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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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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8-05-23 15:44 조회5,3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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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5월 3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7분)

기억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연구범위: 마 5:44-48, 19:13-14, 23:37, 눅 10:38-42, 요 8:2-11, 행 6:7.

안식일 오후
마태복음 9:35은 예수께서 팔레스틴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고 기록한다. 요즘 같은 냉소적인 시대에는 누군가 남을 도와준다면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는 ‘불쌍히 여김’(36절)이라는 말로 묘사된 진실한 사랑이었기에 우리에게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그분의 마음은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으로 가득했으며, 언제나 그들에게로 향하였다. 그분의 이와 같은 연민의 정은 마가복음 8:1-3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집으로 가는 도중에 기진(氣盡)할 것을 염려하시고,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2-3절)고 말씀하셨다.
이 놀랍도록 부드러운 관심은 예수님의 품성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셨으며, 그들의 필요를 통감하셨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도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은, 광야에 사흘을 머무는 동안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된(먹을 음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임)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염려하셨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 각자의 삶과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그러한 사랑스런 동정심을 배우자.

핵심본문: 마 9:36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께서는 주변 사람들을 매우 동정적으로 대하셨음을 인식한다.
느끼기: 주님께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느낀다.
행하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주의 부드러운 사랑을 반사하기로 결심한다.

< 교과 개요 >
I.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
A. 예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와 사역 동안에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고, 그것에 주요한 초점을 두셨음
B. 예수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녀를 고소한 자들 또한 긍휼히 여기시어 공개적으로 정죄하지 않으심
C.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그들을 맞아 주심

II. 친구와 원수
A. 예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대하신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분께서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필요에 관심을 표명하심
B. 예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에게도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주심으로 동정심을 나타내심

III. 부드러운 말씀들
A. 주님의 부드러운 본성은 그분께서 어떤 부류의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신 사실에 잘 나타나 있음
B.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주님의 강경한 말씀은 항상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길을 조심하고 수정하도록 기회를 주었음

요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와 사역을 통하여 구원 받을 자들을 인도하시며 보여주신 부드럽고 완전한 긍휼의 모본을 본다.
일요일(5월 25일)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요 8:2-11)

1.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엘렌 G. 화잇은 그 여인이 어떤 음모에 걸려들었다(시대의 소망, 461)고 하였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죄는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요8:2-11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용서하셨다.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셨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무죄하신 그분께서는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시대의 소망, 462).
이 얼마나 부드러운 동정과 사랑인가!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고소한 자들로 하여금 총총히 떠나가도록 조치하셨는데, 그분께서 그 아침에 길바닥에 쓰신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그들은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2. 예수께서는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 여인을 당신께로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까지도 어떻게 구원의 사역을 행하셨습니까?

답:“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7-9).

이 이야기를 주의 깊이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아주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있던 자들까지도 동정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가련한 여인에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호소하셨을 때 그들이 마음을 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공포에 질린 어떤 여자를 끌고 와서, 거칠고 열띤 음성으로 그 여자가 일곱째 계명을 범하였다고 고소하였다. … 예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면 그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다는 비난을 받으실 것이었다. 만일 그분께서 그 여자를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선언하신다면 그분께서는 로마인들에게만 속해 있는 권리를 빼앗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할 것이었다”(가정과 건강, 249-250).

<부가설명>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처주지 않는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8장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여자를 고발한 자들을 상처주지 않는 사랑으로 대하셨다. 땅에 글씨를 쓰시고 하나씩 하나씩 당사자만이 그 글씨를 읽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그들에게 경고와 권고를 주시기 위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훗날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을는지 모를 일이지만.
예수님의 모본은 오늘날 우리도 따라야 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며 상처주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상처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당신이 대신 상처를 당하시면서 사랑하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희생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교훈: 예수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까지도 동정하시고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그분은 그녀를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도 동정심을 나타내셨다.

