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충성된 자에게 주어질 상급(질문, 대답, 설명)03/25.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3-18 00:40 조회6,208회 댓글0건본문
제12과 충성된 자에게 주어질 상급
(3월 2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48분)
연구 범위: 히 11:6, 사 62:11, 롬 6:23, 요 14:1~3, 계 21, 마 25:20~23, 롬 8:16~18
기억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비록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신실한 삶을 위한 동기로 최후의 상급에 대한 소망을 제시한다. 결국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 19:7~11).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받을 상급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상급은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된 것으로서 재림 후에, 끔찍한 죄의 결과들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게 된 후에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약속은 무엇이며, 그것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어떤 보증이 주어져 있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늘의 상급은 공로가 아닌 예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 느끼기: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되게 봉사한 믿음의 선조들의 모본을 생각한다.
- 행하기: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원을 충성되게 관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TMI 위로
2.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 종처럼 부족한 노력에도 귀한 것을 누린 경험이 있습니까?(마 25:21)
※ 각자 대답해보자. 사실 우리의 삶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3.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이 진실한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요 14:3)
※ 예언이 이 세상 역사에서 다 성취된 사실에 의하여 믿을 수 있다.
4.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 기록된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와 예언의 확실함을 통하여 믿음으로 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실까요?(마 25:14-19)
※ 비교하지 않으시고 성취한 그대로 평가하신다.
6. 고난을 당하면서도 바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빌 3:13, 14)
※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했다(빌3:11).
결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상급은 죄의 결과들이 사라진 재림 후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상급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며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바울과 믿음의 선조들은 약속된 상급에 큰 가치를 두고 끝까지 충성 하였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새 하늘을 바라보면서 맡겨 주신 자원을 충성되게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주께서는 충성된 청지기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3월 19일(일) 충성됨에 대한 상급
히브리서 11:6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또한, 요한계시록 22:12, 이사야 40:10, 이사야 62:11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사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사62: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답: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신자를 개인적으로 관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관계하신다는 사실을 행한대로 상을 주신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충성된 자녀들에게 주시는 상급은 매우 특별하며, 다른 영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한한 지식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언어는 의인들이 받을 상급을 묘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깨닫게 될 것이다. 유한한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낙원의 영광을 깨달을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674).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이었던 팔복을 이렇게 마무리하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 12).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한 후에, 바울은 다음 장을 예수님께서 왜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셨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 2).
충성됨으로 인해 상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받는 구원과 다르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성경의 인물 중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행위를 통해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상급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의 결과일 뿐이다.
<묵상>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실 영광은 다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하늘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상급을 주실지 묵상해 보십시오.
답: 최고의 상급은 영생이다.
<부가설명> 전사한 군인에게 최고의 훈장을 수여한다고 해도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지각도 감각도 없다. 가족들이 죽은 가족을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죽은 그 아들을 부활시켜서 가족들 앞에 데려온다면 어떨까? 국가가 주는 최고 훈장보다 더 큰 상급이 아닐까? 본인에게도 말할 것 없는 훈장이 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라고 말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그들이 함께 하늘에 왔을 때 그들이 전도자의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것이다. 동시에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이 씌어질 것이다. 그 외에 문들을 통하여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권세를 얻을 것이다(계22:14). 이 모든 것이 상급이 아니겠는가?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면류관에 별들이 빛나게 될 것이다. 그 별들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충성한 훈장이 될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 생명 나무, 생명 강, 생명 샘 모든 것이 생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최고의 상급이 바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잘 나타낸다.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 생명은 이미 받은 것이다.
<교훈>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끝까지 믿음으로 충성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상급이 주어진다.
<적용> 은혜로 받는 구원과 행위에 따라 받는 상급은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안식일학교 활동반에서 함께 토의해 보십시오.
3월 20일(월) 영원한 생명
모든 인간에게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영원이라는 시간은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죽음의 모습으로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중간지대도 없다. 양쪽에 조금씩 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 없다. 생명을 통해 전부 다 갖든지 죽음을 통해 전부 다 잃든지, 둘 중 하나이다.
로마서 6:23과 요한복음 3:16을 읽어보라. 우리 앞에 어떤 선택이 놓여 있는가?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답: 생명과 사망.
이보다 더 분명한 선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지금 이것을 읽고 있다면 그대는 영생을 선택했거나 그것을 선택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는 당신이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믿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쉼을 얻으며,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3을 읽어보라. 1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면은 무엇이며 2절과 3절에서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시는가?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답: 근심하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을 믿으라 그러면 영원한 집으로 영접할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소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절망과 고난의 시기에 그들에게 용기와 힘을 줄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셨으며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초림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그분의 재림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재림이 없다면 예수님의 초림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신 그분의 약속 또한 분명히 믿을 수 있다.
