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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충성된 자에게 주어질 상급-(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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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3-19 23:03 조회1,3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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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충성(忠誠)된 자(者)에게 주어질 상급(賞給)

                                     (3월 25일 (안) / 일몰: 오후 6시 48분)


<서언(緖言)>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하늘의 상급(賞給)은 죄의 결과들이 다 사라진 후(後)에 받게 될 것이지만 그 때 받을 상급은 인간의 공로(功勞)에 의해서가 아니라 10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와 은혜(恩惠)로 말미암은 것이고 확실히 신뢰(信賴)할 수 있는 약속으로 믿음의 조상(祖上)들은 그 약속된 상급(賞給)에 가장 큰 가치(價値)를 두고 끝까지 충성(忠誠)을 한바 우리도 믿음의 조상(祖上)들처럼 하늘에 소망(所望)을 두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와 자원(自願)을 충성되게 관리(管理)하여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3월19일) (日)  <충성(忠誠)됨에 대한 상급(賞給)>


(Q)~충성(忠誠)됨에 대한 상급(賞給)은 무엇이며, 은혜(恩惠)로 받는 구원(救援)과 행위(行爲)에 따라 받는 상급(賞給)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理解)하여야 할까요? (히브리서 11:6, 요한계시록 22:12, 이사야 40:10, 이사야 62:11 참조)


(A)~충성(忠誠)됨에 대한 상급(賞給)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救援)과 행위(行爲)에 따른 상급으로 믿는 사람들은 우주만물(宇宙萬物)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救主)로 믿음으로 그 은혜(恩惠)로 구원(救援)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개인적인 관계로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에 힘입어 예수님재림 때까지 믿음으로 충성(忠誠)을 다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3월20일 (月)  <영원(永遠)한 생명(生命)>


(Q)~성경에 따르면 “영원(永遠)한 생명”, 또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죽음”의 둘 중의 하나에 해당되는바 이를 설명해보세요. (로마서 6:23, 요한복음 3:16, 14:1~3절 참조) 


(A)~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關係)에 들어가는 것으로, 성경(聖經)에서 말하는 ‘영생(永生)’ 또는 ‘영원한 생명’이란 영혼불멸(靈魂不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다. (요한복음 3:16절) 초림(初臨)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그분의 재림(再臨)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없다면 예수님의 초림(初臨)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有益)이 되겠는가?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초림(初臨)하셔서 예언한 사건들을 다 성취(成就)하신 것이 예언한 재림(再臨)을 확신할 수 있는 보증(保證)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聖肉身)하여 세상에 임(臨)한 것이다.(요한복음 1:14). 이 하나님인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고 그 안에 거(居)하는 것이 영생(永生)이다.(요한복음 6:56~57). 


(3월21일 (火)  <새 예루살렘>


(Q)~그리스도인들의 영원(永遠)한 안식처(安息處)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어떤 약속(約束)이 기록되어 있는가? (계시록 21장1~27절 참조)


(A)~새 예루살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이다. 새 예루살렘은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들이 바라고 사모(思慕)해야 할 곳이다. 그 땅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마음의 고향(故鄕)이자 거룩한 땅이었듯,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救援)의 처소(處所)이자 영혼의 안식처(安息處)인 곳이다.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들을 위해 준비된 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며 이 세상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가장 좋은 것들로 악(惡)이나 사단의 올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자 그대로의 천국(天國)에서 좋은 것들만 누리며 아픔이나 죽음이나 고통(苦痛)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3월22일 (水)  <결산(決算)할 때>


(Q)~성경은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세상(世上)끝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끝이 되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징조(徵兆)에는 어떤 징조(徵兆)가 있을 것이며, (누가복음19:12~24절) 달란트 비유(譬喩)는 어떤 비유(譬喩)를 뜻하며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여 할 수 있는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이란 어떤 사람을 지칭(指稱)하고 있습니까?


