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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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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5-11 09:40 조회4,7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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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7(안) 李奉周 (일몰: 오후 7시 36분)

제 7과 그분의 당혹(當惑)스런 행동(行動)
<확대경(擴大鏡)>
◎ 프리즘을 통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빛깔(色)이 다양한 색으로 보인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들도 사물과 사람들을 볼 때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그대로 듣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의 각도로 생각을 한다.

☞ 그 일례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씀으로 설교를 해도 다 틀린 말로 들리고,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거나 하물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찬양을 해도 아름답지 않게 들린다는 사실이다.

☞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고 그분께서 하신 모든 것들을 자기들의 유전(遺傳)과 관습(慣習)과 시각(視覺)으로 그분에게 대하였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문화(文化)만 다를 뿐이지 똑 같은 경우이다.

◎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깨끗하고 신령한 것을 보거나 듣기 위해서는 시력(視力)보조기(안경)나, 청력(聽力)보조기(보청기)와 같은 것을 사용해야 되듯이, 마음에도 생각에도 가슴에도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보혈(寶血)을 통해서만이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를 볼 수가 있다.

◎ 사람들은 생각한 것을 → 말로하고, 말한 것을 → 행동으로 옮겨간다.

◎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트집을 잡고 도전한 실례들을 살펴보았고,
금주에는 "예수님"의 행동을 유대인들의 관점으로만 생각해서,
부모에게 하신 것과,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과,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몰살한 것과, 침례 요한의 의로운 죽음과, 세상 적인 도덕의 자(尺)대로 본 저속(低俗)한 사람들과 만나고 보살피신 것들을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면서 당혹스런 행동으로 간주하고 배척한 잘못들을 살펴보고 교훈 삼아서 나에게 적용해야겠다.

<적용>
◎ 우리들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거나 듣지 않고 나의 고정된 생각의 자대로 모든 사람의 행동과 삶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되고, 과거의 죄 된 실수로 인해서 고통 받고 있는 그들에게도, 사람들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전도자와 기별 자로써 우리의 사명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日 (5월 11일)
<부모(父母)를 경홀(輕忽)히 여기시다? >
◎ 많은 분들이 재림교인이 되기 전에는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려 간다든지 자기의 집에 찾아오신 다든지 하면 으레 술과 담배와 육류(고기)를 듬뿍 사다드리는 것이 효자(孝子)로 알고 그와 같은 처신이 효도(孝道)로 착각을 하고 지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재림교인이 되고 나서야 지난날의 무지(無智)로 인하여 백해(百害)무익(無益)한 것을 삼가 하도록 권면(勸勉)을 해야 될 자식(子息)의 도리를 오히려 몸에 나쁜 것을 사다드렸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無知)한 것에 대하여 깊이 교훈 하여 차제는 주위에 그와 같은 처지에 계시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잘못된 효도를 알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방 종교의 오랜 세습(世習)에 물든 우리 주위의 현실에서 술과 담배와 어패류(魚貝類)와 돼지고기를 비롯한 육류(肉類)에 대하여 우리 몸의 건강에 나쁘다고 계도(啓導)를 할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 이상(以上)의 비유(譬喩)와 같이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르게 전할 때의 상대의 반응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누가복음 2:49절의 말씀을 가지고 부모를 경홀(輕忽)히 여기시는 것으로 흔히들 오해(誤解)를 하는 것과 똑 같은 경우이다.

◎ 누가복음 2장41-51절의 장면은 마치 소년 예수께서 염려하는 부모에 대해 무례(無禮)하게 대하는 듯 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랍비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7)

◎ 누가복음 2장41-51절에서의 예수께서는 이때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인식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

※ 소년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효성을 다해 섬기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늘아버지에 대한 더 높은 충성의 의무도 인식하셨다.

