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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그리스도로 꼴 지은 삶, 성령이 이끄는 말(질문, 대답, 설명) 08/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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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8-12 01:16 조회5,9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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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그리스도로 꼴 지은 삶, 성령이 이끄는 말

(8월 1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0분)

 

연구 범위: 엡 4:17~32, 골 3:1~17, 슥 3:3~5, 슥 8:16, 사 63:10, 롬 8:16, 26, 27

 

기억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호세 안토니오는 스페인 팔마(Palma)의 거리에서 수년간 노숙자로 살았다. 헝클어진 회색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호세는(57세) 자기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어느 날 미용실 주인인 살바 가르시아가 그에게 다가와 완전한 변신을 제안했다.

호세가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직원들은 열심히 엉킨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고, 염색하고, 손질했다. 그런 다음 호세는 새롭고 세련된 옷을 입었다. 마침내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호세는 눈물을 흘렸다. "이게 나라고? 완전히 달라졌잖아. 너무 달라서 아무도 날 못 알아볼 거야!" 훗날 그는 말했다. "단순히 외모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날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엡 4:17~32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완전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옛 자아를 벗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호세의 변화와 다소 비슷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다. 이것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엡 4:23) "의와 진리와 거룩함"(엡 4:24)의 새 삶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변화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과 언어생활이 그리스도를 닮아 새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 느끼기: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악의 일과 악한 말을 버려야 하는 것을 느낀다. 

- 행하기: 변화된 말을 통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에 용서와 사랑을 나눈다. 

 

TMI 위로

2. 나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엡 4:18~19)  

*답: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삶이다. 그것은 감각이 없고 방탕하게 나타난다.

3.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모양으로 나타납니까?(엡 4:20~24)

*답: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급나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세우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엡 4:29) 

*답: 덕을 세우고 선한 말을 하여 은혜를 베푸는 언어이다. 

5. 잘못된 말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엡 4:30)

*답: 성령께서 구속의 날까지 인친 것을 무효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6. 바울은 우리의 언어생활이 어떤 모습이기를 기대합니까?(엡 4:31~32)

*답: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언어생활을 할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생명에서 떠나 죄 가운데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삶의 변화는 언어생활에서 두드러진다. 그리스도인은 부정적인 말의 해악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세우며 은혜가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날에 참여할 자로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언어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담은 말로 세상에 감화를 나누어야 한다.  

 

8월 13일(일) 죄의 하향 곡선

 

엡 4:17~32과 골 3:1~17을 비교해 보라. 바울은 신자들이 교회의 연합을 장려하는 방식으로 살게 하기 위해 어떻게 권면하는가?

[엡4:17~32]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3:1~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답: 거듭난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살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없는 이방인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자이지만, 예수를 믿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엡 4:1~16에서 바울의 주제는 교회의 연합이었다. 엡 4:1과 엡 4:17은 연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생활 방식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것 같다. 바울은 신자들이 어떻게 행할지,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다만 17절에서 바울은 새로운 관점을, 먼저 부정적인 측면에서부터 다루기 시작한다.

엡 4:17~24에서 바울은 연합을 해치는 이방인의 생활 방식(엡 4:17~19)과 연합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엡 4:20~24)을 대조한다. 여기 기록된 타락한 이방인의 생활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읽을 때, 우리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았고 하나님의 백성과 완전한 동역자가 되었다는 바울의 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엡 2:11~22, 3:1~13). 엡 4:17~19절에서 바울은 "육체로 이방인"인 그들에 대해 제한적이고 부정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엡 2:11).

바울은 단순히 이방인들이 보이는 특정한 죄나 행동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궤적, 즉 죄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삶의 하향 곡선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엡 4:17~19은 반복된 죄로 무뎌지다 못해 무감각해진 영성을 묘사한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영적인 무감각은 이 구절의 시작과 끝부분에 각각 강조된 어두워진 이해력과 타락한 음행("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9)의 원인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그분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분리되어 죄와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교훈> 이방인의 생활 방식에 대한 바울의 경고는 특정한 죄에 관한 것보다는 연합을 해치고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를 따르는 삶의 하향곡선에 대해 경고한다. 

 

<부가설명> 바울은 여기서 새 생명 새 생활에 관하여 기본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골로새서의 말씀도 같은 사상이다. 아담 후손으로 사람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는 옛습관을 따라가는 옛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새사람이다. 교과 저자가 여러 번 표현한 대로 새로운 하늘 인종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들의 삶은 거룩하게 된다. 전에는 썩는 냄새를 풍기며 사망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나 이제는 위엣 것을 찾아 하향곡선이 아니라 상향곡선으로 하늘로 치솟는 삶은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당연히 의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삶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배속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비유하셨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났으면 거듭나기 전의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를 때 자신과 새사람이 된 지금의 자신을 스스로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이 위의 것이고 당연히 생활이 예수께서 세상에 사실 때 보여주신 그런 삶을 따라가는 모습이 되었다. 성령께서 주장하시게 된 것이다. 

