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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그분의 긴밀한 동행(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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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5-15 12:08 조회4,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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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그분의 긴밀한 동행
5월 24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2분)

도입)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동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맡긴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을 비우는 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소망하고 다짐하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또한 나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 마음이 적다면 결코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이 바로 맡기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에도 모든 것을 맡기시는 참 신앙의 본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그러한 주님을 본받아 진실로 주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한다. 예수께서는 먼저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기도 내용은 곧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부탁의 기도였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육신까지도 다 맡기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당신의 육신을 맡겨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입으셨던 단벌옷까지도 로마 병정들에게 다 주셨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겼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하는 신앙을 몸소 실천에 옮기셨다. 그래서 당신의 영혼과 육신, 옷 한 벌까지 다 맡기시고 평안한 믿음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이다. 그분의 긴밀한 동행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의 자세에서 시작된 것이다.

기억절: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연구범위: 마 4:4, 눅 2:40, 6:12, 요 4:34, 17장, 요일 2:6.

안식일 오후
재림교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회나 교인들이 좋은 일로 언론에 보도되거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그러나 만일 어느 날 갑자기 언론 매체의 머리기사에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사회의 파괴자와 선동자로 낙인찍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확신과 신뢰만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분께서 그 당시에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비방을 당하시고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아는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분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거칠게 다뤄지셨다.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17-20).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신체적 및 정신적 학대를 끝까지 견디도록 힘을 주었는가? 온 세상이 그분을 대적하고 한 가닥의 인간적 도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확고부동하고 침착하게 서 있을 수 있게 하였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교통하심으로 그분과의 긴밀한 동행을 함으로써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이번 주에 이 주제를 공부해 보자.

일요일(5월 18일)
초기의 생애(눅 2:40)

도입)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최고의 강심장을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 특유의 강인함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성경에서조차 어린 시절은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누가복음만이 청소년기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경 박사들과 질문도 하시고 답변도 하셨다는 내용이 나올 뿐이다. 그러나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부터 예수님의 강인한 성품에 대해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해주는 것들이 있다. 예수님은 외유내강(外柔內剛)하셨다. 예수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셨고, 약한 듯 하시면서도 강력하셨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지혜와 지식 그리고 권능을 행사하셨다. 예수님은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무장한 경건의 능력을 펼쳐 보이신다. 가장 겸손하신 성품으로 사단의 유혹을 이기셨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청중들을 사로 잡으셨다. 예수님의 입술은 꿀방울이 떨어지듯 달콤한 진리가 쏟아져 나왔으며, 예수님의 가슴에는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충만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죄인들과 친구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음이 강한 사람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한다. 허울 좋은 희생이 아니라 완전한 헌신이다. 마음이 강한 사람은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를 사랑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 마음이 강한 사람은 자신만의 크고 원대한 포부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두지 않는다. 마음이 강한 사람은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안다. 자신이 죽어 온 인류를 살릴 수 있다면 기쁨으로 자신을 사지(死地)로 내려 보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 그대로 구원자이시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구속주이시다.

이미 앞에서 강조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기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분의 탄생과 열두 살 때 성전을 방문한 것(참조 눅 2장)이 그분의 초년기에 대한 기록의 거의 전부이다. 그분이 ‘삼십 세쯤’ 되시어(참조 눅 3:21-23)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까지 다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내용에 근거하여 그분의 초기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가능하며, 그분의 생애를 지탱해 준 영적 기초에 대해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더라도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 동안에 보이신 견실함과 강인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피상적인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하나님과의 긴밀한 동행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 예수께서 성전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다시 읽으십시오(눅 2:39-52). 어린 예수께서 자라나실 때에 어떤 영적인 기초를 가지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한 그분의 부모는 그분의 성장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답:
이 기사는 다른 탄생 기사와 달리, 예수님의 30세 이전까지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복음서의 대부분 자료들이 그분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전기(傳記)가 아닌 수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이 사실은 그분의 신비로운 탄생(성육신)과 의미심장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대한 두 사건에 조명을 비추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사건 사이에서 그분의 무아적인 봉사와 희생의 삶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분께서 공생애 동안에 보이신 집중적인 헌신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이고 개인적인 긴밀한 관계의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교훈: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통을 나누시기 위해 한적한 천연계를 찾아가셨으며, 그곳에서 행복한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셨다.