月 (5월 12일)
<화(禍)를 내시다? >
◎ 불의(不義)에 대하여 일으키는 분노를 “의분(義憤)”이라고 한다.
① 화(禍)를 내는 것과, ② 분(憤)풀이를 하는 것과, ③ 성질(性質)에 못 이겨 폭발(暴發)하는 것, 등의 차이(差異)와 이 말을 사용하여 표현할 때를 어떻게 구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요?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인격형성과 사람 됨됨이에 따라서 ① ② ③ 으로 표현이나 행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즉 자기의 주관과 판단이 흐리거나 잘못된 경우에는 그 결과가 천파만파로 얼마나 크게 파생되는지를 우리는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가인이 그러했고, 사울 왕이 그러했고, 압살롬이 그러했고, 느브갓게살, 벨사살왕들이 그러했고, 예수님 당시의 많은 제사장들이나 바리세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나 장로들이나 군중들이 그러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죄인들인 인간들이 ②③번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이다.
◎ 예수님께서 노(怒)하신 사례들이 성경가운데에서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일과,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 나타내신 의분(義憤)”들이 기록되었다.
믿음과 성전은 예수님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단어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을 부인(否認)하는 첫 단계이며, 성전(聖殿)역시 하나님과 만나는 최고의 성(聖)스러운 곳이며 거룩한 장소요 구별된 장소가 성전인 것이다. 구약의 성전(성소(聖所))은 제사장(祭司長)까지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할 때에는 1년에 단 한번만 출입이 허용되는 지성소의 성소봉사 중의 출입도 대제사장은 발목에 끈을 매고 세마포 옷에 방울을 달아서 지성소 봉사에 제사장의 움직이는 방울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은 것으로 알고 그 발목에 맨 끈을 당겨 시신(屍身)을 밖으로 끌어내릴 정도로 성소(성전)는 거룩한 장소이다.
◎ 성전은 하나님과 만나는(기도(祈禱)와 찬송과 예배)이 있는 곳이 성전이다.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면 이는 없는 것만도 못한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화(禍)를 내신 것은 생명의 끝을 아시기 때문이시다. 생명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는 일만을 미연에 방지하시고자 의분(義憤)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주님은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우리도 교회의 기능을 다시 한 번 재 적립해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는 건물만의 것을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聖殿)인 것이다. (고전 3:16-17)
그러므로 우리의 몸에 부정한 음식과 식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질병(疾病)을 통하여 고통을 맞게 되며, 그 한계를 벗어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의분(義憤)으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심에 감사드리자.

◎ 성경에는 예수께서 노(怒)하신 몇몇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일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 예수께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의분(義憤)을 일으키셨는데, 이는 우리가 보통 화(禍)를 내는 것과는 구분된다.

火 (5월 13일)
<남의 재산(財産)에 피해(被害)를 입히시다? >
◎ “가치(價値)”와 “값어치”는 비슷하면서도 그 뜻은 차이가 있다.
가치(價値)는 단순 품목만을 가지고 매기는 값이고, 값어치는 통 털어 매기는 가격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보석을 보고도 그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금괴(金塊)를 가지고 담을 만들 것이며, 진주(眞珠)나 다이아몬드를 일개의 광물질이나 돌 조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석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이 산간오지에 있는 보석의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울타리에 금괴로 담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어떠하겠는가? 그 원주민들이 아는 값어치를 주고(식물이나 생활용품들) 물물교환을 제의하여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보석들을 바꿀 것이다. 이는 값어치를 알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돼지에 대한 값어치만을 안다. 예수님은 사람의 가치(價値)를 아신다.
사람들은 한 마리에 2-3십만은 하는 돼지× 2,000마리 = 4-6억의 재산으로만 계산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한 인간의 값어치를 돈으로 얼마의 값어치로 환산하시는가 하면 온 천하(天下)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신다.
☞ 사람들의 질병 퇴치를 위해서 예방약을 개발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흰쥐의 생명은 얼마만큼 되겠으며 온갖 동물들의 실험용 숫자는 얼마만큼 되는지 아시는가?
이처럼 많은 동물들이 실험용으로 사람들의 예방 백신 등을 만들기 위해서 죽어 가는 이유는 한사람의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살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다.
귀신들려 돼지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며 피해를 안겨주고 있는 사람으로 그 누구도 이를 도와주거나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귀신들린 사람을 돼지2천 마리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셔서 물질만을 귀하게 여기는 돼지의 주인에게 강한 경각심을 주시면서 물질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귀신들린 광인(狂人)을 구원하신 것이다.
◎ 사람들은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사랑한다. 물질(物質)은 사랑에 대상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이 실망하고 실패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할 대상은 믿고, 믿음에 대상은 사랑하기 때문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이며, 사람과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인데 우리 인간들은 거꾸로 대상을 믿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결과는 실망하게 되고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 예수께서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신 일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리게 하신 일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救援)에 관한 매우 중대한 경고를 주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었다.

