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수평적 속죄: 십자가와 교회(질문, 대답, 설명) 07/29/23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5과 수평적 속죄: 십자가와 교회(질문, 대답, 설명) 07/29/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7-22 04:20 조회6,415회 댓글0건

본문

제5과 수평적 속죄: 십자가와 교회

(7월 2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4분)

 

연구 범위: 엡 2:11~22, 롬 3:31, 롬 7:12, 사 52:7, 사 57:19, 요 14:27, 고전3:9~17

 

기억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안토니는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이방인, 그리스인이다. 그는 여러 어려움에도 숭배하던 많은 신을 버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뜰과 정교한 기둥들 곁을 지날 때, 들려오는 예배의 소리가 그의 마음에 찬양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그 순간 가슴 높이의 돌 장벽이 그를 막아선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진 라틴어와 헬라어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외국인도 성전 주위의 장벽과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이를 어기는 자는 누구라도 죽음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찬양의 감격은 사라지고 문득 소외되고 분리된 느낌이 안토니의 마음에 밀려온다. 

바울은 엡 2:11~22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런 장벽과 담을 무너뜨리고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십자가는 수직적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그분께로 인도한다.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을 화해시킨다.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을 제거하고 화평을 가져와 "한 새 사람(인류)"(엡 2:15)을 만든다. 그들은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 2:22)인 새 성전이 된다.

이 진리가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느끼기: 하나님은 분리된 나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 행하기: 관계 속에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실천한다. 

 

TMI 위로

2.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엡 2:13)

*답: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다. 

3. 불화하던 인간관계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까?(엡 2:16)

*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화해가 이루어진다. 

4. 율법이 폐하였다고 한 바울의 말은 어떤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까?(엡 2:15) 

*답: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여러 예식법들에 초첨이 있다.

5. 우리의 갈등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이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엡 2:17, 요 16:33)  

*답: 서로 만나 하나가 되어 평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6. 성전의 은유 속에 나타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은 무엇입니까?(엡 2:18-22)

*답: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연합으로 하나님의 성전 교회가 되는 것이다. 

7.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적 원칙은 에베소서 전체의 맥락과 어떻게 조화됩니까?

*답: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원칙이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될 때 성취된다.

 

결론 

십자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도 회복시킨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뚜렷하게 분리된 장벽을 무너뜨리고 화평을 가져오는 새 인류를 만드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은 잘못 사용된 의례적 율법을 넘어서서 멀리 있던 이들을 가깝게 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새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7월 23일(일)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짐

 

에베소 신자들의 이방인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설명인 엡 2:1–3을 엡 2:11~12과 비교해 보라. 그들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설명에서 바울은 무엇을 강조하는가?

[엡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11,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답: 그때에는(2:1~3)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언약에는 외인, 소망도 하나님도 없었다. 이 표현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 이방인들은 한때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런 과거를 "기억"(엡 2:11)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통해 전해주신 구원의 약속을 알지 못하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 이스라엘과 그들을 통해 제공된 구원의 언약에서 외인이었다는 것은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음을 의미한다(엡 2:12).

또한 이방인들은 과거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큰 불화 가운데 있었다. 바울은 그 불화의 한 가지 형태인 서로를 비하해 부르는 말을 통해 이들 사이의 고착화된 증오에 대해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무할례자들'이라고 조롱했고, 이방인들도 유대인을 '할례자'라며 멸시했다(엡 2:11).

그러나 엡 2:13은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을 한때 "멀리 있던" 자로 묘사할 때 사 57:19을 인용했다.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엡 2:17, 18 비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이방인 신자들은 전에는 분리되어 있었던 하나님, 소망, 유대인 형제자매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강력한 복음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넓은 균열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불화와 분열이 거기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의 삶과 교회에 존재하는 분열을 숙고하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십자가의 능력을 구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교훈> 분열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균열이 십자가 앞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불화와 분열도 거기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분열은 죽은 자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죽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감각없는 자가 된다(엡4:18). 생명이 없으니 감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시체마다 따로따로다. 나의 이런 표현은 극단적이고 과도한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아담 안에서 죽은 자(고전15:22)라고 확언한다. 산자와 죽은 자는 함께 지낼 수 없다. 죽은 자들도 서로 함께 할 수 없다. 산 자들은 산 자들끼리 함께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고 약속에 대하여는 외인이라는 설명은 이방인들은 죽은 상태로만 있는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산 자들인가? 그들도 율법주의에 빠졌고 할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며 예수님을 거절했다. 그들도 죽은 자들이다. 하나는 율법과 약속 없이 죽은 자요 하나는 율법 안에서 죽은 자이다. 이 둘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면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어 함께 산 자들이 된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 분열이 없어지고 생명으로 통일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과 화목이고 사람 사이의 화목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7월 24일(월) 화해: 십자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십자가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영향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바울이 십자가에 대해 말하는 것과 십자가가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요약해 보라(엡 1:7, 8, 4:32, 2:13, 14, 2:16, 5:2, 25 참조)