부가적용)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독을 즐기는 분은 아니셨다. 혼잡과 시끄러움을 싫어하시기에 되도록 조용하고 안정된 장소를 즐겨 찾으시는 분도 아니셨다. 늘 주변에 사람들이 들끓어도 개의치 않으시고 묵묵히 복음 사역을 감당하셨고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시러 자진하여 회당 같은 공공장소를 자주 찾으셨다. 하지만 종종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가신 것도 사실이다. 우리 주님께서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모습을 보여준다. 한적한 곳과 기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영적 의미가 크다.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16절). '한적한'이란 말은 헬라어로 ''(엘레모스)인데 인적이 끊어진 황량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에 '한적한 곳'은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장소를 뜻한다. 우리 주님께서 일부러 찾으신 한적한 장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다. 왜 이런 자리를 찾으셨을까? '기도하시니라',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우리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지셨다. 그 시간 그 자리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굳이 한적한 장소를 택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로 성부 하나님과의 은밀한 그리고 개인적인 교제를 가지기 위함이다. 그 곳에서 우리 주님은 다른 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집중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성부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우리 주님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기도에 전심전력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성부 하나님만을 뵈옵고 그 안에 깊이 몰입하시기를 원하신 우리 주님이셨기 때문이다.

월요일(5월 19일)
그분의 사역이 시작될 때(마 4:4)

도입)
시험이 없는 인생이 없고, 시험이 없는 장소도 없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찾아오고, 어디에서나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왕에게도 시험이 있고, 걸인에게도 시험이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고, 365일 앓아눕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어도 시험이 찾아오고, 산속에 꼭꼭 숨어 있어도 시험이 찾아온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시험이 찾아오고, 혼자 고독을 즐기고 있어도 시험은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 시험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달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릴 때 달을 등지고 한참 도망가다가 돌아보면 여전히 달이 머리 바로 위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보는 경험 하였을 것이다. 시험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그와 같다. 이 세상에 시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그 까닭은 우리를 시험하는 사단이 영적인 존재,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며, 우리가 갖지 못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어둠의 왕으로 행세하면서 사람을 유혹하고, 시험한다. 사단은 우리가 속아 넘어가기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변장을 한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사단의 시험에 굴복해 왔다.

예수께서는 침례 받으신 후 유다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기도하시며 당신의 사명을 깊이 숙고하셨다. 우리 가운데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가져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영적인 집중력, 즉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의 집중력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광야로 나가신 뚜렷한 이유는 시험받으시기 위함이었는데(마 4:1, 참조 눅 4:2), 시험하는 자에게는 더없이 유리한 기회였던 것이다. 사단은 구주께서 극도로 배고프신 것을 이용하여 그분과 하늘 아버지와의 사이를 분열시키고, 하나님을 굳게 잡은 예수님의 손을 비틀며, 그 긴밀한 동행을 깨트리고자 하였다.

1. 다음 구절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답은 그분이 하나님과 긴밀하게 동행한 사실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여기서 어떤 교훈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마 4:3-10, 눅 4:3-12).
답:
우리는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위대한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예수님이 차지하신 중대한 위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흠 없는 아들이셨다. 그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루 이틀이 아닌 당신의 일생 동안 완전한 생애를 사셔야만 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이 고난 받으셨고, 시험을 당하셨으나 순결함을 유지하셨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33년 동안 컴퓨터를 가지고 기사를 쓰고, 숙제를 하고, 답장을 쓰면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삭제’나 ‘실행취소’의 자판을 누르지 않는 것과 같다. 혹은 수학이나 물리학 과목을 배우면서 한 문제도 틀리지 않는 것과 같고, 33년 동안 피아노를 치면서 단 한 번도 잘못된 건반을 누르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었다. 그분은 단지 이타적인 삶의 모본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죄 없는 분으로서 이 지상에 구원을 가져오셔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셨으며, 우연히 승리를 거두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단 하나의 실수만으로도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과 집중적인 교통을 하시기 위해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셨다. 그분의 승리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다.