◎ 예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돼지 떼의 소유주를 비롯한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다.

水 (5월 14일)
<핍박(逼迫)받는 자(者)들에게 무관심(無關心)하시다? >
◎ 봉건주의(封建主義)적인 한국의 가정을 들여다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가 그리 좋게 형성되어있지 않기에 시모(媤母)와 며느리사이는 항상 주종(主從)관계로 인식하여 왔기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역성들어주거나 대변(代辯)하여주지 않는 남편이 더 밉다는 말이 있다.
아내의 생각은 핍박받는 아내를 편들어주지 않는 것은 남편의 무관심(無關心)으로 생각하기에 불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관심이 아니라 더 많은 관심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 무관심하게 보일 뿐이다.

◎ 자기 아들과 다른 집 아들이 싸움을 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에 한 부류(部類)는 자기 아들만을 옹호하고 편들고 대변(代辯)하는 사람과, 다른 한편 부류는 자기 아들을 책망하고 상대의 아이를 더 따뜻하게 대하며 친절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사람이 어느 부류가 결국에는 승리한(할) 것일까?

◎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요한 의 투옥 소식을 들으셨을 때에 방문하지 않으셨고, 능력을 행사하시어 그를 구출하지도 않으셨다. 요한 이 목 베 임을 당했을 때에도 그분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 침례요한을 구출(救出)하시지 않는 이유나 핍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시고 무관심(無關心)하게 하신 것은 아닐까?

☞ 침례요한의 투옥생활과 목 베임의 순교까지 허락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후(後)에 억울한 일로 고통(苦痛)당할 영혼들에게 위로가 되게 하기 위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사실을 영감의 글에는 기록하고 있음에 큰 감동을 안겨주신다.

※ 비록 예수께서 요한 의 투옥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 의 고독한 죽음은 후세대에 있을 수많은 순교자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

木 (5월 15일)
<저속(低俗)한 자들과 어울리시다? >
◎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통한다.
사회의 모든 모임이나 단체를 보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퇴폐(頹廢)한 곳이나 특정 지역을 우리는 곱지 않는 시각(視覺)으로 보며 또한 그렇게 여긴다.
교회 안에서도 지난날의 행실에 대해서 모를 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행실이 바르지 못한 과거의 전력(前歷)이 있는 사람에게는 곱지 않는 경계심이 늘 주시하고 있다.

◎ 그러나 죄(罪)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뜻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성경에도 저속(低俗)한 삶의 과거가 있었던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난 이후에는 끝까지 주님을 따랐고 생명의 위협도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세리 마태 와 실수 많고 다혈질(多血質)들의 제자들과 몸을 팔던 막달라 마리아 등등은 저속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처럼 위대한 생애를 사셨다.
우리 주님의 지상생애는 저속한 사람들까지도 영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늘보좌를 두시고 이 땅에 오셨다. 세상 사람들의 외적인 관심과 모양을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 주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그에 목적을 두셨고 상대하셨고 사랑하셨음을 우리는 배우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고린도전서 1:18-31절의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으며, 그들과 섞이시는 가운데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전 1:26-28).

