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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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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5-22 18:34 조회5,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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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5월31일(안) 오후7시47분 (李奉周)

제9과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확대경(擴大鏡)>
◉ 단단한 바위를 뚫는 것은 예리한 칼(劍)이 아니라, 부드러운 물(水)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내고, 강인한 완력(腕力)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랑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 수 천 년에 걸친 역사의 페이지에 불후의 명성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님은 가장 짧은 기간의 공생애를 보내셨다. 그분의 활동 기간은 단지 3년 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3년 반은 얼마나 놀라운 기간이었던가!
소크라테스는 40년간 제자들을 양육했고, 플라톤은 50년간 가르쳤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40년간 활동했으나 예수님은 4년도 채 못 되는 공생애를 사셨다. 그러나 그분의 짧은 사역의 영향력은 위의 세 사람의 헬라거장들이 활동한 기간을 다 합한 130년의 영향력을 훨씬 능가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장엄한 작품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드높인 것이었고, 하이든과 헨델, 바흐와 멘델스존이 최상의 멜로디로 만든 위대한 심포니와 오라토리오는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과 문화, 음악과 철학,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장식해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철학과 예술과 음악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제공해 주셨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지만, 예수께서는 죄지은 인간에게 빛과 생명과 구원(救援)을 제공해 주셨다.”
이 진술이 비록 훌륭하긴 하지만 예수님의 귀중한 사역의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단지 서양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정치적, 인종적, 문화적 장벽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교과2008년 제2기 총론: 클리포드 골드스틴)

◉ “ 많은 사람들이 생애의 큰 싸움에서 피곤에 지쳐 용기를 잃었는데, 그들은 친절한 격려와 용기의 말 한마디로 승리할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코, 결코 무정하고, 냉랭하고, 무자비하고, 비판적으로 되지 말라. 용기를 주고 희망을 고취시켜 줄 한마디의 말을 해 주는 기회를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 우리는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한 부드럽고 친절한 우리의 말, 그리스도와 같은 노력이 얼마나 원대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말할 수 없다. 실수한 자들은, 온유와 친절과 부드러운 사랑의 정신 외에 다른 길로는 회복될 수 없다.”(5증언, 612)

日 5월25일
<간음(姦淫) 중에 잡힌 여인(女人)에게 (요 8:2-11)>
◎ 요한복음 8장2-11은 ① 원고와 ② 피고와 ③ 재판장으로 구분해서 현대 버전으로 생각보자.
① 간음한 여인을 잡아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②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③ 예수님께서 등장 하신다.
☞ 우리 모두는 요한복음8장2-11을 수(數)번 또는 수십 번을 읽으면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보다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힐난이 비난하고, 자신은 그 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오늘까지 지내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똑같다 못해 더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우리주위에서 누가 실수(失手)를 한다든지 부족함이 보이면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고 배웠지만 기도나 불쌍한 마음은 고사하고 얼마나 많이 속과 겉으로 욕(辱)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입방아를 찧는지 모른다. 그와 같은 것이 습관화 되고 품성을 이루어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부족한 사람이나 실수를 한 사람들을 위하여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중보기도는 고사하고, 왕따 시키고 못된 소문을 퍼트리는 장본인들이 아닙니까? 또한 이론적으로는 교회에서 천박(淺薄)(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하게 생활하는 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며 그 들을 위해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여야 된다고 머리로나 지식으로는 너무나 많이 듣고 배웠지만 이론만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교회만큼 이기적인 곳도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회 내에는 지금도 힘들게 도덕적인 죄와 어려운 현실에 짓눌려 있는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 또한 간음 사건만 하드래도 육신의 간음만 간음이 아니고, 영적인 간음도 똑같은 간음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자신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센병(문둥병)이 무서운 것은 자신의 살이나 뼈가 썩어들어 가는데도 아픈 통증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육적인 간음만 안했다고 해서 영적인 간음을 망각하며 육적인 간음을 한 사람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욕하고 비웃고 살고 있습니까?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간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즉 신앙의 문제인데, 오늘도 세상의 속된 것들로 마음을 다 빼앗기고 예수님은 식사(食事)때에 잠깐의 통보 성 기도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깐과 일어나서 눈뜨고 잠깐만 0.5초의 기도로 온종일 내 맘대로 세상의 시류(時流)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 하고 살면서, 나의 주님과의 영적(靈的)인 부정과 세상과의 간음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결코 자유스럽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재하고 이 교과를 공부하여야 될 것이고,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
◎ 1.간음(姦淫)이란 육적(肉的)인 간음(姦淫)과, 영적(靈的)인 간음(姦淫)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육적(肉的)인 간음(姦淫)>
1. 간음(姦淫)이란 기혼(旣婚)이든 미혼(未婚)이든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합의(合議)하에 성관계(性關係)를 가지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2. 십계명(十誡命)중에 제7계명은 이러한 것(간음)을 엄격(嚴格)히 금(禁)하고 있다.
(출 20:14; 신 5:18; 레 18:20)
모세 이전에도 이것은 심각한 죄악으로 인식 되었으며 (창 39:9) 그 외 이방 사람들까지도 간음은 죄악으로 인정되었다. (창 26:10)
3. 모세의 율법은 간음을 행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레 20:10; 신 22:22) 간음을 행한 남, 녀 모두에게 해당된 징벌이었다.
그 형벌의 방법이 명시되어있지는 않지만 아마 돌로 쳐 죽인 듯하다.
특히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한 경우에는 그들 모두를 돌로 치도록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신 22:23-24)