<묵상>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어떤 일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재림을 신뢰할 수 있게 합니까? 예수님의 초림이 그분의 재림에 대한 보증이 된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십시오.
답: 예언대로 초림하셔서 예언한 사건들을 다 성취하신 것이 예언한 재림을 확신할 수 있는 보증이다.
<교훈>
초림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그분의 재림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3월 21일(화) 새 예루살렘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바라본 바로 그것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한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새 예루살렘은 천년기 동안 그리고 후에 새롭게 된 지구에서 하나님의 충성된 자녀들이 영원히 살게 될 집이다. 짐을 싸거나 이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그 성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요한계시록 21장을 읽어보라. 우리를 위한 어떤 약속이 기록되어 있는가?
답: 새 하늘과 새 땅, 또 새 예루살렘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 새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상태 등등이 소망으로 벅차게 느끼도록 기록되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죄로 인해 망가져 버리고 타락한 세상의 것들만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망이 가득하다.
첫째,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과 함께 타락한 세상에 거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집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예수님과 가까이 살면서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특권이었겠는가! 우리도 죄로 인해 모든 것이 왜곡되지 않는 세상에서 그와 같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눈물과 슬픔 그리고 아픔 가득한 세상에 살며 그런 것들만 알고 있는 우리들이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약속들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애초부터 이곳에 있지 말아야 했던 “처음 것들”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맑은 생명수의 강이 나오며, 그 강의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그곳에 있을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계 22:4) 될 것이다. 모든 구원받은 자들은 지금과는 달리 하나님과 가까이 살게 될 것이다.
<묵상> 요한계시록 21:8에 기록된 둘째 사망을 경험하게 될 자들에 관해 읽어 보십시오. 여기에 묘사된 죄 중에 예수님께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었습니까?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답: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회개하라는 성령님의 호소를 거절하기에 회개하지 않은 죄다.
<부가설명> 새 예루살렘은 새 평화의 도성이라는 말이다. 아담 부부나 에덴동산을 멀리서라도 봤던 사람들 외에는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홍수 때 하늘로 옮겨진 에덴동산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의 그의 자손들은 그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저주받은 땅과 천연계 현상이다. 땅이 저주받아 창조 때의 상태는 대격변을 겪어서 변질된 천연계를 보면서 변질 되기 전의 상태를 알 수 없다. 오늘날 천연 법칙들은 대개가 변질된 법칙들이다. 소위 말하는 자연과학은 이 변질된 천연계를 관찰해서 얻는 지식이다. 변질 되기 전 상태를 절대로 바르게 알 수 없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회복된 세상에서 천연계 상태를 바르게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를 통하여 기록한 말씀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묘사하려고 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볼 것이다. 또 연구할 것이다. 생명과 사랑을 깊이 느끼고 더욱 넘치는 감사로 창조주 여호와라 이름하신 삼위일명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릴 것이다. 거기 내가 꼭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3월 22일(수) 결산할 때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거의 마쳐가고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용히 찾아와 질문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의 두 장에 걸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신다. 24장에서는 전쟁과 재난 같은 이 세상에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 그리고 2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날 교회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신다. 교회의 상태는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묘사되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이야기하는 달란트의 비유이다.
마태복음 25:14~19을 읽어보라. 타국으로 떠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소유를 누구에게 맡기는가? “결산할새”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참조, 마 25:19)
[마25:14~19]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답: 주인이 타국으로 갔다. 그분은 예수님을 표상한다. 종들에게 맡겼다. 주인이 돌아와서 재산을 맡긴 종들과 결산한다.
우리는 종종 달란트를 노래, 말하기와 같은 타고난 재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므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된 누가복음 19:12~24은 돈과 그것을 관리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달란트의 비유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중요한 교훈은 마지막 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이 달란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능력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 비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탁하신 세상의 재물에도 적용된다”(교회증언 1권, 197).
나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며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불충실한 종으로 평가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잃은 사람은 가장 적은 한 달란트를 가진 자였다. 다른 사람들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과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집중하도록 하자.
마태복음 25:20~23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돈을 충성되게 관리하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25:20~23]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답: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많을 맡기겠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기쁨을 함께 누리자.
<묵상> 착하고 충성된 종을 위해 준비해 두시고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하자고 하시는 주인의 마음이 어떤지, 또 그 즐거움은 얼마나 클지 묵상해 보십시오.