(A)~예수님의 재림의 징조(徵兆)는 (마태복음24장)에서는 전쟁(戰爭)과 재난(災難)같은 이 세상에서의 일어날 징조(徵兆)들이고, (마태복음25장)에서의 예수님의 재림직전에 나타날 교회의 상태(狀態)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바로 지금 현재(現在) 우리들의 상태(狀態)인데 우리는 시기(時期)를 정하는 것보다 말세(末世)의 상태의 증상(症狀)인 징조(徵兆)에 주목(注目)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9:12~24절)의 달란트의 비유(譬喩)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위탁(委託)하신 세상의 재물(財物)에도 적용(適用)된다 말씀하고 계신다.(1T 197p 참조) 그러므로 그날을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比較)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충성(忠誠)되게 준비(準備)하고 관리(管理)하라는 말씀이다.


(3월23일 (木)  <준비(準備)된 상급(賞給)을 바라보라>


(Q)~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수준(水準)높은 교육(敎育)을 받았고 가문(家門)도 좋았다. 그로 인해 바울은 세상의 기준(基準)으로 보기에는 매우 성공(成功)할 수 있었다. 그런 바울이 매를 맞고 돌에 맞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온갖 고난(苦難)을 많이 겪으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그를 향하여 참고 견디는 생애를 살았다. 그러한 엄청난 고난(苦難)을 어떻게 견디며 극복(克服)할 수 있었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을 견디고 극복(克服)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 3:13~14, 고후 11:24~33, 로마서 8:16~18, 딤전 6:6~12 딤후 4:6~8, 빌3:11)


(A)~사도 바울이 엄청난 박해(迫害)와 고난(苦難)을 당하면서 극복(克服)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장차(將次)받을 영광(榮光)과 상급(賞給)에 비교(比較)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과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자족(自足)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의 재물(財物)은 하늘로 가지고 갈수 없음을 알고 선(善)한 청(聽)지기 직분을 충성스럽게 하며 믿음의 선(善)한 싸움을 싸우는 삶이 풍요(豊饒)로운 삶이라는 것을 실천(實踐)하며 믿음을 잘 지켰다.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바울을 비롯하여 믿음의 조상(祖上)들처럼 살자.



*******<말미부록(末尾附錄)​>************************



제12과 충성(忠誠)된 자(者)에게 주어질 상급(賞給)

                                 (3월 25일 (안) / 일몰: 오후 6시 48분)



<기억절(記憶節)>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여(參與)할지어다 하고”(마 25:21). 


<서언(緖言)>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하늘의 상급(賞給)은 죄의 결과들이 다 사라진 후(後)에 받게 될 것이지만 그 때 받을 상급은 인간의 공로(功勞)에 의해서가 아니라 10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와 은혜(恩惠)로 말미암은 것이고 확실히 신뢰(信賴)할 수 있는 약속으로 믿음의 조상(祖上)들은 그 약속된 상급(賞給)에 가장 큰 가치(價値)를 두고 끝까지 충성(忠誠)을 한바 우리도 믿음의 조상(祖上)들처럼 하늘에 소망(所望)을 두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와 자원(自願)을 충성되게 관리(管理)하여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3월19일 (日)  <충성(忠誠)됨에 대한 상급(賞給)>


(Q)~충성(忠誠)됨에 대한 상급(賞給)은 무엇이며, 은혜(恩惠)로 받는 구원(救援)과 행위(行爲)에 따라 받는 상급(賞給)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理解)하여야 할까요? (히브리서 11:6, 요한계시록 22:12, 이사야 40:10, 이사야 62:11 참조)


(A)~충성(忠誠)됨에 대한 상급(賞給)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救援)과 행위(行爲)에 따른 상급으로 믿는 사람들은 우주만물(宇宙萬物)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救主)로 믿음으로 그 은혜(恩惠)로 구원(救援)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개인적인 관계로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에 힘입어 예수님재림 때까지 믿음으로 충성(忠誠)을 다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늘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상급은 미래(未來)에만 있지 않다(엡 1:14).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내 음성(音聲)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계 3:20)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언제나 하늘나라를 함께 가지고 오신다.” 그분과의 교제(交際)는 “하늘이 마음속에 임(臨)함이다. 그것은 영광(榮光)이 시작된 것이며, 바라던 구원(救援)의 임(臨)함이다." (교리, 352)