[엡1:7,8]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5:2,25]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답: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엡 2:11~22의 문맥에서 보면 십자가는 신자들에게 세 가지 큰 자산을 나누어 준다. (1)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이 "가까워"(엡 2:13)졌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며, 유대인 신자들의 형제자매가 되었다(엡 2:19). (2)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echthran, 헬라어)을 "죽이사"(엡 2:16, 흠정역) 제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적대감과 전쟁 상태를 소멸한다(엡 2:16). (3) 적대감 대신에 화해가 자리한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 그리스도의 목적이었다(엡 2:16, 골 1:19~22 비교).

화해는 어떤 모습인가? 화해하는 기분은 어떤 것인가? 엄마와 딸 사이에 심각한 소원함이 오랜 시간에 걸쳐 고착된 것을 생각해 보라. 이 앙금이 은혜와 용서의 물결 속에 녹아내리고 이어서 두 사람이 재회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것이 바로 화해이다. 화해는 불화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갈라놓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타인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로 인정하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때에 경험된다. 

화해는 기계적이거나 법률 용어가 아니라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축하하는 인간관계에 관한 용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강력한 능력이 개인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단언한다. 그는 십자가가 우리 삶에 침투해서 우리의 분열을 파괴하고, 다툼을 해소하며, 서로에 대한 교제와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것을 그려낸다.

 

<교훈> 십자가는 우리의 교제와 이해를 새롭게 하여 우리를 갈라놓는 문제를 넘어서 한 몸으로 하나되고 회복되는 화해로 우리를 초대한다. 

 

<부가설명>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이 선악과 먹는 것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으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영원한 사망의 존재가 되어서 생명과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서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화목할 수 없다. 대화도 될 수 없다. 사망이 처리되지 않으면 가능한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사망을 처리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아담에게 선고된 사망을 처리하셨다. 그리거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으로 사망을 이기셨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상태에서 예수님 안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생명을 얻으면 그때 생명이신 하나님과 화목이 되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 사이는 예수님 안에서 화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십자가가 화목의 도구라고 설명한 것이다. 

 

7월 25일(화)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셨다고 하는가?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엡 2:14, 15)

[엡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답: 폐하셨다. 

 

바울은 여기서 헤롯 성전의 이스라엘 궁정을 둘러싸고 있던 난간 또는 담장, 그 담 안으로 들어가면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위협을 암시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이 담이 무너지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온전히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을 그려본다(엡 2:18). 그 벽은 십자가에 의해 제거되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두 민족이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엡 2:14~15이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십계명이 십자가에 의해 "폐지" 또는 "무효가 되었다"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바울이 십계명을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원천으로서 깊이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다섯 번째 계명을 인용하고(엡 6:2, 3) 다른 계명(일곱 번째- 엡 5:3~14, 21~33, 여덟 번째- 엡 4:28, 아홉 번째- 엡 4:25, 열 번째- 엡 5:5)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전 주장과도 일치한다(롬 3:31, 롬 7:12). 바울은 율법의 오용을 지적하지만, 율법 자체를 존중하고 그 연속성 또한 분명히 인정한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사용하여 십계명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의 영속성에 관한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의도를 분명 잘못 해석한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쐐기를 박고, 특히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완전한 협력 관계와 예배 참여에서 배제하기 위해 율법을 사용하는 것은 바울에게 혐오스러운 일이며 율법의 신성한 의도를 오용하는 것이다. 

엡 2:14, 15에서 바울이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라는 복잡한 문구로 표현한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율법의 의례적인 측면이거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쐐기로 해석, 확대, 오용된 구약의 법체계 전체를 의미한다.

 

<교훈> 바울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은 율법의 잘못된 사용을 반대하지만, 십계명을 제자도의 원천이요 하나님의 율법으로서 존중한다. 