 

8월 14일(월) 최상의 옷으로 바꾸어 주심

 

수신자들의 회심의 경험을 다시 살펴보면서 바울이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인가?(엡 4:20~24)

[엡4:20~24]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답: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라는 것이다. 

 

엡 4:17~19은 이방인이었던 그들의 이전의 삶을 설명한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힘껏 외치고 있다(엡 4:20). 바울은 수신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흠정역), "그 안에서"(엡 4:21) 또는 "그분에게서"(흠정역)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면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엡 4:21)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채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높임 받으신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안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 형성되며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해 충성을 다하며, 성령과 성경을 통한 그분의 생생한 인도와 지도하심에 우리의 삶을 맡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을 옷 입는 세 단계의 과정 즉, (1) 옛 삶의 방식을 "벗어 버리고"(엡 4:22) 거기서 돌아서는 것, (2) 내면의 새로움을 경험(엡 4:23), (3) 거룩한 새 삶의 방식을 "입"는(엡 4:24) 은유를 통해 보여주었다. 바울은 옷이 죄의 상징과(시 73:6, 슥 3:3, 4, 말 2:16)과 구원(사 61:10, 겔 16:8, 슥 3:4, 5)의 상징으로 사용된 구약성경의 은유를 인용했다.

고대에 남성은 속옷으로 무릎까지 오는 내의를 입고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겉옷을 입었다. 여성이 입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성경 시대의 의복 문화는 생계를 위한 문화였다. 한 벌 이상의 옷을 가지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외투는 귀하고 값비쌌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입었다. 

 그 사람의 의복의 품질과 스타일은 옷을 입은 사람의 정체성과 지위를 나타냈다.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즉 한 벌의 옷을 다른 옷으로 바꿔입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사소한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이례적이고 중요한 행사였다. 바울은 1세기의 상황에서 한 벌의 옷을 다른 옷으로 교환하는 것만큼이나 눈에 띄는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말하고 있다.

 

<교훈> 당시 옷을 갈아입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그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결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일어나는 눈에 띄는 삶의 변화를 뜻한다.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지식으로 예수님을 잘 몰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믿음으로 아는 예수님은 지식으로 아는 예수님과 다를 수 있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자가 귀신들이었다. 사람 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쳤다. 야고보는 말한다. 마귀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떤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인격과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그분처럼 살아지지 않아도 그분처럼 살려는 마음는 충만하다. 그래서 그분의 삶을 생활에 실천하려고 기도하며 굴복하며 말씀에 순복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예수님이 생명으로 작용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옷입는다는 것은 삶에 예수님이 보이도록 산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속살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입은 옷이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모습과 생활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보이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학자들 만큼 몰라도 생활로 예수님 같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살려고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다. 

 

8월 15일(화) 공동체 만들기, 은혜를 담은 말

 

신자들 사이의 언어생활에 관한 바울의 권면 중에서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엡 4:25~29)

[엡4:25~29]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답: 이 질문은 반생들이 각각 대답할 질문이다. 누구든지 덕을 세우는 은혜로운 말을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엡 4:25~32에서 바울은 흥미로운 구조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엡 4:25이 그 예이다. 부정 명령("거짓말을 버리고"), 그다음 긍정 명령("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그리고 그 근거("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가 나오는 구조이다. "진실을 말하라"는 바울의 권고는 무심하게 사실만을 반복해 다른 교인들과 대립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말은 화평을 증진하는 방법으로 진실을 말하라는 슥 8:16의 권면과 같은 맥락이다. 

바울은 노함과 분노를 내는 말을 금하기 때문에(엡 4:31), 엡 4:26의 말씀은 회중 가운데 분노를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분노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분을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는 권면으로 분노의 표현을 제한한다.

도둑질에 대한 권면은 부정과 긍정 명령 이후에 근거가 등장하는 형식을 잠시 중단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엡 4:28)라는 부정 명령이 앞에 있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엡 4:28, 고전 4:12, 살전 4:11 참조)하라는 긍정 명령은 마지막에 두며 그것의 근거를 중간에 두어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엡 4:28)게 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아마도 행 5:1~11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 나타난 도둑질과 구제의 연관성 때문에 도둑질에 대한 권면에 구제의 내용을 함께 기록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바울의 믿음은 심지어 도둑마저도 돕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엡 4:29)라고 명령하는데, 이는 파괴적인 말이 입 밖으로 거침없이 흘러 나와서 해로운 일을 하는 것을 묘사한다. 바울은 단순히 부정적인 표현이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1) 덕을(서로를) 세우며, (2) 적절한 때(상황)에, (3)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엡 4:29, 새번역)하는 새로운 기준을 담은 긍정적인 말로 대체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모든 말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교훈> 바울은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부정적인 말의 폐해에서 벗어나 덕을 세우며, 은혜가 있는 적절한 말을 해야 한다.