<영적(靈的)인 간음(姦淫)>
1.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영적(靈的) 배도(背道)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곧 하나님의 신부로서 정절(貞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꾸짖을 때 사용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그 모든 언약을 다 이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음하였다고 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렘 5:7; 참조 사 57:3; 렘 3:8-9; 13:27; 겔 23:27, 43; 호 2:4)

2. 예수님도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치 못한 자들을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비유적으로 사용 하셨다.
(마 12:39; 16:4; 막 8:38)
3. 예수님께서도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마 5:28; 참조 마 15:19; 막 7:21)
그리고 배우자의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한 남자가 여자와 다시 결혼 하는 것도 간음으로 규정함으로써,
(마 5:31-32)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창조원리를 확실히 하셨다.

◎ 질문 ; 큰 실수를 한 사람에게 그대는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 ☞ :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정신과 인자한 사랑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2보감, 255)

◎ (교훈) : 세상 사람들은 죄인들을 멸시와 조롱 밖에 주지 않지만,
예수님은 부드러운 사랑과 동정으로 간음 중에 잡힌 가련한 여인에게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시고 죄책감을 경감(輕減)시키지도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지 않으시고 아울러 동정하시고 위안과 희망의 말씀으로 죄인을 구원(救援)하셨다.

▶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7-9).

◉ 예수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까지도 동정하시고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그분은 그녀를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도 동정심을 나타내셨다.

月 5월26일
<어린아이들에게 (마 19:13-14)>
◎ 어린 아이들의 특성을 신앙에 적용해보면
① 단순하고 → 믿음은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어야지 내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지 말라)
②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지(의존)하고 → 예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자.
③ 눈에 띄게 잘 성장(成長)하고 → 믿음은 자라나야 한다.
(성장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④ 거짓말을 모르고 → 신앙은 진실 되게 하라.(말씀에 의지하여 명령대로만 실천한다)
⑤ 모든 면에서 저항력이 약하고 → 신앙인(信仰人)이라도 인간은 사단의 유혹에 약(弱)하다
⑥ 의심이 아닌 질문(質問)이 많고 → 하나님을 의심치 말고, 하나님께 여쭈어라.(기도하라)
⑦ 잘 알지 못(무지(無知)) 하고 → 무식(無識)하면 용감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⑧ 연약(軟弱)하고 → 예수님이 내안에 안계시면 항상 연약(軟弱)해진다.
⑨ 걱정이 없고 →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미 506장)
⑩ 웃음이 많고(해 맑고)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주님안에 있을 때 이르러온다.
어린이가 하루 400회 웃는데 비해 성인은 15회 밖에 되지 않는 다’고 한다. →
☞ 덧 붙여 이야기 한다면
⑴ 어린이들은 전 인격적(人格的)으로 하나님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
⑵ 어린이들의 신체적 특성은 전기가 흐르고 있는 전선과 같아서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발달하고 있다.
⑶ 어린이들의 지적(知的) 특성은 스펀지와 같아서 지적 흡입력이 대단하다.
⑷ 어린이들의 정서적(情緖的), 사회적(社會的) 특성은 불안정(不安定)하여,
그들의 감성(感性)과 적응능력(適應能力)을 고려한 교육과 환경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⑸ 어린이들은 부모와 강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속적인 연결이필요하다.