부가적용)
침례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림을 받았다. 거기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앞으로 주님께서 행하실 사역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런데 거기에도 시험이 찾아왔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에,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장소에 시험이 찾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적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사단의 시험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을 금식기도 했으니까 사단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 철저히 지키고, 성경 날마다 읽고, 열심히 새벽기도 드리고, 십일조 철저히 드리니까 사단이 아예 시험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단은 더 교묘하고 간교한 시험 문제를 가지고 찾아간다. 사단이 광야의 예수님을 시험했을진대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쉽게 살아라, 쉽게 믿으라고 유혹한다. 꼭 그렇게 정석대로 할 필요가 있느냐, 꼭 그렇게 양심대로 할 이유가 있느냐, 꼭 그렇게 원칙대로 해야만 하느냐고 유혹한다. 쉽게 사는 것이 멋이고, 여유고, 지혜라고 유혹한다. 온 세상에 쉽게 살라는 사단의 유혹이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쉽게 돈 벌고, 쉽게 사랑하고,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고, 쉽게 인생을 포기한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친다. 쉽게 살기 위해서 양심도, 도덕도, 윤리도 못 본 척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쉽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쉬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깊이 연구해야 한다. 말씀의 허리띠로 우리 자신을 동여 매야 한다.

화요일(5월 20일)
그분의 기도생활(눅 6:12)

도입)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이다. 기독교인이란, 기도하고, 기다려서,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기적의 통로, 축복의 통로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 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도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기도를 등한히 여기는 성도들이 있다. 바쁘고 피곤해서, 일이 많아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기도를 해도 기쁨과 응답이 없고, 조금만 기도하면 할 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사시다가, 기도로 끝마치신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기도는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눅 22:39-40). 예수님처럼 우리도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먼저 기도부터 하셨다. 전도여행을 떠나시기 전에,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되느냐고 묻기 전에 기도부터 하셨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뜻을 깨닫고, 뜻대로 행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특별히 집중적인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심으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권능으로 충만하여 돌아오셨다(참조 눅 4:14).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고 하늘과 산 연결을 맺지 않은 채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것은 그분께 부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분께서는 계속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의 생애를 사셨지만, 주요한 사건이나 발전의 단계마다 특별한 탄원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매우 중요하거나 긴박하고 위험한 순간에 직면하실 때에 안내와 지시와 능력을 받으시기 위해 하나님께 의존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예수께서 어떤 경우에 특별한 기도를 드리셨는지 다음 구절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마 14:23(24-33절과 비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6:12(13-16절과 비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7장(18:1-3과 비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는 마가복음 1:35의 기록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방식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분은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일과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에는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늘리셨다. 누가복음 6:12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무리 가운데서 택하시기에 앞서 밤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참조 눅 6:13). 그분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시는 놀라운 사건이 있기 전에도 당신의 아버지와 긴밀하게 교통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그리고 수난주간에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눈앞에 두시고 당신의 제자들과 마지막 때까지의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간절한 탄원의 기도를 올리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평소에도 기도로써 하나님과 교통하셨으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더욱 집중적인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으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항상 사역을 하신 후에는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기도를 일보다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다. 많은 병자와 허다한 무리들이 몰려와도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셨다(눅 5:15-16). 이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그날 하루 사용해 주심에 감사하며, 그 일의 결과를 책임져 달라고 맡기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무슨 일을 할 때, 준비기도 시간만큼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한다. 감사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 일한 후에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큰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항상 기도하셨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힘이요, 능력이요, 특권이다. 예수님도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죽음에 직면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그 최후의 기도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셨음을 보여준다. 먼저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의 기도를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영적 전투이다. 우리는 내 뜻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릎이 마비되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셨다. 이 기도의 불을 우리가 이어받아 하루에 한 시간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함으로 겟세마네 기도의 불길을 이어가고, 전해주는 기도의 용사가 되어야겠다.