○. “우리가 우리의 인간됨과 모든 소유(所有)를 이 모든 것의 소유주(所有主)가 되시는 하나님(고전 3:21-4:2)께 바칠 때, 그분께서는 그것을 받으시나 도로 우리에게 맡겨주시며, 우리가 "소유(所有)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청(聽)지기로, 또는 관리자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안락(安樂)하고 이기적(利己的)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慾望)은 우리 주께서 헐벗고 옥(獄)에 갇히고 나그네로 사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族屬)...을 가르쳐" 라는 그분의 항구적(恒久的)인 명령(命令)은 교회의 활동들(나누어주고 가르치고 전도하고 침례 주는)을 우리에게 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한다. 우리는 그분 때문에 충성(忠誠)된 청(聽)지기들이 되고자한다.”(교리, 251)



○. “하나님의 사업은 그 반포(頒布)하는 일에 탁월(卓越)한 도덕적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참여하기를 요구(要求)하고 있다. 거룩한 열성으로 분발(奮發)하는 심령을 가진 인물들, 쉽게 요동(搖動)하지 않는 강력한 목적을 가진 인물들, 모든 이기적인 이익을 내버리고 십자가와 면류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줄 아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현대진리(現代眞理)의 사업은 의(義)와 의무감(義務感)에 충성된 사람, 굳건한 도덕적 순수성(純粹性)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열리는 대로 활동력을 발휘(發揮)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의 길이다. 이러한 자질들은 하나님의 사업과 일에 투자한 헤아릴 수 없는 재물(財物)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 활동력, 도덕적 순수성, 의에 대한 강력(强力)한 목적은 아무리 많은 금(金)으로도 대체(大體)할 수 없는 자질(資質)들이다. 이런 자질을 갖춘 인물들은 어디에서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들의 삶은 우렁찬 웅변(雄辯)보다도 훨씬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정신과 도덕적 순수성을 갖춘 인물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당신의 진리의 보고(寶庫)로 삼아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그 신성한 원칙들을 올바로 나타내게 하실 것이다.”(3증언, 23)


○. “주께서는 당신의 충성(忠誠)된 일꾼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삶은 하나의 순례(巡禮)에 불과(不過)하다는 것과 하늘이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본향(本鄕)이라는 것을 명심(銘心)하라. 하나님을 믿어라. 나의 말이 그대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상처(傷處)를 주었다면 미안하다. 나 역시 상처를 받고 아픔을 당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사업, 놀라운 사업, 위대한 사업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함께 묶어 준다. 그대는 그대의 갑옷을 벗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끝까지 입고 있어야 한다. 주께서 그대를 해방시켜 주실 때, 그대의 갑옷을 그분의 발아래 내려놓을 때가 될 것이다. 그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분의 군대(軍隊)에서 봉사하도록 징집(徵集)되었다. 그러므로 그대는 탈주(脫走)함으로써 그대 자신의 명예(名譽)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侮辱)해서는 안 된다.”(8증언, 175)


○.<일찍 하나님을 찾으라.

유년(幼年)들과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습관(習慣)과 감명(感銘)은 생애(生涯)와 품성(稟性)에 항상 강력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이나 요한이나 특히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청년들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히 하며, 악(惡)한 것을 꾀하는 친구나 또는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는 것은 쾌락(快樂)과 이기적(利己的)인 방종(放縱)을 누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친구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 가정의 작은 의무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예사(例事)로이 넘겨 버리나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큰 책임도 또한 소홀히 할 것이다. 그대는 순결하고 건전하며 고상한 품성을 가진 온전한 남녀가 되기를 원한다. 일을 가정에서 시작하라. 작은 의무들을 책임 맡아 철저하고 정확하게 행하라. 주께서는 그대가 작은 일에 충성된 것을 보실 때에 그대에게 더욱 큰 책임들을 맡기실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건물을 짓고 있는지, 그 건물을 위하여 어떤 종류의 재료를 사용하는지 신중(愼重)을 기하라. 그대가 지금 형성하고 있는 품성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가정, 297)


○.<잘 되어져야 할 만한 일은 잘 되어야 할 가치(價値)가 있다.>

  그대가 하는 일이 어떠한 것이라 해도 그 일을 성실히 행하라. 작은 일에 관해서도 진실을 말하라. 날마다 사랑의 행동을 행하고 명랑(明朗)한 말을 하라. 삶의 길목을 따라 웃음을 뿌리어라. 그대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당신의 승인(承認)을 내려주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날 그대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높임, 346)