이러한 어린이들이 수세기 동안에 고통의 표적이 되어왔다.
힘없고 누군가에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은 종종 전쟁(戰爭)이나 분쟁(忿爭)에서 희생자가 되어왔다. 성경기록에는 헤롯이 내린 살인명령(마 2:16)과 바벨론 포로당시에 있었던 무차별적인 유아 학살(마 2:17-18; 렘 31:15참조)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녀를 이방 신전(神殿)의 제물로 바치는 등 어린이들의 수난이 있었다.

◎ ( 5월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
어린 시절이 지나서 나이가 들면 가끔 어린이 시절의 동요가 생각납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라는 동요가 아련히 귓전에 들려온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난 뒤엔 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어른이 되면 어린이만큼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어른과는 달리 어린이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미래에 대한 꿈이 있기에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이렇게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을 동심(童心)이라고 한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어른들은 바로 어린 시절의 느낌, 곧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도록 돕는 소위 “키덜트문화” 산업이 호황을 누린다. 그런데 어른들은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어린이들이 누려야 할 동심의 세계는 도리어 파괴하고 있다. 어린이날을 처음 제정한 방정환 선생께서는 1923년 당시, 배포된 “어른에게 드리는 글”에서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시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 라며 어린이를 존중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어른들은 존중은커녕 어린이를 방치하고, 학대하고 심지어는 범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시대는 어린이로 살아가기에 참으로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못난 어른들로 인해 어린이들이 동심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마땅히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이다. 물론 미래의 주역으로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사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는 어른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꿈이 있을 뿐, 그 자체로는 한 없이 약한 존재이다. 진정 어린이의 힘은 그 약함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사랑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구 중 절대빈곤 아동은 102만 명, 상대빈곤 아동은 170만 명에 이른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자기보호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이 희생물이 되고 있다.
게다가 납치, 폭력 등 범죄에 희생되는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선 사회적 무관심 속에 어린이들이 노예처럼 팔려나가고, 부유한 나라에선 어린이를 표적으로 삼은 범죄가 극성을 부린다. 이런 어린이들에게 어찌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미래 사회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에게 동심의 세계를 되돌려 줄 수 있는 방안을 확고히 세워야 한다. 이제 어린이날은 단지 어린이들에게 형식적인 이벤트와 선물이나 안겨주고 마는 날이 아니라, 동심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어른들이, 깊이 각성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루속히 어린이들의 수난 시대가 끝나고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게 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실체가 되시는 주님 안에서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때 어린이 수난이 없는 세상이 실현될 것이다 그날을 기원합니다.

▶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에도 깊은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셨다. 어린 영혼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축복하기를 기뻐하셨다.

火 5월27일
<나사로의 가족(家族)에게 (요 11:5)>
◎ 가장 친근감을 나타내는 말로 친정식구 또는 친정집이라는 말이 있다.
친정집은 온실처럼 따뜻한 곳이요 침대처럼 포근한 곳으로 언재든지 반겨주는 곳이 친정집이다.
친정집은 격식이나 것 치레나 형식이 없는 곳이요 다정다감(多情多感)하고 편안한 곳이 친정집이다.
◎ 인성(人性)으로써의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의 집을 자주 찾으신 설명을 시대의 소망 2권50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정에서의 몰이해로 너무 괴로우셔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오해가 없는 곳으로 가셔서 위안을 얻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즐겨 찾아가신 한 가정이 있었는데 그 가정은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이었다. 믿음과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예수의 마음은 평안함을 얻으셨다. 그러나 예수의 거룩한 사명을 이해하고 인류를 위하여 지신 짐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소망, 영 326)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5)