◎ 예수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받을 영혼으로 보셨으며 그들과 섞이심으로 구원의 진리를 소개하고자 하셨다.

<초점(焦點)>
1. 죄(罪)된 사람들의 식견(識見)으로 볼 때의 예수님의 당혹스런 행동들은, 당혹스런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에 목적을 두신 위대한 행동이셨다.

2. 구원의 대상은 신분과 인종과 남녀노소 빈부귀천(貧富貴賤)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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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1.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을 때에 그는 위를 가리키셨다. 그의 얼굴에는 빛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광채를 보고 놀랐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번쩍였다. 성전에서 그를 발견하였을 때에 그들은 예수와 랍비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그의 질문과 대답에 놀랐다. 그의 말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여러 생각을 연달아 일으켰다.
그리고 부모에게 한 그의 질문에는 한 교훈이 있었다. 그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셔야 할 일에 종사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할 일을 등한히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맡기심으로 그들에게 높은 영예를 베푸셨었다. 거룩한 천사들은 예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요셉의 행로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예수를 온 종일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근심에서 놓여났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을 책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에게 질책의 말을 던졌다.
예수의 부모가 그를 그들의 자식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는 날마다 저희와 같이 살고 그의 생애는 여러 가지 점으로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므로 그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세상의 구주와 같이 살게 하신 축복을 감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와 헤어짐으로 그들이 괴로워한 일이나 그가 은근히 책망한 말은 그들에게 그들이 맡은 책임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처음으로 그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셨음을 나타내셨다. 예수의 탄생 전에 천사는 마리아에게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 33)고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아이가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되실 줄은 믿으면서도 그의 사명에 대하여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요셉과는 친족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알았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부모와 같이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수고스러운 그 부모들의 생계를 도왔다. 그는 그의 마음 가운데 자기의 사명의 신비를 감추시고 그가 사업을 시작할 지정된 시기를 겸손히 기다리셨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인식하신 후 18 년간을 나사렛에서의 가정적인 유대 관계를 인정하셨으며 아들과 형제와 친구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셨다. ”(소망, 80-83)

2. “유대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유월절 절기 동안 예루살렘에는 팔레스틴 각처와 심지어 먼 외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전 뜰은 혼잡한 군중으로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이 한 크신 희생 제물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하여 바칠 제물들을 가져올 수가 없었다. 이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성전 바깥뜰에서 짐승들이 거래되었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헌물을 사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다. 이곳에서 모든 외화가 성소에 바칠 주화(鑄貨)로 교환되었다.

모든 유대인은 “그 생명의 속전”으로 해마다 반 세겔을 지불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이렇게 모은 돈은 성전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출 30:12-16). 이외에도 많은 금액이 자원하는 헌물로 드려져서 성전 금고에 넣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외국 화폐는 성전 봉사에 사용되었던 성전 세겔이라고 불리어졌던 주화로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돈을 바꾸는 일은 사기와 부정 취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수치스러운 거래로 발전하였으며, 제사장들의 소득원이 되었다. 상인들은 동물들을 팔 때에 엄청난 가격을 요구하여 제사장들 및 관원들과 이익금을 나눠 가졌다. 그들은 이와 같이 백성들의 희생으로 치부하였다. 경배 자들은, 만일 그들이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자녀들과 토지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도록 가르침을 받아왔다. 이와 같이하여 비싼 가격에 동물들을 팔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그들이 하려고 왔던 헌신의 행위를 이행함이 없이 가정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월절 때에는 수많은 제물들이 바쳐졌으므로 성전에서의 매매 행위는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따르는 혼란으로 그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란스러운 가축 시장과 같았다. 쩔렁거리는 동전과 노한 언쟁 소리에 뒤섞여 흥정하는 날카로운 소리, 가축들이 우는 소리, 양들과 비둘기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혼란이 너무나 극심하여 경배 자들은 방해를 받았으며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은 성전 속까지 침입하여 들어온 소동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건을 크게 자랑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바라보며 기뻐했으며, 성전을 헐뜯는 말을 하면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성전에 관계가 있는 의식을 이행하는 데 매우 엄격했으나 그렇게 한 것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이 의식의 원래의 목적에서 그들이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