(3월20일 (月)  <영원(永遠)한 생명(生命)>


(Q)~성경에 따르면 “영원(永遠)한 생명”, 또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죽음”의 둘 중의 하나에 해당되는바 이를 설명해보세요. (로마서 6:23, 요한복음 3:16, 14:1~3절 참조) 


(A)~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關係)에 들어가는 것으로, 성경(聖經)에서 말하는 ‘영생(永生)’ 또는 ‘영원한 생명’이란 영혼불멸(靈魂不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다. (요한복음 3:16절) 초림(初臨)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그분의 재림(再臨)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없다면 예수님의 초림(初臨)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有益)이 되겠는가?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초림(初臨)하셔서 예언한 사건들을 다 성취(成就)하신 것이 예언한 재림(再臨)을 확신할 수 있는 보증(保證)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聖肉身)하여 세상에 임(臨)한 것이다.(요한복음 1:14). 이 하나님인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고 그 안에 거(居)하는 것이 영생(永生)이다.(요한복음 6:56~57). 


○.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權勢)도 있다.” 인간 가족의 일원으로 예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으로서는 세상을 위한 생명의 근원(根源)이셨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하실 수 있었으며 죽음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생명과 불멸(不滅)을 드러내시기 위해 자원(自願)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죄의 저주를 견디시고 생명을 희생제물(犧牲祭物)로 바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傷)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懲戒)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平和)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罪惡)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소망, 484)


○. “천국(天國) 열쇠”는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의 말씀으로서 그 말씀은 여기에 포함(包含)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늘을 열고 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가납(嘉納)되느냐 혹은 거절(拒絶)당하느냐를 결정짓는 조건들을 선언(宣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傳播)하는 자들의 사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香氣)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거나 한다. 그들의 사업은 영원한 결과가 달려 있는 사명이다.”(소망, 413)


○. “교육(敎育)의 최고의 사업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傳達)하는 데 있지 않고 마음과 마음, 영혼(靈魂)과 영혼의 접촉(接觸)을 통하여 얻어지는 그 생기(生氣) 있는 정력(精力)을 나누어주는 데 있다.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축복하셨던 모든 생명을 주는 충동(衝動)을 흘러 낸 그 하늘의 생명과 3년간을 날마다 접촉(接觸)하였던 그들은 얼마나 큰 특권을 가졌던가! 모든 동료 중에서 특히 사랑하신 제자(弟子) 요한은 그 놀라운 생명의 능력에 자신을 굴복(屈伏)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證據)하여 너희에게 전(傳)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充滿)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恩惠)러라”(요일 1:2; 요 1:16).”(소망, 250)


○. “그러나 진심(眞心)으로 죄를 회개(悔改)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그들의 속죄제물(贖罪祭物)로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책에 기록된 그들의 이름 아래 용서(容恕)받았다는 말이 기록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들의 품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된다는 것이 나타날 때, 그들의 죄는 도말(塗抹)되고 그들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선지자(先知者) 이사야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塗抹)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生命冊)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是認)하리라”(계 3:5).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是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是認)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否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否認)하리라”(마 10:32, 33).”(쟁투, 483)


○.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자(使者)들로서 그와 그의 동역자(同役者)들이 끊임없이 위험(危險)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상기(想起)시켰다. 저희가 당한 고생들은 그들의 힘을 쇠약(衰弱)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死亡)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기록하였다. 이 그리스도의 목사(牧師)들은 궁핍(窮乏)과 수고를 통하여 육체적 고통을 당함으로 그분의 죽으심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역사하고 있는 사망은 고린도 인들에게 영적 생명과 건강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태만(怠慢)과 불만(不滿)으로 사역자들의 부담(負擔)과 시련(試鍊)들을 증가(增加)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행적, 331)


(3월21일 (火)  <새 예루살렘>


(Q)~그리스도인들의 영원(永遠)한 안식처(安息處)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어떤 약속(約束)이 기록되어 있는가? (계시록 21장1~27절 참조)