◎ 친절이 몸에 밴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1. 먼저 (열왕기 하 4:8-37)의 이야기로
수넴에 귀한 여인이 있어 선지자 엘리사를 간권(懇勸)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 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왕하 4:8)
이렇듯 친절을 몸에 배어있는 여인은 무자(無子)함에 아들까지 덤으로 얻었고 그 아들이 죽자 믿음으로 엘리사로부터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축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열왕기 4장8-37절)가지 자세하게 재미있게 기록되어있다. 이 여인의 경우도 아들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라 일상 몸에 친절이 배어 삶자체가 친절이다 보니 덤으로 얻은 축복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2. 창세기 19장1-22까지의 소돔성에 대한 기록 중에 “
(창 19:1-2)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친절이 몸에 익숙한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친절을 교육받았기에 그가 장성하여도 이처럼 손님대접하기를 즐겨함으로 멸망의 소돔성에서 대접을 받은 천사로 인하여 덤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창 19: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城)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3. 성경은 그 밖에도 아브라함, 아비가일, 도르가, 등등 친절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에게는 수십 배 이상(以上)의 축복을 허락하셨다.

▶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적용)
1. 우리 집에 손님이 얼마나 자주 몇 분정도 오십니까? (친척을 제외하고).
2. 본인이 즐겨 찾는 집은 어느 가정입니까? (무엇이 그토록 즐겨 찾게 하는가?)

◉ 예수께서 나사로의 가족에 나타내신 동정어린 사랑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가정(家庭)도 예수님이 즐겨 찾으실 만한 곳이 되게 하자.

水 5월28일
<당신의 원수(怨讐)들에게 (마 5;44)>
◎ 우리 속담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의 깊은 뜻은 무엇입니까?
◎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법을 좋아하고 원리원칙만을 강조하고 적용한 사람의 말로(末路)의 삶은?
◎ 과거에 나의 잘못을 징벌한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까? 용서해주신 분이 기억에 남습니까?
◎ 경제적인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끝까지 법으로 내몰고간 사람들은 거의가 돈 잃고 사람을 잃게 되지만, 잠시 어려운 고비를 넘기도록 선처해준 사람들은 아마도 경제가 회복 되는대로 먼저 찾아오게 될 것이다.

◎ 원수를 사랑한 목자 - 손 양원 목사
손 양원 목사님은 해방과 6.25사변 전후에 목회를 하시면서 신사참배 반대로 모진 고초를 겪었고 그 후에 해방이 되어서도 좌익 공산주의에 시달리는 어려운 시기에 목회를 하셨다. 특히 그가 목회한 교회는 많은 병자들이 집단 거주하는 곳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그는 그곳에서 남들이 할 수 없는 환경 안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갖은 고초를 다 겪으셨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자신의 장남과 차남을 좌익 공산주의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 비운을 겪었는데,
동인, 동신 두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딛고 또 한 번의 역경을 넘는다. 떨리는 가슴을 믿음으로 진정시킨 후 어린 순교자들의 장례식 날 9가지 감사문을 적어서 읽었고 두 아들 죽인 자를 사형장에서 빼내서 아들로 삼겠다는 선언을 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 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 되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 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을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 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 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폭탄과도 같은 선언에 장례식장은 또 한 번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얼마 후 동인, 동신을 죽인 학생은 손 목사의 간청으로 사형되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출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아들로 받아들여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켜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손 목사는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 성자였던 것이다. (손 양원목사 홈페이에서)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4-45).

▶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 일,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 일 등을 들 수 있다.

◉ 예수님의 온 생애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당신의 명령을 친히 보여주신 모본의 삶이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木 5월29일
<이스라엘 백성(百姓)에게 (마 23:37)>
◎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의 경우처럼 좋으신 아버지에 대하여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몰랐다. 그가 창기(娼妓)와 허랑 방탕(虛浪放蕩)하다가 가지고 나간 모든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어서 돼지우리에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그때야 아버지에 집이 좋은 것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성령의 음성으로 속삭이고 계시며 권고하시고 사랑하시는지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지금 병상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젊고 건강할 때 하나님의 건강 법칙을 무시하고 몸을 함부로 하여 질병을 얻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아십니까?
육적(肉的)으로 영적(靈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민족의 모든 소망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도성은 민족의 힘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말씀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염려하는 마음이 이처럼 사무치고 부드러운 표현으로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적은 없었다. 하늘은 이와 같은 부드러운 열망으로 잃어버린 모든 자들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거절해야만 하는 때가 임박했으나 여전히 하늘은 그들이 잘못된 길과 비극적인 운명에 빠지는 것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을 표현한 기타의 성경 진술은 (겔 18:23, 31-32; 33:11; 딤전 2:4; 벧후 3:9 참조)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하늘의 준비가 부족하여 잃어버리게 될 죄인은 하나도 없다.(수 24:15;사 55:1;계 22:17참조)(본교 한글 성경주석9권454-455)