 

<부가설명>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교양을 드러낸다. 스스로는 감출지라도 일상 사용하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계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말씀이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입으로 말씀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처럼 그리스도인도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되도록 침묵과 대화가 다 영의 사상이 드러나도록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고 바울이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1:20). 성이 나면 언어가 성난 음성으로 튀어나온다. 화가나서 말하거나 욕하고 비난하는 정신으로 말할 때 그 언어에는 독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중요한 실험을 했어요. 사람이 내보내는 숨을 유리관에서 액체 공기로 냉각시켰더니 약간의 침 같은 물질이 생겼는데 화를 낸 사람의 물질을 쥐에다 주사했더니 몇 분 뒤에 죽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1시간 동안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을 때 나온 침전물로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는다면 80명의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 독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독사의 독 못지않게 독한 물질이랍니다.” 이것은 7월 13일(목) 어린이 기도력에 있는 말이다. 이런 예를 여러 면으로 소개했다.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은혜롭고 온유하고 인정있는 말을 하도록 성령께서 깊이 감동하시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쓰는 나도 언어가 온유하고 은혜롭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쪼록 우리의 감성을 성령께서 강하게 주장해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8월 16일(수) 신자들의 삶에 함께하시는 성령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말의 죄를 논하면서 성령의 임재에 대해 신자들에게 무엇이라 호소하는가?(엡 4:30)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답: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바울은 엄중한 경고와 따뜻한 약속을 동시에 제시한다. 신자들이 교회에서 서로에게 저지르는 죄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인 말을 오용하여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엡 4:25~27, 29, 31, 32). 바울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를 인용한 것은 그 심각성을 경고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날(엡 1:13, 14)부터 "구속의 날"(엡 4:30)까지 성령께서 그들을 인치심을 확증하면서 신자들을 격려한다. 성령과 신자의 관계는 깨지기 쉬운 것이 아니라 단단한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사인 말을 무기화하여 내주하시는 성령을 무시할 때라도, 성령은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와 보호를 받는 존재로 인치시며 신자들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그리고 성령께서 “근심”하신다는 표현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한다(롬 8:16, 26, 27, 고전 2:10, 13, 고전 12:11, 갈 5:17, 18 참조).

신격의 신비를 논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이시며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구별된다. 

"성령은 자신의 뜻을 가지고 그에 따라 선택하신다. 그분은 슬퍼하고 모독당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이 아닌, 인격적인 존재에 적용하는 특성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나와 당신과 같은 사람인가? 아니다, 우리는 신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된 인간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성령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이다"(폴 피터슨, Paul Petersen, 신약에서 나타난 세 위격의 하나님, 성경 연구소 BRI, 2015, 20).

 

<교훈> 성령과 신자의 관계는 지속적이다. 말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지만 성령은 떠나시는 것이 아니며 신자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로 자존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을 가지셨다. 이것은 7과에서도 말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라는 말을 창안했다. 라틴어로 ‘트리니타스’라고 하는데 영어로 트리니티가 되었다. 이것을 한자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삼위일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모통 하나에 머리 셋이라는 뜻인가? 라고 조롱하는 교단도 있다. 그서나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가르치고 에베소 4장4~6에서는 성령, 주(예수), 하나님을 각각 하나라고 계시하였다. 그리고 마28:19에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한 이름이라고 계시하였다.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나는 삼위일명(三位一名)이 성경적 표현이라고 믿는다. 세분이 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세분은 다 각각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성령님고 아버지와 아들처럼 인격적 개체심을 분명히 기록했다. 그분은 단독 생각이 있으신 분이다(롬8:26,27). 그러나 삼위는 모든 면에서 한분 같이 활동하시는 것이다. 그분들은 분열이나 다툼이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 승천 후에 이 지상의 교회를 주관하기 위하여 활동하시는 여호와이시다. 사람들이 성령님을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그분을 보내셨기에 오셨다는 생각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확하게 맞는 말도 아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세상에 사람을 탄생하실 때 역사하셨다(마1:18). 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하셨다(히9:14). 성경을 전체적을 잘 살펴서 삼위일명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지혜를 구하자. 