(A)~새 예루살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이다. 새 예루살렘은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들이 바라고 사모(思慕)해야 할 곳이다. 그 땅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마음의 고향(故鄕)이자 거룩한 땅이었듯,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救援)의 처소(處所)이자 영혼의 안식처(安息處)인 곳이다.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들을 위해 준비된 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며 이 세상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가장 좋은 것들로 악(惡)이나 사단의 올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자 그대로의 천국(天國)에서 좋은 것들만 누리며 아픔이나 죽음이나 고통(苦痛)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 “(계 20:9,10,14) 화염(火焰) 중에 보존(保存)되는 새 예루살렘(창 8:1; 벧후 3:10)

홍수(洪水)가 땅의 가장 높은 곳까지 차올랐을 때 땅의 모습은 끝이 없는 호수(湖水)같았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땅을 청소(淸掃)하실 때 땅의 모습은 끝이 없는 불 못같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홍수가 요동(搖動)치는 중에서도 방주(方舟) 속에 의인(義人) 여덟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방주를 보존하셨던 것같이 새 예루살렘도 보존하실 것이다. 이는 각 시대의 신실한 사람들, 곧 의인(義人)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살아남은 마지막 성도(聖徒)에 이르기까지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그 성(城) 안에 있기 때문이다.”(화잇주석, 계 20:9,10,14)


○. “대쟁투(大爭鬪)의 종결(終結), 하나님 사랑이 옹호(擁護)됨

그곳에서 영화롭게 된 새 땅의 수도 새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冕旒冠),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王冠)이 될 것이”다. (화잇주석, 계 22:19)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은 이 새 땅의 수도(首都)이다. 히브리어로 예루살렘(Jerusalem)은 "평화의 도성(都城)"을 의미한다. 지상(地上)의 예루살렘의 역사(歷史)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정확하게 그 이름의 뜻대로일 것이다.(교리, 347-348)


○.<그리스도와 성도(聖徒)들과 성(城)이 내려옴.>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성도(聖徒)들과 새 예루살렘과 함께 이 땅으로 내려오신다. 그분은 천년기(千年期) 심판(審判)의 결정(決定)을 집행(執行)하심으로 대쟁투(大爭鬪)를 끝내시고, 또한 지구(地球)를 정결(淨潔)케 하고 새롭게 하심으로 당신의 영원한 나라를 그 위에 세우실 것이다. 그 때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王)이 되"(슥 14:9)실 것이다.”(교리, 338)


○.다사(多事)한 그날에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흘러나간 진리(眞理)의 보석(寶石)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상이 생애 속에 침투(浸透)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포부(抱負)가 일깨워졌으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고 부활(復活)하신 후에 이 사람들은 선두(先頭)에 나아와 그 사업의 위대(偉大)함에 부합(符合)하는 지혜와 열심으로 그들의 거룩한 사명(使命)을 성취(成就)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呼訴)하며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단축(短縮)시킨 낡은 미신(迷信)들을 약화(弱化)시키는 기별을 전파했다. 그들의 증언(證言) 앞에는 인간의 학설(學說)과 철학(哲學)이 쓸데없는 우화(寓話)와 같았다. 예루살렘 성전(聖殿) 안에 있는 놀라움과 위엄(威嚴)에 눌린 군중(群衆)들에게 하신 구주(救主)의 말씀에서 넘쳐흐르는 결과는 컸다.”(소망, 620)


○.<물리적(物理的) 묘사(描寫).>

   요한은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위하여 로맨틱한 말을 사용한다. 그 성(城)은 "신부(新婦)가 남편(男便)을 위하여 단장(丹粧)한 것 같"(계 21:2)다. 그 성(城)의 물리적(物理的) 특성에 대한 그의 묘사(描寫)는 우리에게 그 실제(實際)성을 인식케 해준다.”(교리, 348)


○.<우리의 영원한 본향(本鄕)>

   성경은 최종적(最終的)으로 구속(救贖)받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준다(마 5:5; 시 37:9, 29, 115:16).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집에 "처소(處所)"를 예비(豫備)하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 우리가 이미 연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寶座)와 하늘의 본부(本部)는 이 땅에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자리 잡을 것이다. (계 21:2, 3, 5).”(교리, 349)