답: 죽은 자를 살리신 즐거움, 죽었다가 살아난 즐거움이다. 어디다 비교해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부가설명> 사람들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하든지 결산할 때가 있다. 일이 일단락 되면 그 결과가 어떤지 알아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다. 목숨을 버리면서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업을 하셨고, 이 일을 계속해서 결산할 때까지 일하도록 그분의 종들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넉넉히 일 할 수 있는 밑천을 주셨다. 주인이신 예수님은 종들에게 맡긴 밑천을 얼마나 바르게 열심히 사용했는지 물어보신다. 그때가 세상 끝이고 결산할 때이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다. 종들은 그때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듣도록 일해야 한다. 시간, 재능, 재물이 다 결산의 대상이다. 재물이 없어도 재능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받은 시간도 있다. 이것들을 주인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한다. 정직하고 진심으로 사용했는데 밑천까지 몽땅 까먹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정직하고 진심으로 힘을 다했다면 밑천 잃은 것도 탓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랬다면 밑천을 까먹을 일이 결단코 없다. 반드시 남길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그 능력에 합당하도록 맡겼기 때문이다. 칭찬받도록 맡은 일을 잘 감당하자.
<교훈>
세상 끝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을 결산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그날을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진 것을 충성되게 관리해야 한다.
3월 23일(목) 준비된 상급을 바라보라
바울은 회심을 경험한 후에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다. 그가 받은 교육과 명석함으로 인해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에 매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모세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를 선택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24~33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매 맞고, 돌에 맞고, 굶주리고, 추위와 싸우는 등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는가?
로마서 8:16~18을 읽어보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충성하게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롬8:16~18]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답: 현재의 고난을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아들로서 아버지께 충성(효도)을 다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면서도 바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충성된 자에게 주어질 상급에 큰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 14).
다시 한번 디모데전서 6:6~12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기별은 무엇인가?
[딤전6:6~12]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답: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을 사는 것이 풍요로운 삶이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 풍요로움이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재물은 쌓아 두는 것이 아니다. 또한, 풍요로움이란 빌립보서 4:19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마지막으로 풍요로움이란 하나님 안에서 이미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모든 일에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물질적으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세상의 어떤 재물보다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필요를 채울 것이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충성된 백성들에게 참된 부와 책임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상급인가!
<묵상> 디모데후서 4:6~8을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바울의 고백과 확신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딤후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답: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며 부지런히 달리면서 믿음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이중 상급을 준비하셨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을 때 그에게 준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버렸다. 그것은 생명을 버린 것이다. 생명은 사망이 전혀 상관하지 않는 상태의 삶을 뜻하는 표현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하는 육체의 생명은 사망에 이르는 과정이지 생명 자체가 아니다. 생명은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 사망의 존재이지 생명이 없다.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하나님의 생명으로 탄생하셨다. 그것을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표현했다(마1:18). 그분이 육체가 되어 오셨는데 그 육체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었다(골2:9).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 그 생명을 위탁하시고(눅23:46) 육체에 죄를 정하여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셔서 죽으셨다(롬8:3, 벧전2:24).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 이 생명을 주셨다. 이보다 더 큰 상급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생명의 상급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따사 또 상급을 주신다(계22:12, 11:18). 증언의 말씀대로 그 면류관에 별을 달아주신다. 그 외에 어떤 상급이 더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영생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그 다음 일은 이 생명을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상급니다. 아멘.
<교훈>
온갖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었던 바울의 모습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3월 2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충성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보았다.
전 세계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향한 이상적 청지기상
(이것은 목사와 지역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청지기 직분에 관한 제반 사항을 바르게 조성한 미래의 어느 때를 가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올바른 재정 관리에 대한 성경적 원칙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훈련시키며, 지원하고, 격려한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성경적 원칙들을 실천한다. 후하게 베풀며, 예상치 못한 때를 대비해 정규적으로 저축하고, 빚의 노예가 되는 데서부터 벗어난다. 그들은 검소하며, 규모 있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돈은 더 이상 그들의 우상이 되지 않으며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져 간다.
안식일 아침이면 예배 시간에 늦지 않게 교회에 도착한다. 그들의 행동에서 평안함이 느껴진다.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않으며 만족과 감사의 정신이 가득하다. 돈으로 인한 부부관계 문제가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기를 기대하며 예배에 참석한다. 교회의 사역들은 재정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지역 사회 봉사에 힘쓴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매우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누어 준다.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에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며 모든 시설들이 잘 관리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질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행위에 따른 상급, 이 두 가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라. 이 두 개념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 행위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신 새 생명의 활동(작용)으로 나타는 열매일뿐이다.
2. 우리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우리는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를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개념이 서로 충돌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가진 것을 만족하는 것은 재정 상태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3. 영원이라는 시간이 우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선택들이 앞으로 우리가 어디서 영원을 보내게 될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 영원함은 시간 개념이 아니다. 영원함은 그대로 한 단위이다. 그것은 끝이 없는 생명의 현실을 표현한 말이다. 시간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함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은 시간을 정복한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