요20:26-27}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과 의심했던 도마까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로운 영적 세계에 눈을 뜨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요20:20,28)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이들의 변화는 훗날 죽음을 무릅쓰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게 했다. 당신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며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 당신이 노력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방문을 잠그고도 마음조이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함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의심에 휩싸여 믿지 못했던 도마 역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의와 불신을 물리치고 드디어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며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있다. 그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불안과 의심을 극복하게 하시고 미래에 대한 확신과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말씀 안에서 주님과 깊게 교제하는 삶만이 진정한 변화와 기쁨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말씀 안에서 만나야 겠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정한다면, 그것은 죽은 예언자의 부활을 믿는 무리가 로마 제국에 두루 퍼져 있는 것 같은 참으로 이상스런 이야기가 아니었겠는가? 몇몇 어부들과 세리들이 무엇 때문에 그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이같은 이야기를 지어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이 이야기를 꾸며냈다면, 어떻게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도 버리고, 그들이 선포한 부활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주님께서 붙잡혀 심문 받으시고 처형되시자 제자들은 충격과 상심과 좌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제자들은 옛날에 익숙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본래의 생계 수단이던 고기잡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어부가 아니었던 마태나 열심당원 시몬 같은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금방 몇 주가 지나가고 오순절이 되어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을 입었다(행 2장). 베드로는 오순절에 설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분이시며, 부활하여 하늘 아버지 앞에 높임을 받으신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고 반응하였다.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초기교회 신자들의 일시적인 신념이 아니었으며, 더 나은 것이 생기면 쉽게 내팽개치는 순간적인 경험도 아니었다. 정반대로 부활은 사도들의 가르침의 중심 내용이었으며 그들이 입을 열면 언제나 계속해서 되돌아갔던 주제였다.

1. 사도행전 3:11-16, 4:8-12, 7:54-56, 17:29-31을 읽으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주제로 되돌아갔습니까?
답: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설교에 있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증명하는 것은 부활이었다. 부활은 그분이 하늘로 오르셔서 메시야로서의 당신의 통치를 시작하시고 영광의 시대를 여시는 시작점이었다”(해설자의 성경 사전, vol R-Z, 44).

교훈: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이 주제를 반복하였다.

부가적용)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인간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이다. 왜 그런가? 단지 죽은 사람이 살아 왔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행동하셨다. 그분이 하신 것은 그 자신을 위해 한 것이 아니다—우리를 위한 것이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실제로 일어나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났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고통을 겪은, 인류의 대속자 이셨던 것이다. 거룩한 정의가 만족되었을 때—예수님은 당신의 대표자로서 죽음으로부터 일어 나셨다. 당신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과 부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법적으로 우리 모든 사람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인류의 중보적 대표자로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선다, 혹은 의롭다고 선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수요일(6월 11일)
증거하는 일에 권능을 부여함(빌 3:7-10)

도입)
'엠마오 도상'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램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라는 화가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잘 그려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행복이 하루아침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버린 것이다. 램브란트는 붓을 내던지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엠마오로, 엠마오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닫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서 그린 것이 '야경(Night Watch)'이라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 값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참 생명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면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값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서 그가 그린 그림은 바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무려 18종류의 번역 성서를 읽었다. 그 그림을 보면 대화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나 나무의 모습들에서 부활의 약동을 느낄 수 있다. 그 그림을 완성하고 그는 '나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다.'라고 고백했다. 그가 행복했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감을 느끼는 길목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를 그릴 수 있었다. 우리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

우리는 사도들의 사역에서 부활의 능력을 본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한 말은 부활하신 구주께 기초를 둔 말이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이 엄청난 이적에 사람들이 흥분하여 날뛸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고(13-14절) 그 다음에 복음으로 옮겨갔다. 처음부터 베드로의 목표는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이 앉은뱅이를 걷게 한 능력은 그분의 부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그 놀라운 이적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체포되어 이 새로운 사건에 대해 답변하도록 소환되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또 다시 재빨리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 곧 예수님의 부활로 되돌아갔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
베드로는 이 세 번의 경우에 다 자신이 증거하는 능력의 근원을 예수님의 부활에 두고 있었다.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그분의 부활이 암시되어 있었다(행 5:40-42).
“예수께서 계속 살아계신다는 확신은, 모욕당하고 죽임을 당한 지도자 뒤에 남아서 위로받지 못하고 있던 열두 제자들로 하여금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무리로 변신하게 해 주었다. 불의 혀가 그들에게 임하였다. 말주변이 없던 자들이 유창한 웅변가들이 되었고, 그레코-로만 세계를 가로질러 폭발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시작한 그들은 자신들의 세대 안에 그 기별을 그 당시 모든 주요 도시에 뿌리내리게 했던 것이다”(휴스턴 스미스, 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하퍼콜린스 출판사, 1986년, 215).