○.<의인(義人)들의 승천(昇天).>

   죽은 의인(義人)들이 부활(復活)한 후(後), 그들과 산 성도(聖徒)들은 "공중(空中)에서 주를 영접"하기 위하여 끌어올려 진다(살전 4:17).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直前)에 하신 약속,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處所)를 예비(豫備)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 3)고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데려갈 장소를, "내 아버지 집", 혹은 "처소(處所)"라는 말로 묘사(描寫)하셨다(요 14:2). 여기서 예수님은 천년기가 끝나기 전에는 이 땅에 내려오지 않을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재림시(再臨時)에 의인(義人)들이 "공중(空中)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때, 그들의 목적지는 하늘이지, 그들이 방금(方今) 떠난 이 지구(地球)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에 당신의 영광(榮光)의 나라를 지상(地上)에 세우지 않으신다. 그분은 천년기의 끝에 그렇게 하신다.”(교리, 335)


(3월22일 (水)  <결산(決算)할 때>


(Q)~성경은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세상(世上)끝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끝이 되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징조(徵兆)에는 어떤 징조(徵兆)가 있을 것이며, (누가복음19:12~24절) 달란트 비유(譬喩)는 어떤 비유(譬喩)를 뜻하며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여 할 수 있는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이란 어떤 사람을 지칭(指稱)하고 있습니까?


(A)~예수님의 재림의 징조(徵兆)는 (마태복음24장)에서는 전쟁(戰爭)과 재난(災難)같은 이 세상에서의 일어날 징조(徵兆)들이고, (마태복음25장)에서의 예수님의 재림직전에 나타날 교회의 상태(狀態)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바로 지금 현재(現在) 우리들의 상태(狀態)인데 우리는 시기(時期)를 정하는 것보다 말세(末世)의 상태의 증상(症狀)인 징조(徵兆)에 주목(注目)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9:12~24절)의 달란트의 비유(譬喩)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위탁(委託)하신 세상의 재물(財物)에도 적용(適用)된다 말씀하고 계신다.(1T 197p 참조) 그러므로 그날을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比較)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충성(忠誠)되게 준비(準備)하고 관리(管理)하라는 말씀이다.


○.<바로 오늘 성령의 늦은 비를 위하여 탄원(歎願)할 때임>

   지상(地上)에서 하나님의 사업이 막을 내리는 종말(終末)의 때에 있어서 헌신(獻身)한 신자(信者)들이 성령의 지도(指導)하에 발휘(發揮)하는 열렬한 노력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표적(表迹)이 따를 것이다. 동방 나라들에서 파종(播種) 때와 추수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표상(表象)으로 히브리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에게 비상(非常)한 방법으로 영적 은혜를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였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심은 이른 비의 시작이었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웠다. 세상의 끝에도 성령의 임재가 참 교회와 함께 하여야 한다.”(화잇주석, 슥 10:1)


“우리는 이러한 성경 말씀이 예언한 시기(時期)에 이르렀다. 종말(終末)의 때가 이르렀다. 선지자들의 이상은 개봉(開封)되었고 그 엄숙(嚴肅)한 경고(警告)는 우리 주의 영광의 강림(降臨)이 가깝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소망, 234)


○.재림의 시기(時期)를 가장 분명히 계시(啓示)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예언(豫言)은 다니엘서 8장 14절이었다. “이천삼백 주야(晝夜)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淨潔)하게 함을 입으리라.” 밀러는 성경 말씀 자체가 해석해 주는 법칙에 의하여, 예언상 하루는 1년을 상징(象徵)하는 것임을 알았다(민 14:34; 겔 4:6 참조). 그는 또한 2300일, 곧 실제적인 2300년이 유대인의 시대를 훨씬 지나는 것이므로 그것이 그 기간의 성소(聖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밀러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있어서 이 세상이 성소라는 일반적인 견해(見解)를 받아들임으로 다니엘서 8장 14절에 예언된 성소의 정결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지구가 불로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2300일의 정확한 기산점(起算點)만 발견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쉽게 확정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그 큰 종말(終末)의 때, 곧 “모든 교만(驕慢), 권세(權勢), 사치(奢侈), 허영(虛榮), 사악(邪惡), 억압(抑壓) 등이 끝나는 때, 저주(詛呪)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망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종들과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상급(賞給)을 받고 세상을 멸망(滅亡)시키는 자들의 멸망당하는 때가 확실히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쟁투, 324)