 

<부가설명> 엡2:15의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는 번역은 개역에는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라고 번역했다. 개정판은 ‘원수 된 것’ ‘자기 육체’라는 말을 번역에서 다 빼버렸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구절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교단에서 십계명을 폐했다고 주장할 때 잘 사용하는 구절이다. 문장을 그냥 읽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십계명을 폐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교과 저자가 지적한 대로 바울이 십계명에 관하여 언제나 존중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을 볼 때 이것은 십계명을 예수님의 육체로 폐했다고 주장하는 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기 않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라고 했다 원문은 “to;n novmon tw'n ejntolw'n ejn dovgmasin(톤 노몬 톤- 엔톨로론- 엔 도그마신)”이다. 격을 살려 번역하면 ‘톤 노몬=그 율법을, 톤- 엔톨론- =그 계명들의, 교리 안에’이다. 정리하면 ‘그 교리 안에 그 계명들의 율법’이 된다. 여기 율법은 계명에 소속된 것이다. 계명들은 복수 소유격이다. 계명들로 말미암아 생긴 율법이라는 의미이다. 계명이 없었으면 이 교리의 율법을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 구절은 갈3:19과도 연결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율법은 법을 범했기 때문에 더하여준 것이라는 말이다. 법을 범하지 않았으면 더해준 율법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엔톨레-엔톨론은 속격)을 범했기 때문에 율법을 더해준 것이다. 그것은 계명을 범한 죄를 사유하는 방법을 주신 율법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오해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장벽으로 사용하였다. 성소에 관한 법, 속죄에 관한 법, 등등. 예수님은 십작에서 이것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장벽이 된 법조문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믿는 사람들끼리도 화목하여 사랑의 가족, 형제가 되는 것이다. 

 

7월 26일(수) 평화의 사자, 예수

 

바울은 엡 2:17, 18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떻게 요약하는가?

[엡2:17,18]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답: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평안을 전하셨는데 이것은 이 둘이 성령님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함께 하나님께 나간다고 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엡 1:2, 엡 6:23) 오는 평강을 구하는 축복으로 채우고 있다. 에베소서에서 평화의 개념은 그렇게 중요하다. 엡 2:11~2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시며 그분의 십자가가 평화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엡 2:14~16).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엡 2:14, 15)을 무너트리실 뿐만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관계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신다(엡 2:15~17). 이러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롬 5:1)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온전함과 안녕을 경험하는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개념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나누는 데 동참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엡 4:3, 엡 6:14, 15, 롬 10:14, 15을 엡 2:17~19, 사 52:7, 사 15:7과 비교해 보라)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6:14,15]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롬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엡2:17~19]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15:7]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답: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표현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줘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한다.

 

복음서에는 평화의 사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인사에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시며 결언을 주셨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21, 26)라고 여러 번 다시 말씀하신다.

엡 2:17, 1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화의 전파가 지상 봉사 기간을 넘어 확장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그분은 '멀리'(회심하기 전의 이방인 신자들)와 '가까이'(유대인 신자들, 엡 2:11~13 비교)의 모두에게 "평화를 전파"하셨다. 이 선포를 받아들인 모든 신자는 충만하고 완전한 축복을 경험하였다.

 

<교훈> 그리스도는 평화의 사자이시다. 그의 평화의 사역은 지상 봉사 기간을 넘어 신자들의 삶까지 이어지는 사역이며 에베소서의 중요 주제이다.  

 

<부가설명> 사망의 세상에 속하여 살명 평화가 없다. 그들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기 때문이다(히2:15). 그러므로 참으로 평화를 얻으려면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출생할 때부터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고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막연한 공포심인 것 같지만, 바로 사망의 공포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사망을 폐하셨다(딤후1:10).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8:51).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도 사망을 좋아하지 않고 두러워한다. 안 죽어야 하는데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담에게서 받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그 죽음이다(히9:27). 예수님은 이것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그것은 잠자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을 확신하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순교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독실한 그리스도인도 죽음이 달가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부활의 확신을 날마다 확인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사망은 생명에게 삼킨바 되었으나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의인도 한번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이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아침에 깨어 일어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생명을 확실히 소유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평화가 삶을 주장할 것이다. 

 

7월 27일(목) 거룩한 성전인 교회

 

바울은 엡 2:11~22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됨을 나타내는 어떤 적합한 예를 사용하는가?