월요일(5월 26일) 어린아이들에게(마 19:13-14)

어린아이들은 수세기 동안 고통의 표적이 되어 왔다. 힘이 없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은 종종 전쟁이나 분쟁에서 사로잡히고 사회적 폭동이나 가정적 불화의 희생자가 되어 왔다. 고대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을 때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유아들 특히 남자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후에 헤롯이 내린 살육 명령(마 2:16)에 희생된 것도 남자 아이들이었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 당시에 있었던 또 다른 무차별적인 유아 학살을 상기시켜 준다(마 2:17-18, 비교 렘 31:15). 예수께서 모친의 무릎에 앉아 헤롯의 살육에 대해 들으셨을 때, 어떤 면에서 자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겠는가?(그분께서는 그들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건만 그분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인식하시기도 전에 그들은 그분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이신 부드러운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기사들은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를 넘어 어떤 심오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까?(마 18:2-6, 19:13-15).
마18:2-6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19:13-15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답: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결단코 못 들어간다고 가르치셨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그날 예수님의 무릎에 앉았던 아이들과, 그분께서 손을 얹어 축복하신 아이들의 미래는 어떠했겠는가? 기억할 만한 나이에 있었던 아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추억했겠는가? 그들 중에 얼마는 후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자기에게 축복의 손을 얹으신 그 사랑스런 분이 이제 하늘 높은 곳에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느꼈겠는가? 그들에게 얼마나 깊은 확신이 들었겠는가! 정치가들이 아기들에게 입 맞추는 것은 그 부모의 표를 의식하기 때문이지만,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고 말씀하셨다.

아이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으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어린이다운 동정과 편견이 없고 변함이 없는 사랑을 받으셨다. 그들의 순결한 입술에서 나오는 감사의 찬양은 그분의 귀에 음악이 되었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과 접촉하심으로 말미암아 억눌렸던 그분의 정신을 상쾌하게 하였다. 어디로 가시든지 구주의 인자하신 용모와 온화하고 친절하신 태도는 어린이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었다”(시대의 소망, 511).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거기에는 어린아이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기로 탄생하셨다. 그는 어릴 때도 성령으로 잉태하고 탄생하신 분답게 온전한 어린이로 거룩하게 사셨다. 그분은 나시면서부터 거룩하신 분이었다(눅1:35). 그분은 일생동안 그의 거룩함을 결코 단 한 번도 손상하지 않았다. 그는 장성하여서도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셨다. 우리도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린아이의 가장 큰 특성을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한다.

교훈: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에도 깊은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셨다. 어린 영혼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축복하기를 기뻐하셨다.

화요일(5월 27일) 나사로의 가족에게(요 11:5)

우리는 베다니 나사로의 가족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한다. 사복음서에는 그들에 관한 정보가 아주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세 명의 장성한 미혼 남매들로서 함께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유대인 가족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 마을에 오실 때면 언제나 그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마리아)과 (그들의 오라비)나사로를 사랑하”셨다(요 11:5)고 요한은 말한다.

1. 누가복음 10:38-42에 기록된 일화를 숙고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르다를 대하신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서도 예수께서 보이신 사랑스런 동정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눅10:38-42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답: <부가설명> 예수께서 마르다를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육신의 일보다 영적 일의 중요성을 은근히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마르다의 일이 마리아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 일과 육신의 일을 비교하여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육신의 건강과 힘을 위하여 음식 봉사는 중요하다. 한 덩어리의 빵에는 생각보다 깊은 신앙과 종교가 있다.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될 때 더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이겠는가 하는 것이지 마르다의 봉사를 나무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도 사랑과 동정이 넘치는 음성이었을 것이다.