이 절기에 고통당하는 자들과 곤 핍과 비탄에 잠겨 있는 자들이 왔다. 그곳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벙어리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들것에 실려 왔다. 너무 가난하여 심지어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울 양식조차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이 사람들은 제사장들의 말을 듣고 크게 괴로워하였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경건함을 자랑하고 백성들의 수호자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동정과 긍휼이 없었다.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과 죽게 된 이들이 은총받기를 간구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들의 고통도 제사장들의 마음속에 연민의 정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이 모든 광경을 보셨다. 그는 부정한 거래를 보셨다. 그는 피 흘림이 없이는 그들의 죄를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자들의 슬픔을 보셨다. 그는 당신의 성전의 바깥뜰이 부정한 장사의 장소로 변한 것을 보셨다. 신성한 구내는 일종의 광대한 돈 바꾸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만 될 것을 아셨다. 백성들은 의식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받음이 없이 무수한 의식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배 자들은 그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이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희생 제물 되시는 분을 상징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쳤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그들의 모든 제사가 상징하고 있는 분께서 인정과 존귀를 받으심 없이 서 계셨다. 그가 바로 헌물에 대한 지시를 주셨던 분이셨다. 그는 그 제물들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셨다. 그는 이제 그 제사가 왜곡되고 오해되고 있음을 보셨다. 신령한 예배는 신속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을 그들의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하나도 없었다. 전혀 다른 예배를 확립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전 뜰의 계단에 서셔서 준엄한 눈초리로 자기 앞에 있는 장면을 바라보신다. 그는 예언적인 눈으로 미래를 내다보신다. 그리고 몇 년 후의 일만이 아니라 여러 세기와 여러 시대를 내다보신다. 그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어떻게 궁핍한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을지를 보신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에게서 감추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할 것을 보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광경을 보실 때 당신의 용모에 의분과 권위와 권세가 표현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에게로 끌린다. 부정한 거래를 하고 있던 자들의 눈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집중된다. 그들은 그들의 시선을 돌이킬 수가 없다. 그들은 이 사람이 그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읽고 그들의 은밀한 동기를 알아내는 것을 느낀다. 어떤 자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가 얼굴에 기록되어 그 준엄하신 눈초리가 환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숨기려고 애쓴다.
소란이 그쳤다. 거래하고 흥정하던 소리가 멈추었다. 침묵은 고통스러우리만큼 지루하였다. 경외감이 회중을 압도했다. 마치 그들의 행한 일에 답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송사를 당하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를 쳐다본 그들은 인성의 두루마기를 통하여 신성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하늘의 주재되시는 분께서 마지막 날의 재판장처럼 서 계셨다. 지금은 그날에 그를 두를 영광으로 둘리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 때와 같은 능력으로 심령을 감찰하고 계셨다. 그는 무리들을 훑어보시고 하나하나에 시선을 머무셨다. 그의 모습은 당당한 위엄으로 그들 위에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으며 하늘의 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그가 말씀하시자 그의 명확하고 울려 퍼지는 음성 곧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범하고 있는 율법을 시내산 위에서 선포하신 바로 그 음성이 성전의 궁형각(弓形閣)을 울리면서 메아리쳤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3. 돼지의 소유주에게 이런 손실을 당하게 허락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에 골몰하여 영적 생애의 큰 관심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기적 무관심의 마력을 깨뜨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인 손실로 말미암아 아깝고 성이 나서 구주의 자비하심에 눈을 감아버렸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미신이 생기고 공포가 일어났다. 이 외인을 그들 가운데 머무르게 하였다가는 더 큰 재난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재정적인 파탄을 염려하여 예수께서 계시지 못하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예수와 함께 호수를 건넜던 자들은 전날 밤에 일어났던 모든 일 곧 태풍을 만나 위기에 빠진 일이며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잔잔하여졌던가를 다 얘기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말은 효과가 없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예수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들에게서 떠나주시기를 간청하였으므로 예수께서는 이에 응하시고 곧장 배에 오르셔서 맞은편을 향하여 떠나셨다.
거라사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자비의 산 증거를 저희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인 이익이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저들의 눈앞에서 흑암의 임금을 내쫓으신 예수를 한 방해꾼으로 취급함으로써 하늘의 선물이신 예수를 그들의 문전에서 돌아서게 하였다. 우리는 거라사 사람들처럼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서는 그런 기회는 없다. 그러나 순종하면 세속적인 이익을 희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임재로 인해 금전상의 손실을 당치 않기 위하여 그분의 은혜를 거절하고 그 성령을 내쫓는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광인들의 느낌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그들은 저희를 구원하여 주신 분을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 그들의 생애를 괴롭혔고 폐인이 되게 만들었었던 귀신들로부터 안전하다고 느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려고 하실 때에 그들은 예수 곁에 가까이 서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저들을 예수의 곁에 있게 하여 늘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저들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전하라고 분부하셨다. (소망, 337-342)