◎ (우리 편에서 할 일)
“하나님께서 호소하시는 바는 우리 편에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회개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감정들을 떨쳐 버리고, 우리의 궁핍을 느껴야 한다.
부요하게 되기 위해서 금을 사야하고, 보기 위해서는 안약을 사야하며, 입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흰 옷을 사야 한다. (편지 2, 1851).

◎ 아직도 교회에서 우리가 라오디게아에게 보낸 기별을 주의 할 때에 희망이 있다.
(원고 139, 1903)”(화잇주석, 계 3:18-21)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품어주셨건만 그럼에도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 하도다.”(마 23:27-28).

◉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는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끝나고 말았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의 호소를 보내신다.

<초점(焦點)>
1. 예수님의 긍휼에는 죄(罪)는 미워하시되 죄인(罪人)은 사랑하신다.

2.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시고, 죄를 경감시키지도 않으시지만, 죄인을 동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위안과 희망의 말씀으로 부드러운 사랑으로 구원(救援)해주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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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 <간음(姦淫)중에 잡힌 여인에 대한 참고 말씀 >
<함정 가운데서* (요 8:1-11)> (시대의 소망 “제50장 발췌(拔萃))
○ 예수께서는 잠시 동안 수치심으로 떨고 있는 여인과 인간적인 동정조차 없는 철면피한 고관들을 바라보셨다. 흠없이 순결한 그의 정신은 그 광경을 보고 움츠러지셨다. 어떠한 목적에서 이런 문제를 그에게 가져오게 되었는지 예수께서는 잘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들의 품성과 생애의 어떠함을 아셨다. 소위 정의의 수호자들이라는 이들이 예수를 해할 함정을 만들기 위하여 이 여인을 죄 짓게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시선을 땅에 고정시키시고 흙에다 글씨를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지체하시고 무관심하신 듯 함에 참을 수 없이 된 고소 자들은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시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예수의 시선을 따라 땅바닥으로 쏠렸을 때 그들의 안색은 변하였다. 그들 앞에 그려져 있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생애의 숨은 죄의 비밀들이었다. 바라보고 있던 백성들은 그들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자 무엇 때문에 그처럼 놀라고 부끄럽게 생각하는지 알기 위하여 밀어 제치며 앞으로 나왔다.

율법을 존중한다는 그들의 모든 공언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여인을 고소하기 위하여 데려옴으로 율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고소할 의무는 남편에게 있었으며 범죄한 상대방도 똑같이 처벌을 받아야 하였다.
고소 자들의 행동은 완전히 월권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셨다.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할 때 그 사건의 증인들이 먼저 돌을 던지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음모한 장로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계속 기록하셨다.
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제거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로마의 권위도 침해하지 않으셨다. 고발 자들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제 거룩함을 가장하던 그들의 의복은 찢겨진 채 그들은 무한히 순결하신 분 앞에서 정죄를 받고 서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의 숨은 죄악이 무리들 앞에 공개될까봐 두려워 떨면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땅에 떨어뜨린 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희생자와 동정하시는 구주를 남겨두고 슬금슬금 도망쳐 버렸다.
예수께서는 일어나셔서 여인을 보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가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 여인은 두려워 떨면서 예수 앞에 서 있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그녀에게 사형 선고처럼 들렸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구주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고요히 운명만을 기다렸었다.
그는 그의 고발 자들이 말없이 부끄러워 떠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는 희망에 찬 말씀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고마운 사랑의 마음으로 흐느껴 울면서, 뜨거운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순결과 평화의 생애,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바쳐진 새 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이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가장 흉악한 육체적 질병을 고칠 때보다도 더 큰 이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적 질병을 고치셨다. 이 회개한 여인은 예수를 가장 신실히 따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자기희생적 사랑과 헌신으로 그는 예수의 용서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아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무죄하신 분은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과오를 범한 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에게서 눈을 돌이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고 그들을 재판하여 처벌하는 데 열중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 사람들보다 더욱 죄가 많을 수가 있다.
사람들은 죄는 사랑하면서도 죄인은 미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난하는 데는 느리고 회개함을 분별하여 용서와 격려를 하는 데는 신속하고 방황하는 자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여 그의 발이 그 길에 머무르도록 한다. ”(소망, 454-462)