마르다의 요청은 매우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동양의 풍습은 환대의 표시로 음식을 대접했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아마도 마르다는 너무 가난해서 하녀를 둘 형편이 되지 않아 부엌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반응은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이라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눅 2:48-49)을 통해 그분의 부모도 깨닫게 되었듯이, 예수님께는 그 어떤 것도 평범한 것이 없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매 분초가 그분께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엌일은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실 때의 표정을 우리는 볼 수 없고, 연민의 정이 배어 있는 그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다른 곳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종합하고,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볼 때, 이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두 번이나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부르시고, 뒤 따라오던 마리아를 가리키시며 “대접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했구나.”라고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휴식처 나사로의 가정
“예수께서는 때때로 나사로의 가정에서 휴식을 얻으셨다. 구주께서는 집이 없으셨기 때문에 친구들과 제자들의 후한 대접에 의존하셨으며, 가끔 피로하고 인간의 우정이 갈급 될 때에는 분노한 바리새인들의 의심과 질투에서 벗어나 이 평화스러운 가족에게로 피하기를 즐기셨다. 이 곳에서 그분은 진심어린 환영과 순결하고 거룩한 우정을 발견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이해되고 소중히 간직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순하고도 완전히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다. …
그리스도께서는 공중 생애의 피곤한 투쟁에서 떠나 베다니에 있는 그 가정에서 휴식처를 찾으셨다”(시대의 소망, 524-525).

교훈: 예수께서 나사로의 가족에 나타내신 동정어린 사랑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가정도 예수님이 즐겨 찾으실 만한 곳이 되게 하자.

수요일(5월 28일) 당신의 원수들에게(마 5:44)

1. 예수께서 하신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마태복음 5:44-48에 나옵니다. 이 성경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이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마5:44-4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답: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신 정신으로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온 생애와 죽음은,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네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선을 베풀라’는 이 원칙의 현현(顯現)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온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의 영토가 되었고,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원수 된 지구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범죄한 지구를 쓸어버리기 위해 천사의 군대를 보내셨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끝장내는 대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2.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원수에게까지도 나타내신 명백한 사랑의 모본들 중에 가장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 일,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 일 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을 때 낫게 해 주신 일(눅 22:50-51)은 어떤가? 혹은 그분께서 유다가 행할 일을 미리 아셨으면서도 마음이 굳어져가는 그 제자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키도록 또 다른 기회를 주신 사례(마 26:25)는 어떤가?
물론 가장 위대한 모본은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늘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여러 면에서 이 기도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신 그분의 모본을 궁극적으로 나타내 준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당신이 누구이시며, 적어도 그런 거친 대우를 받을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넉넉한 기회를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동정심을 그들에게까지도 보여주신 것이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군병들이 무시무시한 일을 하고 있는데 반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기도하셨다. 그분의 마음은 자신의 고통보다 박해자들의 죄를 생각하셨고 그들에게 무서운 보응이 이를 것을 아셨다. 그분을 그처럼 난폭하게 다루는 군사들에게 그분은 아무런 저주도 하지 않으셨다. 저들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만족히 여기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아무런 복수도 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무지와 범죄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다만 그들을 용서해 주기를 탄원하셨는데 이는 저희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었다”(시대의 소망, 744).

<부가설명>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떠나서 인류의 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실 때 그는 이미 원수를 사랑하셨다. 그는 대적하는 자 루스벨로 사랑하셔서 그의 길에서 돌아오도록 간절히 호소하셨다. 그러나 루스벨은 그 호소를 무시하고 마침내 자기 지위를 버리고 자기 처소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구를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위를 확장하였다. 그럴 때 주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여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람 되어 세상에 오셔서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교훈: 예수님의 온 생애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당신의 명령을 친히 보여주신 모본의 삶이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목요일(5월 29일) 이스라엘 백성에게(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1. 위의 본문에는 예수님의 품성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이 구절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구절은 사랑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키기 전에 이 말씀을 어떻게 내 자신에게 직접 적용할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답: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품어주셨건만 그럼에도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신다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4천년간의 끊임없는 실망과 좌절의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때는 아주 드물고 비교적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가 다하자, 그분께서는 메시야의 초림에 이르는 490년의 기간(단 9:24)을 그들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그 메시야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과 동정의 태도로 일관하셨다.