교훈: 제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상에 전파하였다. 그들의 이와 같은 담력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었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있는 제자들의 영혼들을 깨웠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 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그런데 이처럼 비겁하고 두려움이 많던 제자들이 사도가 된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 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단 하나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의 능력이 제자들을 변화시켰다. 부활의 능력은 숨어있던 그들을 살게 하였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목요일(6월 12일)
우리 자신의 부활의 보증(고전 15:20)

도입)
기적은 특별한 것만이 기적이 아니다. 우리 자체가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이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예배드리는 이곳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 자신을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졌다. 변화가 바로 기적이다. 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사방에 우겨 쌈을 당하여도 우리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부활의 주님이 계시므로,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더라도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걸어갈 수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가 해를 받지 않을 것을 믿고 담대히 걸어갈 수 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에 관해 신약에 그렇게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만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순전히 과학적, 이성적 세계관에 미혹되어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성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세운다. 그들은 부활을 하나의 신화나 은유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부활이란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지금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생명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에 관해 신약에 그렇게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만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순전히 과학적, 이성적 세계관에 미혹되어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성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세운다. 그들은 부활을 하나의 신화나 은유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부활이란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지금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생명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그럴 듯 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적 사고에 기초한 견해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부활에 대해 지극히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결코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취한다면 부활을 은유로 받아들일 위험은 없다.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적인 부활을 하셨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그 부활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 우리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든지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부활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전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1. 다음 구절들은 우리 자신의 부활에 관한 어떤 소망을 줍니까?
요 5:25-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23-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전 15:51-5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의 부활은 세 가지 확실성을 던져 준다. (1)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보장된다는 사실(벧전 1:3-5)과, (2) 죽음은 이미 정복된 원수라는 사실(고전 15:20-22)과, (3) 이 엄청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요 14:12, 행 1:8)는 사실이다.

교훈: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은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들은 마지막 날에 육신의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이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주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은 것처럼 보이거나 기절한 것 같은 가사 상태가 아니었다. 주님의 머리는 가시면류관에, 손과 발은 대못에, 허리는 로마 군병의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예수님의 육체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운명하셨다. 그리고 해가 져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서 그의 생애를 끝마치지 않으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 : 17-18)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하고 그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실 때 인생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하셨다(마 16 : 21).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첫째로,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종교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병 고침도 요술로 취급되었을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하나의 비극적인 순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속하는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죄를 속함 ,즉 구원의 보증이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죄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인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죄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나셨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청산되고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된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 : 13).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장차 다가올 부활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소망이 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요, 우리 죄속함의 보증이 되며,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확증이 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이다.

금요일(6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갈라진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산다.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느냐에 따라 저들의 생사가 좌우된다. 가장 높은 스랍으로부터 가장 낮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에게서 생명을 공급받는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분만이 나는 내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 속에 죽음의 속박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시대의 소망, 785).
“당신의 봉사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다. 그분은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과 관원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불멸의 옷을 입지 못했다. 살아난 후에도 그들은 역시 죽음에 정복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무덤에서 나온 자들은 영생으로 일으킴을 받았다. 그들은 죽음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전승 기념으로서 그분과 함께 승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사단의 포로가 아니다. 내가 그들을 나의 능력의 첫 열매로서 무덤에서 일으켰으므로 그들은 나와 함께 있어 다시는 결코 죽음을 당하거나 슬픔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78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신약에서 가장 강력한 부활의 신학을 대변해 주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어보십시오. 만약 죽은 의인이 죽자마자 즉시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면 이 장의 어떤 내용과 서로 모순이 됩니까?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재림교회의 이해는 부활의 소망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까?

2.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나버린다고 믿는다면 인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까? 각자의 답을 교과토의 시간에 나누어 봅시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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