◉ “과거에 소홀히 한 일을 보상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늦지 않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성을 회복하도록 하자. 그대들이 쫓아 버린 자들을 찾아내어 고백으로써 그대들이 가한 상처를 싸매 주라. 자비의 사랑으로 된 위대한 마음에 접근해 가서 그 거룩한 동정의 물결이 그대들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하고, 거기서 다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흘러가게 하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귀중한 생애에서 나타내신 친절과 자비는 우리들이 우리의 동료들, 특히 그리스 도안에서 우리의 형제가 된 자들을 취급하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생애의 큰 투쟁에서 피곤하고 낙심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용기를 주는 한 마디의 친절한 말이 승리의 힘이 될 것이다. 결코, 결코, 무정하고 냉랭하고 동정심 없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용기를 주고 희망을 일으켜 주는 말을 할 기회를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 우리는 친절에서 나온 부드러운 말이 얼마나 멀리까지 그 영향이 미치며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의 노력이 어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줄 것인지 결코 예측할 수 없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정신과 인자한 사랑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 (2보감, 255)

◉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 사랑, 부드러운 애정을 제시할 때에 주님의 영이 나에게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임하는 것을 느꼈다. 빛과 자유와 축복이 청중에게 이르러 왔으며 발해진 말씀에 대한 전적인 반응이 있었다.” (3기별, 164)

◉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예절이 있고 부드러운 마음과 용서하는 정신을 가지라. 그대의 구속 주를 영예롭게 하고 그분이 그대에게 행하라고 지정해 주신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아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가라앉게 하라. 어두움의 사슬에 묶여 있는, 단호함과 도덕적 능력이 없는 불쌍한 영혼들의 심령에 있는 시련을 그대는 거의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기 위해 힘써라. 필요한 자들을 돕고, 자아를 못 박고, 그대의 매일의 생애에서 진리의 원칙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대의 영혼을 지배하시도록 하라. 그 때에 그대는 전에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던, 교회와 그대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축복이 될 것이다.” (4증언, 133)

◎ (어린아이에 대한 말씀)
○ “부모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성실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자녀들 속에 교만, 과장, 남에게 보이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조장시키지 말아야 한다. 어린아이 때에는 귀엽게 보이나 나이가 든 후에는 잊거나 교정되어야 할 사소한 장난들은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도록 허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처음에 익힌 습관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부모들이여, 마침내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매우 어릴 때부터 자녀들의 마음을 훈련시키기 시작하라.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빛날 보석으로 다듬어지기 위하여 그들이 그대의 손에 위탁된 것처럼 행동하라. 그들이 아직 책임을 질 만한 나이가 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할 나이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그릇된 생각으로 자녀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잠재우지 않도록 조심하라.”(1보감, 146) (1증언, 396)

○ “하나님의 택한 종들을 지지해야 할 의무를 가진 어떤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종들의 이름이 불경스럽게 취급되어 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명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엄숙한 책망과 경고에 대한 부모들의 불경스러운 말을 놓치지 않고 들어 왔다. 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귀에 익숙해지는 조소 어린 농담과 남을 깎아 내리는 말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거룩하고 영원한 관심사를 세상의 통속적인 것과 동일한 위치로 끌어내렸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자녀들의 불신을 조장하는 이러한 부모들의 처사는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그리하여, 자녀들은 불경스럽게 되고, 죄에 대한 하늘의 책망에 대항하여 반항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1보감, 490)