수요일(5월 21일)
사명에의 집중성(요 4:34)

도입)
예수님은 이미 소년 시절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셨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사셨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인식하며 살아가야 한다. 신분은 곧 운명이다. 예수님은 지혜와 육체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셨다. 1997년 92세로 세상을 떠난 유대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의 베스트 셀러 "그래도 나는 삶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에서 나치 수용소의 처절한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1) 하나님을 의지하고, (2) 아름다운 일을 상상하고 (3) 자연을 보면서 힘을 얻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 경험을 통해서 그는 유명한 말을 한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사람에게 인생 최대의 사건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사건'이다. 그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발견한 사건'이다. '세상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사명'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사명을 인식하면서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의 성패는 '환경'이나 '타인'이 결정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이 결정한다. 사람에게 사명이 생기면 인생의 목적이 뚜렷해지고, 인생의 차원이 깊어지며, 외적인 것으로 인생을 저울질하지 않게 되고,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보게 되고, 자신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사명이 없는 사람에게 일은 '의미 없는 노동'이 되지만 사명을 가진 사람에게 일은 '최대의 축복'이 된다. 자녀를 기를 때 "내일의 대들보를 기른다"고 생각하면 자녀 양육이 사명이 되고, 식사를 준비할 때 "가치 있는 일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생각하면 식사 준비도 사명이 되고, 사업을 할 때 "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기쁨을 창출한다"고 생각하면 사업도 사명이 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청소년 문제가 거의 없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로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셨다"는 의식을 심어 주기 때문이다. 인생 최대의 교육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주는 교육' 이다. 역사상 위인의 길을 걸었던 사람에게 반드시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사명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사명만 있다면 우리에게도 위인의 길은 펼쳐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이렇게 노래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둘러싼 숲의 어두움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사셨는데, 그 숲은 항상 깊었을 뿐 아름답지는 않았다. 시인과 같이 그분은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셨고,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하셨다. 이와 같은 사명의 집중성을 우리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가련한 영혼 앞에서 그분께서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잊어버리시고 자신의 사명에 온전히 열중하셨다.
그 여인은 마침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자신이 만난 분에 대하여 전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신 채 이 새로운 접촉의 성공을 기원하고 계셨다.

1. 제자들이 잡수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요 4:32-34).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답:

2. 다음 구절은 당신의 사명을 향한 예수님의 집중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요 9:1-12, 35-39, 12:27-36).
답: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러 온 헬라인들의 요청을 가지고 왔을 때(요 12:20-22), 그것은 팔레스틴 본토를 넘어 세계 곳곳을 향해 하나님의 왕국의 기별을 전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모든 민족을 위한 속죄의 사역과 맞지 않음을 예수께서는 아셨다. 그분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24절)는 강력한 말씀을 통해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치러야 할 희생의 원칙을 말씀하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당신의 사명에 온전히 집중하셨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

부가적용)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행 20:24).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가 당신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 이 과제를 우리의 사명(mission)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사역과 이 세상에서의 사명 둘 다를 감당하기 원하신다. 우리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섬김이고(골 1:25, 고전 12:5), 사명은 이 땅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섬김이다. 우리의 삶의 사명은 공유되며 또한 구체적이다. 한 부분은 다른 크리스천들과 나누어야 하는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게만 주어진 과제다. 영어단어 ‘사명(mission)’은 라틴어 ‘보내다(sending)’에서 유래되었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이 땅에 보내지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사명을 명확하게 이해하셨다. 열두 살 때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눅 2:49)라고 말씀하셨고, 21년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지고 계셨던 사명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 분이 육신을 입고하신 일을 우리는 그분의 영적인 몸인 교회로 계속 어어 나가야 한다. 그 사명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적에서 친구로 바꾸셨고, 다른 사람들도 그의 친구가 되게 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후 5:18).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단으로부터 구원해 당신과 화해하고, 우리를 창조하신 다섯 가지 목적을 우리가 성취하기를 바라신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신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 5:20).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을 세상에 전하는 메신저이다.