○.지상(地上)에서의 하나님의 사업이 마쳐지는 종말(終末)의 때에 성령의 지도(指導)하에 헌신한 신자들이 열렬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 있어 거룩한 은혜의 특별한 증거가 그 노력에 수반될 것이다. 동방나라들에서 파종(播種)기와 추수(秋收)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비의 상징을 통하여 히브리 선지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 위에 부어질 영적(靈的)인 은혜를 예언(豫言)하였다. 사도시대(使徒時代)에 성령을 부어 주심은 이른비, 혹은 먼저의 비의 시작이었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웠다. 종말(終末)에도 성령의 임재(臨在)가 참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행적, 54) (선교, 250)


○.오늘날 세상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오심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警告)로 주신 증거들에 대하여 눈을 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애써 모든 불안(不安)을 잊으려고 노력하나 바로 그 때 종말의 징조(徵兆)들은 신속하게 성취되고 있으며, 세상은 인자가 하늘 구름 가운데 나타날 그 때를 재촉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강림 전에 있을 징조(徵兆)들에 대하여 무관심(無關心)한 것은 죄라고 가르친다. 그는 이와 같은 태만(怠慢)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밤의 아들이요 흑암(黑暗)의 자녀라고 부른다. 그는 경성(警醒)하며 깨어 있는 자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激勵)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盜賊)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謹愼)할지라.”(행적, 260)


○.우리는 종말(終末)의 시기(時期)에 살고 있다. 신속히 성취되는 때의 징조는 그리스도의 강림(降臨)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선포(宣布)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엄숙하고 중대하다. 하나님의 영(靈)은 점차로,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지상에서 물러가고 있다. 재앙(災殃)과 심판(審判)이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蔑視)하는 자들 위에 이미 내리고 있다. 땅과 바다의 재난(災難), 사회의 불안한 상태, 전쟁의 경보(警報) 등은 하나의 전조(前兆)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최대의 사건이 접근하고 있음을 예보(豫報)하고 있다.”(3보감, 280) (9증언 11)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때인 것을 기억하라.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同行)했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갔다. 우리가 종말(終末)의 때로 다가갈수록 에녹이 한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오른편에 계심을 알아야 하며, 그분이 나의 사상(思想)을 아시고, 우리가 사업에 충성하고 참된지를 그분이 아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아신다. 우리는 한 증인(證人)이 계심을 알아야 하며, 사랑하시는 관찰자(觀察者)가 계심을 알아야 하며, 우리의 동기(動機)를 아시고 우리의 삶의 방식이 거룩한지를 아시는 한 분이 계심을 알아야 하며, 우리가 정결하며 그리스도의 의인(義人) 흰 세마포(細麻布)를 위해 준비되었는지를 아시는 한 분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분은 그것이 나에게 입혀졌는지를 아시며, 영광의 왕국에서 거룩한 천사들의 무리와 내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아신다. (2설교, 52)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오늘날 창궐(猖獗)하는 만취(漫醉)와 범죄는 주님께서 이미 예고(豫告)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구 역사의 종말의 때에 살고 있다. 지금은 가장 엄숙(嚴肅)한 때이다. 모든 사태(事態)는 우리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징조(徵兆)들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6. 10. 25.) (절제, 25)


(3월23일 (木)  <준비(準備)된 상급(賞給)을 바라보라>


(Q)~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수준(水準)높은 교육(敎育)을 받았고 가문(家門)도 좋았다. 그로 인해 바울은 세상의 기준(基準)으로 보기에는 매우 성공(成功)할 수 있었다. 그런 바울이 매를 맞고 돌에 맞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온갖 고난(苦難)을 많이 겪으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그를 향하여 참고 견디는 생애를 살았다. 그러한 엄청난 고난(苦難)을 어떻게 견디며 극복(克服)할 수 있었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을 견디고 극복(克服)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 3:13~14, 고후 11:24~33, 로마서 8:16~18, 딤전 6:6~12 딤후 4:6~8, 빌3:11)


(A)~사도 바울이 엄청난 박해(迫害)와 고난(苦難)을 당하면서 극복(克服)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장차(將次)받을 영광(榮光)과 상급(賞給)에 비교(比較)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과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자족(自足)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의 재물(財物)은 하늘로 가지고 갈수 없음을 알고 선(善)한 청(聽)지기 직분을 충성스럽게 하며 믿음의 선(善)한 싸움을 싸우는 삶이 풍요(豊饒)로운 삶이라는 것을 실천(實踐)하며 믿음을 잘 지켰다.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바울을 비롯하여 믿음의 조상(祖上)들처럼 살자.