○ “어린아이 때부터 디모데는 성경을 알았고, 그의 지식은 의무보다 쾌락과 이기적 만족을 택하게 하는 주변의 악한 영향과 유혹에 대한 방벽이 되었다. 이러한 방벽은 우리의 모든 자녀들에게 필요하며,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절하게 교훈을 받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부모들과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할 일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1보감, 528)

○ “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엄숙한 책망과 경고와 관련하여 부모들의 불경스러운 말을 놓치지 않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따금 그들이 들어왔던 조소 어린 농담과 남을 깎아 내리는 말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경향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거룩하고 영원한 관심사를 세상의 통속적인 것과 동일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그런 것이었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자녀들의 불신을 조장하는 이러한 부모들의 처사는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그리하여 자녀들은 불경스럽게 되고, 죄에 대한 하늘의 책망에 반항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악이 존재한 곳에서는 영적 타락이 성행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수에 의해 눈이 멀게 된 바로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그들의 자녀가 왜 그토록 성경의 진리에 불신을 품고 의심하는 경향으로 기우는지 이상히 여긴다. 그들은 자녀들을 도덕적·종교적 영향으로 감화시키는 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의아해 한다.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된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통탄할 만한 형편은 바로 그들 스스로가 가정에서 끼친 감화의 결과, 곧 그들의 질투와 불신의 열매임을 즉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가정 안에서 많은 불신자들이 양성된다.”(4증언, 195)

○ “만일 그대가 그대의 자녀들을 관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그들의 품성을 꼴 지어 주지 못한다면 그대에게서 불완전한 훈육을 받아 나빠질 자녀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부모 된 그대들을 위하여 또한 사회를 위하여 더욱 좋은 일이다. 자녀들이 어린아이 시절부터 온 가족을 주를 경외하는 가운데 다스리는 양심적이고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현명한 어머니에 의하여 교육되고 훈련되어 의의 표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품성을 형성하고 꼴 지울 수 없다면 그대의 가족을 늘이는 것은 하나의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이성을 주시고 그대가 그것을 활용하도록 요구하신다. ― 5T, 323, 324.”(가정, 163)

◎ (나사로에 집을 자주 찾으시는 예수님에 대한이야기)
“가장 확고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대하여 믿음이 강했고 사랑이 깊었으며 또한 구세주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가장 큰 이적은 나사로를 위하여 이루어졌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하셨다. 그는 모든 인간가족을 사랑하셨으나 특별히 부드러운 사교로 접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다니에 사는 한 가족들과 두터운 정분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가족 중의 한 사람을 위하여 가장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나사로의 가정에서 휴식을 얻으셨다. 구주께서는 집이 없으셨기 때문에 친구들과 제자들의 후한 대접에 의존하셨으며, 가끔 피로하고 인간의 우정이 갈급될 때에는 분노한 바리새인들의 의심과 질투에서 벗어나 이 평화스러운 가족에게로 피하기를 즐기셨다.… 나사로를 살리는 이 더할 나위 없는 이적은 그의 사업과 신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 하나님의 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실 때에 저들은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고 말하였다. 저들은 함께 무덤으로 나아갔다. 슬픈 장면이었다. 크게 사랑을 받아온 나사로의 친구였던 이들이 그 누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데 그의 누이들은 그를 위하여 가슴이 찢어지듯이 울었다. 이 인간의 고통,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께서 곁에 서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당한 친구들이 죽은 자에 대하여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시고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었으나 그는 인성을 쓰셨으며 따라서 인간의 슬픔에 감응되셨다. 그의 부드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언제나 고통 받는 자에게 동정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는 우는 자와 같이 우시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신다.” (소망 524,533). (화잇주석, 요 11장)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 자와 보증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인류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보시고 그냥 계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고 죽으신 그분께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정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실 것이다. 그분은 떨면서 간구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속죄를 통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사람을 위해 예비하셨으므로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그분의 발 앞에 놓을 수 있다. 우리를 보시는 그분의 눈빛과 그분의 말씀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한다. 그는 자기의 뜻을 따라 우리의 품성을 조성하고 도야(陶冶)하실 것이다.
아무리 사단이 온 힘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단순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는 영혼은 결코 정복할 수 없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실물, 156-157)


<행복한 안식일 맞이 하세요 ^^>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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