목요일(5월 22일)
우리와 하나님의 동행(요일 2:6)

도입)
사람의 신앙생활이나 성품의 평가는 그 사람이 어떤 특별한 경우에 행한 일이 아니라 그의 일상생활에서, 곧 놀라울 것도 굉장한 일도 아닌 때 어떻게 사는 가에 달려 있다. 사람의 가치는 사람들의 조명을 받을 때가 아닌 일상사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에서 들어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그것은 당신이 제 2의 영적흐름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배움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보조를 맞추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보조를 맞추게 되면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그 특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람 개인은 하나님과 연합하므로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보조와 능력만이 나타난다. 하나님과 보조를 함께한다는 것은 어렵다. 하나님과 걷기 시작하면 불과 세발자국을 떼기 전 하나님이 앞서가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훈련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길로 단련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그는 쇠하지 아니하시며 낙담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시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영적진리는 상황으로 배운다. 지성적 논리로 배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사물에 대한 관점의 상황을 바꾼다. 그러므로 전에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하게 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계속하라. 지금 고통스럽다고 포기하지 말라. 지속하라. 머지않아 당신은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1. 위의 본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우리가 따라야 할 어떤 원칙이 나타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우리가 다 행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하면 이 구절을 우리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답: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개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개념이 맨 처음 성경에 나오는 곳은 아마도 창세기 5장일 것이다(22, 24절). 특히 24절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동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지속성이 강조된 말로 항상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에녹이 어떤 실수와 투쟁을 했든 간에 그는 끊임없이 주님과 동행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동행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일들로 인해 너무나 쉽게 이러한 동행을 빼앗긴다.

2. 우리가 처한 문화적 환경에서 볼 때,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할 수 있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너무 한가하거나, 너무 분주하거나, 혹은 단지 생존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먼저 문제점을 파악한 다음, 나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제적인 단계들을 정리해 보십시오.
답:
마태복음 13:22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라.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야기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때를 내다보시고 경고하시면서, 그 어떤 것들도 단지 변명에 불과함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 매일 매 순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써 사단을 기쁘게 할 필요가 없다.

교훈: 오늘날과 같이 사단의 유혹이 강렬한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최우선으로 삼고 우리의 시선을 그분께 고정시켜야 한다.

부가적용)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걷는다” “주님과 늘 교제하며 산다”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간다” “주님의 뜻에 즐겨 순종하여 하나 되어 산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큰 기쁨을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기쁨을 주는 일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과의 동행하는 기쁨을 크게 느낄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 다윗도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일상생활 중에 할 수 있다. 에녹 당시의 세상은 이미 죄악이 퍼져 나가고 있었고, 타락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에녹은 그 세상을 등지거나 떠나지 않았다. 그냥 거기서 아이를 낳으며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도 다른 자녀를 낳았는데, 영어로는 ‘other sons and daughters’ 로 되어 있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는데 일상생활을 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 동행을 위하여 기도원에 들어가 거기서 산다거나 이 일을 위해 직업도 방해가 된다고 직업을 버리고 성경공부만 한다든지, 교회에만 산다든지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일상(日常)의 삶을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한다. 직업을 가지며 일하여서 돈 벌어야 할 사람은 일해야 한다. 가정주부는 가정을 잘 가꾸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 학생은 공부하면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살기 위해 몇 가지의 도움이 되는 지침이 있다. 첫째,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어느 상황에서도 늘 주님을 인정하라(계 3:20). 둘째, 은혜 받은 설교 말씀, 성경 말씀, 예언의 말씀 등을 자주 묵상하라(시 1편). 셋째, 은밀한 곳, 골방에서 하루 한번은 기도하고(마 6:6),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엡 6:18)

금요일(5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에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한 그분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분께 대한 우리의 신뢰심은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어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83).
“사단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유년 시절의 완전한 발달과 흠 없는 장년 시절과 거룩한 봉사와 흠 없는 제물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패배하였고, 예수님을 죄에 빠뜨릴 수도 없었다. 광야에서부터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분노의 폭풍우가 그분께 휘몰아쳤지만, 그 폭풍우가 더욱 사정없이 후려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아들은 더욱 단단히 당신의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피 묻은 길을 힘 있게 밀고 나아가셨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주님과의 동행을 방해하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각자 자신의 목록을 작성한 다음 교과토의 시간에 나누어 봅시다. 다른 반원들과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요? 서로 도와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찾아보십시오.

2.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자주 산에서 시간을 보내시고, 산기슭에서 가르치신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변화산에 오르신 일화도 소개되어 있습니다(마 17:1-9).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것과 그분께서 매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신 것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연결이 있습니까? 우리는 비록 분주한 산 아래에 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더 높은 영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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