4. “요한에게 기적적인 구출은 허락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항상 하늘의 천사들이 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들은 그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성경 말씀의 귀중한 허락들을 공개하여 주었다. 이것이 그의 지주(支柱)였으며 이것은 또한 미래의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할 지주가 될 것이었다. 요한의 뒤를 따랐던 자들에게와 같이 침례 요한에게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보증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만일 처음부터 종말까지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들이 성취하고 있는 그 목적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인도받기를 선택하였을 그 길 이외의 어떤 다른 길로는 결코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신다.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나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일지라도 결코 옥중에서 외롭게 죽은 침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거나 영예를 더 많이 받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고 하늘이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신임이요 가장 높은 영예인 것이다. ”(소망, 222-225) <소망 275) <소망 151>

<치료143>
5. “제자들의 사업은 복음의 지식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신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사업이 위탁되었다. 그들은 그 사업을 그 당시의 사람들을 위하여 성취하였다. 복음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 단 한 세대 동안에 전해 졌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위탁하신 사업이다. 복음은 세상의 죄와 불행을 제거해 주는 유일의 해독제(解毒劑)이다.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을 알려 주는 것이 그 치료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들의 첫째 과업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 기별을 주어서 제자들을 내보내실 당시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세상에서 거의 떠나갔다. 여호와의 지식을 가졌노라고 공언한 유대 백성들 사이에도 그분의 말씀은 유전과 인간적 이론 때문에 무시당하였다. 이기적 야망, 허영에 대한 사랑, 이득에 대한 탐욕 등이 사람들의 생각을 빼앗았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떠나가자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사라졌다. 이기심이 지배적 원칙이 되고, 사단이 인간의 불행과 타락에 그의 뜻을 행사했다.
사단의 대리자들이 인간을 사로잡았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도록 창조된 인간의 육체는 마귀의 소굴이 되었다. 사람의 감각과 신경과 기관들은 가장 타락한 정욕의 방종에 있어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바로 마귀의 인이 인간의 얼굴에 찍혀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악의 군대의 표정을 반사하였다.*
오늘날의 세상에 있는 상태는 어떠한가? 성경을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당시의 유전과 유대의 율법주의로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고등 비판과 인간적 이론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파괴되고 있지 않는가? 탐욕과 야망과 쾌락을 사랑하는 일은 그 당시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고 있지 않는가? 믿노라고 공헌하는 그리스도교계, 심지어 믿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까지도 그리스도인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사업, 사교적 모임, 가정, 심지어 종교적 모임에서까지도 그리스도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법칙으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 도다 … 악을 떠나는 자가 약탈을 당하는 도다”고 한 말이 사실이 아닌가?(사 59:14, 15).
”(치료, 14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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