○.바울의 소명(召命)은 그에게서 여러 가지 종류의 봉사를 요구하였다. 즉 손으로 일하여 생계비(生計費)를 버는 일, 이곳저곳으로 여행(旅行)하는 일, 교회를 세우는 일, 이미 설립된 교회들에 편지를 쓰는 일 등이었다. 그렇지만 이 여러 가지 일들의 와중(渦中)에서도 그는 “나는 오직 이 한 일만을 합니다. 라고 선언하였다.

이 모든 일 가운데서도 그가 그 앞에 굳게 붙잡고 있었던 한 일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그의 이름을 훼방(毁謗)하고 있었을 때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手段)을 다 동원(動員)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毁謗)하게 하였을 때 친히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의 삶의 큰 목적은 그가 한때 경멸(輕蔑)하였던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의 오직 하나 뿐인 소원(所願)은 영혼들을 구주(救主)께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異邦人)들이 그를 배척(排斥)하고 박해(迫害)하였지만 그의 목적에서 그를 돌아서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편지 107, 1904). (빌 3:13~14, 화잇주석)


○.<오직 한 일.>

문자적(文字的)으로 “한 가지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뒤따르는 구절(句節)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바울의 단 한 가지 목적은 그를 부른 주의 목적을 성취(成就)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목표가 나뉘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생에서의 부(富)와 명예(名譽) 그리고 내세(來世)에서의 구원(救援)과 면류관(冕旒冠)을 동시에 추구(追求)하지 않았다. 그가 한 가지 목적을 가졌을 때 영성(靈性)이 깊어졌고 사역에 성공이 이르러 왔다. 바울은 그의 눈을 영생과 내세(來世)에서의 유업(遺業)이라는 목표에 고정했다. 이 목표를 분명하게 바라볼 때에 그리스도인은 그의 앞에 놓인 경주(競走)를 충성스럽고 기쁘게 할 수 있도록 격려(激勵)받을 것이다(히 12:1, 2).

이는 바울이 눈을 목표에 고정(固定)하고 오직 목표에만 주목(注目)하기 때문이다. 이기려는 자는 목표와 상급(賞給)을 분명하게 마음에 두어야 함을 그는 알고 있다. 경기자(競技者)는 박수(拍手)나 모욕(侮辱)에 주의를 돌려서는 안 되며, 긴장(緊張)을 풀어서도 안 되며, 실족(失足)해서 넘어져도 안 되며, 멈춰도 안 된다. 그는 결승점(決勝點)에 도달(到達)하기까지 끊임없이 매진(邁進)해야 한다. (빌 3:13~14, 재림교주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은 경주(競走)의 승리자(勝利者)에게 상(賞)을 주기 위해 심판관(審判官) 앞에 있는 높은 단(壇)으로 올라오도록 명(命)하는 것에서 연유(緣由)된 표현으로 인간을 구원(救援)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實際的)인 부르심을 의미(意味)하며(고전 1:26, 7:20, 엡 1:18, 4:1,4, 살후 1:11) ‘상(賞)’은 경주(競走) 뒤에 있을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구원(救援)의 완성을 시사(示唆)한다. (빌 3:13~14, 만나주석)


○. <귀한 약속(約束)들 (딤전6:12)>

“영생을 취(取)하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구(求)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회개(悔改)하는 자에게는 죄의 용서(容恕)가 약속되어 있고 믿는 자에게는 칭의(稱義)가 약속되어 있으며, 죽도록 충성(忠誠)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冕旒冠)이 약속(約束)되어 있다(편지 33, 1895).  (딤전 6:12, 화잇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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