2. 마태복음 23:25-35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강경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마23:25-3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답: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인내가 그 한도에 가까이 이르렀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또 아무리 오랫동안 그 완고함으로 버리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은 마침내 그분의 강경한 사랑의 껍질을 깨뜨리고 만다. 만약 이 백성 중에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자들이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그분은 그렇게 강경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아,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그분께서는 그대들을 위하여 울고 계셨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은 회개하고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하늘의 선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때까지도 예루살렘이 당신을 받아들이길 기다리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사랑의 음성으로 그대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산상보훈, 151).

<부가설명>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악신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이다. 말은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의 상태에 따라서 표현이 달라진다. 고부간의 사이가 너무 나쁜 집안이 있었는데, 며느리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시어머니를 자기가 죽인줄 모르게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음식으로 죽이는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친정에서부터 신임하고 존경하는 한의원을 찾아가 자기의 괴로움 심정을 토로하고 방법을 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한의원은 죽게 하는 정말 너무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밤을 먹게 하는 것이었다. 한의사가 처방하는 대로 밤을 시어머니에게 먹이면 전혀 눈치 못 채고 석 달이면 죽는 법이었다. 너무 좋은 방법을 안 며느리는 그날부터 한의의 처방대로 끼니때와 간식까지 밤을 먹게 했다. 한 달여가 지나면서 이 시어머니는 동네방네 며느리 자랑을 늘어놓고 다니면서 어찌나 집에서도 며느리에게 살갑게 대하는지, 며느리가 놀랐다. 그런 시어머니의 사랑 표현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었다. 며느리가 어느 날 급히 한의원을 찾아와서 시어머니가 죽으면 안 되겠다고 죽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의원은 다시 죽지 않는 처방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처음 며느리가 찾아왔을 때 시어머니를 죽이려는 의도를 나무라고 도덕적 교훈을 했다면 그 며느리가 그 말을 들었겠는가. 한의원은 그 고부간이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도록 며느리가 이행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한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성질이 그와 같다. 대상이 시행하여 유익하게 되도록 하는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강경하게 말씀하시는 것도 듣는 자들이 진정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사랑의 언어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교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는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끝나고 말았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의 호소를 보내신다.

금요일 (5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58장 ‘나사로야 나오라’(524-536), 제75장 ‘안나스 앞과 가야바 궁전에서’(710-715), 제76장 ‘유다’(720-722)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는 많은 기지(機智)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구주께서는 결코 진리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많은 기지를 사용하시고 항상 사랑과 이해심이 많으셨다. 무례한 행동을 하신 일도 없었고, 쓸데없이 가혹한 말을 하거나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도무지 없으셨다. 사람의 약점을 힐난하는 일도 없으셨다. 그러나 외식과 불신과 죄악은 기탄없이 책망하셨다. 그러면서도 책망하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분은 진리를 무정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 속에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의 눈에는 모든 영혼들이 다 귀중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위엄을 친히 지니고 계셨을지라도 하나님의 가족의 각 개인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돌아보셨다. 모든 사람들을 보실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여야 할 사명이 당신께 있음을 아셨다”(복음 교역자, 1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실제적인 면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으로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 상대방이 진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원수가 예수 안에서 살 수 있게 되도록 한다면 실제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정이 개입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 우리는 어떤 식으로 참된 사랑과 값싼 은혜를 혼동할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도 묵인해버리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책무를 엄격히 지적해야 할 때도 있습니까?
* 사랑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 곧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정이 넘치고 따뜻하고 포근해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사랑을 인간의 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 유대 민족과 오늘날의 재림교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사례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 우리교회는 유대민족과 아주 유사한 점이 많다. 먼저는 책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구약과 탈무드가 있고, 우리는 성경과 예언의 신의 권면이 있다. 우리는 타교단의 비성경적인 사실을 지적하는데 빠르면서 스스로는 주신 권면을 수행하지 않는다. 특히 예언의 신을 권면을 남에게 잘 적용하면서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아주 흡사하지 않는가?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상처주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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