[엡2:11~2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답: 예수님 안에서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된다. 예수님 안에서 한 건물이 되는 산 돌들이다. 

 

에베소서 2장을 살펴보면 1~10절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대하여 산다고 가르치고, 11~22절은 우리가 그의 교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여 산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연결하게 하고(엡 2:1~10) 다른 사람들과는 수평적 관계를 연결하도록 도와 준다(엡 2:11~22).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와의 간격을 벌리는 율법의 오용과 장벽들을 모두 허무셨다(엡 2:11~18). 예수님은 또한 신자들로 구성된 놀라운 새 성전을 세우신다. 

신성한 곳인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었던 이방인들이 이제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새로운 성전이 된다.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엡 2:19~22, 흠정역)인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 예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연대하며 사는 특권을 누린다.

 

엡 2:19~22에서 바울이 교회를 성전으로 비유한 것을 다음 구절들과 비교해 보라(고전 3:9~17, 고후 6:14~7:1, 벧전 2:4~8).

[엡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전3:9~17]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6:14~7: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벧전2:4~8]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답: 성도들은 다 개인적으로 성전이 되고 연합하여 교회라는 성전도 이룬다. 모든 성도는 다 성전을 구성하는 재료들인데 각 사람이 다 성령의 전이 될 때 그렇게 된다. 

 

바울은 이방인을 교회에 온전히 포용하기 위한 최고의 표현으로 성전으로서의 교회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한때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이방인들은 이제 성전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엡 2:18), 그 자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만들어질 새 성전을 위한 구성 재료가 된다(엡 2:22).

신약성경 저자들은 성전 은유를 사용하여 교회의 신성함, 교회를 세우시고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할, 교회 내 신자들의 연대를 시각화한다. 이 은유는 생물학적 언어와 함께 사용되며(엡 2:21, 성장한다), 건축의 과정이 자주 강조된다(엡 2:22,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은 고정된 모습이 아닌, 움직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교훈> 성전에서의 예배가 금지되었된 이방인이 새 성전을 구성하는 자로서 제시된 성전의 은유는 새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을 잘 보여준다. 

 

<부가설명> 에베소 2장 마지막 구절은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하여 지금 지어가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즉 미완성으로 완성할 때까지 지어져야 하는 것이다. 20절에는 예수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했다. 모퉁이 돌은 양면에 걸리는 주춧돌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의 교회와 하늘 교회가 연결된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새 예루살렘에 이를 때 세상에서 지어져가던 성전은 완성된다. 그때까지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영과 육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날마다 회개로 예수님 손에 씻음을 받고 세상에서 입은 상처는 예수님 손에서 완치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가오기를 언제나 기다리신다. 그분께 가서 허물들 아뢰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86:5).

 

7월 2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아래의 토론 질문을 위한 다음 서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바울이 엡 2:11~22을 쓰면서 십자가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맥락은 무엇인가?

바울은 함께 교회의 구성원이 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엡 2:19)의 일원으로서 각자의 지위는 공유되고 또 화해된 것임을 이해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신 전체의 맥락에서 바울은 보다 더 넓고 원대한 목적을 보여준다. 그의 주제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시키려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궁극적인 계획(엡 1:9~10)이며, 그 범위에는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엡 3:15, 흠정역)이 포함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엡 2:11~22에서 바울이 언급한 교회 내 구성원들의 연합이, 엡 3:10에서 "교회로(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로부터 교회를 만드신)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는 더 넓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연합을 실현함으로써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진행 중인 것을 나타내게 된다. 그들의 회복된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늘날 중요한 주제인 인종 또는 집단 간의 관계에 관한 성경적 원칙을 찾기 위해 엡 2:11~22을 에베소서 전체의 맥락과 함께 살펴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엡 2:11~22에는 민족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어떤 성경적 원칙이 제시되어 있는가? 이 구절은 한 민족의 구성원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그리스도 중심의 독특한 방안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답: 예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명으로 연합한 하나가 되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성전 개념이다. 

 

2. 인류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해 볼 때(엡 1:9~10, 엡 2:11~22), 교회가 내부의 문제와 민족 간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답: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거듭나도록 성령님의 역사를 기도하고 전하는 것은 교회가 할 사명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3. 어느 지역, 어떤 국가라도 이런저런 양상의 차별이나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하신 연합의 사역을 실현하는 데 당신의 교회는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답: 교회가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전도하여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성도 개개인도 전도로 참여할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