 

8월 17일(목) 친절

 

"구원의 날"(엡 4:30)을 언급함으로써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의 맥락에서 언어 사용에 관하여 주의를 촉구한다. 그러므로 엡 4:31, 32은 그 위대한 사건에 참여할 자의 언어 사용에 대해 권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로서 우리는 말과 관련된 어떤 태도와 행동을 버려야 하고, 어떤 모습과 행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엡 4:31, 32)

[엡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답: 기록한 말씀 그대로 우리의 감정생활과 언어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강력한 감동과 역사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엡 4:17~32의 마지막 권면에서 바울은 다시 부정 명령, 즉 버려야 할 여섯 가지 악(엡 4:31)과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용서하라는 긍정 명령(엡 4:32),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엡 4:32) 서로 용서해야 한다. 여섯 가지 악의 목록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용어인 "모든 악독"으로 시작해서 "모든 악의"로 끝난다. 그 사이에 네 가지 악 “노함,” "분냄," "소란," "비방"(엡 4:31)이 언급된다.

이 중 마지막 단어는 헬라어 “블레스피미아”(blasphemia)를 번역한 것으로, 영어에서는 “신성 모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됐다. 그러나 헬라어는 이를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비방" 또는 "악한 말"로 사용한다. 이 목록은 마음가짐(악독, 노함, 분냄)이 분노의 말(소란, 비방)로 끓어넘치는 것을 보여준다. 본질적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말을 무장해제 시키려고 한다. 분노의 말을 유발하는 마음과 그것을 사용하는 수사학적 전략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내버린 곳에서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번성하고 교회의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엡 4:1~16 비교).

악한 말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까지) 우리의 대화와 행동은 분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최고 기준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엡 4:32)에 근거한 친절과 온유함, 용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수직적 용서"(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를 "수평적 용서"(우리가 서로에게 베푸는 용서, 골 3:13, 마 6:12, 14, 15 비교)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교훈> 바울은 “수직적 용서”를 “수평적 용서”로 적용하는 언어생활을 제시했다. 분노의 말은 잘 사용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씨로 출생한 하나님의 자녀이다(요1:12,13, 요일3:9, 벧전1:23). 왕자는 왕자답게 말하고 표정과 태도가 왕자다워야 한다는 것을 교육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교육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교육은 사람 교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배우고 깨닫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라고 말씀께 부탁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히4:12, 벧전1:23) 언제나 교육되어야 한다. 그래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명상해야 한다. 그때마다 들려주는 성령님의 음성을 기록된 말씀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요16:13~15, 고전2:10~14).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언어와 감정이 주님의 그것첨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전적으로 주장해주시도록 맡겨버리는 경지에 이르도록 성령님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하자. 

 

8월 1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그대의 대화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대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지극히 거룩한 믿음으로 형제를 세우고 도와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친구나 형제의 성품에 해로운 말이 나왔을 때, 이 악한 말을 부추기지 말라. 그것은 원수의 일이다. 말하는 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종류의 대화를 금하고 있음을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라"(리뷰 앤드 헤럴드, 1888. 6. 5.).

여러분과 모든 교인들이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하고 실천한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어떻게 바뀔까?

1. 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나의 영향력이 긍정적이고, 발전적이며, 믿음을 키우고, 사기를 북돋우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엡 4:29).

2. 연합과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름을 상기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좋은 행동과 말을 배양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겠다(요 13:34, 35, 요 17:20~23, 엡 4:1~6, 살전 5:9~11).

3. 나는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에도, 동료 신자에 대한 존중을 분명히 밝히겠다. 그도 그리스도에게 성실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대와 다른 나의 의견을 단호하지 않고 부드럽게 제시하겠다(엡 4:31, 32).

4. 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동료 교인들을 세워주고 긍정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찾으며 기쁨으로 생활하겠다(엡 4:29, 30, 갈 6:2, 히 10:24, 2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신격의 세 위격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 묘사한 구절들을 살펴보라. 반복되는 강조는 신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돕고 있는가?(엡 1:3~14, 1:15~23, 2:11~18, 2:19~22, 3:1~13, 3:14~19, 4:4~6, 4:17~24, 4:25~32, 5:15~20, 6:10~20, 엡 6:10에서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답: 세 위격이 동등한 것을 잘 기록하였다. 성구들을 찾아 삼위일명 여호와에 관한 진리를 바르게 깨닫도록 하자.

 

2. 그리스도인의 말에 대한 바울의 권고(엡 4:25~32)는 "컴퓨터를 통한 소통"의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사이버 폭력, 익명성 뒤에 숨어 행해지는 온라인 인신공격이 빈번한 시대에 이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답: 입으로 말하는 언어생활만이 아니고 글로 표현하는 문자생활에도 이 권고를 실행하도록 기도하고 올바르게 예수님을 보여주도록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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